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날을 내다보는 지도자의 결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글이라서 옮겨봤습니다.
요즈음 국가의 지도자들이 꼭 가지고 있어야할 부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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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 팬텀기 한국 오던 날-1969년 지금으로부터 40년 전,1969년 8월 31일, 국내 주요 신문은 아래와 같은 기사를 크게 실었다.
팬텀F4D "팬텀기 6대 인수-
세계 네 번째 보유 어제 환성 속에 축하비행"
-공군 OO 기지에서 유지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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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팬텀기를 맞은 이날 공군00기지에는 임충식 국방장관 문형태 합참의장, 맥기히 미5공군 사령관 등 한미 고위 장성들이 참석했다.
1969년 8월 31일 신문기사, - 대구 기지 인듯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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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분들은 이 팬텀기의 도입이 뭣이 새삼스럽다고 옛 신문을 뒤지고 찾아내어 블로그에 올리고 호들갑을 떠냐고 하실지 모른다. 그러나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40년 전 가난한 이 나라가 거금을 들여서 사들인 팬텀기는 60년대의 의심할 바 없는 세계 최강의 전투기였다.
일본도 독일도 이스라엘도 가져보지 못했던 그런 초고가의 최신형 전투기를 그 때 아시아의 빈국 한국이 도입했다는 것은 지금으로 따져 보면 미얀마나 이티오피아같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나라가 F15 스트라이그 이글 전투기를 도입했다는 것만큼이나 쇼킹했던 뉴스였다.
팬텀은 미 해군기로 개발되었지만 그 예상을 깬 막강했던 성능으로 미 공군에 채택했던 범상치 않던 경력이 말해주듯 공중 전투나 육상 폭격 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고 그 전투력은 월남전에서 이미 충분히 입증했던 환상의 전투기였다.
항속 거리도 길었고 음속의 2.4배나 되는 빠른 속도에 2차 세계 대전 때 미군의 4발 중폭격기 B-17과 같은 폭탄 적재량 등, 팬텀을 능가할 전폭기가 그 당시 세계에 없었던 만능의 폭격기였다.
이 최신 전투기는 미국이 그 때까지 했던 것처럼 한국에 거저 주던 낡은 군사물자가 아니었다. 월남전이 격화 되어가면서 미국은 이미 월남에 맹호부대와 청룡부대를 파병했던 한국에 일개 사단의 추가 파병을 요청하였다.
67년도에 미국의 사이러스 반스 특사와 한국의 최규하 외무장관이 합의 했던 것은 미국이 한국에 일 억 달라를 국군 현대화 자금으로 제공하고 한국은 보병 일개 사단을 추가 파병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 뒤 월남에 파병되었던 국군 보병 사단이 백마부대였다. 그러니까 초고가의 최신 전투기 팬텀은 그저 주어진 선물이나 군사 원조 무기가 아니라 한국의 젊은이들이 이국 땅에서 흘릴 피의 대가였다.
일억 달라는 그 당시로서 엄청난 액수의 거액이었다. 불과 그 2 년 전인 65년도에 한일 수교를 하고 일본에서 받은 무상 배상액이 3억 달라였다. 3억 달라는 아무 것도 없었던 한국이 경제 개발을 향해 시동을 걸 때 종자돈으로 적지 않게 유용하게 썼다고 할 만큼의 거액의 규모였다.
이 거금을 바라보며 고장 많은 구식 장비에 애를 먹던 한국군의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는 물론이고 경찰까지 침을 삼키며 로비를 했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심사숙고 끝에 대부분을 신형 전투기 F4D 팬텀기를 구입하기에 투입하기로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국가 운영 기술의 하나는 상황을 정확히 읽어내고 한국의 빈약 했던 물적 자원을 집중 투입해서 승부를 거는 것이었다. 즉 선택과 집중의 기술에 능한 것인데 크게는 그의 집권 초기는 경제 부흥을 위해서 수출 산업에 집중했었고 후기에는 국가의 명운을 걸만큼 중화학 공업육성에 집중 했던 사실을 들 수가 있다.
