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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LG에는 김선진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최동수가 이었다. |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헌액자 조지 브레트는 "야구는 그레이하운드(미주 고속버스)와 같다"라고 말한 바 있다. 무슨 뜻일까.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을 것 같지만 결국엔 경적을 울리며 오지 않는가." 브레트의 대답이다.
그러니까 그레이하운드가 연착을 호흡처럼 빈번하게 해도 결국엔 정류장에 도착해 손님을 싣고 가듯 야구선수도 때를 기다리면 언젠가는 기회가 찾아온다는 뜻이다.
브레트의 표현에 합당한 선수가 있다. LG 최동수(37)다. 5월 초 잠실구장에서 그와 만났을 때 "LG 젊은 선수들의 성장이 너무 더디다는 게 세간의 평"이라는 말을 전했다. 최동수는 잠시 고개를 끄덕이다가 뭔가 생각난 듯 이렇게 되물었다.
"제가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걸린 지 아십니까?"
모를 리 없었다. 1994년 중앙대를 졸업하고 프로에 데뷔한 지 13년 만에 지난해 첫 규정타석 타율 3할을 기록했던 그였다. 그리고 올시즌 붙박이 4번 타자가 되는데 꼬박 14년이 걸렸다.
"네. 정확히 14년이 걸렸습니다. 팀 내 젊은 선수들 가운데 저보다 재능이 떨어지는 선수는 없습니다. 가끔 선수들에게 그런 말을 합니다. '기다리라고. 기다리면 반드시 기회가 온다는 믿음을 가지라고. 나를 보라고. 내가 10년을 넘어 기다려서 지금 이 자리까지 오지 않았느냐고. 너희들은 나보다 몇 배는 빨리 원하는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자기만족 같지만 그래야 견딜 수 있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야 포기하지 않아요."
최동수는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데 주저하는 이가 아니었다. 자신의 과거를 불행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저 다른 선수보다 준비기간이 조금 더 오래 걸렸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돌아보면 LG에는 최동수 같은 선수가 꽤 있었다. 그 가운데 최동수만 보면 오버랩 되는 이가 있다. 김선진(41)이다.
김선진을 아십니까
주간야구 1991년 4월 3일자 기사
교과서적인 타격폼으로 꿈을 쫓는다 (주간야구 1991년 4월 3일자 기사) 그립은 윤덕규(28),백스윙은 김상훈(31),임팩트는 박흥식(29). 그리고 모든 타격자세를 종합, 가장 뛰어난 교과서적인 타자 김선진(24). LG 백인천 감독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타자 김선진이 드디어 방망이감을 잡았다. 3월초부터 시작된 시범경기와 자체 청백전에서 누구보다 속을 태운 두 사람. 백인천 감독과 김선진이었다. 백감독은 겨우내 타격훈련에서 김선진을 칭찬해 왔고,2월중 국가대표팀의 타격을 지도할 때는 김선진을 숙달된 조교로 내세웠을 정도. 김선진 자신도 사기가 올라 우쭐했으나 어쩐 일인지 방망이는 계속 침묵했다. 지난 17일 쌍방울과의 마산 시범경기에서 김선진은 1회말 솔로 홈런을 뽑아냈다. 데뷔 이후 공식경기 첫 홈런이었다. 지난해 규정타석을 못 채우긴 했으나 .344(90타수 31안타)의 높은 타율. 그럼에도 홈런은 없었다. 김선진은 데뷔 첫 홈런이라는 기쁨보다 그제야 타격에 감을 잡았다는 기쁨이 더 컸다. 백감독도 함지박 만하게 입을 벌려 김선진을 맞았다. 