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4학년인 큰아이의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것이 지난 6월이었다. 평소 학교생활에서 잘 적응하던 아이가 그날 따라 우울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이를 걱정하신 선생님께서 우리 아이와 상담을 한 후 보내주신 아이에 대한 염려가 담긴 긴 편지였다.
이것 저것 해야 될 일에 치인 아이가 그날 아침 아내의 싫은 소리를 듣고 학교까지 우울해진 감정을 연장시킨 모양이었다. 아이에게 너무 큰 부담을 지우지 않아도 잘 해낼 수 있으니 너무 조급해하지 말라는 조언이 담겨 있었다.
아내로부터 이 편지를 건네받고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과 아이의 생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4학년에 접어들면서 부쩍 예민해진 아이의 성격과 부모로서 이런 아이의 변화에 잘 대응하였는지 반성하고 곧장 선생님께 답글을 드렸다.
아이와 도보여행을 실행에 옮길 생각을 가진 것이 이때였던 것 같다. 나도 막 13년 동안의 직장 생활을 마치고 새로운 모색을 꿈꾸고 있던 시기여서 아이의 방학을 기다려 곧바로 실행에 들어갔다.
우선 아이에게 내 뜻을 밝히고 의사를 물었다. 다행히 아이는 평소에 하고 싶던 일이라며 흔쾌히 동의를 했고 난 일정을 잡았다. 몸이 불편하신 아이의 할머니가 계신 청주에서 출발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용인 수지까지의 약 100km가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었다.
부산에서 임진각까지의 종주에 비해 형편 없이 짧은 여정이겠지만 일상에서 20~30일을 뺀다는 것은 보통의 각오로는 어려운 일이기도 하고 아이의 체력이 버텨줄지도 의문이라서 일단 이 정도 여정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버스로 청주에 도착한 후 아이의 체력을 염려해서 아이의 배낭을 비우고 내 배낭에 짐을 모았다.
대충 짐을 꾸리고 염려하시는 부모님을 뒤로 하고 집을 나선 것이 7월 26일 오전 9시였다. 좀더 일찍 떠날 수도 있는 길이었지만 굳이 김밥을 말아 챙겨주고 싶어하는 아이 고모의 성의를 다 받다 보니 어느새 9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태풍이 다가오고 있다는 뉴스를 들은 터라서 하늘을 올려보았더니 흐린 게 햇살을 가려 줄 정도였고 별다른 조짐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흐린 하늘을 보고 느낀 안도감이 방심이었다고 느낀 건 한참이 지난 후였다. 여름 햇살은 구름을 뚫고 첫날부터 우리의 살갗을 벌겋게 태워버리기에 충분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첫 날의 여정은 17번 국도를 따라 처가가 있는 진천 이월까지의 약 32km로 잡았다. 출발한지 1시간 정도 지나자 계속 우리 부자를 괴롭힌 어려움과 마주쳤다. 시내를 벗어나면서 본격적으로 국도에 접어들어 우리가 걸어야 하는 갓길이 나타났는데 이 갓길이라는 것이 둘이 같이 걷기에 불충분할 넓이일 뿐만 아니라 무성하게 자란 풀들이 갓길 쪽으로 돌출되어 있어서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실 이 여행을 맨 처음 아내에게 이야기했을 때 아내가 한 첫 마디가 위험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마음을 다잡고 같이 걷는 걸 포기하고 내가 앞서고 아이가 뒤에 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큰 차가 스치듯이 옆으로 스칠 땐 어지간한 덩치의 나조차도 휘청거리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나 자신도 운전을 하고 있지만 보행인을 얼마나 배려하고 운전을 했는지 반성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12시가 지나며 오창에 도착했다. 아이의 고모가 싸준 김밥을 근처 분식집에서 라면을 사다가 초등학교 운동장 그늘에서 그 국물과 함께 점심으로 먹었다.
아이가 본격적으로 힘들어 한 건 여기서부터였다. 여전히 하늘이 흐려서 햇볕이 따가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이의 다리에 피로가 오기 시작한 것은 분명했다. 나 자신도 발목에 어느 정도 통증을 느끼며 걷기 시작할 정도였다.
오창을 지나 청원과 진천의 경계인 문백에 이를 때까지 30분을 걷고 10분을 쉬는 어려움이 계속 됐다. 이런 어려움은 문백에서 사석 중간에 이를 때까지는 아이가 쉬자고 할 때마다 버스 정류장이나 나무 밑에서 쉬었다가 출발할 정도로 심해지기 시작했다. 중간 중간 빗발이 뿌려지기는 했지만 오히려 아이는 더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로 약한 빗줄기였다.