그가 일본으로부터 받은 청구권 자금의 삼분지 일을 포항 제철에 투자해서 근대화의 초석을 닦은 것이나 미국으로부터 받았던 거금인 일억 달라를 목돈 풀어서 푼돈 만들지 않고 집중해서 팬텀기를 구매함으로서 가장 유효한 전력화로 연결한 것도 이런 선상에서 볼 수 있다. 그 때 이군 저군 원하는 대로 나누어 줬으면 이도 저도 아닌 결과가 되었을 것이다.
박 대통령은 미리 국방장관에게 이 돈의 사용처에 대해서는 자기가 알아서 할 테이니 그리 알라는 지시를 내려놓은 터였다. 그는 결국 국방 장관에게 팬텀기 1개 대대 [18대]와 비행장 개선비로 500만 달러를 쓰고 나머지 3,200만 달러는 육해군과 해병대 경찰들이 알아서 나누어 쓰라고 지시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팬텀기 구매 결정은 한국 국방사에 기록해 둘 최선의 무기 구매 또는 획득의 결단이었다.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서 구입하는 무기 구매는 비즈네스에서 기업인들의 투자와 같다.
잘하면 투자금을 다 회수하고도 막대한 이익을 남기는데 비해서 잘못하면 투자금 회수는커녕 만회하기 힘든 큰 손해를 보고 패가망신을 면치 못한다.
거대한 예산을 써야하는 국방 무기를 잘 사면 그것은 국가 위기시 국토 수호의 최고 주역을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국방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으면서 막대한 국민의 세금 낭비만 애물 단지 노릇을 하기도 한다.
팬텀기는 중고 구식기를 운영하던 한국 공군의 질적 수준을 대폭 업그레이드 시켰다. 그러나 그런 수준만이 아니었다. 팬텀기의 도입은 그때 한국 사회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팬텀기의 도입 보도는 우리 국군 발전사에서 계속 있어 왔던 다른 신형기들의 보도들과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로서 그 뒤 F16이나 F15를 도입 할 때도 메스컴은 이렇게 흥분했던 감정으로 대대적인 보도를 하지 않았었고 국민들은 역시 팬텀이 올 때처럼 열광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5,60년대의 한국의 사회 안팍에 안개처럼 떠돌았던 것은 무력감과 열등감과 도피감이었다. 그래도 60년대에 들어와서 경제개발이 발동이 걸렸고 잘 살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이 점점 가시화되기 시작한 때가 이 팬텀기가 들어올 때이다.
일본도 대만도 가지지 못했던 세계 최첨단 전투기를 우리도 미국이나 영국 같은 선진국들처럼 보유 할 수도 있다는 긍지를 주었고 국민들의 사기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그 후 국방 관련 홍보물이나 보도에 팬텀기 이상 더 많이 출현했던 인기 주연 스타는 없었다. 오죽했으면 한국 공군이라는 앞에 팬텀 공군이라는 수식어가 20년 가까이 붙어 다녔을까 --
여기에 당시 60년대 후반 한국은 실질적으로 북한 김일성의 잦은 도발로 준전시 상황에 놓여 있었다. 국민들은 있을 수 있는 북한군의 남침 가능성에 항상 불안에 떨어야 했다.
국민들은 그 무렵의 북한 전투기가 500기가 넘었었고 한국 공군의 전투기는 150기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팬텀의 도입은 그런 불안감을 일소함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그러나 박대통령이 결단을 내린 팬텀의 도입은 전략적 항공 공격력을 한국이 보유하게 됐다는 점을 제일 크게 평가해야 할 듯하다. 그때 한국 공군은 미군이 쓰다가 넘겨준 6.25때의 전투기 F86을 아직도 다량 가지고 있었다.
F86세이버 - 한국 전쟁 공중전에서 주역을 했지만 너무 낡아서 한국 공군은 정비 유지에 큰 애로를 겪었다. 20살이 다 되어가는 고물 전투기이고 압록강까지 겨우 가서 20여분 머무르고 돌아 와야 하는 구식 전투기였다.
