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화제 낳았던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Notre Dame de Paris)가 지난 1월 18일부터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재공연되고 있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는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 드 파리>(1831)를 화려한 뮤지컬로 연출한 것이다.
1998년 9월 프랑스 파리의 '팔레 데 콩그레(Palais des Congres)' 극장에서 초연된 <노트르담 드 파리>는 300만 프랑스인이 관람했고 이탈리아, 영국, 미국 등 11개국 2500회 이상의 공연으로 전세계 천만 명 이상이 관람했다. 이 뮤지컬은 지난 2005년 2월 25일부터 3월 20일까지 한국 공연에서 열렬한 호응을 받은 바 있다. 30회에 공연에 8만 명이 관람했던 것인데 이러한 호응에 힘입어 재공연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노트르담 드 파리>는 낭만적이고 비극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속에 마녀 재판을 통한 폐쇄적이며 배타적 사회적 편견의 고발, 중세 교회 권력의 이중성과 위선, 기득권 세력과 소외 계층,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미와 추, 선과 악, 빛과 어둠 등 삶의 근본적인 대립 점들이 망라되어 형상화되어 있는 작품이다.
이쯤에서 우리가 한 번쯤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왜 <노트르담 드 파리>를 <노트르담의 꼽추>라고 번역하는가이다. 이는 콰지모도를 장애인의 관점에서 제대로 주목하지 않았던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문학적 예술적인 차원의 접근은 중요하다. 다만 콰지모도라는 인물을 좀 더 장애인의 관점에서 볼 필요는 있다.
이야기를 풀어보기 위해 대강의 줄거리를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노트르담 사원의 종치기 콰지모도는 종탑 아래의 파리 시민들과 어울리기를 열망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 콰지모도의 주인이자, 노트르담의 주교인 프롤로가 종탑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프롤로는 쾨지모도의 원수이자 은인. 콰지모도를 키워준 사람이자 콰지모도의 어머니를 죽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집시를 경멸하는 프롤로는 집시의 도시를 없애야 한다는 생각으로 콰지모도의 어머니를 죽였다. 그리고 일말의 가책으로 콰지모도를 데려다 키우지만 세상에서 격리시키고 종만 치게 했던 것. 그러나 콰지모도는 이같은 사실을 모르고 그를 섬기기만 한다.
콰지모도는 자신의 외모를 사람들이 싫어할까봐 광장으로 나가는 것을 꺼리지만 콰지모도는 가장 행렬이 가장 성대하게 열리는 날인 만우절에 드디어 종탑에서 벗어나 광장으로 나온다. 남들에게 들키지 않고 구경하려 했던 그는 얼떨결에 '만우제의 왕'으로 뽑힌다. '만우제의 왕'은 가장 추하고 바보 같은 인물을 뽑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가 가면을 쓰고 가장 행렬에 참가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너무나 완벽하게 추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원래 그는 그런 모습이었다. 이 자리에 에스메랄다가 등장해 아름다운 춤을 춘다. 이때 우연히 이를 지켜보던 성당의 주교 프롤로는 에스메랄다를 사랑하게 된다.
그래서 주교는 콰지모도를 시켜 에스메랄다를 납치하도록 한다. 이때 근위대 대장 페뷔스가 지나다가 이 광경을 목격하고 그녀를 구한다. 페뷔스와 에스메랄다, 둘은 사랑에 빠지고 만다. 그것이 불행의 싹일 줄 에스메랄다는 짐작도 못했다. 콰지모도는 매를 맞고 수레바퀴에 매달리는 형벌을 받는다. 몹시도 목말라 물을 달라는 콰지모도의 간청에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심지어 에스메랄다를 납치하라고 시킨 주교 프롤로마저 외면한다. 이때 물을 주는 여인이 있었으니 그녀가 에스메랄다였다. 콰지모도는 이를 계기로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한편 근위대장 페뷔스와 에스메랄다가 사랑에 빠지자 주교 프롤로는 질투심을 느낀다. 그래서 페뷔스와 에스메랄다가 만나는 날 쫓아가 칼로 페뷔스를 찌른다. 그리고 에스메랄다가 찌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때 페뷔스는 에스메랄다가 집시 여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의 지위와 신분을 생각해 에스메랄다를 외면한다. 에스메랄다는 감옥에 갇혀 마녀 재판을 받게 되고 교수형 판결을 받는다. 형이 집행되려던 찰나 콰지모도가 그녀를 구출해 낸다. 그래서 노트르담 성당 안의 종탑 안에 에스메랄다를 은신시킨다.
성당은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성역이기 때문에 안성맞춤. 그러나 이 공간에는 주교 프롤로가 있었다. 그는 콰지모도가 없을 때 에스메랄다가 있는 방안에 몰래 들어간다. 그리고 에스메랄다에게 자신의 사랑을 받아달라고 한다. 그녀가 받아주지 않자 프롤로는 감옥에 에스메랄다를 넘기고 마침내 그녀는 광장에서 교수형에 처해지고 불에 탄다.
그녀는 근위대장 페뷔스와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말은 절대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한다. 사랑하는 페뷔스의 명예를 지켜 주고자 한 것이다. 한편 없어진 에스메랄다를 찾던 콰지모도는 에스메랄다가 죽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종탑 안에서 그녀를 빼낼 수 있는 이는 프롤로임을 직감하고 프롤로를 성당에서 떨어뜨려 죽음을 맞게 한다. 몇 년 뒤 집시여인을 껴안은 채 누워있는 사람의 해골이 발견된다.
이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우선 장애인의 관점에서 몇 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다.
1) 이 작품은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이중적 폭력을 드러낸다.
