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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1호 : 대방광원각략소주경<권하-2>(大方廣圓覺略疏注經<卷下-二>) 호림박물관
대방광불원각수다라요의경은 줄여서 ‘원각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우리나라 승려들의 교과과목으로 채택되어 불교 수행의 길잡이 구실을 하는 경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의 지눌이 깊이 신봉하여 ‘요의경’이라고 한 뒤 크게 유행하였다.
이 책은『원각경』에 당나라 종밀(宗密)이 주석을 붙인 것으로, 권 하의 두 번째 책이다. 목판에 새겨 닥종이에 찍은 것을 호접장(胡蝶裝)으로 만들었으며, 크기는 세로 34㎝, 가로 19.8㎝이다. 호접장이란 찍어낸 책장을 글씨가 안으로 오도록 반으로 접어 겹겹이 포개고, 접혀진 부분의 바깥쪽에 풀을 칠한 후 표지를 붙인 책의 형태를 말한다.
고려 문종 때 여러 스님들이 저술한 문헌들을 총망라하여 간행한 속장경계열의 짜임새를 지니고 있으며, 판을 새긴 기법이나 글자체가『대방광불화엄경소』(보물 제891호)와 비슷하고 다시 새긴 특징이 있다.
이 책은 송나라 판본을 입수하여 새긴 고려시대 판본으로 보이며 인쇄상태로 보아 한번 찍어낸 목판에서 다시 찍은 후쇄본으로 추정된다. 이 책이 발견됨으로써 속장경계열의 원각경소가 전부 갖추어지게 되었으며, 보기 드문 호접장본으로서 귀중한 자료이다.
제1172호 : 몽산화상법어약록(蒙山和尙法語略錄) 호림박물관
이 책은 조선 혜각존자 신미(信眉)가 토를 달고 한글로 번역한 것으로, 나무판에 새긴 뒤 닥종이에 찍어냈으며, 크기는 세로 30.4㎝, 가로 18.8㎝이다. 세조 13년(1467)에 간경도감<刊經都監:세조 7년(1461) 불경을 한글로 풀이하여 간행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에서 처음 찍어낸 책에는 맨 앞장의 제목에 ‘혜각존자신미역해(慧覺尊者信眉譯解)’라고 신미의 이름이 있고, 성종 3년(1472) 인수대비가 찍어낸 책에는 이름이 빠져 있으며, 책 끝에 김수온이 쓴 글이 실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책은 김수온의 글이 없는 것과 번역자의 이름으로 보아 세조 13년(1467)에 처음 찍어낸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조선 후기의 고승인 초의(艸衣) 의순(1786∼1866)이 사용하던 책이라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본문의 제4, 6, 7장의 뒷면에 ‘청허당보장록(淸虛堂寶藏錄)’을 베껴 쓰고 이어서 이 기록의 분실에 대비하여 오래 전할 수 있도록 옛 책의 뒷면에 베껴 놓은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제1173호 : 남은유서분재기부남재왕지(南誾遺書分財記附南在王旨) 의령남씨문충공파종중
남은 선생의 유서와 남재 선생의 왕지 등 2점이다.
남은(南誾,1354∼1398) 선생의 유서는 태조년간(1392∼1398)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남은은 조선을 건국할 때 공을 세워 1등공신인 의성군에 봉해졌으며, 태조 7년(1398)에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왕세자 이방석의 편에 가담하였다가 이방원에게 살해되었다.
이 유서는 총 35행이며, 초서체로 기록되었다. 남은이 태조 7년(1398)에 제1차 왕자의 난에 연루되자 당시의 급박한 정세에 대비하여 자신이 죽은 후에 가문의 제반사의 일처리를 후손들에게 부탁하는 유서로 재산과 노비에 대한 분배기록인 분재기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유서는 조선시대 유서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정치, 사회사적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남재(南在,1351∼1419)의 왕지는 태종 15년(1415)에 수문전대제학세자시의 관직을 내리면서 발급한 사령서이다. 남재는 공민왕 20년(1371)에 문과에 급제하고, 아우 남은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을 건국하는데 공을 세웠다. 태조 5년(1396)에 도병마사로서 대마도 정벌에 참여하였고, 태조 7년(1398)에 제1차 왕자의 난 때 아우 남은은 살해되고, 남재는 유배되었다가 혐의가 없어 풀려났다. 그 후 태종 즉위년(1400)에 의령부원군으로 임명되고, 태종 16년(1416)에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총 11행으로 4∼5자의 초서체로 기록되었다. 이 왕지는 조선 전기 관제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제1174호-제1182호, 93.11.05지정, 동산문화재)
제1174호 : 이중로정사공신교서및초상(李重老 靖社功臣敎書 및 肖像)
이 문서는 인조 3년(1625)에 가의대부강화부윤증자헌대부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 청흥군 이중로에게 추증한 것으로서 그가 죽은 후에 내린 정사공신교서이다.
