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우측아랫집인 장평이 형네집은 (입석양반의 4남1녀중 막네) 부잣집 이기에 대밭도 퍽크고 텃밭도 꽤넓었고 집터도 우리동내 부안촌에서 가장넓었던것 같았습니다 장평이형네 마루에는 6.25때 빨치산들에게 겁을주기위한 사격때 예광탄이 마루에 떨어져서 호빵만하게 움푹파인 불탄자국이 3개나 있었습니다 나보다 네살더먹은 장평이 형네집은 텃밭에 해마다 당근을 서너고랑을 (3고랑) 심었습니다 우리동내에서 텃밭에다가 당근을 심은집은 장평이형네집 한집뿐 이었습니다 장평이 형네는 그맛있는 당근을 겨울내내 케서먹다가 못다먹고 봄까지 먹었던것 같았습니다 장평이형은 왠일인지 어릴때부터 귀가많이 먹었습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도 거의입모양 만보고 공부를 하였드랍니다 장평이형이 귀는먹었어도 아주영리하고 산수공부를 잘했다고 했습니다 (장평이형 동창인 춘수리 오점수님) 어쩌다가 영팔이형이나 후식이형이 귀먹쟁이나 먹보라고하면 입을삐쭉하고는 눈을흘겼 드랍니다 다른사람들은 가난해서 도시락을 못싸가지고 다니던때에 부잣집 막둥이 아들인 장평이형은 쌀밥에 맛있는 조기나 소고기 반찬을 싸가지고 다녔기에 장평이형을 아무도 괄세를 못했드랍니다 (춘수리 오점수님) 형셋은 모두들 대학교를 나와서 큰형은 김제죽산 고등학교 선생님 작은형은 부안동아약국 약사 3째형은 내쇼날프라스틱 이라는 큰회사의 회사원이기에 우리동내 부안촌에서 최고의 집안이었답니다 장평이형네 집에는 복구라는 잡종인 아주큰똥개 숫놈이 한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복구는 우리개 메리가 암내낫을때는 하루종일 우리집에와서 살다싶이하고 암내를맛고 다른숫개들이 우리집 근처를 얼씬거리면 무섭게 짖어대면서 죽일듯이 쫓아버렸습니다 복구는 메리의밥이 남아있으면 다줏어 먹어버리기에 우리 아버지한테 대빗자루로 수시로 뚜들겨 맞기도 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대빗자루를 드는성싶으면 죽어라하고 도망갔다가 금방또오곤 하였습니다 장평이형네 복구를 나는항상 예뻐해주고 쓰다듬어 주었기에 나를아주 잘따랐습니다 늦봄에 창원이나 다른애들이 장평이형네 대밭으로 죽순을 꺽으로가면 무섭게 으르렁 거리기에 쫓겨왔으나 내가 장평이형네 대밭으로 죽순을 꺽으로가면 반갑게 꼬리를치면서 내옆에와서 구경만 했습니다 우리집에는 어머니와 아버지 작은누나만 있기에 이야기 거리도 별로없고 재미가 없었는데 영일네집에는 영칠이형 영팔이형 영일이랑 영내누나등 식구가 많아서 언제나 재미있고 좋았습니다 어느날은 눈이살포시 (적게온눈) 온날밤인데 영일이네 집에가서 노는데 영칠이형이 " 심심헌디 장평이네 당근밭에든 당근이나 케다가 쪄먹으면 맛있것는디 그놈의 똥개새끼 때문에 " 하니까 영팔이형이 " 장평이네개가 똥개아니여 쎄파트 잡종이라 물리면죽어 그놈의새끼가 얼마나 싸난디 (사나운디) " 하기에 장평이형네 복구는나를 잘따르니 걱정말라고하고 영팔이형과 내가호미와 대바구니를 가지고 볏짚울타리를뚫고 장평이형네 텃밭에 갔더니 마루밑에서 잠자던 복구란놈이 으르렁 거리면서 뛰어왔습니다 내가작은 소리로 복구야 복구하니 내목소리를듣고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면서 아주좋아 했습니다 영팔이형이 한군데서만 뽑지말고 듬성듬성뽑고 (띠어서파고) 흙으로 잘덥으라고 하였습니다 눈속에든 당근을 잎파리체 바구니에 가득히 담아갔고 영팔이형이 발자국도 지워버리면서 왔습니다 영팔이형과 영내누나가 