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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에 내키지 안은 여행에 알게된 나의 삶 ※
내삶이 별로 순탄치는 못했으나
그런대로 남부럽지는 않은 삶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에 육이오라는 전쟁을 격었고,
고향인 개성으로 피란을 가게되었으나
아버지의 외삼춘댁인 시골 토성이라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는 아저지의 외삼춘을 우리는 토성할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때는 몰랐으나 그 할아버지에게는 배다른 형제 다섯분계셨다.
제일큰분은 아버지보다 어리지만 이북에서 군 장성쯤 되는 것으로
알았고 두째나 셌재는 잘모르지만 본적도 없었다, 그러나 넷째회명,
고모는 차임 이라불리는 고모, 어린 아제 회실이라 불렸고
고모 이분은 내가 아주 어려서 부터 생각이 난다.
해방되고 고성에서 서울로 올때 한밤에 기차역에서 배웅하던이
었끼에 늘 머리에서 있지 않안는데 여기서 다시 만났고 고모라는
것도 알게 되었으며 늘 동생들과 어린 아재들로 부터 일어나는
모든 말성은 부리면 내가 다 혼이났다.
동내에서 말성을 부리게되면 아재 라는 사람의 뜻을 따라 함께
했는데 큰것이 어린것들을 데리고 말성을 부린다고 내가
채벌을 받아야 했다. 그럴때는 고모가 나를 달래어 주었으며
또 한때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토성에서 예성강쪽으로
더들어가 작은 동산 하나만 넘으면 예성강이라는 곳이었다.
우리가 살던곳은 집 바로 뒤가 밤나무 밭이었으며 그곳을 지나
더올라가 꼭대기에 오르면 예성강을 건너 해주로 가는 철길다리가
내려다 보여 비행기가 다리를 끈으려 폭격을 하면 꼭 우리집과
동산을 넘어 폭격을 하는 길이였다. 많이도 그것을 보러 올라 갔다.
한번은 어린마음에 할아버지로 부터 심한 사살을 듯고는 억울해
친고모와 할머니가 게신 개성을 간다고 집을나와 토성음내를
지나 개성이 내려다보이는 언덕까지 올라 깟다가 돌아온 일도 있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음내 거리에서 참외를 파는
아주머니 앞에서 미국인 두사람이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참외 껍질을
주어 먹는을 보기도 했으며 주위 사람들이 그런것을 주면 큰일 난다고
소리치는 것을 보고 듣기도 하였다.
한번은 다섯재 아제가 병에 죽고, 내동생도 알다가 죽었다.
그때는 죽는 다는 것이 그렇게 서러운건지 몰랐다.
동생 이름은 경내 남동생이었다.
고모가 여동생을 업고 나를 데리고 동생 마지막 가는 것을 보러 가자고
손을잡고 우리 세남내를 데리고 집뒤 동산에서 동생을 보자기에 싸서
엄마가 들고 가는 것을 보기도 하였다.
이번에 몬트리올에 사는 조카가 저의 아버지가 돌아가실때
그동생이야기를 하더란다 그리고 동생이름도 부르더란다.
그래서 그때의 이야기를 조카에게 일러 주었으며 20세가 넘어서
죽은 동생 이야기도 하였다.
네째 아저씨(아재)자주 서울 우리집에 오시고 하셔서
잘알고 있었으며 나를 귀여워 하셨으니 생각이 난다.
아마 전쟁일기 전에는 남한의 기관에 계신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전쟁이 일어나고 나서는 큰 형의 덕으로 내무서 기관에서
일을 하고 계셨는데 토성근방에 계셨던 겄으로 생각된다.
다섯째 아제라고 부르는 이는 나보다 한살이 어려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그러나 그시골 집에는 어린애들이 우리 남매 네명 아재라는 분
이렇게 다섯명이 살았으나 어린 막내동생은 아직 젖먹이었고
그다음 어린것은 내동생 경순이라는 여동생이 었으며 그동생은
지금 말하는 아토피 피부염으로 온몸이 진물 투성이었다.
그곳에서 아침이면 일찍일어나지 않으면 어른들로부터 혼이난다.
해가 뜨기전에 내가 제일 먼저 일어나 밭에 나가 배추, 무,
참이 밭에서 벌래를 잡아야 했다,
날리중에는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부모님의 노점장사를 도와야 했고
날리통에 또 태어난 어린 여도생을 아침이면 업고 퇴계로 5가에서
동대문 시장에 어머니가 장사하는 곳 광장시장으로 어머니 아침밥과
동생의 젖을 멱이러 가야 했다.