정사공신은 조선 인조 1년(1623)에 인조반정에 참가하여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공신호이다. 이중로는 정사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정사공신교서에는 수급자명, 공적내용, 특전과 포상, 등위별 공신명단 그리고 발급일자가 기록되어 있어 인조반정에 참여한 공신에 대한 포상의 내역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중로영정은 오사모에 단령을 입고 의자에 앉은 전신좌상이다. 흉배는 모란 및 해태문양이 수놓인 것을 착용하고 있으며, 학정금대(鶴頂金帶)를 두르고 있어 이 초상화가 무관 종2품 때의 도상임을 말해준다.
이중로 초상화는 17세기 초 조선조 공신상의 가장 전형적인 예를 보여주는 동시에 화법 또한 특히 공교하다.
제1174-1호 : 이중로정사공신교서(李重老靖社功臣敎書) 경기도박물관
제1174-2호 : 이중로영정(李重老影幀) 경기도박물관
제1175호 : 청원군심대호성공신교서(靑原君沈岱扈聖功臣敎書) 경기도박물관
녹권이란 공신으로 인정하는 증서를 말하는데, 이 녹권은 선조 37년(1604)에 선조가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할 때 호종((扈從:임금의 수레를 모시어 쫓음)하였던 청원군 심대(沈垈,1546∼1592)에게 내린 공신교서이다.
심대는 선조 5년(1572) 문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하여 의주로 모셨으며, 경기도 관찰사가 되어 서울을 탈환하고자 시민들과 함께 싸우다가 왜병들의 습격을 받고 사망하였다.
교서에는 심대가 임진왜란 때 왕을 의주까지 호종했던 공훈과 경기도 관찰사에 제수되어 서울을 수복코자 하였으나 왜병의 습격에 전사한 그에게 2등공신을 제수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상으로 초상화를 그려 후세에 길이 남기고 관직은 2계급을 진급시키고 부모, 처자에게도 2계급씩 올려주고 자식이 없을 경우 조카나 여조카는 1계급을 올려주고 큰아들과 그 후손에게 그 벼슬의 지위를 영원히 세습하게 하며, 노비 9명과 밭 80결, 은자 7냥, 비단 1필을 수령토록 교시한 것이다.
이 호성공신교서는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하고, 조선시대 공신연구 및 임진왜란 연구에 귀중한 자료의 가치를 두고 있다. 현재 호성공신교서는 여러 건이 이미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제1176호 : 유수초상(柳綏肖像) 경기도박물관
조선 중기 문신인 유수(柳綏)의 초상화로 크기는 가로 88㎝, 세로 165.5㎝이다. 유수는 경종 1년(1721)에 문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에 올랐다. 이 초상화는 의자에 앉아 오른쪽을 바라보는 전신상으로, 얼굴은 선으로 윤곽을 자연스럽게 묘사하여 온화한 성품을 표현하였다. 관리들이 쓰는 모자는 높게 만들어 당시의 모자 형태를 반영하였고 청록색 관복에 한 마리 학문양의 흉배와 허리띠는 당시의 지위를 나타내준다. 의자에 깔린 호랑이 가죽, 발 받침대 위의 돗자리문양 등에서 영조(재위 1724∼1776) 때 초상화의 양식적 특징을 볼 수 있다.
이 초상화는 영조 2년(1726)에 왕실 초상화가였던 진재해(秦再奚)가 그린 그림으로 초상화를 보관하는 함과 함께 전해진다. 제작연대가 확실할 뿐만 아니라 왕실 초상화가인 진재해가 그려 18세기 초상화 화풍을 훌륭하게 표현한 것으로 주목할만한 작품이다.
제1177호 : 오명항초상및양무공신교서(吳命恒肖像 및 附揚武功臣敎書) 경기도박물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오명항(1673∼1728)을 그린 초상화 1점과 1등 공신으로 책록하는 교서 1부 그리고 그것들을 담았던 나무로 만든 상자 1점 등 3점의 유물이다. 오명항은 숙종 31년(1705) 문과에 급제하고 그 뒤 이조좌랑, 병조판서, 우의정까지 올랐던 인물로 영조 3년(1727)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1등 공신으로 봉해졌다.
