城 castle 보루(堡壘)·토벽·석벽·목책·해자(垓字;城壕)등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만들어진 군사적 구축물.
넓게는 성으로써 지켜진 지역도 지칭한다. 성곽이라는 말도 성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 그러나 화기가 발달된 근대에 와서 지어진 군사적 방위시설은 성이라고 하지 않고 요새라 한다.
맨 처음에는 자연적 지형을 이용하여 방위를 위해서만 성을 쌓았으나, 시대가 지남에 따라 군사목적만이 아니라 국왕 및 영주의 거주·권세표시·영내통치를 위하여 축조하게 되었다. 또한 중국의 대부분과 서양의 일부에서 볼 수 있듯이 도시 전체를 성벽으로 둘러싼 성곽도시도 나타났다. 성은 현재도 세계 여러 곳에 남아 있으며, 명소·고적지로서 중요한 관광자원이 되고 있다.
〔유럽의 성〕
<고대의 축성특색과 변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축성은, 지세가 험하고 중요한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토루(土壘)와 해자 등의 방어설비를 갖춘 토성이었다.
영국에 현존하는 메이든성(BC 2000∼BC 300)이 그 좋은 예이다. 키클로포스거석성벽으로 유명한 티린스성채(BC 1400)는 미케네시대의 그리스축성을 대표하는 것인데, 그것은 구릉 위의 벼랑 가장자리를 따라서 성벽을 둘러치고 윗성과 아랫성 등 2개의 성곽을 내포한 불규칙한 평면구성이다.
초기 그리스의 축성은 구릉성인 그리스 지형에도 영향을 받아 일반적으로 티린스와 같은 구릉성곽의 평산성식(平山城式)이었다. 이러한 특징은 고전기(古典期)의 폴리스축성에서도 발견된다. 예컨대 아테네시(市)는 폴리스수호신의 신전이 있는 성역인 구릉 위의 성채적 아크로폴리스와 그 아래에 있는 아고라(광장)를 중심으로 하여 시민의 공공생활이 영위되었던 아스티(시가지)가 되는 평산성식의 성벽도시였다.
로마제정시대가 되자, 그 지배지방에는 진영(陣營)·성채·성벽도시 및 장성(長城) 등이 구축되었다. 로마도시 성벽의 잔존은 런던의 타워힐에 있으며 클리플게이트부근에서 성채자리가 발견되었다. 또 햄프셔에 있는 포체스터성의 외벽은 로마진영의 위벽(圍壁)이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유구(遺構)이다.
장성 유구로는 북방에 대한 방어선으로 구축된 아그리콜라국경선(1세기)과 하드리아누스성벽(2세기)이 남아 있으며, 대륙에서는 게르만민족에 대한 방벽으로 쓰려고 라인강과 다뉴브강 사이의 지대에 장성 리메스(Limes)를 구축하여 놓았다. 로마제국에 이어 5∼11세기까지 영국을 지배한 앵글로색슨의 축성은 부르흐(Burh)가 대표적이다.
부르흐란 토루·목책 및 마른 해자 또는 수호로 지켜진 촌락과 초기의 소도시를 뜻한다. 버크셔에 있는 워링퍼드의 부르흐유구는 그 일례이다. 선사시대부터 10세기 무렵까지의 유럽 축성의 본질적 특색은 지역 주민 전체의 보호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방어목적을 지닌 축성을 중세에는 카스트룸(castrum)이라 했으며, 그에 비해 <방어설비를 갖춘 개인 가옥 또는 소규모 보루>를 카스텔룸(castellum)이라 했다. 이 카스텔룸으로부터 캐슬(castle)·샤토(chateau) 및 로망스어계의 성이라는 낱말이 파생되었다. 따라서 캐슬이나 샤토는 정식으로는 <개인 성곽>을 뜻했다.
게르만어계의 부르크(burg)는 원래 <방어설비가 있는 장소 또는 피난처>를 의미했으나, 12세기 무렵에는 <개인 성곽>을 가리키게 되었다. 따라서 10세기 무렵까지의 축성은 일반적으로 캐슬이나 샤토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보통 캐슬이라 하면 그것은 봉건영주의 성(봉건성곽)을 의미한다.
카롤링거왕조 프랑크(9세기)에 관한 문헌에 팔라티움(palatium)이라는 낱말이 자주 나타난다. 이 낱말은 <궁전>을 뜻했으나, 다른 한편에서는 왕후(王侯)나 유력자의 개인 가옥에도 적용되었다. 그러나 건축사에 따르면, 이 라틴어는 같은 9세기 영국의 홀하우스(hall-house)에도 사용되었다. 홀하우스란 앵글로색슨사회의 지배층의 주거로서, 홀을 중심으로 한 목조건물이다. 팔라티움이나 홀하우스는 간단한 방어설비는 갖추었더라도 주거성이 앞선 건물이었을 것이며, 개인적인 성이라고 지칭할 만한 것은 아니었으리라 짐작된다.