사석에 조금 못미쳐 개천이 나왔다. 크지 않은 개천이었지만 아이와 함께 가장 즐거운 시간을 보낸 개울로 기억된다. 환호하며 개천으로 뛰어들어간 아이가 이리저리 물 속에서 작은 물고기를 따라다니다가 쉬고 있을 때 내가 아이를 향해 물수제비를 띄웠다. 얇은 돌을 엄지와 검지로 잡고 물 위를 스치듯 돌려 던지는 물수제비의 경쾌한 탄성이 아이에게 도착할 즈음 아이는 깜짝 놀라 내 앞으로 돌을 던져 물을 튀기고 있었다. 처음에 서툴던 아이의 물수제비 실력이 두 개를 던지면 하나가 3~4번 물 위를 튕겨 나갈 때까지 우리는 마음껏 개천의 시원한 물 속에서 놀고 있었다.
겨우 기운을 차리고 사석을 지나 잣고개를 넘어 진천읍내에 이르렀을 땐 저녁 6시 반이 되어가고 있었다. 진천에서는 오후에 집을 떠난 아내와 작은 아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깐의 해후가 끝나고 아이와 아내 편에 걸머졌던 배낭을 들려서 처가로 보냈다.
어둠이 내린 밤의 국도는 야광 표식장비가 없던 우리 부자에겐 더 위험했다. 아이는 가도 가도 끝이 없던 그 밤의 마지막 여정이 가장 힘들었다고 나중에 말할 정도였다. 겨우 500m 남짓을 걷고 아이는 쉬고 또 쉬었다. 약 2시간 정도를 걸어 진천 읍내와 이월면 중간에 있는 처가에 도착한 시간은 9시 반이었다.
둘쨋날, 아이와 다시 길을 떠난 시간은 10시였다. 첫날의 피로를 떨치지 못하고 늦잠을 잔 결과였다. 만류하시는 장모님과 아내의 걱정스런 눈길을 나보다 더 씩씩하게 받아 넘기던 아이는 힘차게 문을 나섰으나 하늘은 비껴간 태풍 덕분에 구름 한 점 없는 땡볕을 쏟아 붓고 있었다.
이월을 지나 광혜원에 도착한 시간이 2시 남짓, 그 시간은 뜨거운 7월의 태양과의 싸움이었다. 태양이 아스팔트 국도를 뜨겁게 달구고 아이의 살갗과 내 살갗에 이미 충분한 화상을 입히고 난 뒤에나 늦은 우린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왜 그렇게 국도의 가로수는 앙상하게 그늘 하나 변변히 만들어주지 못하던지 원망스럽기 그지 없었고 이미 충분히 걸어서 쉬고 싶은 시간이었으나 그늘이 나올 때까지 걷고 또 걷는 어려움이 계속 되었다.
한 주 걸러 한 번씩 10년 동안을 고속도로의 혼잡함을 피해 다니던 국도라 어느 구비를 지나면 어떤 길이 나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이는 운전을 하는 나보다는 그 길이 익숙하지 않았던가 보다. 모르는 길을 지도를 펴고 운전하여 목적지를 찾아갈 때 느끼는 감정이지만 한참 길을 갔다고 느껴지던 그 길을 거꾸로 돌아서 올 때는 아주 빠르게 느껴지는 경험이 기억났다.
아이는 끊임 없이 얼마나 더 가야 되는지 묻고 또 물었다. 아마 살아가는 것도 가 보았던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서 이토록 끊임 없이 낯설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문득 난 누구에게 길을 물으며 살아왔는지 궁금해졌다.
둘쨋날의 목적지는 백암이었다. 약 35km정도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출발 시간이 늦어지면서 우리가 그날 8시 정도에 도착한 곳은 안성의 죽산면이었다. 첫날의 어두운 밤길의 공포스런 경험 때문이었는지 거기서 그 날의 목적지를 끝까지 고집할 힘이 아이에게도 아니 나에게도 전혀 없었다. 늦은 저녁을 먹고 근처 모텔에서 짐을 풀고 잠이 들었다. 이미 단단해진 종아리와 허벅지를 서로 문지르며 근육을 풀다가 잠이 들었다.
3일째, 전날의 부진이 마음에 걸린 나는 잠이 덜 깬 아이를 깨워 6시에 길을 나섰다. 약 40km 남짓이 그날 우리가 걸어야 할 여정이었다. 휴게소에서 아침을 먹고 백암으로 길을 재촉하는 중간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처가에서 출발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데 차 안에서 우리를 볼 수 있을 것 같다"며 "어디쯤 가고 있느냐"고 묻는 전화였다.
