45. 피신하라
겨울 강은 적막했다. 강변 양쪽 가장자리로 살얼음이 잡혀있는 강줄기는 흐름을 감지할 수
없는 채 그 자태처럼 기나긴 외로움을 드리우고 있었다. 강변 백사장에 찍힌 여름의 흔적들
마저 매서운 북풍에 부대끼며 시나브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강의 침묵 속에서 이따금 날갯
짓하는 철새들의 모습이 춥고 서글펐다. 얼핏 보아서는 어디서 흘러와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분간하기 어려운 강줄기는 그 양쪽 끝이 아시무락하게 멀고멀었다. 그 먼 한쪽 끝의 하늘에
노을이 연하게 물들어 있었다. 노을도 추위를 타는 것인가. 여름의 노을처럼 야하고 강력하
게 불타오르는 기세는 느낄 수 없었다. 거리가 먼데다가 빛이 약해서 그런지 이쪽 강물에는
노을기가 전혀 미치지 않았다. 그래서 강변은 더 춥고 쓸쓸한지도 몰랐다.
유일민은 먼 노을을 바라보며 한사코 느리게 걸음을 옮겨놓고 있었다. 강둑에 줄지어 선 미
루나무들은 활엽수의 겨우살이가 어떤 것인지 시범을 보이기라도 하듯 잎 하나 달지 않고 송
두리째 알몸을 드러내고 있었다. 멀쑥하게 키가 큰 그 나무들의 실가지들은. 투명하게 맑아
더 시려 보이는 겨울 하늘에 박혀 추위를 타고 있었다. 그 나무 아래서 유일민이 느린 걸음
을 옮길 때마다 낙엽들이 밟히는 소리가 바스락거렸다. 그러나 그 연약한 소리는 독음이 아
니었다. 그의 발길을 따라 또 다른 발길에서도 그 소리가 나며 복음을 이루어내고 있었다.
강줄기를 따라가는 강둑도 길었다. 강둑을 따라가는 발걸음은 낙엽 밟히는 소리만 낼뿐 두
사람의 침묵도 길었다. 유일민은 먼 노을이 변색해 가며 사위어가는 것을 보면서. 피우지 않
는 담배 생각을 했다. 이런 때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담배보
다 더 생각나는 것이 술이었다. 술을 마시면 이야기가 술술 풀려나가리라 싶었다. 물론 어
떤 분위기 좋은 술집을 생각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술 마시
면서 할 이야기가 아니었다. 자신의 마음도 그렇지만 채옥이의 마음을 생각해서도 좀더 색다
르고 의미 있는 장소를 골라야 했다.
먼 노을이 암청색에서 암회색으로 변하면서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했다. 철새들도 보금자리
를 찾아가는지 끼리끼리 날갯짓하며 강위로 낮게 날아가는 모습들이 분주했다. 유일민은, 이
제 그만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고 또 자신을 채근했다. 어두위지기 시작하는데 채옥이를 더
춥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어찌도 그리 꺼내기가 어려운지 몰랐다. 채옥이
도 다 눈치 채고 있으리라 생각하면서도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좋을지 난감하기만 했
다. 그동안 뜸을 들일만큼 들였으니 한마디로 결론을 말해 버리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채옥
이의 의견을 묻는 식으로 해야 할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 망설임은 자신의 뜻을
채옥이가 뜻밖에도 거절할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채옥이는 병적이리만큼
두 아이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두 아이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는 반면에 두 아
이가 조금이라도 불행하게 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게 되어 있는 것이 그녀의 정신 상태였
다.
그러나 유일민은 그동안 뜸을 들여온 결과를 믿기로 했다. 몇 번이고 조심스럽게 되짚어본
바로는 이제 솥뚜껑을 열기에 적합한 때였다.
유일민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서울에 올라와서 고등학교 선배들을 따라 처음 수영을 하러 온 곳이 여기였
어. 난 그때 저 한강 물 속에 머리까지 깊이 박고 간절하게 기도했었어. 나의 앞길이 잘 풀
리게 해 달라고.”
유일민은 말을 끊으며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임채옥은 고개를 숙임 막한 채 발걸음만 옮겨
놓고 있었다.
“그런데....... 그 기도는 아무 효험이 없었어. 채옥이가 잘 알다시피 모든 일이 꼬이고 어
긋나고 했으니까. 물론 내 인생은 기도로 풀릴 일이 아니었지.”
유일민은 또 신음하듯 한숨을 쉬었다. 어둠살을 타고 불어오는 찬바람에 미루나무 가지들이
울고, 임채옥의 머리에 두른 스카프가 나부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그 기도가 딱 한 가지 사실을 들어주었어. 그건 내 인생에
가장 중대한 일이기도 하지. 그래서 굳이 여길 찾아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어.”
유일민은 걸음을 멈추며 한강을 바라보았다. 한강은 안개처럼 퍼져 내리고 있는 어둑발에 잠
겨들고 있었다.
“채옥아. 우리 결혼하자!”
유일민은 이 말과 함께 몸을 획 돌렸다. 그리고 격렬한 목소리만큼 강하게 임채옥의 양쪽 팔
을 붙들었다.
“오빠아.......”
임채옥은 당황스럽게 유일민을 올려다보았다.
“나 그동안 오래 기다렸어. 백일 탈상이 지나고 바로 말하고 싶었지만 채옥이 마음도 그렇
고, 아이들 감정도 생각해서 해가 바뀌기를 기다렸던 거야. 이제 백일 탈상이 세배쯤 지났으
니까 우리 결혼하자구.”
