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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순흥안씨 가문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안치원
순흥지
문과(文科)
고려(高麗)
안유(安裕) : 고려 원종(元宗) 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시중(侍中)에 이르렀다. 위 〈명환(名宦)〉ㆍ〈명현(名賢)〉 조목에 보인다.
안우기(安于器) :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안목(安牧)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안원숭(安元崇)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안석(安碩) : 과거에 급제하여 밀직(密直)에 봉해졌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안축(安軸) : 원(元)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명환(名宦)〉ㆍ〈명현(名賢)〉 조목에 보인다.
안보(安輔) : 원(元)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동경유수(東京留守)에 이르렀다. 〈명환(名宦)〉ㆍ〈명현(名賢)〉 조목에 보인다.
안집(安輯)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에 이르렀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안종원(安宗源)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에 이르렀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조선조에 들어와 태학사(太學士)를 지냈다.
안영부(安永孚) : 벼슬이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에 이르렀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문질(文質) : 벼슬이 정승(政丞)에 이르렀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안수기(安修己)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소윤(少尹)에 이르렀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본조(本朝)
안원(安瑗) : 태조(太祖) 때 유후(留後)를 지냈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안경공(安景恭) : 개국공신에 봉해졌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안순(安純)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중추(判中樞)에 이르렀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안숭선(安崇善) : 벼슬이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예문관제학을 지냈다.
안숭효(安崇孝) :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다.
안종약(安從約) : 안원(安瑗)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목사(牧使)에 이르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안경온(安景溫) :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을 지냈다.
안경량(安景良) : 벼슬이 순문사(巡問使)에 이르렀다.
안문개(安文凱) :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이유(李愉) : 벼슬이 관찰사(觀察使)에 이르렀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이사맹(李師孟) : 벼슬이 참의(參議)에 이르렀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이사증(李師曾) : 벼슬이 참의에 이르렀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이사정(李師程) : 이사증(李師曾)의 아우이다. 벼슬이 목사(牧使)에 이르렀다.
최정호(崔挺豪) : 본관은 해평(海平). 벼슬이 정언(正言)에 이르렀다. 압동(鴨洞)에서 살았다.
안수산(安壽山) : 안천보(安天保)의 아들이다. 벼슬이 영상(領相)에 이르렀다.
섭천지(葉千枝) : 본관은 여주(驪州). 벼슬이 전적(典籍)에 이르렀다. 수민단(壽民丹)에서 살았다.
유당(庾璫) :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유구산(庾龜山) : 벼슬이 관찰사에 이르렀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유오산(庾鰲山) : 벼슬이 관찰사에 이르렀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문경동(文敬仝) : 본관은 감천(甘泉). 벼슬이 사성(司成)에 이르렀다.
문헌(文獻) : 본관은 감천(甘泉). 벼슬이 직강(直講)에 이르렀다.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의 장인이다.
안공신(安公信) : 자(字)는 대부(大孚). 안종약(安從約)의 증손이다. 가정(嘉靖) 무자년(1528, 중종23)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정유년(1537, 중종32)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병진년(1556, 명종11)에 중시(重試)에 급제하였다.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다. 여섯 형제의 우애가 매우 지극하여 우우정(友于亭)을 지어 놓고 살았다.
김난상(金鸞祥) : 가정(嘉靖) 정유년(1537, 중종32)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황사우(黃士祐) : 벼슬이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홍언방(洪彦邦) : 함창(咸昌) 출신. 홍귀달(洪貴達)의 아들이다. 판관(判官) 문장손(文長孫)의 딸에게 장가들어 파문단(破文丹)에서 살았다.
김사문(金士文) : 자(字)는 질부(質夫).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의 증손이다. 가정(嘉靖) 무술년(1538, 중종33)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벼슬이 좌랑(佐郞)에 이르렀다. 충재(冲齋) 권공(權公 권벌(權橃))이 일찍이 일컫기를,
“공께서는 원수(元帥)의 직책을 감당하지 못할 걱정이 없었다. 당시 윤원형(尹元衡)이 권력을 쥐고 있으면서 동년의 정의로 만나보려 하였으나 사양하고 가지 않았다. 그의 지조가 이와 같았다.”
하였다.
김륵(金玏) : 김사문(金士文)의 아들이다. 만력(萬曆) 병자년(1576, 선조9)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참의에 이르렀다. 〈명현(名賢)〉 조목에 보인다.
김택룡(金澤龍) : 자(字)는 시보(施甫). 병자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였다. 벼슬이 헌납(獻納)에 이르렀다. 퇴계(退溪) 문하에서 수학하여 문필(文筆)로 명성이 있었다. 화천(花川) 성곡(筬谷)에서 살았다.