초상화는 가로 1.03m, 세로 1.74m로 비단에 채색하여 그린 전신상이다.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머리에는 검은색 사모를 쓰고 짙은 청록색의 관복을 입었다. 가슴에 수놓은 2마리 학의 모습에서 공신책록 후에 그린 전형적인 공신도임을 알 수 있다. 높이가 높은 사모와 호랑이 가죽이 깔린 의자, 팔(八)자로 벌린 발 모습에서 그 당시의 화풍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갈색의 얼굴에 윤곽선과 양턱, 눈 주위에 붉은색을 사용하여 얼굴의 굴곡을 표현했고 종두 자국과 코 밑의 점까지 나타내 강직하고 진지한 그의 표정을 잘 살리고 있다.
교서는 가로 289.5㎝, 세로 42.9㎝로 닥나무로 만든 바탕에 비단을 배접하여 만들었다. 먼저 감색 천으로 위와 아래에 2㎝폭으로 덧붙이고 다시 붉은색 선으로 사각의 테두리를 두룬 다음 세로로 63개의 선을 그어 그 안쪽에 검은색으로 내용을 적었다. 내용에는 반란을 진정시킨 공로를 인정하여 1등공신 1명, 2등공신 7명, 3등공신 7명을 공훈한다는 글과 15명의 이름이 들어있다. 교서의 좌우에는 나무로 축을 부착하여 말아두게 하였고 뒷면에는 신치근이 만들고 조명교가 글을 썼다는 명문이 있다.
제1178호 :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가천박물관
이 책은 고려시대 김희선 등이 모은 『삼화자향약방』과 조선시대 권중화가 펴낸 『향약간역방』을 중심으로, 당시의 의료경험과 의학서적을 참고, 보충하여 태조 7년(1398)에 펴내고, 이듬해 김희선이 강원감영에서 간행한 의학과 약학에 관한 서적이다.
『향약제생집성방』총 30권 가운데 제6권으로 완질이 아니다. 목판의 크기도 다소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누락된 부분도 있어서 자세한 내용을 다 파악할 수는 없으나, 권근의 『양촌집』과 김성수의 『한의학서지 발전에 관한 고찰』에 의하면 그 간행경위와 약방문 수록 범위 등을 대략 유추할 수 있다. 즉 전 30권에는 ‘338종의 질병의 증상과 2,803종의 약방문을 수록하고 있으며, 당시의 의료경험을 개괄적으로 설명한 다음, 약방문을 질병의 부문별로 제시하고 그에 따르는 설명을 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이『향약제생집성방』은 세종 15년(1433)에 간행된 『향약집성방』의 기초가 될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자생하는 약초로 우리나라의 풍토와 체질에 맞는 향약을 개발, 적용하였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제1179호 : 태산요록(胎産要錄) 가천박물관
이 책은 조선 세종 때의 의학자인 노중례가 세종 16년(1434)에 왕의 명을 따라 편찬한 것으로 임신과 육아의 질병치료에 관한 전문 의학서이다. 상·하 2권으로, 상권은 임산교양을 서술하고 태산문(胎産文)이라는 제목하에 태교론, 전녀위남법(여아를 남아로 바꾸는 법), 식기론(꺼려야 할 음식) 등 20항목이 수록되었고, 하권은 젖먹이의 보호법을 서술하고 있는데 ‘영아장호문(영兒將護門)’이라는 제목하에 거아법, 식구법, 장포의법 등 27개의 항목이 수록되어 있다. 15종이나 되는 의학서적을 참고하여 실용에 편리하도록 편찬하였다. 희귀본으로 의학과 관련하여 귀중한 자료이다.
제1180호 : 신응경(神應經) 가천박물관
이 책은 침구(鍼灸:침질과 뜸질)관계를 다룬 전문의학서적으로, 성종 5년(1474)에 목판본으로 간행한 것이다.
머리말이 빠져 있어 손으로 써서 보충하여 넣고, 본문도 하단이 닳아 헤어져 간지(間紙)를 넣어 포개서 붙였다. 인조 21년(1643)에는 훈련도감자판으로 다시 간행한 일이 있다. 이 책은 서지학 및 한의학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제1181호 : 태인고현동향약(泰仁古縣洞鄕約) 정읍 고현향약회중
향약은 착한 것을 권장하고 악한 것을 경계하며 어렵고 구차한 때에 서로 돕고 구하기를 목적으로 하여 마련된 향촌의 자치규약이다. 이 문헌은 임진왜란을 전후한 선조년간에 시작하여 1977년 최근에 이르기까지 약 400여년 동안 전라도 태인현 고현동에서 결성하고, 시행한 향약에 관한 자료이다.