그때만해도 학교를 가고 싶었지만 형편상 남동생과 함께 학교에
다닐 형편이 아니었느며, 동내 사는 또래들에게 놀림을 받았다.
어떤인연으로 서울 중구 장춘동 고야산이라는 곳에 초등학교
(날리통에 통합학교 동대문 국교)에 입하여 그동안 못다닌 학년은을
보충한다는 식으로 3학년 이학기에 등록하고 동생은 1학년으로
등록하여 학교를 다니다가 동대문국민학교 자리에 미군이 이전 반환한
학교로 가게 되었다. 그당시에는 한반에 학생이 200명넘게 되었다.
학교 건물로 들어오면서 남자 두반 여자 두반으로 나뉘어졌다.
아버지가 중학교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공업학교 부속중학교로
시험을 봐서 들어 갔으며 고등학교는 공업고등학교로 대학은 공대를
시험보고 학교에 합격 하였으나 함격통지서를 받아 오던중
이종사춘 누님집 가계에서 누나에 보여주고는 불태워버렸다.
그때 우리집 형편이 너무 어려워 나와 동생 4명을 공부시키에는
너무 어려울뿐 아니라 어려워서 나는 집에서 하는 장사를
돕지 않으면 안되었다. 또 군대를 가야하는 나이가 넘었었다.
다행이도 중학 입학시에 나이가 많으면 감점이되는 관계로
호적이 서울에는 없고 기류계라는 것이 있어 행정적인 서류를
기류계에서 가호적을 만들면서 나이를 줄일수 있어 5살이나
줄였기에 군대를 지원할수 있어 해군에 갈수 있었다.
제대를 1966. 8.월에 제대를 하고는 나라에서 한참 공장
건설붐으로 화학 공장에 입사를 하여 부강이라는 곳의
대한 프라스틱 PVC 공장에 군대에서 배운 기계기술로
공무과 유치리티라는 부서에 입사를 하였다.
공장 건설시 일본사람과 함께 유티리티라는
부서에서 췹으로 산소 불리기계 물을 이온으로 수질을
개선하는 수질개선기, 보이라설치, 공기 앞츅등 설치건설후
1년간 근무하던중 서울근교에 유니온이라는 곳에서 모집하기에
응시하여 또 공장건설후 가공부서에서 교대 주임으로 근무중 또
월남 기술자모집에 응하여 필코포드회사라는 비해군 지원회사로
파월전지에 가게 되어 집에서는 결혼을 하고 가던지 아니면
약혼이라도 하라고 성화에 여러번 선도 보았지만 부드럽게
여자쪽에서퇘자 논는 것으로 만들었다.
또 아버지 이종 사춘 여동생의 소개로 선을 보게 되었으며
지금의 아내와 맏선을 보고는 그대로 1968년 8월에 월남으로 출국
1971년 7월에 귀국하여 지금의 아내와 그해에 월남에서 벌어온
돈으로 집을 장만하고 결혼도 하였지만 아버지의 성씨다른
누이동생이 집산 잔금치를 돈 15십만원 빌려주자고 하시며
그고모가 못갑으면 지금살고 있는 집(쌍림동 연립주택)
팔아서 잔금치르게 하겠다고 하시니 빌려주었다.
막상 잔금치를 때 다되어도 갑지 못하자 살고 있는 집을 팔아
그돈으로 집을 장만하고 온가족이 면목동으로 이사를 갔다.
신혼에 울산 석유화학 공단인 메타놀공장에 입사하여 울산에서
두아이낳았으나 크게 도둑을 만는 바람에 평편이 별로이며
두아이의 장내를 생각하여 다시 해외 공사장 건설회사에
몸담아 부르나이 LNG 공장 정비팀으로 1년6개월근무 마치고
귀국 다시 메타놀 공장의 공장장이 다니시는 신화건설로 연이되어
이란 페이톤이라는 곳 비료 공장건설현장에 1년6개월 근무후 귀국
다시 이란 출국 팔레비정부 붕괘로 공사현장 철수 귀국 할일
찾아용달운수를 시작하던중 박정희 시해로 어수선한 가운데
동생이 분가 하겠다며 아버지께 400만 해주면 처가에서 만드는
다가가구 주택을 송파에 구할수 있다고 여러차레 이야기 하
는 것을 듣고 아버지가 해줄수 없는 것을 수차례 이야기 하니
어쩔수 없이 내집을 팔아서라도 동생 분가 식혀야 겠다
생각하고 면목동 집을 팔아 동생에게 400 주라고 하여
1000에팔아 400을 주고 우리는 둘째 처형으로부터 400을
비려 주는 덕에 창동에 아버지 성씨다른 삼춘집 옆으로 이사를
하여삶을 살고 또 이란 공사가 재개 되여 잔여공사를 하던 중
아버님의 위독상태로 전해듯고 임시 귀국 임종과 상을 치르고
다시 출국하여 다시 공사를 마무리 짖고 귀국하였다.