이틀 뒤인 19일 진해구장에서 열린 자체 청백전. 김선진은 4타수 2안타를 때려냈다. 더욱 확실한 감을 잡은 것이다. “어느새 그립이 몸 중심 앞으로 나와 있었어요. 형들이 내 폼이 흐트러졌다고 지적해 줄 때에야 알았죠. 시즌에 들어가 그랬더라면 한해 농사를 망칠 뻔 했네요." 다시 교과서적인 타격자세를 되찾은 김선진은 올 시즌 LG 지명 타자자리의 제1후보, 1루수 자리엔 주전 김상훈(31)을 뒤이을 제2 후보로 등록되어있다. 게다가 12초대의 준족으로 기동력 야구의 첨병 역할도 주어졌다. 원래 김선진은 뛰어난 유격수였다. 광주 월산국교 4년 때 야구를 시작. 투수에서부터 포수까지 두루 뛰어보았고, 충장중에 진학해서부터는 유격수를 제자리로 삼았다. 광주일고를 거쳐 연세대 1학년 때까지도 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전 유격수에 중심타자. 그러나 2학년 때 허리부상으로 4개월을 쉰 뒤 곧바로 경기에 투입, 어깨에 무리가 와 어깨를 못 쓰는 반쪼가리 선수로 전락했다. 이 때문에 고향팀 해태에서는 지명조차 하지 않았고, 삼성에서 가까스로 2차 지명을 해주었으나 계약을 해주지 않았다. 실업팀에서도 불러주지 않아 89년 2월 졸업 이후 갈 곳이 없었다. 일본의 모도키는 여러 팀에서 드래프트 1순위로 지명, 자신은 요미우리로 가고 싶어 1년 동안 낭인생활 끝에 뜻을 이루었다. 김선진은 거꾸로 가고 싶은 곳은 많으나 오라는 곳이 없어 89년 한 해 동안 낭인생활을 했다. 모교인 연세대에서 후배들의 훈련을 거들고 기숙사에서 같이 지내는 생활. 프로팀에 입단하기 위한 재수생활에 다름 아니었다. 그 사이 양방, 한방 등 어깨에 좋다는 치료방법을 다 동원했다. 뚜렷한 병명도 나오지 않아 더 답답했다. 심지어 야구계에서‘변도사’로 유명한 한의사 변영호 씨에게까지 찾아가 치료를 받았지만 별무신통. 선수생활을 포기할까도 했지만, 사부님 김충남 감독(연세대 )이나 후배들이 부추겼다. 이강철(25,해태), 박준태(24,태평양) 등 광추일고 동기들이 프로에서 활약하는 TV나 신문을 보면 피눈물이 나왔다. 치료는 포기하고 훈련만 계속했다. 어렵사리 89년 11월 태평양의 입단테스트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1주일 만에 쫓겨나는 신세. 절망이었다. 그즈음 LG에서 연락이 왔다. 테스트를 해보자는 것. 그나마도 백인천 감독의 경동고 직속후배인 김충남 감독이 말을 넣은 끝에 얻어낸 기회였다. 지성이면 감천. 테스트 결과는 합격이었다. 계약금 l천만 원에 연봉 1천만 원의 D급 대우도 감지덕지. 지난해 후반 김상훈의 잔부상으로 1루수 자리에 빈틈이 생기자 2군을 오가던 김선진에게 기회가 왔다. 재수생활과 입단 이후 백인천 감독에게 배우며 닦은 타격 솜씨를 맘껏 뽐냈다. 프로에의 적응에 성공한 것이다. 그 사이 까닭도 모르게 어깨도 좋아져 갔다. "됐다. 해보자. 지명타자로,1루수로 내가 설 자리는 얼마든지 있다. 꿈으로 끝날지 몰라도 어깨만 다 나으면 김재박 선배를 뒤이어 유격수로도 뛸 수 있을지 모른다." 프로 선수로서의 꿈을 김선진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자리였던 유격수로에의 복귀에 두고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다. 꿈이 있는 한 그냥은 사라지지 않겠다는 뜻이다. 유일한 프로야구 재수생 김선진. 교과서적인 타격자세 하나만으로 프로무대에 우뚝 서려는 모험을 걸고 있다. <김도형 기자>
야구재수생 김선진
1992~2000년 LG의 김선진
교과서적인 타격자세로 백인천 전 LG 감독의 신임을 받으며 1992년 주전 1루수를 노렸던 김선진. 그러나 기회는 오지 않고 일은 꼬이기만 했다. 그해 타율 2할5푼5리, 3홈런, 18타점, 12도루를 성공하며 프로 2년 차치고는 좋은 활약을 선보였지만 백 전 감독이 정규시즌 중 갑자기 선수단에 '시즌 포기'와 '결별'을 선언하며 든든한 후원자를 잃었다.