유일민의 목소리도 눈길도 뜨거웠다. 그건 그가 최초로 보이고 있는 열정이었다.
“오빠, 전 그럴 자격이.......”
“아무 말 말어. 아들 말 들었지? 아저씨가 우리 아빠면 좋겠다고 한 말. 그것이면 충분해.
애들이 날 받아들이는 마당에 자격이고 뭐고가 어딨어. 채옥이 자식은 바로 내 자식이야. 아
무 걱정하지 말어.”
“오빠!”
임채옥은 와락 유일민의 가슴에 안겨왔다. 유일민은 임채옥을 힘껏 끌어안았다. 그 순간 폭
설 퍼붓는 강원도에서 첫날밤을 보냈던 기억이 퍼뜩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와 다를 것 없는
욕정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오빠....... 우린 저 한강 같은 운명인가 봐요. 남한강 북한강이 끝내 합해 흐르는 것같
이.......”
임채옥은 유일민의 심장이 박동하는 소리를 들으며 낮게 속삭였다.
“그래. 그런 운명이야.”
유일민은 시를 유난히 좋아했던 처녀 시절의 임채옥을 다시 느끼며 그녀를 더 꼭 끌어안았
다. 그의 뇌리에는 그녀가 시집가기 직전에 보냈던 이별의 편지 구구절절이 떠오르고 있었
다.
“저어.......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임채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무슨.......”
“함께 제주도에 좀 가 주세요.”
“제주도? 왜?”
“가서 말씀드릴게요.”
“언제?”
“빠를수록 좋아요. 오래 안 걸리고 1박2일이면 되니까 토요일 날 오후에 갔다가 일요일 날
돌아오면 회사 일에도 별로 지장이 없을 거예요.”
“애들도 데려가야지?”
“아니요. 하룻밤이니까 애들은 친구 집에 맡기면 돼요.”
“알았어. 그럼 이번 주말에 가지.”
강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둠이 심해져 있었다. 그들은 발길을 돌렸다. 올 때와는 다르게
임채옥의 오른손은 유일민의 왼손에 잡혀 오버 주머니에 들어있었다. 유일민은 자신이 언제
임채옥의 손을 잡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먼저 잡은 것인지, 임채옥이 먼저 잡은 것
인지. 아니면 서로 함께 잡은 것인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그
일이 믿을 수 없도록 신기하기만 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임채옥의 손을 잡는데 이제 아
무런 장애도 없다는 점이었다. 마침내 임채옥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이 현실이 아니고 꿈인
것만 같았다. 형사들을 가로 막으며 자신을 지켜주려고 했던 최초의 타인. 평생을 잊을 수
없는 임채옥의 그 모습이 유일민의 눈앞에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더 바라지 않습니다. 무사하도록 지켜주십시오.
그 옛날 한강 물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유일민은 하늘을 향해 마음을 모두었다. 그는 얻을 것
을 다 얻은 것 같은 벅찬 만족감으로 숨쉬기조차 거북했다.
유일민은 다음날 바로 비행기표를 샀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왜 제주도에 가려고
하는 것인지 짚이는 것이라고는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두서없이 떠올랐지만 그저 나쁜
일이 아닐 거라는 믿음으로 다소 불안스러운 궁금증을 다스렸다.
유일민은 나흘 동안 결혼식과 새살림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스스로 쑥스럽고 계면쩍어 그런
생각을 애써 피하려고 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결혼식장을, 결혼 선물을, 새 거처
를 생각하고 있고는 했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는 날마다 가슴속에 온갖
꽃들이 만발하고, 새싹들이 파릇파릇 돋아나고. 찬란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새 기운이 용솟음치는 감정은 난생처음 느끼는 것이었다. 임채옥의 이별 편지를 받았
을 때의 참담함과 절망과 어둠이 그렇게 뒤바뀌고 있었다.
“제주도에 가본 적 있으세요?”
공항에서 만난 임채옥은 꽃처럼 환한 웃음을 피워냈다. 그녀의 얼굴은 다른 때와 달리 화장
이 좀더 화사했다.
“마음뿐이었지. 언제 사람처럼 살아봤어야 말이지.”
유일민은 임채옥의 여행가방을 받아들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1박2일이라면서 제법 큰 여
행가방을 흘끗 쳐다보았다.
“제주도는 참 좋은 곳이에요. 경치도 아름답고, 사람들도 순박하고 정직하고, 육지하고는
너무 달라서 갈 때마다 여기가 우리나라인가 착각이 생겨요. 제가 제일 살고 싶은 곳이 제주
도예요.”
“그런가....... 좋다는 말은 많이 들었는데, 가끔 신문 나는 걸 보면 외부사람들이 땅 투기
를 해대서 문제가 되곤 하더군. 서울 재벌들 돈이 그렇게 몰려가면 제주도의 좋은 점이 남아
날까?”
“그게 큰 문제긴 해요. 제주도가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인심도 변해가고 있는데. 그래도 아
직까진 천국이에요. 그 좋은 섬을 어떻게 좀 잘 살렸으면 좋겠는데.”
“글쎄....... 돈이란 괴물 앞에서 모든 건 변하고 망가지게 돼 있어. 자본주의란 게 원래
그렇고. 우린 더구나 잘살기 위해 누구나 혈안이 되어 있으니까.”
유일민이 씁쓰레하게 웃음 지었다.
“어서 가요. 시간 얼마 안 남았어요. 비행기 첨 타니까 겁나죠?”
임채옥이 유일민의 팔짱을 끼며 놀리듯 생글 웃었다.