박전(朴全) : 자(字)는 면부(勉夫), 본관은 무안(務安). 진사 박원기(朴元基)의 아들이다. 가정(嘉靖) 병오년(1546, 명종1)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랑(正郞)에 이르렀다. 호는 송파(松坡)이다.
박수서(朴守緖) : 기유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이르렀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김구정(金九鼎) : 자(字)는 경진(景鎭), 본관은 함창(咸昌). 참봉 김희준(金希俊)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부사(府使)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한 공로로 삼대에 걸쳐 벼슬이 추증되었다.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에 올랐다. 호가 서현(西峴)이다.
박선장(朴善長) : 만력(萬曆) 을사년(1605, 선조38)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도사(都事)에 이르렀다. 〈명현(名賢)〉 조목에 보인다.
성안의(成安義) : 만력(萬曆) 신묘년(1591, 선조24)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벼슬이 승지에 이르렀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이여빈(李汝馪) : 본관은 우계(羽溪). 서령(署令) 이수형(李秀亨)의 현손이다. 만력(萬曆) 신묘년(1591, 선조24)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을사년(1605, 선조38)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전적(典籍)에 이르렀다. 광해군 때 이이첨(李爾瞻)이 폐모론(廢母論)을 내놓자, 공이 상중(喪中)에 은혜를 온전히 하여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는데, 승정원에서 저지되고 말았다. 드디어 산속에 자취를 감추고 나무를 이용하여 집을 만들어 살았다. 호는 취사(炊沙)이다.
박한(朴) : 자(字)는 윤보(潤甫). 박선장(朴善長)의 아들이다. 만력(萬曆) 계묘년(1603, 선조36)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여러 번 큰 고을 원을 역임하여 청렴하고 검소하다는 명성을 얻었다. 가정에서는 효성과 우애로 일컬어졌다. 벼슬이 판교(判校)에 이르렀다. 호는 회역당(悔易堂)이다.
금시조(琴是調) : 자(字)는 경평(景平), 본관은 봉화(奉化). 참봉 금복고(琴復古)의 아들이다. 만력(萬曆) 임자년(1612, 광해군4)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천계(天啓) 갑자년(1624, 인조2)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부사(府使)에 이르렀다. 호는 신암(新菴)이다.
권성오(權省吾) : 자(字)는 자수(自守). 참봉 권호신(權虎臣)의 아들이다. 만력(萬曆) 임자년(1612, 광해군4)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랑(正郞)에 이르렀고,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문장이 호한(浩汗)하였으며, 더욱이 시에 능하였다.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과 소암(疎菴) 임숙영(任叔英)이 모두 그의 문장이 고졸하고 굳센 것에 대해 감탄하였다. 호는 동암(東巖)이다.
안욱(安頊) : 자(字)는 근재(謹哉). 효자 안응일(安應一)의 아들이다. 만력(萬曆) 계축년(1613, 광해군5)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숭정(崇禎) 계유년(1633, 인조11)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다. 천성이 효성스럽고 우애로워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죽을 먹었다. 일찍이 가도문안사(椵島問安使)가 되었을 때 명나라 장수가 예우하며 말하기를,
“조선에 인물이 있다.”
하였다. 증손 안하필(安夏弼)이 동지중추부사에 오르자 집의(執義)에 추증되었다.
금충달(琴忠達) : 자(字)는 달지(達之). 직장(直長) 금시영(琴是詠)의 아들이다. 만력(萬曆) 병진년(1616, 광해군8)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천계(天啓) 갑자년(1624, 인조2)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벼슬은 도사(都事)를 지냈다. 호는 사계(泗溪)이다.
김경원(金慶遠) : 자(字)는 선유(善裕). 부사 김구정(金九鼎)의 아들이다.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였다. 벼슬은 찰방을 지냈다. 호는 동고(東皐)이다.
황익청(黃益淸) : 자(字)는 응숙(應叔), 본관은 회산(檜山). 사간(司諫) 황효공(黃孝恭)의 증손이다. 천계(天啓) 갑자년(1624, 인조2)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숭정(崇禎) 경오년(1630, 인조8)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인조 때 은대내사(銀臺內史)로서 병조낭관을 역임하고 스스로 물러났다. 벼슬이 사예(司藝)에 이르렀다.