이때 부터 해왜 공사장에 다니며 10년 전에 갔던 부르나이 LNG
공장의 발전소 공사, 듀바이 담수공장, 휴가출발날짜에 공항에
가지못하고 현장에 급한일이 터저 귀국을 연기 하였는데
그날 타려던 비행기가 에밀라이트 공하을 추발 태국 상공에서
김연희테러를 당한 비행기였다.
천행으로 목숨을 구한 사건도 있었다.
주베일 석유화학 공장, 얌부 석유화학 단지 공사, 이때또 현장에서
휴가차 떠나 얌부 지사에세 한국에서 리비아로 갔다 돌아오는 KAL
비행기로 현지로오는 기능공들을 마중 하고 리비아에서 다시 돌아
오기를 기다리는 중 KAL이 리비아 공항에서 추락사건으로 보름동안
귀국이 늦어진 적이 있으며 다시 이란의 이스파한 아로마틱공장
공사에 참여 하여 맏은바 의임무를 완공하여 귀국후 휴가도 없이
국내공사장 보령 발전소로 발령 받아 터빈 3, 4, 5, 6, 설치공사를
끝내고 당진의 한보 철강공장건설 현장의 산사공장의 산소제조
타워와 부속기계설치감독중 인도네시아 발전소 공사로 발령받아
기계설치 공사로 페이톤이라는 곳에서 중량 설치공사
및 철골 150메차 굴뚝 공사를 마무리짖고 귀국, 이때가 바로
IMF 로 국내가 어수선 한때였다. 내가다니던 회사도 정리 해고가
시작 돼였으므로 귀국후 1개월만에 사표를 내과 퇴사하여 직업을
찾던중 지인의 소개로 개인 택시 면허를 취득하여 택시운전을
하려고 하니 그방법을 알려주기에 응해 보았더니 합격을 하여
택시운전 면허를 취득하여 개인택시를 하려하니 개인택시는
경력이없어 못하고 법인 택시에서 경력을 3년 싸야 하는데
받아주는 곳이 없더라, 그러던중 광명시 박달도에 있는
아버님 묘소를 참배후 양재천 옆길로 귀가하던중 택시회사가
보이기에 들어가 또 이력서를 제출하니 이력서를 보더니 안된다고
반환하기에 그곳 상무에게 사정을 물어 보았다.
무었때문에 못한다고 택시 회사마다 거절하는지 이유나 알자하고
운전 실력이 모자라는지 아니면 나이가 많아 체력이 부족하진 를
알아보자고 하며 그곳의 상무와 이유를 알자고 하고 나는 68년도에
월남에서 미군이 운전을 못한다도 조롱 하는 바람에 4톤 트럭으로
3일밤에 연습하여 운전을 배웟고, 크레인, 트레일러 20톤운전,퍼크레인,
체리피카라는 크레인, 이렇게 운전습득을 하여전지에서 발전기들을
수리하여 현지 미군 부대에 설치하기도 하였던 경력이 있다.
대성목제 메타놀 공장에서중장비 운전사들의 텃세에 어려움을
격을때 공장내에있는 추레라, 크레인, 포크레인,운전을 공무과
정비실 직원들에 가르쳐주었고, 공장장이 나에게 운전을 어떻게
그렇게 잘하냐며 면허증이 있냐고 묻기에 없다고 하니
그럼 자동차 면허증이 있냐고 뭇기에 그도 없다고 하니
자동차 면허라도 따라고 하여 73년도에 경상도에서 자동차
1종 보통 운전면허를 따게되었다.
그덕에 해외공사장에서 많은 편리함을 체험했다.
그래서 강남에 딱한군데있는 자동차 회사에서 주간만
근무 하기로 하고 3년이되던 달에 사고로 또 3년을 더해
6년만에 3년 무사고로 개인택시를 사서 영업을 하게 되었다.
이때야 집안 돌아가는 이상한 형편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러나 결혼생활이란것이 다 시부모와 며누리사이,
시누와 올케사이의 불화건이 생각하였는데하고 평온한 삶을 원했다.
자식들의 나이 혼기를 꽉 채운 떠이라 결혼을 말하였으나 할생각을
하지 않던 딸년이 오빠보다 먼저 결혼을 하겠다고 하기에 허락하고
아파트에서 딸아이를 출가식히는데 딸이 운전을 하고 집사람과
혼수감을 보러 같이 가던중 서로 말을 하던중 이견이 생기니
그러면 아버지 내려 하고 차에서 하차를 시키기에 내리고말았다.