“응. 겁나 죽겠는데. 채옥이가 나 좀 업고 가.”
유일민은 어깨를 떠는 시늉을 했다.
“어머머. 그런 농담 첨 듣네요.”
임채옥은 좀 과장되게 눈을 휘둥그레 떴다. 유일민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에도 얼굴에도 어
떤 생기 도는 빛처럼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고 있었다.
“아....... 이렇게도 곱고 아름다울 수가 있는가.......
유일민은 가슴을 휘도는 야릇한 열기에 감기며 자신도 모르게 감탄하고 있었다. 문득. 내가
너무 유치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음 순간, 유치해도 그만 이라는 엉뚱한
배짱이 생기는 걸 느꼈다.
비행기에는 사람이 절반이나 찼는지 어쩐지 빈자리가 더 많아 보일 지경이었다.
“겨울이라 이래요. 여름철엔 표를 못 구해서 야단인데.”
임채옥의 눈치 빠른 설명에 유일민은 자리 잡고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겨울에 바다
의 고장을 찾아가는 게 이상한 일이기도 했다.
제주도에서 유일민을 제일 먼저 맞이한 것은 한라산이었다. 한라산을 보는 순간 유일민은 이
상스러운 놀라움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남한에서 제일 높은 산이 그렇게 가깝게. 한눈에 보
이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높은 산들이란 으레 깊고 깊은 첩첩의 산들을 지
나야 볼 수 있는 법이었다. 그리고 한라산은 전혀 높아 보이지도 않았다.
“한라산 보고 놀라셨지요? 곧 손에 잡힐 것 같고. 금방 한 걸음에 올라갈 수 있을 것 같고
요. 그치만 여기서부터 걸어서 등산로가 시작되는 곳까지 가는 데만 꼬박 하루가 걸린대요.
거기서 백록담까지가 또 하루구요. 다른 봉우리들 없이 한라산 혼자서만 솟아있어서 저렇게
보이는 거래요. 그러니까 제주도는 한라산 하나인 셈이에요. 저 보세요. 산줄기가 양쪽으로
서서히 뻗어 내려서 해변에 가 닿고 있지요. 사람들은 저 한라산의 모습을 소가 편안하게 엎
드려 있는 형상이라고들 하는데 제가 보기로는 그렇지 않아요. 여자가 폭넓은 치마폭을 끝까
지 다 펼치고 얌전하게 앉아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한라산을 어머니의 산이라고 생각
해요. 언제나 한라산을 보면 어머니 품에 안긴 것처럼 마음이 아늑하고 편안해져요. 오빠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임채옥은 그런 한라산에 마치 무엇을 고하기 위해 제주도에 온 것처럼 먼 봉우리를 우러르
듯 하는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응. 채옥이 생각이 더 그럴듯한데. 사진으로 한 부분만 본 것하고는 영 다르게 참 특이하
고 묘하게 생긴 산이야. 더구나 저 정상에 물이 담겨 있다니.......”
유일민은 신비감이 더욱 깊어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백록담을 꼭 한번 봤으면 좋겠어요. 거기서 기도를 드리면 소원 성취가 다 된다거든
요. 근데 제주도 사람들도 저 상봉에 올라가 본 사람들보다 못 올라가보고 죽는 사람들이
더 많대요.”
임채옥은 차례가 온 택시 문을 열었다.
“그게 본래 그런 거야. 정작 서울사람들이 남산 구경 못하고 살잖아.”
유일민이 택시에 앉으며 말했다. 임채옥이 유일민에게 바짝 붙어 앉으며 쿡쿡거렸다.
호텔에 방을 정하고 커피숍에 자리를 잡았다. 거기서도 한라산이 바라다보였다. 그러나 창
문 크기에 잘려 그 산줄기의 유연하고도 여유로운 긴 흐름을 볼 수는 없었다.
“이제 여기에 온 까닭을 들을 차례 아닌가?”
유일민이 커피잔을 들며 임채옥을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좀더 있다가요. 커피 빨리 마시고 바다 구경 나가요. 제주도 바다는 참 기막혀요. 우리나
리에서 제일 깨끗한 바다라서 그런지 그 물 색깔이 층층이 다른 게 보석이 따로 없어요.”
임채옥은 상그레 웃으며 말을 피했다.
“제주도에 완전히 반했군.”
유일민은 커피를 천천히 마시며 왜 여기에 온 것인지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짚
이는 것이라고는 없었다. 성급하게 신혼여행을 온 것도 아니고....... 임채옥의 깊은 속내
를 헤집어낼 도리가 없었다.
“함덕해수욕장으로 가주세요.”
임채옥이 택시 운전수에게 말했다.
택시는 이내 시가지를 벗어나 오른쪽으로 밭들과. 왼쪽으로 바다가 펼쳐진 길을 달리기 시작
했다. 겨울바다는 짙푸르렀고, 겨울 밭들은 텅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 유일민의 눈길은 그
밭들과 밭 가장자리마다 둘러쳐진 나지막한 돌담에 머물렀다. 밭의 흙이며 돌들이 모두 검정
색이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달리는 차 안에서 보아도 그 돌들은 마치 벌집처럼 숭숭 구
멍이 뚫려 있었다.
“저 돌들이 왜 저렇지?”
유일민이 무심결에 한 말이었다.
“돌이요? 검고 구멍 뚫린 것 말인가요?” 임채옥이 차창 밖을 내다보고는. “오빠 같은 사
람은 척 보면 알아차려야지요. 지리책에 나오잖아요. 한라산이 어떤 산이라는 거. 이것 못
알아맞히면 오빠가 일류대학 나왔다는 것 안 믿을 거예요.” 하며 그녀는 샐샐 웃었다.