황중연(黃中衍) : 자(字)는 덕유(德裕), 본관은 평해(平海). 판서 황유정(黃有定)의 후손이다. 무자년에 과거에 갑과로 급제하여 벼슬이 좌랑(佐郞)에 이르렀다. 스스로 ‘한천거사(寒泉居士)’라 불렀다. 평소 뜻과 행실이 독실하고,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을 다하였다. 상을 당하여 예법을 극진하게 하였고,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그것으로 인하여 묘소 아래에 집을 짓고 이름을 ‘망영재(望塋齋)’라 하고, 아침저녁으로 성묘하며 평생을 마쳤다. 문장은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저술한 시문(詩文) 약간 편이 세상에 전한다. 숙종조 찬수청(纂修廳)에서 문집을 찾았는데, 관문(關文) 속에,
“좌랑 황모는 강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佐郞黃某 講學不倦]”
라는 등의 말이 있었다.
장준남(張俊南) : 본관은 인동(仁同). 연복군(延福君) 장말손(張末孫)의 후손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찰방에 이르렀다.
김선(金鍌) : 자(字)는 여정(汝精), 본관은 선성(宣城). 천계(天啓) 을축년(1625, 인조3)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랑(正郞)에 이르렀다. 벼슬살이를 할 때는 자상(慈詳)하였고, 몸가짐이 고결하였다. 호는 매학당(梅鶴堂)이다. 〈효자(孝子)〉 조목에 보인다.
홍익한(洪翼漢) : 인조 때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이 장령에 이르렀다. 병자년(1636, 인조14)에 오달제(吳達濟)ㆍ윤집(尹集)과 더불어 강화에 반대하다 순절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고을 동쪽 원구촌(院丘村)에서 태어났다. 〈충절(忠節)〉 조목에 보인다.
성이성(成以性) : 인조 정묘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통정대부에 이르렀다. 〈명현(名賢)〉 조목에 보인다.
박안복(朴安復) : 자(字)는 중뢰(仲雷). 박한(朴)의 아들이다. 천계(天啓) 갑자년(1624, 인조2)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숭정(崇禎) 기묘년(1639, 인조17)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랑(佐郞)에 이르렀다. 호는 초당(草堂)이다.
손회종(孫會宗) : 자는 군해(君海), 본관은 경주(慶州). 생원 손약(孫禴)의 아들이다. 인묘조(仁廟朝) 계유년(1633, 인조11)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랑(正郞)에 이르렀다. 효성스럽고 우애롭고 청렴하고 근신한 것으로 일컬어졌다.
황수억(黃壽嶷) : 자는 인수(仁叟), 본관은 회산(檜山). 사간 황효공(黃孝恭)의 6대손이다. 숙종조 계유년(1693, 숙종19)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랑에 이르렀다. 문명이 있었다.
이징도(李徵道) : 자는 이시(以時). 서령(署令) 이수형(李秀亨)의 후손이다. 숙종 경인년(1710, 숙종36)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찰방에 이르렀다. 문예에 뛰어나 고을에서 명성이 있었다.
김화중(金華重) : 숙종 정묘년(1687, 숙종13)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현감에 이르렀다.
이지원(李枝遠) : 본관은 고성(固城). 숙종 경오년(1690, 숙종16)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벼슬은 찰방(察訪)을 지냈다.
홍엽(洪偞) : 본관은 남양(南陽). 벼슬은 정자(正字)를 지냈다. 생진 양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였다. 현감(縣監) 홍유경(洪游敬)의 아들이다.
성세욱(成世頊) : 자는 근원(謹元). 응교(應敎) 성이성(成以性)의 손자이고, 참봉(參奉) 성문하(成文夏)의 아들이다. 숙종 을미년(1715, 숙종41)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현감에 이르렀다. 사람됨이 강직ㆍ방정하고 몸가짐이 맑고 신중하였다. 만년에 태묘령(太廟令)으로 잠시 나갔다가 바로 돌아왔다. 호는 송파(松坡)이다.
이진주(李鎭周) : 자는 문보(文輔). 서령(署令) 이수형(李秀亨)의 후손이며 진사(進士) 성간(成幹)의 증손이다. 숙종 경인년(1710, 숙종36)에 진사(進士), 경종 신축년(1721, 경종1)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현감(縣監)에 이르렀다. 청렴한 문사였다. 금상 조정에서 입시한 신하가 아뢰기를,
“이진주는 조용히 자신을 지켜 성균관에서 공부한 10여 년 동안 재신(宰臣)과 명사(名士)가 그의 얼굴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수령을 선발할 때는 마땅히 조용히 자신을 지키는 자를 취해야 한다.”
하고, 곧이어 수령에 임명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죽었다.