그때부터 딸년의 행동을 좋게 보지는 않았지만
너무 오래도록 떨어저서 살아 정이 덜어저서 그러녀니생각을 하면서
내주의에서 생기는 일들을 신경쓰지 않고 살았으나 아들도 또 방을 얻어
나가겠다고 하기에이 유를 묻자 자기가 하는일에 사무실이 필요한데
집에서 안되니 사무실겸 방을 얻겠다하여 허락을 하였고
또 기구한 사연이 있는 사위의 내막을 알아보니 바로
초등학교 동창겸 자주 만나는 회원의 옆짐에 살고 있어
사위집안의 내력도 알게 되었다.
자기 아버지의 집을 계모가 독차지 하려고 하는 것을 아들과
주위사람들의 협조로 찾아 다가구 주택을 지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딸이 자기집으로 와서 같이 살자고 하나
내집을 두고 왜 딸의 집으로 가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 이유가
없기에 거부를 하였으나 일년이 지나서 또 사위가 와서 자기가
한달에 100만원씩 은행에 집질때 쓴돈 이자를 내니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전세가 잘나가고 자기 집은 한채가 남았는데 전세가
안나가니 평수도 같고 하니 아파트를 전세주고 자기 집에서 살면
그돈을 갑아 돈이 덜지불되니 자기집으로 오라고 하기에 할수
없이 허락을 하고 같은 집에서 살기로 하였다.
그런데 우리집 사람은 남편이 주의를 일러도 잘듣지 않고 무엇이든
제멋대로 하는 습관이 있다는 것을 그때부터 느끼기 시작 하였다.
그저 남편말을 잘안듣는 스타일이거니 생각하였고 한번은
내가 운전으로 스트레스를 받아 그런지 눈이 이상함을 느끼면서
일을 하는데 처가 형제들과 함께 유럽으로 여행을 가가고하기에
못간다고 거부를 하니 더이상 말도 없다가 자기만 형제들과 여행을
갔다왔는데 내가 지시한 일을 시행하지도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기데
대판 말다틈중 바로 옆집에 사는 친한 내친구에 집이어 우리의
다틈소리를 듣고 싸우지 말라는 말에 챙피하여 내방에서 거실로
끌어내었더니 넘어지면서 바닥에 쓰러저 일어나려고 하는것을
머리를 눌렀더니 마닥에 부팃치면서 이마에 멍이 들었다
할수없이 강남성모병워에서 치료를 받고 따로 돌아오던중
딸년과 자식이 경찰에 고발하여 법원에서 접근 금지 처분을
내려졌으나 딸년이 에미를 숨기고 하여 반년동안이었다.
서로 헤어저 살았다.
그러나 부부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무너지는 것은 아니잔은가
다시 화합하여 살게 되었지만 딸네 집에서는 살수업는
나의 마음이었다 또 내생각에는 남편없이 제마음대로 살다
남편이라고 와서는 일함네 하고 새벽에 나갔다 출근시간 지나
집에 들어와 한잠자고 저녁에 또 나가 일을 들며 또 시어머니에
손주 들도 돌보며 하니 더욱 더....
딸이라는 저의 자식 둘을 데리고 키우면서 수시로
외출시에는 어린 손주들을 우리집에게 맏기거나
데리고 외출 하였다 한밤에 돌어오면 전화로 아래 주차장에서
전화로 엄마 애들 좀올려다줘 하면서 어미를 괘롭히는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 저의 엄마는 시어머니에 남편의 뒷바라지를
해야 하는데도 자기의 편안함만을 추구하고 사위나 저는
하는 일도 없으면서 자식의 돌봄은 저의 어마에게
부탁하는 것이었다.
그때는 그런대로 외손주도 손주니 귀엽고 하여 지내려하였는데
집사람은 힘들어서인지 우울증증세가 나기에 어머니를 모시고
딴곳으로 이사를 가자고 하니 집사람이 쾌히 옛날에 살던
창동 근방 방학동에 아파트를 보고는 이사를 하자기에
어머니를 모시고 방학동으로 이사를 왔다.
그런데 무슨일인지 어머니와 같이 사는 것이 힘들어 하는 눈치었다.
그러나 먼저 강남 집에서 일어난 일로 그런가 보다 하고 지냈다.
강남에서 일하다가 이곳으로 와서 일하기 힘들지 않으냐고 하지만
수입은 많이 떨어젔지만 그런데로 연금도 타고하여 생활하는 데는
별로 힘들지 않기에 남은 삶을 살기로 하였다.
