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문에서 금강문까지 약 2㎞에 이르는 오리숲 길. 소나무 등이 우거져 있는 이 길은 자연경관이 뛰어나 산책코스로 제격이다. |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과 경북 상주시 화북면
사이에 있는 속리산은 소백산맥의 한 줄기로서 천황봉(1057m)을 중심으로 비로봉·길상봉·문수봉·보현봉·관음봉·묘봉·수정봉 등 9개의 봉우리와
문장대·입석대·경업대·배석대·학소대·신선대·봉황대·산호대 등 8개의 대(臺)가 있는데, 천황봉 등 9개의 산봉우리가 있다고 해서 구봉산이라
부르다가 속세와 멀리 떨어진 곳이라 하여 속리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속리산은 기암고봉과 울창한 숲, 깊고 수려한 계곡과 폭포 등이
아름다워 소금강이라고도 하는데, 1969년에 국민관광지로, 1970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속리산 깊은 계곡에 천년고찰 법주사가 있다.
법주사(法住寺)는 신라 진흥왕 14년(553) 인도로 유학을 갔던 의신(義信)대사가 귀국 후 이곳의 산세가 웅장하고 험준함을 보고 절을 지었다고 하는데, 1000년쯤 지난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충청도 승병의 본거지였던 법주사를 송두리째 불태워버려서 임진왜란 이후 수차에 걸쳐 중건되었다. 따라서 법주사는 팔상전, 쌍사자석등, 석연지 등 국보 3개와 국내 3대 불전 중 하나인 대웅보전 등 보물 12개를 소장하고 있는 문화재의 보고이지만, 석조물들은 신라시대부터 전해오는 것이고 절집들은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 중건한 건물들이다.
정이품송. |
그런데, 법주사로 가는
길가에는 조선 세조 10년(1464) 정이품 벼슬이 하사된 소나무 한그루가 있는데, 이것은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조카를 죽이고 왕권을
탈취했다는 비난을 받아온 세조를 미화하는 전설 중 하나다. 세조가 법주사로 행차할 때 어가가 나뭇가지에 걸릴 상황에 소나무가 스스로 가지를 위로
쳐들어서 어가가 무사히 지나가도록 해서 세조는 소나무에게 정이품(현재의 장관급) 벼슬을 하사했다고 하여 ‘연(輦)걸이 소나무’라고도 하는데,
나뭇가지가 마치 우산처럼 사방으로 고루 펴진 모습으로 높이 14.5m, 둘레 4.77m에 이른다.
세조때 이미 어가를 방해할 정도의
크기였다면 수령은 아마도 700년 이상 됨직한 고목이어서 그동안 여러 차례 외과시술을 받았으며, 또 솔잎혹파리가 유행하던 1982년 8각형의
철제방충망을 설치했다가 1991년 방충망을 철거하기도 했다. 1993년 봄 강풍으로 서쪽 큰 가지가 부러진 모습은 법주사와 함께 오랜 풍상을
겪은 모습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다.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때 의신 대사가 지었다고 하지만, 일연 스님이 저술한 삼국유사에 의하면 통일신라 혜공왕 12년(776) 김제 금산사를
창건한 진표(眞表)대사가 이곳에 7년 동안 머무르다가 금강산으로 입산하자, 그의 제자 영심(永深) 등이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서 길상초가 난 곳에
길상사(吉祥寺)라는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을 만든 것이 시초라고 한다.
아무튼 현재의 가람은 임진왜란 후 선조 38년(1605)
유정(惟政)대사가 팔상전 중건을 시작으로 중건되기 시작했는데, 법주사사적기도 임진왜란 후인 1630년에야 만들어졌다. 그 사적기에 의하면
법주사는 삼국시대이래 역대 왕실의 보호를 받은 사찰로서 임진왜란 전까지 건물 60여 동, 석조물 10여 점, 암자 70여 개소가 있었다고
하는데, 조선 성종(1478)때 서거정이 저술한 동문선에도 속리사(俗離寺)라는 시가 수록된 점 등을 고려하면, 법주사는 아마도
길상사→속리사→법주사 등으로 이름이 자주 바뀐 것 같다.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이라는 현판이 붙은 일주문을 지나 금강문에 이르는 약2㎞의 길을 오리숲(五里林)이라고 하는데, 계절에 따라 변하는
이곳의 경치는 아주 일품이다. 절을 지키는 사천왕이 사는 천왕문은 1624년 벽암이 중창한 건물인데, 국내의 천왕문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천왕문을 지나면 오른쪽에 돌로 만든 작은 연못인 석련지(石蓮池:국보 제64호)가 있다. 불교에서 연꽃은 극락세계를 뜻한다.