원본을 보고 옮겨쓴 것으로 총 29책인데, 명칭은 다소 다르기는 하나 내용이 향약자료로 분류되는 문헌이 24책이며, 나머지 5책은 향약 관련자료들이다. 책의 형태와 체제는 각각 약간씩 다른데 머리말과 맺음말 그리고 좌목(座目:자리의 차례를 적은 목록)과 규약 등이 갖추어진 책도 있고, 단순히 좌목만 있는 책도 있다. 이 향약은 정극인(1401∼1481)의 『향음서』를 기준으로 하며, 성종 6년(1475)이 그 시행시초가 된다. 이 향약안들은 그 중간중간 빠진 본들이 많으며, 또한 구한말 이후의 것도 6책이나 포함되어 있다.
현재 이 문헌은 영광 정씨, 여산 송씨, 경주 정씨, 청도 김씨, 도강 김씨 등 최초 회원 오대문중의 자손들이 돌아가며 총무격인 유사를 뽑아 보존· 관리하고 있다. 현존하는 향약 문헌으로 양적으로나, 내용면에 있어 가장 많고 충실하며 향약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제1182호 : 인제 백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麟蹄 百潭寺 木造阿彌陀如來坐像 및 腹藏遺物)
백담사 극락보전 안에 주불(主佛)로 모셔져 있는 이 목불좌상은 서방 극락세계에 살면서 중생을 위해 자비를 베푼다는 아미타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조선 영조 24년(1748)에 만들어졌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다. 얼굴은 둥글고 단아하며 가는 눈, 작은 입, 오똑한 코로 인해 독특한 인상을 나타낸다. 넓은 가슴과 둥근 어깨가 당당한 인상을 주는 상체는 다소 평판적이며, 하체는 넓고 큼직하여 상체와 조화되고 있는데 이러한 특징은 이 불상이 당시의 나무로 만든 불상 가운데 대표작임을 알려주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두꺼운 편으로 옷주름이 곡선으로 처리되고 있으며, 가슴에는 U자형의 중복된 주름을 보이는데 이러한 주름들은 조선 초기의 특징이 이어진 것이다. 18세기 전반의 불상 가운데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는 이 목불상은 불상의 조성연대를 알려주는 발원문(發願文)과 많은 복장물이 있어 특히 주목된다.
(제1183호-제1187호, 93.11.19 지정, 불교관련부동산)
제1183호 : 미황사응진당(美黃寺應眞堂) 해남
달마산 기슭에 자리잡은 미황사는 우리 나라 육지 가장 남쪽에 있는 절이다. 미황사 사적비에 따르면 통일신라 경덕왕 8년(749)에 처음 지었다고 한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에 타 버려, 지금있는 응진당은 영조 27년(1751)에 지은 것이다.
응진은 부처의 또 다른 이름이며, 아라한·나한은 수행을 거쳐 깨달은 성자를 말한다. 응진당은 나한전이라고도 하는데, 보통 십육나한이나 오백나한을 모신다. 미황사 응진당에는 안쪽 벽면에 그림으로 십육나한을 모시고 있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기둥 윗부분에는 장식이 조각되어 있는 등 조선 후기의 양식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제1184호 : 선암사북부도(仙巖寺北浮屠)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 이 부도는 선암사 중심에서 북쪽으로 약 400m 지나 한적한 산중턱의 선조암이라는 암자에 세워져 있다. 3개의 받침돌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로 탑신(塔身)을 올려 놓았으며, 각 부분이 8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은 아래받침돌에 사자상과 구름무늬를 조각했고, 가운데받침돌에는 안상(眼象)을 얕게 새겼으며, 윗받침돌에는 8장의 연꽃잎을 큼직하게 새겨 놓았다. 탑신의 몸돌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이 있고, 앞뒷면에 자물쇠가 달린 문짝 모양을 새겨두었으며, 앞면 양 옆으로 인왕상(仁王像)을 배치했다. 투박해 보이는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큼직한 꽃장식이 솟아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보륜과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남아 있다.