가끔 막내 동생이 집에 찾아오고 하는 했던 눈치이긴 했으나
집사람은 막내가 다녀 가는 것을 몰랐던 모양이다.
나도 동생이 다녀 가는 것을 몰랐으니까, 한번은
성남에 있는 막내네집에 아버님 묘소에 벌초를 하기위해 빌리러 갔더니
별이상은 없는 듯한데 오빠 나는 어머니 돌아가시면 올캐와는 연을
끈을 꺼야 하는 이야기를 하기에 별의미 없이 들었다.
워낙 막내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스니까!
방학동에 와서 아들도 늦게 출가를 하고, 2년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이곳에는 노인정에다니시더니 노인정에 안가신단다.
이유를 여주어보니 이곳 의 노인들은 자식자랑은 억수로 잘하면서
강남처럼 간식을 먹기 위해서는 단돈 몇푼도 내지도 안으려고 한단다.
또 내 생강에는 아들이 택시 운전수이니 자랑할것도 없으셨던 것갔다고
생각하여 어머니 뜻대로 하시라 하고 어머니 쉬실수 있는 곳을
알아보기 시작하였다.
여러곳을 알아보던중 좋은 노인 요양원이 있어 낮에 만 모시는
노인요양원, 아침에 모셔가고 저녁에 모셔오는곳에 모시기로하여
낮에는 어머니도 심심치 않고 집사람도 낮에는 자유롭게 행동하고
우울증도 치료되게 하기위하여 일년동안 잘 다니시다가 요양원에서
보호자를 부르기에 갔더니 어머니가 몸이 않좋으시니 쾌차하거던 다시
오시게 하자고 하여 그러기로 합의 하고 요양원앞에 있는 노인 병원에
모시고 가서진찰을 하니 노인들의 노환이라고 하면서 영양제와
주사를 주고 약을 처방하여 집에 모셨다.
한 보름쯤후에 쾌차 하신걸보고 다시 요양시설에 가시겠냐고 하니
이제는 안가시고 집에서 계시겠다고 하시기에 나는 일을 다니고
집에는 집사람이 어머니를 돌보니 마음은 놓았으나,
이번에 그런것이 아니었음을 절실히 알았다.
미국에 사는 동생이 간혹 집에 막내가 들렀다가 어머니를 보고
낮에는 어머니가 마실것이 없어 자기들이 바나나 우유도 사다
들였다고 하고 어머니 방에서 혼자 계시더란다.
그런데 나는 어머니가 잘잡수시는 헤니스 쪼코렛 우유를 박스로
사다 어머니방문옆에 놓아드리고 어머니는 잘 잡수셨는데,
어느때부터인가 안잡수시기에 여쭈어 보았더니 아범 먹는거
아니냐 ? 하시고 어느때는 나를보고 오빠 하시기도 하고
장농에서 옷가지를 꺼내 보자기에 싸셨다 또 푸르시기도하고
이런일을 하시기에 여쭈어보니 어머니께서 아니야 그저
정리좀 하는 거야 하시기에 이제 정신이 혼미하신가보다 하였는데
한참후에는 용변보시는 것을 앉은방이로 화장실을 다니시는 것을
보개되어 어머니께 여쭈어 보게 되었다, 화장실 다니시는 것이
힘드시냐고, 방에 요강을 준비 해 드릴까요? 목욕은 하셔요?하고
물으니 몇일째 못했다고 하시기에 집사람과 함께 목욕을
식혀 들였으며 용변보시기 힘드시면 기저귀를 사다 드리겠다고
사다드리니 절대로 않쓰신다 하신다.
매일 일을 하고 들어오면 어머니 방에 들러 어리광 아닌 오리광을부리며
어머니 상태를 살피고 일 나가기 전에는 꼭 어머니 방에 들렀다 나가고는
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막내가 와서는 나에게 어머니잘 안모신다고 화를낸다.
그리고는 자기네 동내에 잘아는 요양병원에 모시곘다고 하기에 허락
하였는데 어머니를 모시고 가는날 나는 그것을 보기에
힘들것 같고 하여 일을 나가고 말았다.
집사람이 전하는 말에 어머님이 업어 6층에 밖으로 나오시면서
내가 다시 이곳에 올수있을까? 하시더란다.
그후로 세곡동에 있는 노인병원에 입원하시었는데
그때는 곡기를 끈타싶이 아신때였다.
그후로 미국에 있는 여동생이 나왔고 병원에 게신지 보름만에 운명하셨다.