손이웅(孫以雄) : 자는 만부(萬夫). 정랑(正郞) 회종(會宗)의 증손이다. 숙종 무자년(1708, 숙종34)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금상 병오년(1726, 영조2)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랑(正郞)에 이르렀다. 총명하고 박식하였으며, 행실이 확고하였다. 벼슬을 구하지 않고 초야에서 여생을 마쳤다. 호는 탄서(灘西)이다.
금옥심(琴沃心) : 자는 계여(啓汝), 본관은 봉화(奉化). 현감(縣監) 상현(尙絃)의 증손이다. 숙종 갑오년(1714, 숙종40)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금상 을묘년(1735, 영조11)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자(正字)에 이르렀다.
안택중(安宅重) : 자는 인로(仁老). 본관은 순흥. 금상 을사년(1725, 영조1)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동 을묘년(1735, 영조11)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정자(正字)를 지냈다.
이경제(李景濟) : 자는 군즙(君楫). 본관은 우계(羽溪). 생원(生員)ㆍ진사(進士) 진만(鎭萬)의 아들이다. 금상 무오년(1738, 영조14)에 과거에 급제하여 좌랑(佐郞)을 지냈다.
송심기(宋心基) : 자는 덕원(德源), 본관은 야성(冶城). 금상 신유년(1741, 영조17)에 급제하여 정자(正字)를 지냈다.
현재 생존자[時存]
강윤(姜潤) : 자는 덕이(德以), 본관은 진산(晋山). 현감(縣監) 흡(恰)의 현손이고, 생원(生員) 이일(履一)의 아들이다. 금상 정묘년(1747, 영조23)에 급제하였다.
황인채(黃鱗采) : 자는 여성(汝成), 본관은 창원(昌原). 동지(同知) 도익(道翊)의 손자이다. 금상 정묘년(1747, 영조23)에 사마 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고, 동 갑술년(1754, 영조30)에 급제하였다.
김택려(金宅礪) : 자는 - 2자 원문 빠짐 -, 본관은 - 2자 원문 빠짐 -. 금상 계유년(1753, 영조29)에 급제하였다.
황덕윤(黃德潤) : 자는 신지(身之). 사예(司藝) 황익청(黃益淸)의 증손이다. 금상 경오년(1750, 영조26)에 급제하였다.
안치묵(安致黙) : 자는 사상(士祥). 사휴(士休)로 고쳤다. 서파공(西坡公 안리(安理))의 14대손이다. 철종 경술년(1850)에 급제하였다.
[주D-001]홍언방(洪彦邦) : 본관은 부계(缶溪)이다. 홍언방의 부친 홍귀달의 연보(年譜)에 “함창(咸昌) 양적리(羊積里)에서 태어났다.” 하였고, 그 주에 “선대는 남양홍씨(南陽洪氏)이고 고려 중엽 재상 홍란(紅鸞)이 영남의 부계(缶溪)로 이사하여 살아 본관으로 삼았다.” 하였다. 《虛白亭集 續集 虛白亭年譜》
[주D-002]폐모론(廢母論) : 조선 제14대 왕 선조의 계비(繼妃) 인목대비(仁穆大妃 1584~1632)를 폐위시키자는 논의. 인목대비의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성은 김씨(金氏)이다. 존호는 소성정의명렬(昭聖貞懿明烈)이며 휘호(徽號)는 광숙장정(光淑莊定)이다. 영돈녕부사 제남(悌南)의 딸이며,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어머니이다. 1602년(선조35) 왕비에 책봉되었다. 1606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았다. 혼인할 당시 갓 19세였고 광해군은 이미 30세에 가까운 28세였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광해군 대신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던 소북(小北)의 유영경(柳永慶) 일파가 몰락하고 대북(大北)의 정인홍(鄭仁弘)ㆍ이이첨(李爾瞻) 등이 득세하였다. 1612년(광해군4) 이들의 사주를 받은 윤인(尹瑠)에 의해 살해될 뻔했으나 박승종(朴承宗)의 저지로 목숨을 보전하였다. 1613년 대북파의 모략으로 어린 영창대군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친정아버지 김제남 등과 사사(賜死)되었고, 결국 폐모론이 일어나 1618년 서궁(西宮)에 유폐되었다.
[주D-003]중뢰(仲雷) : 원문에 ‘仲電’으로 되어 있는데 ‘仲雷’의 오기이다.
첫댓글 녹사공파 (순흥파)이신 九 자 鼎 자 할아버님과 아래 대이신 慶 자 遠 자 할아버님이 문과 급제 명단에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