이중적 폭력은 물리적 정신적 폭력을 말한다. 노트르담 성당의 종지기 콰지모도는 곱사등이일 뿐만 아니라 주교 프롤로가 종만 치게 해 종소리로 귀가 멀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며 말을 거의 하지 못한다. 이는 또 하나의 후천적인 장애였다. 흔히 장애는 후천적으로 얻는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더구나 사람들은 그를 더욱 더 장애의 처지로 몰아넣는다. 그의 처지에서 소통하려고 하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가 에스메랄다를 납치하려 한 이유에 대해 재판관은 묻는데 그가 귀머거리인 것에 관심이 없고 자신의 말만 해버리고는 무거운 판결을 내려 버린다. 프롤로는 그를 노예처럼 부리지만 그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으며 이용만 한다.
그에게 유일하게 따뜻한 관심을 주는 것은 외면받는 사회의 주변인,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이다. 결국 콰지모도를 통해 사회적 편견과 폭력을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2) 겉과 속의 역설적 대비를 들 수 있다.
콰지모도와 주교는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인물이다. 주교는 다섯 번이나 성당의 주교를 연임할 만큼 신망 받는 존재. 그러나 정념과 질투에 차 살인과 모함을 자행한다. 심지어 자신이 사랑한다는 에스메랄다도 자신을 괴롭히고 자신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죽이려 한다. 하지만 콰지모도는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지만 자신이 사랑한 에스메랄다를 끝까지 지키려 한다. 그리고 죽어서도 함께 한다.
또한 그녀를 사랑한다는 멋지고 신분 높은 근위대장 페뷔스는 에스메랄다를 사랑한다면서 그녀가 집시 여인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냉정하게 돌아선다. 콰지모도는 흉측한 외모와는 달리 영혼의 순수함과 성스러움을 지닌 인물인 것이다.
3) 가상과 현실의 이중성을 나타낸다.
콰지모도의 상징과 관련하여 인상적인 것은, 그가 '만우제의 왕'으로 뽑히자 사람들은 열광했지만 진짜 그의 모습이 추하고 혐오스럽자 분노했다는 점이다. 이는 그에게 더욱더 심한 사회적 폭력이었다.
이는 문학작품이나 영화,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장애인들을 보고 눈물을 흘리거나 감동하는 것과는 달리 그러한 인물이 실제로 자신의 옆에 있으면 질겁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주는 것과 같다.
4) 왜 꼽추라고 번역하는가.
애니메이션 <노틀담의 꼽추>(The Hunchback Of Notre Dame, 1996)와 같이 다른 번역본에서는 "꼽추"를 넣어 번역해 흔히 <노트르담의 꼽추><노틀담의 꼽추>라고 한다. 빅토르 위고의 본래 작품 이름은 <노트르담 드 파리>(Notre Dame de Paris)이다. 대문자 "노트르담(Notre Dame)"은 '성모 마리아'를 나타내며 <노트르담 드 파리>는 "파리의 성모마리아 대성당"을 말한다. <노트르담의 꼽추>는 <파리 성모마리아 성당의 꼽추>가 되는 것이다.
작품 이름에 꼽추를 넣어 번역하는 것은 참으로 특이하다. 이는 비극적 상황을 더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노트르담의 콰지모도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콰지모도는 반신불수 혹은 반만 인간이라는 뜻을 지녔다. 반만 인간의 모습을 지녔지만 그 속은 누구보다도 인간적이며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결국 <노트르담의 꼽추>라고 하는 것은 성스러움과 추함을 대비시키면서 진정한 가치에 대한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그에 비해 장애인의 관점에서 미흡한 점도 있다. 콰지모도는 단지 외모가 문제가 아니라 청각장애에 언어 장애를 가진 인물이다. 꼽추는 그 추한 얼굴과 함께 비극적 상황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이다.
꼽추 혹은 곱사등에 대해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콰지모도는 곱사등이, 꼽추다. 꼽추, 곱사등이는 척추장애, 혹은 척추측만증 때문에 나타난다. 콰지모도를 비롯해 이런 유형의 사람을 꼽추라고 하지 척추측만증 장애인이라고 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 되도록이면 척추장애인, 척추측만증 장애인으로 부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한편 제목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제목에서 "꼽추"가 아니라 "귀머거리", "벙어리"이면 어떨까? <노트르담의 귀머거리><노트르담의 벙어리>라고 하면 어떤가. 괜찮을 듯 싶지만 귀머거리와 벙어리는 장애인들이 거부감을 갖는 용어다. 꼽추도 표준말이지만 마찬가지다. <노트르담의 척추장애인>이라고 하면 딱딱하다고 여길지 모른다. 그렇다면 <노트르담 드 파리>라고 원작 제목대로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랑의 관점에서도 볼 점이 있다.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 드 파리>는 장애인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다룬 작품의 고전적인 원형이 되었다. 그런데 획일적인 작품의 양산으로 나타난 것은 아닌지 볼 필요도 있다. 아름다운 미인, 그리고 추한 외모의 콰지모도. 이 둘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주인공들이었다. 이룰 수 없는 사랑과 그의 굽은 등은 상통하는 비극적 사랑의 상징이었다.
이후의 많은 작품들이 희생적인 비극적인 사랑의 주인공으로 척추 장애인, 척추측만증 장애인을 등장시켰던 것이다. 지고지순한 비극적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감동을 유도하기 위해서다.
사랑은 멋진 공주와 왕자만 하는 것은 아니니 애니메이션 <슈렉>과 같이 발상의 전환을 하는 것도 좋을 듯싶다. 즉 기존의 <노트르담의 파리> 내용을 뒤집는 내용의 작품이 나올 때도 되었다. 이는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에서 아쉬운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