나는 강남에서 일하다 끝나면 집에 올때 들러보곤 하였는데 그날은
쉬는 날이어서 집에서 좀 느즈막이 집사람과 어머니에게 가는 도중
매재로부터 전화가 와 들으니 어머니께서 운명하셨는데
어느장례장으로모실까요? 하기에 자네네집에서 가까운데
모시라고 하고 집으로 다시 돌아와 장례 준비를 하여 삼성병원
장례장으로 가서 일을 맞치었다.
(그중에도 사연은 많았으나 모두 묻어두자)우리두식구가
살기에는 넓은 36평 아파트에 살기는 너무 넓어 원눔으로
이사 가기를 말했으나 그래라도 하면서 방두개,
거실, 욕실, 주방이 달린 24평짜리 로 가겠다하여
현재사는 집으로 이사 하여 살고 있다.
자식이라고는 아들과 며누리 친손녀 둘뿐인데 명절이고
때가 되면 집에는 오지만 집이 미아리고개의 아파트에 사니
집에 와서 자는 일이 없었다. 혹 손녀들이 할머니집에서
자겠다고 하여 자는 일은 있으나, 손님이라고는 와서 숙식을 요하는
손님도 없으니 두사람 살기는 좋으나 한사람이 먼저가면 이집도 크다.
자기 엄마에게는 생일때나 육순, 찰순에는 꼭 행사를 해준다
해외여행도 식혀주었으며. 우리 두부부도 여행도 다녔고
또이번에도 내자의 칠십육세에 버러진 일이다.
카나다로 이민을 떠날때 인사도 하지 않고 떠난 딸이라는 사람이다.
여지껏 애비라고 문안 전화한번 없던 그녀가 저의 엄마에게
사진과 손주들 사신을 모내오면서 문자가 왔다.
※ ※ ※
카나다로 이민을 떠난 딸의 칸톡이 집사람에게 왔다.
몬트리올과 서울의 직항 노선이 생겼으며 비행기 요금도 많이 싸단다.
문자는 보지 못하고 사진만 보고는 나에게 조여준다 그래서 핸드폰을
보니 그런 내용의 문자가 있시에 보라고 하여 알게되었다.
그문자를 보고는 당장 날리가 났다 카나다에 가겠단다.
당장 여권을 챙기고 기한만료가 당장 몇일 남지않아
여권을 갱신해야하기에 구청에 가서 갱신하고 돌아와서는
마음이 들떠 어쩔줄 모른다. 차근차근 준비를 하였다.
집사람이 건강이 별로이기 때문에 망설여 졌다.
얼마전부터 똥이 마려우면 참지를 못하며 변도 매일 하는 것이 아니다.
삼사일에 한번씩 하는 변비 상태인데 큰실수를 몇차례 하였다.
새벽이면 둘이서 산에올라 장수 운동회라는 곳에서 새벽 체조를 하고
하산하는 늙은이들의 운동을 하고 귀가 하고는 하는데
하산 중에 집과 약 2~3백 미터쯤 와서는 갑자기 똥이 마렵다고
하고는 걸어오는 중에 몇 미터 걷지 못하고는 똥을 저리고 만다.
항상 새벽에 산행을 하기 전에 물어보고는 하였다.
똥누었느냐고, 그러면 괜찬다고하고는 하였집만,
몇 차레는 실수를 했다.
늘 수영자에 다니는 관계로 크게 신경을 쓰지 않든 중
수영하러 갔다가 탈의 장에서 변이 급해 화장실을 가는중
변을 흘린 바람에 날리가나서 수영장을 다니지 못하게 되었다.
이건 아니다 십어 병원에를 찾아 검사를 하였는데
괄략근이 조금 약해졌고, 나이가 들었으니 뇌의 검사로 침해 검사와
뇌파검사를 해보라고 하여 침해검사에서는 인지 능력과 방행감각이
좀 떨어진다는 결과를 받고 뇌파검사는 심방동계를 부착하고 있는
관게로 전문의이에 소견이 있어야 한다기에 아직 받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
아무래도 보조자가 있어야 하기에 아내를 위해 동행하기로 하였으며
무슨 일이 있어서인지 자주 오지 않던 사위가 와서 인터넷으로
카나다 eTA와 비행기포를 예약할수 있도록 해주었으며 이왕 가는길에
미국뉴욕에 갈수있으려니 하고 미국의 eSTA를 내가 신청을 몇차래
시도 하여 받아두고 미화도 조금 준비 하였다.
처움에는 무척 반기더니 몇곳 관광을 식히고는 나에게 어리광아니
콤프레임을 토하더라 그래서 그저 어래광이거니 하였다.