이 부도는 사자상, 구름모양, 연꽃, 인왕상 등을 새긴 조각 양식과 수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제1185호 : 선암사동부도(仙巖寺東浮屠)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 선암사 무우전 뒷편의 능선을 따라 동북쪽으로 약 200m 올라가면 이 부도가 보이는데, 사찰 안에 있는 3기의 고려시대 부도 중 하나로, 규모가 크고 각 부분이 8각으로 이루어진 모습이다.
기단부(基壇部)는 8각의 바닥돌 위에 안상(眼象)을 새긴 괴임대를 마련하여 구름무늬를 조각한 아래받침돌을 올려 놓았다. 가운데받침돌과 윗받침돌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물결무늬와 연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탑신(塔身)의 몸돌은 윗부분이 좁아진 사다리꼴 모양으로, 앞면에는 봉황이 새겨진 문의 양 옆을 지키는 인왕상(仁王像)을 새겨 두었고, 뒷면에는 문고리가 달린 문짝을 조각해 두었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꽃장식이 달려있다. 꼭대기에는 갖가지 모양의 머리장식이 차례로 놓여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8각 부도 양식을 착실하게 따르고 있는 작품으로, 각 부분의 만든 솜씨들로 보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제1184호 | 제1185호 |
제1186호 : 직지사청풍료앞삼층석탑(直指寺淸風寮앞三層石塔)
강락사라고 전해지는 옛 절터에 무너져 있던 탑으로, 1968년 경북 선산군 군청 앞뜰에 옮겨 복원하였고, 1980년 10월 다시 현재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을 탑신(塔身)을 세우고 머리장식을 얹은 구조이다.
기단은 네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본떠 새기고, 면의 중앙에도 기둥 하나씩을 조각해 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을 각기 한 돌로 짜고,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을 본떠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수가 각 층 모두 5단으로 깔끔하게 마무리 하였고, 빗물을 받는 낙수면은 반듯하다가 네 귀퉁이에서 살짝 치켜 올려져 있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1980년 탑을 옮겨 세울 때, 같은 시기의 석탑을 모방하여 복원해 놓은 것이다. 지붕돌의 치켜 오른 정도나, 밑면의 받침수, 각 부의 세부적인 양식으로 보아 9세기경 통일신라시대의 탑으로 보인다.
제1187호 : 불탑사오층석탑(佛塔寺五層石塔) 제주시
원당사의 옛 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이다. 원당사는 조선 중기에 폐지되었고, 1950년대 이후 절터에 새로이 지어진 불탑사가 대신 자리잡고 있다. 탑은 1단의 기단(基壇) 위로 5층의 탑신(塔身)을 두고,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 모습이다. 탑 주변에는 돌담이 둘려져 있다.
기단은 뒷면을 뺀 세 면에 안상(眼象)을 얕게 새겼는데, 무늬의 바닥선이 꽃무늬처럼 솟아나도록 조각하였다. 탑신의 1층 몸돌 남쪽면에는 감실(龕室:불상을 모셔두는 방)을 만들어 놓았다. 지붕돌은 윗면의 경사가 그리 크지 않지만, 네 귀퉁이에서 뚜렷하게 치켜 올려져 있다. 꼭대기에 올려진 머리장식은 아래의 돌과 그 재료가 달라서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전체적인 탑의 모양이 조형성이 적고 무거워 보이는 점으로 보아 지방색이 강했던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제1188호 : 천룡사지삼층석탑(天龍寺址三層石塔) 경주
천룡사의 옛터에 무너져 있던 탑으로, 1990년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여 새로이 복원한 것이다. 1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인데, 1990년에 실시된 조사과정에서 기단이 1단임이 밝혀졌다.
탑신의 몸돌 아래에 새긴 괴임의 크기가 작아지고 있는 점과, 지붕돌의 낙수면이 경쾌한 경사를 보이고 있는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기단의 일부와 머리장식의 대부분이 없어지거나 파손되어 원래의 모습을 볼 수 없음이 안타깝다.
(제1189호-제1196호, 94.1.5 지정)
제1189호 : 박문수초상(朴文秀 肖像)
조선 영조 때 문신인 박문수를 그린 초상화 2점이다. 박문수(1691∼1756)는 조선 영조 때의 문신으로 1723년 병과에 급제한 후 암행어사로 활약하면서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하여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는데 힘썼다.