법주사에서는 석연지에 물을 담고 연꽃을 피웠는데, 표면은 아래는 작은 연꽃잎을 돌려서 소박하고, 윗부분에는 큼지막한 연꽃잎을 두 겹으로 돌린 후
그 안으로 화사한 꽃무늬를 새겨서 반쯤 피어난 연꽃 모양이 마치 연꽃이 구름 위에 둥둥 뜬 듯한 모습이다. 8세기경에 제작된 통일신라시대
석련지는 균열이 심해서 걸쇠로 이어붙인 것이 안타깝다.
천년고찰 법주사에서 눈여겨 볼 것이 많지만 특히 대웅전 앞의 팔상전(八相殿)이
독특하다.
중국에서 불탑은 목탑→전탑(塼塔)→석탑으로 변천되었는데, 불교가 한반도에 전래될 때 경주 황룡사 9층 목탑을 만들기도 했으나 그
탑은 몽고란 때 소실되었다. 대웅전 앞에서 석탑을 대신하고 있는 팔상전은 벽면에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나눠서 그린 팔상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서 임진왜란 후인 1605년(선조 38) 재건한 것으로서 현존하는 국내 유일의 목조 5층탑이자 국내 탑파중 제일 높은
탑(22.7m)이다. 팔상전에는 사리를 모신 공간과 불상과 팔상도를 모신 공간, 예배를 위한 공간이 있다(국보 제55호).
팔상전(왼쪽)과 금동대불상. |
팔상전 옆에 철당간이 있고, 서쪽 산기슭에는 동양 최대의 불상인 높이
33m의 청동미륵대불이 있는데, 이곳이 원래 법주사의 정신을 상징하는 중심법당인 용화보전(龍華寶殿)이 있던 곳으로서 산호전 혹은
산호보광명전(珊瑚普光明殿)이라고도 불렀다. 산호전이란 전각의 후면 암석을 산호대라고 불렀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으로서 사적기에 의하면, 2층으로
된 용화보전은 35칸으로서 대웅전 28칸보다 더 큰 가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872년(고종 9) 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할 때 당백전
주조를 한다고 불상을 압수하면서 용화보전을 허문 뒤, 1964년 6월 용화보전 터에 시멘트로 만든 미륵불입상을 조성했다가 1986년 이를 다시
헐어내고 1989년 사월초파일에 청동 160톤의 청동미륵대불을 점안했다.
또, 팔상전과 대웅전 사이에 있는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은
통일신라 성덕왕 19년(720)때 작품으로서 8각의 바닥돌 위에 사자 두 마리가 서로 가슴을 맞대고 뒷발로 아랫돌을 디딛고 서서 앞발과 주둥이로
윗돌을 받치고 있는 모습인데, 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에는 지붕돌을 올렸다.
종래 신라 석등은
8각기둥을 주로 사용하였으나, 두 마리의 사자가 이를 대신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획기적인 시도로서 통일신라는 물론 후대에 가서도 이를
모방하는 작품이 많이 나타났다. 쌍사자 석등은 경남 합천의 영암사지 석등, 국립광주박물관의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과 함께 신라의 불교미술이
꽃피웠던 8세기 중반 신라시대의 3대 석등으로 일컬어진다.
법주사 대웅보전. |
법주사의 가장 중심인 대웅보전은 1624년(인조 2) 정면 7칸·옆면 4칸 규모의 2층 팔작지붕 건물로서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보신인 노사나불, 오른쪽에 화신인 석가모니불이 있다.
대웅보전은 부여 무량사 극락전, 구례 화엄사 각황전 등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불전중 하나로 꼽하는데(보물
제915호), 복장품은 대부분 도난당했으나 남아있던 연기문으로 불상이 조선 인조 4년(1626)에 조성되었으며, 영조 23년(1747) 불상에
금 도색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또, 원통보전(圓通寶殿; 보물 제916호)은 정면 3칸·옆면 3칸의 정사각형 단층건물로서 지붕은 꼭대기를 중심으로 4면이 기하학적으로 경사졌는데, 단순하지만 특이한 건축 양식을 갖추고 있어서 건축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건물 안에는 목조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있으며, 그밖에 명부전·약사전·능인전·진영각·사리각·염화실(拈華室)·삼성각·응향각·진해당·궁현당·명월료·정제당을 비롯하여 동쪽 암벽에 새긴 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 당간지주 등 신라시대의 작품들이 많이 있다.
또, 신법천문도 병풍(보물 제848호)·괘불탱(보물 제1259호)과 세존 사리탑(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6호)·희견보살상(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38호)·석조(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70호)·벽암대사비(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71호)·자정국존비(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79호)·철확(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3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