그러나 팬텀은 북한 전역은 물론 중국의 북경까지도 그 유효한 공격거리 안에 가지고 있는 전폭기였다. 홍위병들이 맹위를 떨치던 중국에서도 오로지 미군만이 갖는 이런 장거리 공격력을 가진 국가가 이웃에 나타난 것이 결코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이다.
전략 무기의 의미는 적의 공격 의지 사전 억제라고 한다. 북한의 김일성은 팬텀기가 들어오기 일 년 전에도 월남식의 게릴라전을 꿈꾸며 무장간첩을 120여명이나 울진 삼척으로 보냈었던 남한 적화에 대한 불치의 과대망상증을 앓고 있던 자였다.
그런 그가 남한의 급속히 성장하는 경제력과 함께 보조를 맞추어서 군 현대화를 해나가는 남한이 이제는 침략할 대상이 아니라 자신들을 공격 할 가능성도 배제 못할 군사적 강국으로 커가는 것을 느꼈을 수도 있다.
불치의 남한 적화병을 앓던 김일성에게 그때까지 이 팬텀기의 도입처럼 충격을 준 남한의 최신 무기 도입은 없었을 것이다. [그 뒤 F16기 도입 때 북한 방송이 엄청난 광기를 띄고 악담을 해댔던 것을 생각하면 팬텀 도입 때도 북한 방송이 얼마나 광란의 욕설을 뱉어냈을지 짐작이 간다.
얼마 전에도 도입하지도 않았던 AH64 아피치 공격 헬기 도입 이야기가 잠깐 방송에 비친 것만으로도 북한 방송의 아나운서는 게처럼 입에 거품을 품고 별별 욕을 다 해댔었다. 정상적이 아닌 정신 구조를 물려받은 북한 수뇌부의 아킬레스 근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히스테리다.]
6.25남침 때 북한이 100대가 넘는 전투기를 보유 했을 때 남한은 단지 연습기 10여 대 뿐이었다. 전쟁 중에 북한은 소련이 공여해준 미그 제트 전투기를 몰고 미 공군과 공중전까지 했던 북한은 56년도에야 겨우 미군으로부터 이미 구식이 되어가는 F86을 물려받은 한국 공군의 수준이 경멸스러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런 한국 공군이 일본도 가지지 못했던 F4팬텀기를 가지게 되었으니 그들의 양적인 공군력 우위가 송두리째 무너지는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 팬텀이라는 전투기가 자신들이 보유했던 최신 전투기 미그21을 월남 상공에서 박살냈던 가공할 전폭기였다.
어쨌건 팬텀이 들어오고, 그리고 팬텀 때문만은 그런 것이 아니겠지만 그 뒤에 김일성의 남한 도발은 상당히 소규모화 했고 조심스러워졌다. 남한 적화의 과대망상증 환자 김일성의 남침 심리를 묶어 놓았고 한국 국민의 국방 신뢰를 확보했으며 한국 공군의 수준을 크게 상향시킴에 어느 전투기보다 큰 몫을 했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팬텀기 구매 결단을 그 분의 업적으로 소개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차기 무기 도입 때[ 먼 훗날 F22나 공격용 원자력 잠수함 같은] 항상 해대는 비용대 효과니 뭐니 하는 주판질을 넘어서 때로는 앞날과 주변을 거시적으로 내다보는 전략적 안목도 절대 필요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위의 일화를 포스팅한다.
이 신문 보도가 있던 날 팬텀기를 미국에서 몰고 한국에 온 팬텀대 지휘관 강신구 중령은 왕년의 영화배우 신성일[실명 강신영]씨의 친형이다. 그가 팬텀대를 이끌고 도착했던 대구 기지에 신성일씨가 환영 나갔던 사실도 보도가 되었었다. 강신구 중령은 공군 소장으로 전역해서 은퇴 생활을 즐기다가 2002년 지병으로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