당시의 카롤링거왕조 프랑크는 집권적 국가였으며, 영국도 웨섹스에 의한 통일시기를 맞아 사회의 치안은 국가주권에 의해 유지되었으므로 개인적 지위를 위한 성곽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대륙에서 프랑크왕국의 해체와 봉건제도의 지향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영국에서는 데인인의 침공이 활발해질 무렵(9세기 후반)부터 팔라티움과 홀하우스의 평면적 축조가 입체적인 탑형식의 타워하우스로 바뀌었다.
이런 변화는 방어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높이를 추구하여 방어선을 축소한다>는 축성의 기본원리를 의식한 데에서 비롯된다. 이 타워하우스의 설영의식(設營意識)은 그 후의 모트성곽으로 발전했다.
<중세성곽의 여러 형식〉 모트성곽이란 영국의 테트퍼드와 아일랜드의 내크그래펀 등의 성터에서 발견된, 유발(乳鉢)을 엎어놓은 것 같은 모트(motte;작은 언덕, 일반적으로는 사람이 만들어놓은 6∼10m 정도의 언덕)를 핵심으로 한 성곽이다.
유명한 바이외태피스트리 등의 고고학적 연구조사의 결과에 따르면 모트의 정상면은 이 성의 내곽이며, 거기에 성주와 그 가족이 생활하는 목재탑이 세워졌고 모트의 기슭에는 외곽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곳 전체가 토루·목책·수호 또는 마른 해자로 둘러쳐져 있었다. 유구의 면적은 3∼1.5acre 정도이며, 그것은 이미 말한 10세기 무렵까지의 광대한 카스트룸적 축성과 비교할 때 매우 협소하며, 관계사료의 고증대로 모트성곽이 봉건영주의 개인적 방위를 목적으로 한 초기 봉건성곽이었음이 확실하다. 이런 형식의 성은 10세기 중엽 무렵부터 11세기까지 서유럽 각지에서 널리 축성되었는데, 그 후에 석재의 성(석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석성에는 많은 형식과 여러 가지 분류방법이 있는데, 여기서는 키프(keep;主塔)의 유무와 그 형식에 따른 분류법에 따라 분류한다.
⑴ 키프를 갖춘 성;
① 직사각형 키프성곽:키프의 평면구성을 사변형이 되게 하거나 그 조합을 기본형으로 했으며, 12세기가 그 축성시기였다. 영국의 도버성, 프랑스의 로슈성, 스위스의 시용성 등이 그 좋은 예이다.
② 바퀴형 키프성곽:이 말의 원어인 shell keep란 <조개껍데기처럼 내부가 비어 있는 키프>라는 뜻이다. 모트 위에 성벽과 건물을 원형 또는 다각형으로 둘러놓고 중앙에다 안뜰을 남긴 것으로, 평면구성은 바퀴와 같은 형태이다. 영국에서는 이런 형식이 12세기 후반 무렵부터 13세기까지 이용되었다. 영국의 레스토멜성·캐리스부르크성, 네덜란드의 레이덴성 등이 그 좋은 예이다.
③ 원통형 키프성곽:키프가 원통과 같은 탑모양의 성이고, 평면구성은 원형이다. 영국에서는 12세기 후반 무렵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국의 펨브로크성, 독일의 뮌첸베르크성, 프랑스의 쿠시성 등이 이 형식에 속한다. 이들 외에 영국의 요크성과 폰티프랙트성처럼 평면구성이 4잎형인 키프도 있으며, 또한 워크워스성의 키프와 같이 정사각형과 정십자형을 조합한 그랜드플랜을 비롯해 변형적인 것도 있다.
⑵ 키프를 갖추지 않은 성:성주의 거관(居館)이기도 하고 성이 공격당할 때에 최후의 거점이기도 했던 키프를 설치하지 않는 형식이다. 영국에서는 13세기 후반 무렵부터 14세기 중반 무렵까지 나타났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① 위곽성곽(圍郭城郭):안뜰을 둘러싸고 건물이 위벽을 따라 줄지어 서고 출입구에는 크고 훌륭한 문루식 건물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영국의 카나번성, 프랑스의 피에르퐁성, 아일랜드의 밸리모트성 등이 이 형식에 속한다.