샘에가서 당근과 고구마를 씻어가지고 쪄놨는데 흙을깨끗이 못씻어서 삶은당근에서 흙이써그럭 거렸어도 향긋한 당근은 기가막히게 달고도 맛이있었습니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때 이야기 입니다 닭서리를하면 지금같으면 112순찰차가 출동을하고 절도죄로 큰일이 날일이지만 내가청소년 시절이었던 60년대만해도 흔히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지금생각하면 닭을도둑 맞아서 큰손해가난 피해자인 독골닭주인 들한테 참으로 미안하고 죄송하답니다 큰방에서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주무시고 나는혼자서 아랫방에서 잠을자는데 아마24시가 거의된것 같은데 나와동갑이고 죽마고우인 영일이가 잠자는 내손을잡고 흔들면서 깨웠습니다 왠일인가하고 놀라서 일어나니 손짓을 하면서 밖으로 나오라고 했습니다 밖에나가니 우리집 외양간앞에 창원이는 닭을한마리 상복이는 닭을두마리들고 서있었습니다 한마리만 잡어오지 누집것을 3마리나 잡아왔냐고 나무라니 독골에서 잡아왔다고 했습니다 큰방부억에있던 등까지 갖고와서 호롱불 심지를 많이올려서 등불두개를켜고 닭을삶을 준비를 하였습니다 우리집 외양간 소죽끓이는 큰가마솥을 서너번 씻어내고 일단은 물을붓고 물을끓였습니다 내가 마늘 소금 배추김치 칼과큰쟁반 큰그릇들을 준비하는 동안에 창원이와 상복이한테 닭털을 뽑으라고 했더니 상복이와 창원이는 끓는물을 붓으면 털이금방 빠진다고 물로닭털을 처리하자고 하였습니다 닭3마리를 언제뜨거운물로 한다냐 내말듣고 털을대충 뜯어서 부엌의 불에넣어 흔적을 없에고 잔털은 짚불로 끄슬려야 꼬숩고 훈제맛이나니 털을뜯으라고 했더니 창원이가 내말이 맞다고 하면서털을 뽑았습니다 닭을잘잡는 영일이는 닭의배를 갈라서 간만꺼내고 닭대가리 발 창자등을 세면기에다 담아서 우리헛청의 잿간재에다 파묻고 왔습니다 세면기에 닭3마를넣고 대충핏기를 씻고는 마늘과 소금을넣고 가마솥에 넣었습니다 닭고기를 먹을때는 소주가 있어야한다고 상복이는 동내에서 제일로 끝집인 자기집으로 소주를 가질러 가더니 큰댓병의 소주를한병 갖고왔습니다 큰암닭 3마리를 넷이서 소금을 찍어먹고 배추김치로 싸서먹는데 참으로 기가막히게 맛이있었습니다 사발에다가 소주를 붓어서 물을마시듯 마시는 영일이와 창원이와 상복이는 술을참으로 잘도먹었습니다 닭고기를 먹으면서 영일이는 집주인이 문을열고 나올까 보아서 작대기로 문고리를 고여놨다고 했습니다 닭털이 오면서 빠지기에 새내쪽으로 돌아서왔고 우리동내 오기전에 새내쪽 산속에서 닭털을전부 털어버리고 왔기에 부안촌 쪽으로는 닭털이 하나도 없으니 절대로 모를것 이라고 했습니다
새벽이 되도록 닭고기를 싫컷먹고 잠을자는데 새벽녁에 아버지께서 소죽을 끓이로 나오셨다가 부억바닥에 널부러진 닭뼈들과 김치조각등을 보시고는 가마솥도열어 보셨던가 봅니다 " 이놈의 새끼들이 엇저녁으 (어젯밤에) 누집닭을 잡어다가 여그서 히먹었다냐 (삶아먹었다냐) 이것이시방 (이것이지금) 맷마리다냐 (몇마리다냐) 이런오살놈의 새끼들봐 " 하시면서 국물이 아직도 따땃허네이 하시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시치미를떼고 모른체하고 잠을잤습니다 자면서 들으니 가마솥에든 먹다남은 닭고기와 닭고기 국물을 바가지로퍼서 양은바께스에 담고계셨습니다 어머니는 닭고기 국물에 무우를 썰어넣고 양념을 잘하여서 닭고기도 많이넣고 아주맛있는 국을끓였습니다 나는배가 부르고 잠을설쳐서 잠을자고 싶은데 어머니는 아침밥을 먹으라고 " 먹을때 얼렁같이먹게 빨리큰방으로 건너오니라이 " 하시면서 