“지리책? 글쎄에.......”
유일민은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알았어요. 오빤 수학. 영어는 박사지만 지리는 엉터리였나 봐요. 한라산은 화산이 폭발했
던 사화산이잖아요.”
“오라! 화산 때문에 색깔이 저렇고. 저 돌에 뚫린 구멍들은 기포라 그거지? 그래. 그래. 내
가 엉터리야.”
유일민은 제 이마를 치며 껄껄거리고 웃었다. 그 검은 화산토와 화산석들은 유일민을 맞이
한 제주도의 두 번째 인상이었다.
겨울 해변에는 물새조차 보이지 않았다. 가없이 넓은 겨울 바다에는 배 한 척 떠있지 않아
더 아득하게 넓어보였고, 머나먼 수평선도 더욱 숨 자지러지게 멀어지고 있었다. 싸한 추위
를 품고 있는 하늘도 쪽빛이었고, 무한의 무게를 담고 있는 바다도 쪽빛이었다. 서로를 닮
은 하늘과 바다는 저 까마득하게 먼 곳에서 맞닿으면서 수평선이 하늘인지. 하늘이 수평선인
지 분간할 수 없게 하며 그 깊이를 모를 정적에 잠겨 있었다. 그 정적은 쉼없이 밀려드는 파
도에 실려와 해변에 겹겹이 쌓이고 있었다. 밀려오고 또 밀려오는 파도는 슬픈 노래 같은 소
리를 앞세워 새하얀 물꽃을 피워내고는 백사장에 스러지곤 했다.
유일민은 그 장엄한 자연에 압도당하며 묵묵히 서 있었다. 겨울바다가 이처럼 숭엄하고 경건
하다는 것은 생애 첫경험이었다. 그때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이 속에서 사랑을 맹세하려는 것이 아닐까.......
그 생각이 들자 그럴 수 있는 일이라 싶었다. 임채옥은 감상적인 데가 있기도 했고. 자신들
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남다른 곡절이 많기도 했던 것이다. 만약 그녀가 새로운 마음가짐으
로 사랑을 맹세하고자 하면 흔쾌히 따르리라 생각했다. 삶이란 수많은 사건들의 연결이고.
그때마다 어떤 형식이 필요한 것이다. 그 형식은 그저 겉치레가 아니고 마음을 새롭게 다지
는 계기가 된다. 그 형식은 곧 충실한 내용을 이끌어내고 인생이란 형식과 내용을 일치시키
며 가꾸어가는 자기 자신들의 나무다. 더구나 결혼이란 인생사 수많은 사건들 중에서 가장
중대한 사건이 아닌가.......
“저는 바다에 오면 죽고 싶어져요.”
긴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바다만 바라보고 있던 임채옥이 이윽고 침묵을 깼다.
“.......”
유일민은 바다를 바라본 채 임채옥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한참 생각하다 보면 죽고 싶은 만큼 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겨나요. 그건
알 수 없는 바다의 마력이에요. 그래서 저는 바다에 자주와요. 중대한 일이 닥칠 때마
다.......”
“.......”
유일민은 바다를 바라본 채 임채옥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오빠. 그런 제 맘 이해가 되세요?”
임채옥은 두 팔로 유일민의 허리를 감았다.
“그래....... 이해할 수 있어. 아니....... 나도 동감이 돼. 바다를 보니까 무언가 경건해
지고....... 새로운 삶의 의욕 같은 것이 생겨나.......”
유일민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고 그리고 모자람 없이 담아내려고 한마디. 한마디를 신중하
게 했다. 임채옥이 굳이 바다를 찾아온 의미를 되새기면서.
“정말이에요. 오빠? 정말 오빠도 그런 감정이 생기세요? 전 유치하다고 흉잡힐 줄 알았어
요.”
임채옥은 유일민의 허리를 더 꼭 끌어안으며 고개를 들어 유일민을 올려다보았다.
“흉잡히기는. 그런 게 가장 순수하고 진실한 감정일거야. 그런 감정을 유치하다고 하는 게
시건방지고 덜된 것이지.”
유일민은 임채옥의 눈을 어느 때 없이 깊이 들여다보며 웃었다. 그는 그 눈에서 전에 보지
못했던 또 하나의 바다를 보고 있었다.
“오빠. 우리 저 백사장 좀 걸어요.”
임채옥은 유일민의 눈길이 눈부신 듯 고개를 숙이며 속삭였다.
반달형의 백사장에는 파도소리만 자욱했다. 휘어져 감기며 밀려온 파도는 깊은 흐느낌 같은
소리와 함께 몸부림치듯 백사장에 부서지고 또 부서지고 했다. 물 머금은 모래톱은 바다 색
깔에 젖은 듯 마른 모래밭의 새하얀 색과는 달랐다.
“이 모래는 저 바다에서 밀려와 그렇겠지만. 모든 게 검은 데서 이런 흰 모래가 있는 게 신
기하군.”
“오빠. 멋없이 그렇게 과학적으로 말해 버리면 어떡해요.”
임채옥이 유일민을 때리는 손짓을 지으며 눈을 흘겼다.
“과학적.......?”
“네에. 이 모래가 왜 희냐면 말이죠. 원래는 검었는데 저 바닷물에 길고 긴 세월동안 씻기
고 씻겨서 하얗게 된 거예요. 이렇게 말해야 문학적이고 운치가 있잖아요.”