그중에도 미국에 가겠다고 하는중에 내가 이상한 현상이 났다.
아침에 더운물에 샤워를 하고 나왔는데 팔에 혈관이 크게 도출되고
앞머리가 몽둥이 얻어맞은 겉처럼 아팠으며 어지럽기도 하고 엉치
허리가 갑자기 아프기도 였다.
딸이 이일을 사위에게 전화로 알려 사위의 지시고 에즈빌이라는
진통제와 병원에를 갔었다 병원에서는 별이상없이 진단만 끝내고
무사히 귀가 하였다.
또 딸이 좋지 않은 표정으로 뉴욕에 가겠느냐 아니냐를 따지더라
그래서 갔으면 좋겠다하니 그때야 그래야지 하면서 생색을 내며
뉴욕을 가기로 하였으며 안면에 회색을 띠며 즐겁게 뉴욕에 7곱시간
이나 운전하여 작은 동생집에 도착 하고 한밤에는 뉴오리엔트에서
뉴욕매네턴 야경을 건너다보고 다은날 매네턴 거리를 구경하고
작은 집에서 워신턴에 사는 누이도 만나고 누이동생과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이야기도 나누며 현재 삶의 이야기도
하면서 동생의 치야관계로 고생중인 것을 보니 무척 안스러웠다.
그래도 이 동생만은 내가 업히어 자랐고 태어나서 부터 어머니 젖도
제시게에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란 동생이었으며 대학 공부도 내가
일학년만 도와 주지 못한 동생인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뿐이었다.
다음날 남동생의 남골당을 참배후 이국에서 모인 동생내들과
점심을 먹고 각자 집으로 길을 떠났다.
지금 생각하니 딸이라고 하는 사람이 왜 여행떠나기전에 심각한
표정으로 나에게 뉴욕행을 물었는지도 지금생각하니 조금은
이해 아니 생각 하게 된다.
캐나다에 돌아와서는 또 나야가라 폭포 구경에 힘들어하면서도
계획을 짜면서 자기 성당 언니친구들이 우리를 꼭 관광 시켜주라고
말 하면서 그것을 못하면 추후에 크게 후회한다고 꼭해야 한다며
관광가기를 힘들어 하는 것 갔아 힘들면 관광 아니 나이야라 폭포
구경 안해도 된다고 하기도 하였으나 8월6일 출발하여 여러곳을
관광하며 잠은 모텔에서 자고 나이야가라 시에서 나이야가라 폭포 관광을
야경까지 하고 모텔에서 자고 돌아오는중 토론토에 있는 한식집에서 맛있게
한식을 먹고 오던중 중간에 하루또 모텔에서 자고 8월 9일 돌아
오던중 폭우속에서 운전하면서 지금 또 생각 낱다며 어리광아닌 투정을
하기기에 나도 무어라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나를 너 하기에 집사람에게
나를 너라고해 하면서 말을 하니 나가죽어 고속도로를 달리며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닌가 그즉시 이런생각이 들었다.
내가 자기에게 너박에 안되는 인간이며 여기에 더 탈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차에서 내리려고 하니 문이잠겨 내리지 못하는데
주유소 입구에서 열어줘하여 하고 손주에게 소리치니 손주가 차잡금을
열어주기에 비를 맞으며 내려서 주유소를 거처 고속도로 갇길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는 모든것을 버리고 싶었다.
한참을 걸어가는데 앞에 한차가 서서 어디가는가를 물어 그저 걷는다고
이야기하니 위험하니 돌아가란다.
돌아가기도 싫고하여 몇걸은 뒤로 돌아가다가 머뭇거리니
경찰차가 옆에 와서 서더니 취조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아무 증명서가없다.
경찰은 증명서를 요구하였지만 없으니 핸드폰에 찍어둔 여권사진이있어
핸드폰에 있는 사진을 보더니 인터넷을로 조회를 하는지 조회후
어디서 출발하였냐 하면서 차에 타라고 하여 차에 타니 내가 떠난
주요소로 데려다 주겠다고 하며 고속도로를 달려 다시 주유소로 돌아와
그곳에 있는 초소에서 한참 저이끼리 이야기 하더니 나에게 어떤차인지
찾으라고 하여 주차장을 돌면서 그차를 찾았다. 나를 인계 하면서 내려주기에
주차장에 있는 휴계소로 가서 배회하고 있는데 아내라는 사람이 나를 찾아 와
나를 회유하며 차로 갈것을 권해 참고 갔으나 우리가 도착하자 아내와 나를
남겨두고 휴계소로 가더니 다시 돌이오지 않아 제네들이 나를 실어하는데
왜 여기에 앉아 있어야 하냐고 다시 치에서 내렸다. 비는 계속 나리는 중에
집사람은 딸과 무슨이야기를 하는지 한참후에 나를 찾아 또 나를 설득
그리고 또 딸에게 한참을 있더니 다시 나찾아 오더니 공항에 가서
노숙을 하더라도 함께하자고 하고 나를 설득하려 들었다.