여러번을 불러대기에 큰방에가니 아주맛있는 닭고깃국 냄새가 폴폴낫습니다 나를보더니 아버지 께서는 " 어떤놈 새끼들이 닭을맷마리나 잡어왔다냐 그지랄 허다가 쥔한티 잽히면 (잡히면) 빽따구가 (뼈가) 부러져 " 하셨고 닭고기나 소고기 돼지고기를 일체안잡수는 우리어머니 께서는 " 괴기가 (고기가) 많이남은것봉게 한두마리가 안닌것 같은디 하여간에 괴기좋아하는 영감은 영일이 창원이덕에 너댓끼는 (4-5끼) 잘먹것네이 "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삼일이 지난후 헛청에서 외양간의재와 큰방의 부억의재를 삽으로 정리하시던 아버지가 재를퍼올리 시다가 잿속에서 닭대가리와 발목들과 내장들을 발견하셨 드랍니다 닭대가리3개 닭발목6개 닭내장3개를 찾아셔서 물로깨긋이 씼었드랍니다 닭대가리와 발목은 짚불로 끄슬려서 털도태우고 발톱도 태워서 뽑아버리고 손질을 잘했드랍니다 닭내장도 소금으로 잘씼어서 대가리와 발목과함께 절구통에 소금과 쌀가루를넣고 도굿대로 잘찧었드랍니다 그리고는 아버지 혼자서 손으로 주물러서 먹기좋은 크기의 똥그랑댕을 두쟁반을 만들었답니다 그똥그랑땡을 조금씩 솥에넣고 무우를 썰어넣고 국을끓이니 닭뼈가 씹히면서도 기가막히게 맛이있었습니다 몇년전 부모님 산소에서 텐트를치고 며칠간 쉬면서 고향마을 친척동생인 명수에게 그이야기를 했더니 형님은 호랑이가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를 한다면서 지금은 그런것을 누가꿈도 안꾼다고 했습니다 명수동생은 부안촌에서는 아마 닭서리가 영일이형때가 끝물이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날저녁에 산소의 텐트속에서 대전에서 혼자살고있는 작은누나한테 그똥그랑땡 이야기를 하였더니 언제막내사위 박서방이 저그집에가면 토종닭을 한마리 사오라고해서 만들어준다고 하면서 절구통이 문제라고 하였습니다
정읍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2일과 7일이 장날이 었습니다 6.25.한해전에 큰형님이 정읍중학교 1학년때인데 장날이라 시장통을 구경도할겸 시장으로들어 갔드랍니다 그런데 시장입구에서 우연히 장에오신 아버지를 만나버렸 드랍니다 학교가 파했으면 직선길인 연전으로해서 상평리를지나 집으로바로 가야하는데 당고개로 한참을 돌아서가는 시장통으로 나왔으니 아버지한테 욕얻어먹고 혼날것을 생각하니 큰일이 낫드랍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싫은말씀을 한마디도 안하시고 " 밴또밥 (도시락) 먹었어도 배고프제 " 하시면서 다섯개짜리 단팥이든 아주맛있는 고급빵을 사주시드랍니다 언제나 먹고싶었던 그빵이었는데 돈이없어서 눈으로만 요기를했던 그단팥빵 이었답니다 게눈감추듯 3개를먹고 2개는 가방에 넣었는데 이번에는 엿장사를 만나니 큰깨엿을 두개를 사주시드랍니다 맛있는 단팥빵 빵3개를먹고 꼬숩고 (고소하고) 파삭파삭한 큰깨엿을 두개나먹으니 배가든든 하드랍니다 집으로 바로안가고 시장통으로 나왔다고 아버지한테 욕을얻어먹고 혼날줄 알았는데 그무서운 아버지가 왜이러시는가 싶으면서도 아무말도 안하시니 좋기만 하드랍니다 시장속을 한참을 가다가 아버지가 이것저것 사가지고넣은 밀가루 자루를 큰형에게 들으라고 맞기시 드랍니다 그리고는 질퍽한 시장속에서 많은사람들이 밟고다닌 지저분하고 검은흙 범벅이된 밀가루 자루를 한손으로 줏어들더니 댓충접어서 들고는 정읍천변 냇가로 가시드랍니다 큰형은 챙피한 생각이 들어서 아버지의 한참뒤에서 솔차니 거리를두고 따라갔드랍니다 큰형은 뚝위에서 쳐다보니 대양리 