“호오. 그것 참 기막힌데? 난 채옥이 감각을 도저히 당할 수가 없어. 그래. 자기도 모르게
논리적이고 과학적으로 말하는 버릇은 그게 다 어설픈 유식이나 지식 때문이야. 참. 멋없이
말야.”
유일민은 감탄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렇게 감탄 하시면 제가 민망해요. 그건 모방이거든요.”
“모방?”
“네에. 어떤 시인이. 바다는 왜 그리 푸르른가. 파도로 끝없이 바위에 부딪쳐 멍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썼거든요. 그걸 살짝 이용해 먹었어요.”
“아니야. 그런 모방은 아무나 하나? 난 그 시를 읽었더라도 채옥이 같은 생각은 못 해내.
그리고 그건 모방이 아니라....... 뭐랄까? 응. 응용이야 응용.”
“오빠. 너무 관대하게 봐주지 마세요. 그렇게 사적으로 치우치면 국가 발전에 막대한 지장
이 초래돼요.”
“뭐야!”
임채옥은 깔깔거리며 백사장을 뛰었고. 유일민은 그 뒤를 쫓았다.
임채옥은 백사장을 벗어나 아까 왔던 길로 뛰어 가고 있었다. 그녀가 가는 방향으로 한라산
의 의연하고 수려한 자태가 먼 배경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마치 한라산의 품으로
안기고 있는 것 같았다. 한라산과 어우러진 그 모습이 자신의 인상에 남아있는 그 어떤 영화
장면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유일민은 뛰고 있었다. 그러면서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냥 이
대로 호텔로 돌아가는 것인가? 하는 미심쩍음이 고개를 들었다.
“오빠. 빨리 오세요. 빨리. 저기 마침 택시가 있어요.”
임채옥이 뒤돌아서서 다급하게 외치며 손짓했다. 유일민은 장난삼아 뛰고 있던 다리에 힘을
가했다.
“어머 아저씨. 아까 우리 태우고 왔던 아저씨 아니세요?”
택시를 타려던 임채옥이 운전수를 보고 놀랐다.
“예. 맞습니다. 어서 타세요.”
운전수가 환하게 웃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또 손님 태우고 오셨어요?”
“아니오. 겨울이라 택시도 잘 없고 해서 그냥 기다린 겁니다. 빈 차로 시내 들어가 봐도 손
님이 별로 없고 하니까요.”
“어머. 고마워요. 그럼 대기료 드릴게요.”
“아닙니다. 아닙니다. 제 좋아서 한 일인걸요. 피곤한 김에 한숨 자면서 잘 쉬었어요.”
운전수는 손까지 내저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임채옥은 운전수를 가리키며 유일민에게 눈짓말을 했다. 그녀의 눈은. 이 봐요. 제주도사람
들은 이렇다니까요. 하는 말을 담고 있었다. 그 의미를 알아 새긴 유일민은 느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건 유일민을 맞이한 제주도의 세 번째 인상이었다.
“아저씨. 저녁 먹고 이따가 이 차 대절할 수 있어요?”
임채옥이 손거울을 꺼내며 운전수에게 물었다.
“그럼요. 어디 가시게요?”
“네. 여기 와서 밤바다를 구경하고 싶어요.”
“예. 좋지요. 밤에 고깃배들이 불을 밝힌걸 보는 건 구경거리 중에 일품이지요. 몇 시쯤
차 대기시킬까요?”
“8시가 어떨까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차의 속도를 따라 가까운 경치는 계속 바뀌는데도 해가 그렇듯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고
초연하게 솟아있는 한라산을 바라보다가 유일민은 불현듯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렸다. 어딘
가 이국 풍경이 느껴지는 제주도를 생각하다가 이곡의 특산물인 귤을 떠올렸고. 귤이 생각나
자 대뜸 그 정치인이 떠올랐던 것이다.
심술과 욕심이 얼굴에 맥질된 그 사람이 떠오르자 유일민은 대번에 기분이 상하고 말았다.
그는 제주도에 어마어마하게 큰 귤 농장을 가지고 있다고 진작부터 소문이 나 있었다. 귤은
가장 비싸고 귀한 과일이었다. 그는 제주도에서 제일 큰 귤밭을 차지하고 앉아 막대한 치부
를 일삼고 있었다. 그가 대규모 귤농장을 갖게 된 것도 권력의 힘을 이용한 것이라는 말이
자자했다.
“무슨 생각을 하세요?‘
임채옥이 방싯 웃으며 유일민 옆으로 다가앉았다.
“아니. 괜히 이곳과 연관된 어떤 정치인이 떠올라서.......”
“아유. 정치는 생각지도 마세요. 기대할 것 아무것도 없이 다 틀렸잖아요.”
임채옥은 싸늘한 어조로 몸서리치는 시늉을 했다.
“그래. 골치 아파. 근데 말야. 제주도가 이렇게 좋을지는 몰랐어. 채옥이가 반한 마음을 알
겠어.
“그렇지요? 제주도는 우리나라 보물이에요. 이 아름다운 섬에 사람이 산다는 게 아까울 정
도에요. 사람이란 아름다운 자연을 자꾸 망치기만 하잖아요. 육지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여
기 인심도 경치도 자꾸만 망가지고 있다니 걱정이에요.”
“그래. 사람. 그게 문제지. 자연의 입장에서 볼 때 사람만큼 골칫덩어리도 없을 거야. 그렇
지만 어쩌겠어. 그게 다 인간이 사는 방법이니. 제주도 망가지는 것도 너무 애석해 하지
마.”
유일민은 임채옥의 손등을 토닥거렸다.