아내와 작은 아이가 탄 버스가 우리 곁을 지난 시간은 10시가 가까워서였다. 우리를 보기 위해 좌석 맨 앞에 타고 있던 아내와 아이는 우리 부자를 발견한 순간 무척 눈물겨웠다고 도착한 후 고백했다.
사석의 개천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아이는 물만 보면 들어가 놀기를 원했다. 그러나 우리가 마지막 날 걸었던 길에는 기꺼이 들어가 쉴만한 맑은 물을 만날 수가 없었다. 둘쨋날 못지 않은 뜨거운 길을 걸으며 물집 잡힌 발, 발목과 허벅지의 통증이 본격적으로 전해져 오던 11시경 백암을 지나 양지로 향했다.
7월 오후의 햇발 속에서 숨이 턱에 차오르는 걸 느끼며 더 이상 걷기 싫었을 즈음 길 옆에 원두막이 나타났다. 아직 과일이 익을 때가 아니었는지 원두막은 비어 있었고 근처에 마땅히 쉴만한 그늘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아이와 함께 원두막에 올라갔다.
배낭을 베개 삼아 우리 부자는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과 어느 성능 좋은 에어컨보다 시원한 그늘을 이불 삼아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오수에 빠져들었다. 아마 이 기억도 두고두고 아이와 함께 나눌 추억이 되리라 여기면서 옅은 꿈까지 꾸며 즐겼다. 백암에서 양지에 이를 즈음 늦은 점심을 먹고 용인에 도착한 시간이 저녁 7시. 아이가 먹고 싶다던 냉면과 약간의 수육으로 저녁을 마치자 피로가 몰려들었다.
저녁을 먹고 약간의 휴식 후 용인에서 구성으로 향하는 길목에 접어들 즈음 시계는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나마 용인 시내에서는 가로등 불빛에 어둡지 않았으나 구성으로 향하는 좁은 편도 1차선의 길은 캄캄한 어둠뿐이었다. 또 유난히 굴곡이 많은 그 길을 불빛 없이 걸어야 한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아들과 함께 나선 길을 예정대로 끝내야 한다는 절박함과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사고의 염려 사이의 갈등 속에서 결국 난 여기서 그만 두어야겠다는 내 생각을 아이에게 밝힐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일정을 예정대로 마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나보다 더 큰 것 같았다. 차를 타고 집에 도착한 시간은 7월 28일 밤 10시 정도였다.
사실 길을 떠나며 컴퓨터 게임과 TV 등과 격리된 아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리라는 욕심과 짧지 않은 길을 평소에 걸어 다니지 않던 아이의 체력이 염려되었다. 그러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리라는 욕심은 눈 앞에 닥친 힘겨움 때문에 욕심껏 나누지 못했고 걱정스럽던 아이의 체력보다는 내 체력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아이는 잘 버텨 주었다.
내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튼튼하거나 체력적으로 우월해서는 아니라고 믿는다. 다만 아이에겐 아빠와 함께 한 이 시간이 소중할 수 있으리라는, 그래서 나중에 어른이 되었을 때라도 아빠와 함께 한 이번 경험을 기억할 수 있었으면 하는 기대를 하게 된다.
늘 시작은 끝에 대한 두려움으로 출발하지만 끝은 또 늘 과정에 대한 아쉬움을 갖게 한다. 3일 동안 힘들게 걸었으면서도 목적지에 닿지 못한 아쉬움과 조금 더 단단히 준비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고개를 쳐들지만 아이와 함께 한 이번 여정은 나중에 내가 우리 아이의 앞날과 현실에 대해 고민해야 할 경우 가장 먼저 떠올릴 기억이 되지 않을까 생각도 한다.
여행을 마친 후 신문에서 이번 여름에 도보로 국토순례를 하는 사람들의 수가 2만5천명 정도에 이르리라는 기사를 보았다. 그 2만5천명이 서로 다른 이유에서 여행을 출발하고 또 끝낼 수 있지만 모두가 함께 느끼는 감정은 떠난 길을 끝까지 걸어 도착지에 다다르려는 목적의식일 것이다.
이 불볕 더위를 뚫고 오늘도 우리 국토의 어디인가를 걷고 있을 누구인가에게 응원을 보내며 아이와 함께 다음 번엔 자전거를 타고 여행하자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 마딘 삶을 살아내야겠다고 다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