종가에 전해오는 2점의 영정은 크기가 다른데, 1점은 가로 100㎝, 세로 165.3㎝이고 다른 1점은 가로 45.3㎝, 세로 59.9㎝이다. 2점 가운데 크기가 큰 초상화는 38세의 젊은 시절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공신상 초상화의 전형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다. 호피가 깔린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상으로 두 손은 맞잡고 소매속에 넣은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발은 받침대 위에 팔(八)자로 얹어 놓았다. 초록색 관복을 입고 가슴에는 두 마리 학과 구름무늬를 수놓은 흉배를 하고 있으며 금장식의 각대를 두르고 있다. 단아한 얼굴에 수염이 그리 많지 않으며 음영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수준 높은 화원의 솜씨인 듯하다. 다른 1점은 붉은색의 관복을 입고 있는 모습으로 화법이 정교한 반신상의 그림이다. 2점의 초상화 모두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질적 수준이 뛰어난 작품들이다.
제1189-1호 : 박문수초상(朴文秀 肖像) 천안시
제1189-2호 : 박문수초상(朴文秀 肖像) 서울
제1190호 : 전오자치초상(傳 吳自治 肖像) 궁중유물전시관
조선시대 무신인 오자치를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초상화로 가로 105㎝, 세로 160㎝이다. 오자치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으나, 세조 13년(1467) 이시애의 난을 물리친 공을 인정받아 일등공신에 올랐다고 한다.
이 초상화는 오른쪽을 바라보고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이다. 머리에는 검은색의 사모를 쓰고 짙푸른색의 관복을 입었으며 두 손은 옷 속으로 마주 잡고 있다. 가슴에는 호랑이무늬를 수놓은 흉배가 있어 이 그림을 그릴 당시 그의 직위가 무관1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얼굴은 살색을 칠한 후 갈색으로 윤곽을 그렸고 입술은 살빛보다 약간 짙은 황토색을 사용하여 차분한 느낌을 준다. 옷의 외곽선을 각이 지게 표현했고 옷자락의 옆트임 안쪽으로 보이는 안감도 풀을 먹인 것처럼 세차게 표현되었다.
이 그림은 그린 대상만 다를 뿐 장말손의 초상화나 손소의 초상화와 같은 형식과 형태를 보여주고 있어 성종 7년(1476) 모든 공신의 영정을 그리도록 했을 때 함께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초 몇점 남지않은 귀중한 작품으로 공신그림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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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1호 :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권제30>(初雕本大方廣佛華嚴經周本
<卷第三十>) 한솔종이박물관 (제1191-1193호)
당나라의 실차난타가 번역한『화엄경』주본 80권 가운데 권30의 내용을 1책으로 엮었으며, 고려 현종 때 새긴 초조대장경 가운데 하나이다. 이 책은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종이를 이어붙여 두루마리처럼 말은 형태이며, 보존상태는 양호하나 표지가 없어지고, 첫째장에 제목 등 약 20여자가 없어졌다. 책 제목아래 “新譯(신역) ”이란 표시가 있어서 이 책이 화엄경 주본 80권을 옮겨 적었음을 알 수 있다.
초조대장경은 거란의 침임을 막기 위해 판각된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으로, 해인사대장경보다 글씨가 힘이 있고, 새김이 정교한데, 매 행(行)의 글자수가 14자로 해인사본의 17자와 분명하게 구분되는 특징을 지닌다. 이 초조본은 종이질이나 인쇄상태로 보아 11세기 경에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제1192호 : 대방광불화엄경진본<권제38>(大方廣佛華嚴經晋本<卷第三十八>)
표지는 감색(紺色)인데 은니(銀泥)의 보상화문(寶相華文)으로 장식되고 그 가운데 금니(金泥)의 장방형(長方形)안에 학립사횡(鶴立蛇橫) 표시와 함께〈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권제삼십팔(卷第三十八))의 표제명(表題名)이 금니로 필사되어 있다. 그 아래에 진본(晋本)임을 나타내는“진(晋)”자(字)가 역시 금니로 필사되어 있다. 보존상태는 본문은 양호하나 표지의 보상화문이 일부 결손되어 있다.
이 책은 동진의 불타발타라가 한역한 화엄경 진본으로 60권 가운데 하나이다.
이 판본은 간행당시의 표지가 붙어 있는 고려 숙종년간(1096∼1105)에 간행된 목판본의 번각(飜刻)으로 보이는 해인사 사간판본(寺刊版本)으로 간행시기는 고려말로 추정된다.
제1193호 : 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권제1∼5>(詳校正本慈悲道場懺法<卷第一∼五>)
자비도량참법은 경전을 읽으면서 죄를 참회하는 불교의식으로, 이를 수행하면 죄가 없어지고 복이 생기며, 나아가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공덕기원의 내용을 담고 있다.