겨울 밤바다의 정적은 더 깊고 은밀했다. 어둠 속에 번지는 파도의 슬픔 음조만 더욱 애절하
고 간절해지고 있었다. 어둠 짙은 밤바다 저 멀리 작은 불빛들이 모둠모둠 빛나고 있었다.
별들이 바다에 빠져 빛나고 있는 것 같은 그 작은 불빛들은 밤바다를 치장한 유일한 장식이
었다.
말없이 모래밭을 걷던 임채옥은 물가에 가까워져 걸음을 멈추었다. 어둠이 짙어 가까이 있
는 서로의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오빠......”
가늘고 낮은 임채옥의 음성이 파도소리에 묻혀 버리는 것 같았다.
“응......”
“저는 이 깨끗한 바닷물에 몸을 씻고 새롭게 태어나고 싶어요.”
임채옥의 목소리는 또렷해져 있었다.
“아니.......”
“바다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잖아요. 저는 새롭게 태어나고 싶어요.”
임채옥의 목소리는 더욱 또렷했다.
“......”
“오빠도 빨리 옷을 다 벗으세요. 이제 우리 인생이 새롭게 시작돼요.”
임채옥은 옷을 벗기 시작했다.
“.......”
‘바로 이것이었구나!’ 하고 깨달으며 유일민은 ‘감기 들면 어쩌려고’ 하는 말을 가까스
로 참아내고 있었다. 그 말을 한다고 임채옥의 기세가 꺾일 리 없었고. 또한 이런 분위기에
서 그 말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객쩍은 소리일 뿐이었다.
유일민도 옷을 벗기 시작했다. 과거를 깨끗하게 씻어버리고 싶어 하는 임채옥의 심
정....... 옛날을 새롭게 회복하고 싶어 하는 그녀의 마음....... 그건 어쩌면 자신이 더 바
라는 것이기도 했다.
알몸이 된 임채옥은 먼저 바다로 걸어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파도소리가 굽이치고 있었다.
유일민도 곧바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바닷물에 발을 담그는 순간 머리끝이 쭈뼛해지며 머리가죽이 바짝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그
리고 동시에 찌르르한 오한이 전신으로 퍼지며 온몸을 위축시켰다. 그러나 유일민은 어금니
를 맞물며 가슴을 폈다.
바다는 경사가 완만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닷물은 조금씩 차올랐다. 유일민은 바닷물
이 차오를수록 추위가 가시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바닷물이 유일민의 배꼽께에 이르렀을 때였다. 임채옥이 입을 열었다.
“오빠. 우리 손잡아요.”
유일민은 임채옥의 손을 잡았다.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었지만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았
다. 걸음을 더 옮겨 놓으면서 임채옥도 아무 말이 없었다. 바닷물이 유일민의 가슴께에 차올
랐을 때였다. 임채옥이 걸음을 멈추었다. 바닷물은 유일민보다 키가 작은 임채옥의 목에 이
르러 있었다.
“오빠. 오늘부터 제 과거는 완전히 없어졌어요.”
임채옥이 유일민의 다른 손을 마주 잡고 마주서며 말했다.
“그래.......”
“오빠의 좋은 아내가 되겠어요.”
“그래.......”
“오빠. 절 안아주세요.”
유일민은 안겨오는 임채옥을 힘껏 감싸 안았다. 그 순간 그는 눈물이 울컥 솟는 것을 느꼈
다.
“오빠. 사랑해요.”
“그래. 나도.”
일순간 그들의 입술이 하나가 되었다.
물에서 나온 임채옥은 정신없이 서둘러댔다.
“오빠. 타월 여기 있어요. 타월. 빨리빨리 몸 닦으세요. 감기 들면 큰일 나요.”
임채옥이 유일민의 어깨에 걸쳐준 건 전신이 다 감길 만큼 큰 수건이었다.
“내 걱정 말고 채옥이나 빨리 닦아. 난 이래뵈도 군대생활 할 때 강원도 추위 속에서 냉수
마찰하며 끄떡없이 견딘 몸이야.”
“제 수건은 여기 따로 있어요. 빨리 몸 닦고 내의 갈아입으세요.”
“내의?”
“네. 새것으로요.”
유일민은 그제서야 왜 여행 가방이 큼직했었는지를 깨달았다.
그들은 서로를 껴안고 바다를 등졌다. 밤바다의 파도소리는 정적 속에서 쉼없이 울리고 있었
다.
호텔방으로 들어서자 임채옥이 유일민을 끌어안았다.
“오빠. 우리의 잃어버린 아이를 되찾고 싶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뜨거웠다.
“그래. 찾아야지.”
유일민의 목소리도 뜨거웠다.
그들은 서로의 옷을 벗기며 침대로 가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 유일민은 동생과 마주앉았다.
“나 곧 결혼해야 되겠다. 집 문제 때문인데. 난 새 집을 장만할 테니까 이 집 명의를 네 이
름으로 바꾸도록 해.”
“결혼?” 유일표는 깜짝 놀라다가. “그거 참 잘됐네. 어떤 여자야? 근데 왜 이집 명의를
내 이름으로 바꿔? 우리가 딴 데로 나가야지.” 그는 두 가지를 한꺼번에 물었다.
“아무 말 말고 그대로 해. 내가 너한테 해 줄게 뭐가 있냐.”
“아니. 형 사업도 힘 드는데 그러면 안 돼지. 우린 어디서 전세살이를 해도 괜찮아.”
“걱정하지 마. 무리하는 것 아니니까. 그동안에 그 정도 돈은 벌었다.”