다리윗쪽 냇가에서 검은흙으로 범벅이된 밀가루 자루를 한참을물에 흔들어서 행구더니 그자루속에서 무엇을 꺼내는데 돈이나오 드랍니다 조심해서 돈을물로씼고 물을뿌려 버리고 손바닥으로 돈을탁탁 두드리더니 그돈을 세어보고는 씽긋이 웃으면서 돈을잘접어서 조끼주머니에 넣드랍니다 그리고는 그더러운 밀가루포대를 한참동안 흐르는물에 더흔들어서 빨더니 물을꼭짜고 털어서 가지고 갖고오면서 " 집에갖고가면 콩도담고 폿도담고 (팥) 씰디가 (쓸데가) 많혀 하시면서 돈을시어봉게 쌀한말값이 넘어야 " 하시면서 좋아하시면서 웃드랍니다 큰형은 아버지가 남들이 밟고다닌 그더러운 밀가루 보자기를 왜줏어갖고 냇가로 가는가 챙피하고 걱정스럽고 싫었는데 막상 그속에서 쌀한말값이 넘는다는돈이 나오는것을 보고는 신통하기만 하드랍니다
춘수리 구상리 부안촌 만수동에관한 이야기 입니다 퍽옛날 내가 어렸을때 초등학교 다닐때 아버지께서 입석리나 인촌 그리고 금구로 시제에 다녀오시면 조끼 주머니에서 시루떡조금과 꽃감 밤 대추 몇알씩을 내놓으셨습니다 그때의 떡맛은 참으로 기가막히게 맛이있었습니다 지금한번씩 먹어보는 비싼갈비집의 갈비보다도 맛이있었습니다 가난했던 그시절에는 일년내내떡을 맛볼수있는때가 설날과 추석과 식구들의 생일때뿐 이었습니다 어쩌다가 입석리 시제때는 그맛있는 떡도못얻어 오시고 싸움을 말리시다가 옷고름만 뜯겨가지고 오셨습니다 이유는 문중논을 경작하는 사람들이 농사가 잘되었는데도 병충해와 수해로 패농을했으니 (농사가 망했음) 도지세를 못내놓겠다 무슨소리냐 매루도 (병충해) 안먹었고 수해는 무슨수해냐 농사만 터지게 잘지었제 하면서 싸우기에 우리아버지는 키도작고 삐쩍마른 체구이기에 싸움도 제데로 말리지도 못하시고 옷고름만 뜻겨가지고 오시는게 일상이었습니다 만수동 친척들 중에는 수십년전 조상대대로 한필지 두필지씩 문토를 거의헐값에 벌어서 먹는데 황새고개 겸호당숙같은분은 논은물론 밭한평도 못벌어먹는 불공평한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서 2015년 줄포에서 정읍을거쳐서 전주에이르는 도로가 새로나면서 우리문중산으로 도로가 지나가면서 5억3천만원의 보상금이 나왔드랍니다 그돈으로 3억을들여서 땅을사서 12000평의 밭으로 만들었답니다 예비비 2억몇천만원의 이자로 전문업자에게 맞겨서 매년제물을 잘차려서 시제를 모시고 있답니다 젊은 오두근 종친회장님은 평탄작업을 하면서 나온흙을 정읍00에게 현금으로 1억원에 판매하여서 문중기금에 입금하는 큰공헌을 하였답니다 2005년에 종친회 회장을 역임한 오재근님께서는 문중에 2000만원을 기부하셨고 1971년봄에 태능선수촌 입구의 산속에서 만수동 일대의 종친들과 출가한 (女) 자손들까지 245명에게 종친단합의 큰행사를 열어주셨답니다 그때만해도 소고기를 마음껏 먹기가 힘든때 였는데 모두들 소고기를 배부르게먹고 참석한분모두들 여러가지 선물도 여러가지를 가지고 돌아갔드랍니다 그때참석을 못했던 제가 오재근 회장님께 경비를 물었더니 그때돈으로 370만원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후로 태능에서 그런행사를 4회를 더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오동주님 증언) 2010년에 종친회 회장을 역임한 오식근님께서는 문중밭을사는데 2000만원을 기부하셨고 인촌 999비 600만원 888비 700만원을 사비로 세우셨습니다 (오동주님 증언) 이렇게 고맙고 훌륭하신 후손들이 계시기에 학정공파 필경제는 무궁한 발전이 있을것 같습니다