양나라의 무제가 황후 치씨(치氏)를 위해 처음 지었으며, 그 뒤 여러 고승들이 10권으로 개편한 바 있었는데, 이 책은 원나라 때에 잘못된 부분을 자세히 교정한 정본(正本)에 해당한다. 이 책은 10권 가운데 제1∼5권으로 5권이 1책으로 묶여있다. 나무에 새겨서 닥종이에 찍었으며, 크기는 세로 37.3㎝, 가로 24㎝이다. 책 끝의 간행기록이 없어서 간행연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예념미타도량참법』권1∼5, 6∼10(보물 제949호)과 동일한 판본으로, 조선 성종 5년(1474)에 세조비인 정희대왕대비가 성종비인 공혜왕후 한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간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표지는 떨어져 나가고 없지만, 조선시대 책 가운데 가장 뛰어난 판본 중 하나이다.
제1194호 : 묘법연화경<권제2>(妙法連華經<卷第二>) 통도사
묘법연화경은 줄여서 ‘법화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것을 중요사상으로 하고있다. 천태종의 근본 경전으로 화엄경과 함께 한국 불교사상 확립에 크게 영향을 끼친 경전이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병풍처럼 펼쳐서 볼 수 있는 형태로 되어있으며, 접었을 때의 크기는 세로 33㎝, 가로 10.9㎝이다.
간행기록이 없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권 제9∼10(보물 제1195호)과 글씨체가 같은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찍어낸 것으로 보인다.
제1195호 :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권제9∼10>
(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卷第九∼十>) 통도사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가 번역하고 송나라의 계환(戒環)이 해설을 더한 전 10권을 5책으로 편찬하여 간행한 것 가운데 권9∼10의 1책이며, 크기는 세로 33.4㎝, 가로 20.8㎝이다.
이 책은 태종 1년(1401)에 태조가 신총에게 명하여 불경을 쓰게 하고 목판에 새긴 것을 닥종이에 찍어낸 것으로,『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권1∼10(보물 제759호)와 동일한 판본이다. 조선 초기 억불정책속에 왕실에서 주관하여 불경을 간행했다는 점이 주목되며, 태조의 명령으로 간행한 독자적 판본이란 점에서 가치가 크다.
제1196호 : 묘법연화경<권제1∼7>(妙法連華經<卷第一∼七>) 통도사
묘법연화경 권1에서 권7에 해당하는 이 책은 세조 1년(1456)에 동궁(東宮)의 빈(嬪)인 한씨가 좌의정 한확의 부인 홍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간행한 것이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권1에서 권7의 내용을 3책으로 엮었으며 각 권의 크기는 세로 30㎝, 가로 17.6㎝이다.
표지의 일부가 약간 훼손되었을 뿐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완전본이다. 제목은 붉은 바탕 위에 금색 글씨로 썼으며, 각 권의 첫머리에는 불경의 내용을 요약하여 그린 변상도(變相圖)가 있다.
판에 새긴 후 처음 찍어낸 책은 아니지만, 권1에서 권7까지 완전하게 전해진다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이다.
(제1197호-제1201호, 94.5.2지정)
제1197호 : 기묘제현수필(己卯諸賢手筆) 남원
사재 안처순(1492∼1534)이 중종 13년(1518)에 구례현감에 제수되어 떠날 때, 동료나 친구들이 이별을 아쉬워하며 써준 송별 시문을 모아 하나의 첩으로 엮은 것이다. 안처순은 고려시대 성리학을 처음으로 소개한 안향의 9대손으로, 예문관검열, 홍문관박사와 구례현감 등의 벼슬을 거쳤다. 이 수필첩은 안처순이 세상을 떠난 후인 선조 36년(1603)에 김인후의 발문과 함께 첩으로 만들어졌고, 순조 29년(1829)에 조인영에 의해 전라감영에서 다시 제본한 것이다. 총 3면에서 50면에 이르고 있는데, 수필첩 끝에는 총 24명의 명현들의 성명, 호, 관직 등이 간략하게 수록되어 있다. 이것은 조선 중기의 정치사상사 및 서지학 등 학술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제1198호 : 기묘제현수첩(己卯諸賢手帖) 남원
대체로 사화가 일어난 기묘년을 전후하여 친구, 동료들로부터 안처순(1492∼1534)에게 보내진 편지글을 묶어 만든 것으로, 거의가 기묘사화에 연루된 인물들의 글이다. 안처순은 고려시대 성리학을 처음으로 소개한 안향의 9대손으로, 예문관검열, 홍문관박사와 구례현감 등의 벼슬을 거쳤다.