그러나 나는 나를 두고 떠나기를 바랐으며 떠난 후에는 무슨수를 쓰던
몬트리올로 돌아갈수 있으니 걱정은 하지 않고 떠나기만 기다렸다.
집사람이 나를 찾아 같이 가잔다.
내가 고속 도로에서 또 뛰어 내릴까바 운정을 못한덴다
그러니 아무소리 하지말고 조용히 가잔다.
조용히 차를타고 몬트리올로 돌아왔다.
집에는 물날리가 났다.
그러나 나의 모든 지난 생각은 이제야 풀리기 시작하여 한시라도
그집에 있을 수가 없어 큰 왜손주 현우에게 부탁하여
공항가는 택시를 잡아달래 공항으로 떠나 공항에서 모든것을
정리 하기 시작하였다.
어미란 사람이 딸자식이 저의 아비라는 자에게 막말을 해도
나무라지 않고않고 나무람도 하지 않으며 딸편을 드는지....
공항대합실에서 노숙을 하면서 옛날에 시원치 않게 생각한일
또 내가 의심스럽고 의야한 일들 모든것을 딸만 챙기고 끼고들고
제대로 교육하지 않는 걷을 내가 탓하던 것, 우리가족의 형제 의리,
옛날에 소소하게 씨끄러웠던 일들이 이해돼고 알게 되었다.
내가 애들에 잘못을 탓하려면 꼭 옆에서 끼고 들던일,
슬그머니 어머니와 아버지의 잘못을 함을 말하던 것,
어머니가 미국동생집으로 가실때 자기에게 다시는 오지 않고,
한국에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말하였다는 뉘앙스 말슬,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 자기가 모시게 되니....
딸년과 작당하여 노모를 힘들게 하지 않았나?
창동에 살때 아버지가 어머니하고 방을얻어 따로
사시고 싶어 하시던일....
이번에도 동서끼리 오랬만에 만나 이야기 중에 하던 말들
막내의 삶을 동서가 말하니 비양이는 말로 말하던일..
하기야 막내의 행동이 내 마음에도 시원치는 않았지만
모든것을 곰곰히 생각하게 된다.
또 조카 정승이가 나에게 말하던 말이 새삼 생각났다.
큰아버지 XX동생이 큰아버지에게 어리광을 부리면 그저
받아주셔요, 하면서 몇번이나 아에게 부탁을 하기에 그러마고
말을 하였지만 지금생각하니 그의미를 알것 갔다.
사흘 밤을 몬트리올 공항에서 노숙을 하면서
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고민중에 고민을 했다..
그래도 에미라면 딸년의 잘못된 점을 꾸짖고 나무램을 해야 할것이 아닌가?
그래도 남편이라고 자기와 살기위해 어렵고 힘든 세월을 살아온 나를...
아내라는 사람이 겨우 한다는 말이 호텔에가서 씼고 자란다.
자기 반려자요 5십년 이상을 어렵고 힘들게 마음 달래며 살아온 나를!
몇일 동안 자기는 딸년 앞에서 잘먹고 대접아닌 호식을 했겠지?
하는 생각에 이것이 아내라는 사람이 나에게 대하는 태도인가?
딸이라는 사람이 28년동안 먹이고 잎히고 공부식힌 후 결혼까지?
어려서 잘못을 타이른일 나무란일이 혹시 채벌을 했다 하자
그것이 그렇게 5십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고 원한 맺힌 일인가?
피뭍힌 원한의 일이되었단 말인가 ?
고속도로 상에서 운전을 하면서 너 나가 죽어!
도저희 자식으로서 인간이란 피를 가진....
그렇게 키운 엄마로서!....
이해가 되지 않으며 지금도 제잘못을 모르고
나를 옹졸하고 못난 사람이 삐저서 하는 행동으로
생각있다니!....
지금은 어떻게 처리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다른것은 모른다 모르지만 아버지라는 자를 너!....
달리는 차 속에서 나가 죽어!
이런일을 길을 막고 지나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뭐라고 들 할까?
아마도 자식이 아니라 .....
뭐라고 하며 혀를 차고 인연을 끈고 내가 하고 싶은데로
하고 살라고 하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