고맙고 그리운 이일년 (1938.3.3 - 2021.5.5.) 누님의 이야기 입니다 이일년 누님은 1950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남동생하나와 여동생 하나를데리고 00으로 피난을 왔습니다 동생들을 먹이고 가르치고 결혼을 시키는라 혼기를 놓치셨습니다 그러다가 잘아는분이 결혼을하여야 한다고 15살더먹은 상처하고 혼자사는 남자를 소개해주어서 결혼을 하였드랍니다 시장에 다녀오면 10원짜리까지 전부다 보고를 하여야하는 괴로운 생활에 술을마시면 수시로 밥상을뒤업고 구타를 하는통에 도저히 살수가 없어서 2년만에 이혼을 하였드랍니다 1993년봄에 제가 이일년님네 현대아파트 앞에있는 괴안동 파출소장으로 발령이나서 갔습니다 일요일은 파출소에서 밥을하는 아주머니가 안나오는 날이라 직원들과 의경6명이 라면을 끓여먹던지 짜장면을 시켜먹든지 대충때우고 넘어가는 날이었습니다 파출소앞에사는 이일년누님이 일요일날 퍽큰검정색 핸드빽을들고 상담을하시러 오셨다가 밥때문에 옥신각신 하는걸 보더니 자기가 맛있게 해준다고 하드랍니다 의경둘을 데리고 나가더니 한사람에게 돈을주면서 돼지고기와 대파를 사오라고하고 한명은 자기집으로 데리고가서 묵은지를 두포기를 갔고와서 저녁밥 먹을것까지 아주맛있게 잘끓여 주셨답니다 파출소아래서 자취를하던 이창수순경(이천) 조경욱순경(예천) 까지 데려다 먹였더니 아주좋아 했습니다 이일년누님의 상담내용은 전부가다 부채관계였기에 경찰서에 고소할것과 변호사한테 찾아가서 민사소송 할것들을 구분만해 드렸습니다 경찰관은 민사관계 불간섭의원칙 법조항을 펴주고 읽어보시라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 셨습니다 그동안 약2억정도의 채권때문에 인천변호사와 서울변호사 법무사들에게 상담료와 밥값이 겁나게 들어갔으나 파출소에와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남의다리만 긁었다고 하시면서 만족해 하셨습니다 가끔 궁금한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삐삐를 ( 012-260-5049) 하시라고 삐삐번호를 적어주었더니 아주좋아 하셨습니다 이일년 누님께서는 교회나절에 안다니 시기에 일요일마다 파출소의밥을 해주시겠다고 하시기에 힘드시니까 안해주셔도 된다고 하셔도 손주같은 의경들과 노닥거리는게 좋다고 하셨습니다 파출소에서는 112순찰중 뚱뚱하신 이일년님을 만나면 모두가 알아서 가시는곳 까지는 꼭태워다 드렸드랍니다 이일년님은 그것이 미안하고 쑥스럽지만 그렇게 고맙고 좋을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2년여를 정답게 잘지내다가 1995년 여름에 중동파출소장 으로왔는데 어느날 이일년누님이 시민회관옆 식당에 오셨다고 혼자만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소갈비를 시켜놓으 셨기에 잘먹고 나오면서 돈을낼려고 했더니 그럴줄알고 미리계산을 하셨다고 했습니다 괴안동까지 모셔다 드린다니까 파출소장님이 일과시간에 돌아다니면 안된다면서 조수대문을 열더니 내년에 작은딸 대학교에갈때 보태쓰라면서 안식구한테 갖다주라면서 100만원을 놓으시고는 얼른택시를 타셨습니다 그이듬해에는 우리집사람이랑 셋이서 밥을먹었는데 막내아들 대학에갈때 보태라고 100원과함께 금반지계를해서 자기차례라 탔다고하시면서 금을한냥을 (2022년 약280만원) 주셨습니다 2015.5.5.이일년누님이 돌아가셨을때 성모병원 장례식장 화성함백산공원 화장터를 거쳐서 평택서호 납골당까지 전송해 드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