편지글을 모아놓은 이 글씨첩은 안처순이 살아있을 당시 중종 12년(1517)에서 중종 26년(1531)에 이르는 15년간 그의 동료 12명으로부터 받은 편지 39통을 모아 하나의 첩으로 만든 것으로, 3면부터 72면에 걸쳐 수록되어 있다. 수첩의 첫 머리에는 한준겸의 식문이 실려있고 첩 끝에는 조광조의 후손인 조성교가 이 첩에 대한 감회 및 경위 등을 서술한 발문이 있다.
이것은 기묘사화에 관련된 명현들의 글과 필적이 집결되어 있는 것으로, 조선 전기 서화(書畵)는 물론 기묘사화 연구에 더할 나위없이 중요한 자료이다.
제1199호 : 혜산유숙필매화도(蕙山劉淑筆梅花圖) 리움박물관
조선 후기 화가인 유숙(1827∼1873)이 그린 홍매화그림의 8첩 병풍이다. 유숙은 그림을 담당하던 국가기관인 도화서 화원으로 인물화, 풍속화, 산수화에 뛰어났다.
매화를 그린 것은 이것이 유일한 작품이다. 가로 378㎝, 세로 112㎝의 커다란 화면 전체에 가지를 펼친 매화나무를 능숙한 필치로 처리하였다. 유숙이 그린 유일한 매화그림인 이 그림의 왼쪽 아래쪽에 자필로 쓴 찬문이 있다.
고종 5년(1868)에 그린 매화도는 그림의 품격이 높아 19세기 유행하던 매화도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며 제작연대가 확실하고 유숙이 별로 다루지 않던 주제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회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있다.
제1200호 : 선운사도솔암마애불(禪雲寺兜率庵磨崖佛)
선운사 도솔암으로 오르는 길 옆 절벽에 새겨진 마애불좌상으로, 머리 주위를 깊이 파고 머리 부분에서 아래로 내려가면서 점차 두껍게 새기고 있다.
평판적이고 네모진 얼굴은 다소 딱딱하지만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가느다란 눈과 우뚝 솟은 코, 일자로 도드라지게 나타낸 입술 등으로 얼굴 전체에 파격적인 미소를 띠고 있다. 목에는 3개의 가느다란 주름이 있기는 하지만 상체와 머리가 거의 맞붙어서, 상체 위에 머리를 올려 놓은 것처럼 보인다. 상체는 사각형인데 가슴이 넓고 평판적이어서 양감없는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옷주름은 선을 이용해 형식적으로 표현하였고, 평판적인 가슴 아래로는 치마의 띠매듭이 선명하게 가로질러 새겨져 있다. 무릎 위에 나란히 놓은 두 손은 체구에 비해서 유난히 큼직하고 투박하여 사실성이 떨어지는데 이는 월출산에 있는 마애불좌상과 비슷한 고려 특유의 마애불 양식이다. 층단을 이루어 비교적 높게 되어 있는 대좌는 상대에 옷자락이 늘어져 덮여 있으며, 하대에는 아래를 향하고 있는 연꽃무늬를 표현하였다.
이 불상은 고려 초기의 거대한 마애불 계통 불상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으며, 특히 가슴의 복장에서 동학농민전쟁 때의 비밀기록을 발견한 사실로 인해 더욱 주목받고 있다.
제1201호 : 불영사대웅보전(佛影寺大雄寶殿) 울진
불영사는 신라 진덕여왕 5년(651)에 의상대사가 세웠다고 전하는 절이다. 대웅보전은 절에서 석가모니불상을 모셔 놓은 중심 법당을 가리키며 지금 있는 건물은 안에 있는 탱화의 기록으로 영조 원년(1725)에 세운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규모는 앞면과 옆면이 모두 3칸씩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각 공포의 조각 솜씨가 뛰어나다.
가장 주목할만한 점은 건물에 색을 칠한 단청 부분을 들 수 있는데 바깥쪽은 다시 칠하여 원래 모습을 잃었지만 안쪽은 그 형태가 잘 남아 있다. 천장부분을 비롯한 벽, 건물을 지탱하는 굵직한 재료들에 그림을 그린 기법들은 수준이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건축양식과 기법연구, 격조 높은 불교그림과 단청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조선 후기 건축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