유일민은 동생을 바라보며 웃었다.
“형. 그거 정말이야?”
유일표의 눈에도 목소리에도 물기가 번져있었다.
“그래. 난 무리하는 사람이 아니잖냐. 내 사업은 그런대로 잘 돌아가고 있으니까 아무 걱
정 말고 어서 명의 변경하는 절차를 밟어.”
“그럼 이 집에 내 문패를 붙여도 된다 그 말인가? 이거 통 믿어지지 않는데. 맨주먹 붉은
피로 서울에 올라와 내 문패를 단 집을 갖고 재산세를 내게 되다니. 마침내 완전한 서울특별
시민이 되는 건데. 형. 우리 성공했네! 아니지....... 난 아무것도 한 게 없으니까 우리가
아니라 형이 성공했네.”
유일표는 상기된 얼굴로 뒷머리를 긁었다.
“왜에. 성공이라면 우리의 성공이지. 너도 그동안 몸고생. 마음고생을 얼마나 많이 했는
데. 그나저나 60퍼센트가 넘게 집이 없는 서울에서 우리가 집을 하나씩 갖게 됐으니 성공이
라면 성공이라고 할 수도 있겠구나. 네 말 듣고 보니 완전한 서울특별시민이 된다는 게 감동
적인 면도 없진 않구나. 어떤 사람은 13평짜리 아파트를 갖게 된 날 아내와 얼싸안고 울었다
고도 하더라.”
유일민은 지난날을 더듬는 듯한 감회 어린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어떤 여자야.......?”
유일표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너도 기억할 사람인데.......”
유일민은 임채옥이 홀로 된 사연을 간추려 이야기했다.
“잘됐네. 형. 결혼 축하해.”
유일표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속마음은 그리 밝지 않았다. 형에 대한 인사로 ‘잘됐
네.’ 했을 뿐 진정으로 ‘참. 잘됐네.’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인연치고는 참으로 질긴
인연이었지만. 무언가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였다. 그건 처녀가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었고.
두 아이가 딸려 있기 때문일 수도 있었고. 가족 구성이 복잡해질 장래에 대한 불안 때문일
수도 있었다.
“어머나. 어머나. 우리 아주버님 정말 멋지셔요. 항상 침울하시고. 통 말도 없으시고 해서
아무 멋도 없는 분이신 줄 알았는데 진짜 멋쟁이에요. 정말 너무 멋지고 근사해요.”
유일표의 말을 전해들은 그의 아내 서경혜는 두 손을 모아잡고 흔들며 수선스럽다 싶은 반응
을 나타냈다.
“갑자기 왜 그리 수다를 떨지? 그게 뭐가 그리 멋지고 근사해?”
유일표는 아내에게 눈총을 쏘며 퉁명스럽게 내질렀다.
“어머. 요새 세상에 얼마나 기막힌 러브스토리예요. 그보다 더 멋진 순애영화의 주인공이
어디 있겠어요.”
“괜히 감상적으로 그러지마. 앞으로 가정이 복잡해지고, 시끄러워질 수도 있으니까.”
“가정이.......?” 서경혜는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새 애가 태어나면 가정에 불화가 생길
지도 모른다 그건가요?” 그녀는 남편을 향해 똑바로 눈길을 모았다.
“눈치 하나 빨라 좋네.”
“아이구. 누가 형제애 없다고 할까봐서 그런 걱정 하고 있어요. 지금? 당신은 철학과 나왔
다면서 인생의 기본도 모르는 엉터리예요. 남자 자식들은 후처가 못 키우지만. 후처 자식들
은 남자가 얼마든지 잘 키운다는 말도 못 들었어요? 엄마가 같으면 아무 탈 안 생기니까 그
런 걱정은 하지도 말아요. 그리고 아주버님이 애인을 그토록 사랑하는데 그 애들을 차별하
실 분이세요?”
“글쎄....... 그게 듣고 보니.......”
유일표는 어물거리며 담배를 빼물었다.
“구분이 누군지 그렇게 뜨거운 사랑을 받는 게 부럽네요.”
서경혜는 아까의 분위기로 다시 돌아갔다.
“그런 말로 괜히 나 화나게 만들지 말고 형이 주는 선물이나 받을 생각해.”
“선물이요......?”
“선물도 엄청난 선물이야. 이 집을 내 이름으로 명의 변경하래.”
“네에?”
서경혜는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까지 벌어졌다.
“너무 놀라지 말어. 몸 상해.”
“안 놀라게 됐어요. 갑자기 돈 벼락을 맞은 것이나 마찬가진데. 그럼 아주버님은 어떡하시
구요?”
서경혜는 눈을 훔쳤다.
“새 집을 장만할 거래. 그동안 모아둔 돈이 있어서.”
“아주버님 참 대단하시고 고마우세요. 아무 표도 내지 않고 그렇게 사업 잘 끌어가시고.
꼭 부모처럼 마음도 그리 쓰시고.”
서경혜는 또 눈물을 훔치며 목이 잠겨들었다.
“형이 고생 참 많이 했는데......”
유일표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유일민은 20일쯤 지나 결혼식을 올렸다. 임채옥이 예식장을 원하지 않아서 백운대의 도선사
에서 조촐하게 치렀다. 그리고 신혼여행이라는 것도 가지 않았다. 남들에게는 공장을 잠시
도 비울 수 없는 급한 일이 밀렸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들은 이미 신혼여행을 다녀온 셈이
었던 것이다. 또. 임채옥의 아이들을 며칠씩 떼어놓을 형편도 못 되었다.