② 동심원적 성곽:핵심적 위곽을 바깥쪽 성벽이 동심원적으로 둘러싸는 평면구성이며, 영국의 보머리스성, 에스파냐의 코카성, 프랑스의 카르카손성, 독일의 한슈타인성, 시리아의 크라크 데 슈발리에성 등이 있다.
유럽 중세성곽은 위곽성곽과 동심원적 성곽의 2형식에서 그 완성을 보았다. 예컨대 벽탑(壁塔)·우탑(隅塔)·도개교(跳開橋)·떨어뜨리기격자·총안·호어딩과 머치컬레이션(호어딩은 일반적으로 목재이며, 머치컬레이션은 석재로 만들어져 있다) 등의 방어설비가 완비되었고, 벽탑·우탑은 활의 사정권 안에 마련되었으며, 동심원적 성곽에서 내벽은 항상 외벽보다 높게 축조되어 안팎의 성벽 위에서 동시에 성 밖으로 쏠 수가 있었다.
요컨대 종래 성곽의 수동적 방어와는 달리 공성군(攻城軍)에게 능동적으로 유효한 반격을 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성을 쌓는 첫째 목적은 공성군을 방어하고 격퇴하는 일이다. 따라서 공성무기와 공성법의 발달에 대응하여 축성도 변화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형식의 성곽이 나타난 것은 일면 그러한 것과도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새로운 성곽 형식이 나타나도 오래된 형식의 성이 시대를 초월하여 여전히 존속하며 신구(新舊) 여러 형식의 성이 섞여 있었던 것이 중세성곽의 현실이었다. 중세의 성주나 공성자는 일반적으로 그들의 경제력이나 당면한 군사적 필요 등으로 인해 새로운 공성무기와 공성법 또는 새로운 성곽형식을 채용하는 데는 각기 그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즉 새로운 공성법이나 축성법과 실제적 채용과는 시간적으로 꼭 일치하지는 않았던 것이 그 까닭이라고 생각된다. 봉건영주는 공권(公權)에 속해 있었던 그 지방의 군사적 방위책임을 그의 개인적 이해(利害)에 관계시켜 그 거성을 거점으로 삼아 수행했던 것이다.
또 영주는 그 지방의 과세·재판·경찰 등의 공권을 사권화(私權化)하였으므로 성은 군사적 기능과 더불어 영주가 그들의 여러 권리를 행사할 거점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은 봉건성곽은 영주(성주)의 가신(家臣)에 의해 윤번제적 수성부역(守城賦役, castleguard)으로 수비되었다. 성이 완성되어가자 성내 생활자는 주거성을 추구하게 되었고, 위곽 안에서 쾌적한 생활을 보낼 수 있는 건물을 마련하게 되었으며, 일상생활에 불편한 키프는 불필요한 것으로 보게 되었다.
키프가 폐지된 것은, 단지 대포의 파괴력이라는 군사적 이유에만 그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성곽에서의 주거성을 갈구하는 경향이 발전하였고, 마침내 영주층으로 하여금 일상생활에 불편한 낡은 성곽에서 떠나가도록 했던 것이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새로운 형식의 성곽이 나타났다.
③ 후기성곽:완성기 성곽에서 보게 되는 여러 가지 방어설비를 갖춘 저택성(邸宅城)이다. 그러나 그 방어 설비는 이미 장식적인 것이 되었고, 성이라기보다는 본질적으로 귀족의 거처 또는 저택이었다.
영국에서는 14세기 후반 무렵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사각형성곽>이 그것을 대표한다. 그것은 중앙에 사각형 안뜰이 있는 사변형의 저택성이었다. 영국의 보디엄성, 네덜란드의 무이덴성, 덴마크의 프레데릭스보르그성 등이 그 좋은 예이다.
또 프랑스 루아르강변의 유명한 샤토군(群)의 대부분은 겉보기와는 다르지만, 그 축성의도의 근저에는 동일한 이유가 고려되었을 것이다. 중세성곽의 쇠퇴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성의 주거성 추구와 관련해서 일찍부터 진전되고 있었는데, 그것을 발전시킨 계기는 15세기의 개량된 대포의 파괴력이었다.
처음에는 그것에 대응하기 위하여 성곽에다 부분적 개량을 하고 대포도 설치하였다. 이런 경과는 영국의 에든버러성·독일의 마리엔부르크성, 스웨덴의 칼마르성 등에서 볼 수 있다. 요컨대 이런 변화는 성곽의 특징인 방어성의 발전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대변천과 더불어 <높이를 확보한다>고 하는 낡은 축성원리 대신 <낮고도 두꺼움을 추구한다>고 하는 새로운 근대 요새의 원리를 만들어냈으며, 17세기 프랑스 축성가 보방에서 시작되는 근대의 요새축성에 이르게 된다.
출처:<야후위키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