형의 결혼식이 끝나자 유일표는 커다란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동안
결혼하지 않은 형과 함께 살면서 얼마나 입장 옹색하고 마음의 짐이 컸는지 몰랐다. 형이 떠
나고 나니 아내와의 잠자리도 편해졌고, 아침에 눈을 뜨면 괜히 신명이 나고는 했다. 형과
자신의 인생이 음지에서 양지로 바뀐 것 같은 묘한 기분이 가슴에 감돌고 있었다.
유일표는 그런 생기 속에서 그 일을 적극 추진했다. ‘노동자를 위한 기도회’ㅡ 그건 단순
히 기도회가 아니었다. 노동운동을 하다 생존권을 잃어버린 노동자들에게 힘을 주고, 노동조
합 조직을 강화시키고, 노동자들을 더 일깨우고자 하는 또 다른 형태의 노동운동이었다.
기도회는 성황이었고 효과가 컸다. 참가한 노동자들은 상기된 호응으로 결속을 다짐했다. 착
취에 대항하고, 억압에 저항해야만 사람다운 삶을 얻을 수 있다는 것에 노동자들은 한 마음
을 이루었다.
유일표는 흡족한 마음으로 재건대로 돌아와 야학을 시작했다. 첫 시간이 끝나갈 즈음이었
다.
“빨리 전화 받아 봐요. 박 목사님이라고 하는데 위급한 일이래요.”
이용진 대장이 다급하게 말했다.
“여보세요. 박 목사님. 어쩐 일이십니까?”
유일표는 불길한 예감으로 이렇게 물었다.
“아. 유일표 씨. 큰일 났어요. 빨리 몸을 피하세요. 수사기관에서 우리 간부 셋을 체포했어
요. 계속 체포할 테니까 빨리 피해야 돼요. 오늘 밤부터 집에 들어가지 마세요. 절대 잡히
면 안 되니까 명심해요. 그럼......”
“목사님은......”
“내 걱정은 말아요. 그럼......”
전화가 끊겼다.
유일표는 송수화기를 든 채 어금니를 맞물었다. 불안해했던 사태가 결국 터지고 만 것이다.
그는 앞이 어둠으로 막히는 것을 느꼈다.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 머릿속도 어둠이 가
득할 뿐이었다.
“무슨 일 생겼어요?”
이용진이 불안한 기색으로 물었다.
“예. 빨리 피신하래요. 오늘 일로 체포가 시작 됐다고.”
유일표는 송수화기를 놓았다.
“그래요? 그럼 지금 당장 피해요. 내빼는 게 대통령 빽 보다 더 쌔다니까. 내가 감옥살이
하면서 귀아프게 들은 말이오. 참. 돈이 있어야 되겠지. 잠깐 기다려요.”
이용진이 나가자 유일표는 형네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거의 날마다 야근을 하기 때문에 형
이 있을지도 몰랐던 것이다. 형은 야근을 함께하는 사장이었다.
“형. 피신해야 될 일이 생겼어. 집에 연락 좀 해줘야 되겠어.”
“무. 무슨 일이냐?”
“아무것도 모르는 게 좋아. 혹시 형한테 내 행방에 대한 조사가 나오면 지금 전화한 것도
없었던 일로 해야 해.”
“......”
“형. 미안해. 사상 문제는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괜찮아. 할 일 한 거니까. 어디 정한 데는 있냐?”
“아니. 아직......”
“선희한테로 가라. 아무도 모르니까. 돈 없지? 지금 빨리 이리 와.”
“아니. 여기서 해결됐어.”
“됐다. 몸조심해라. 어서 끊자.”
유일표는 의자에 주저앉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두려움 한편에서 분노가 고개를 들고 있었
다. 결국 올 것이 온 거였다. 정부는 노동자들의 블랙리스트를 만들다 못해 노동운동의 뿌리
를 도려내려고 나선 것이었다. 노동자들을 적으로 삼는 정권이 얼마나 오래 가는지 봐라. 그
는 어금니를 맞물어 뿌드득 소리가 나도록 갈았다.
“자아. 이것 넣고. 빨리 떠요.”
이용진이 돈 봉투를 내밀었다.
“이거 죄송합니다.”
“무슨 말씀이오. 남들이 못하는 장한 일 한건데. 빨리 서울을 벗어나요.”
“예. 그럼......”
“참. 집에 연락 못했지요? 전화가 없으니까. 지금 내가 가겠소.”
“아닙니다. 형한테 전화했어요.”
“아. 잘됐군요. 장기간 피해야 될 텐데 돈 떨어지면 바로 연락해요. 가명으로 짤막하게 안
부 편지를 보내요. 그럼 그 주소로 송금할 테니까. 나한테 편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편지할 때마다 이름을 바꿔도 그게 유 선생이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어요.”
“예. 감사합니다.”
“한곳에 오래 있지 말고. 몸이 아파 요양 다니는 것으로 적당히 둘러대요.”
유일표는 재건대 뒷골목으로 빠져나갔다. 어둠을 밟으며 서울 역으로 가야 할지 고속버스터
미널로 가야 할지를 생각했다. 서울역이 가깝기는 했지만 모든 행선지가 한곳에 집중되어 있
는 것이 신경에 거슬렸다. 그곳에 수사망이 퍼져 있다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함정으로 들어
가는 셈이었다. 그는 고속버스터미널로 방향을 잡고 걸음을 빨리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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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님의 한강
한 강 = 제 3 부 불신시대 4 (10권)ㅡㅡㅡ 45. 피신하라
정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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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7.05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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