여기다 ‘제 2의 김재박’을 꿈꿀 정도로 완쾌됐다고 믿었던 어깨는 결국 낫지 않았다. 지금도 그는 이따금 어깨 통증으로 고생한다.
백 전 감독의 사퇴와 어깨 회복이 무산되며 김선진은 방황을 거듭했고 1992년부터 1993년까지 각각 66, 57경기에만 출전하며 잊혀진 선수가 됐다. 1993년 삼성과의 플레이오프에서는 천국과 악몽을 동시에 경험하기도 했다. 당시 삼성은 잠실 LG 원정 1, 2차전에서 연거푸 이기며 한국시리즈 진출을 눈앞에 뒀다. 여기다 대구 3차전 선발로 박충식을 내세운 터라 쉬운 승리가 예상됐다.
이에 반해 LG는 3차전 선발을 자청한 정삼흠 대신 신인 이상훈 카드를 집었다. 정규시즌 14승의 삼성 에이스 박충식과 풋내기 이상훈의 대결은 그러나 시속 145km의 강속구와 슬라이더로 탈삼진 10개를 빼앗으며 7.2이닝 동안 1안타 무실점으로 대활약한 이상훈의 승리였다.
김선진의 진가가 발휘된 건 4차전이었다. 양팀 선발 김상엽과 정삼흠은 5회까지 성난 짐승을 길들이는 과묵한 사육사처럼 잔뜩 흥분한 상대 타선을 능숙하게 요리했다. 6회초 LG 공격에서 선두 타자 이병훈이 볼넷으로 진루하자 이때부터 LG 타선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 선봉에 김선진이 있었다.
이병훈의 대주자로 기용된 김선진은 감독 사인이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도루, 이른 바 '그린 라이트'를 감행해 성공했다. 이뿐이 아니었다. 1사 후 다시 ‘그린 라이트’로 3루 도루를 시도했다. 삼성 포수 김성현이 놓칠 리 없었다. 3루 김용국을 향해 송구를 시도하는데.
"그때 공이 뒤로 빠졌어요. 3루 도루로 그칠 게 홈인으로까지 이어졌지요. 그 1점을 시작으로 타선이 터져 우리(LG)가 5-0으로 이겼습니다." 김선진의 기억이다. 여기까지는 천국이었다. 다음날 경기에서 김선진은 야구인생 최대의 악몽을 경험하게 된다.
"플레이오프 5차전이었습니다. 2회인가 선발 김태원이 삼성 이종두 선수에게 2점 홈런을 맞았을 겁니다. 선수단이 당황했지요. 하지만 3회 우리가 3점을 내며 경기를 역전시켰어요. 이때는 다들 좋아라들 했지요. 그런데 야구가 어디 마음대로 되나요. 3회말 공격에서 삼성이 다시 2점을 내 경기가 3-4로 역전됐습니다. 순식간의 일이었지요."
3-4로 뒤진 LG는 4회부터 마운드를 지킨 삼성 박충식을 상대로 기회를 얻지 못했다. 운명의 7회가 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7회 우리가 연속 안타를 치면서 1사 1, 3루 찬스를 잡았을 거예요. 그때 제가 대주자로 3루에 있었습니다. 바짝 긴장했지요. 그런데 정규시즌 말미에 대구구장에서 3루 도루를 시도하다가 무릎을 다친 적이 있었어요. 그날따라 무릎이 좋지 않더군요.”
그런 무릎으로 김선진은 전날 연속 도루를 하고 득점까지 올렸다. 왜 하필 이날 무릎에 통증을 느꼈던 것일까. “전날도 무릎이 아팠어요. 하지만 당시 저 같은 백업선수가 어디 ‘아프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의 고통을 코칭스태프에게 알렸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랬다면 그렇게 많은 비난을 받지 않았겠지요.”김선진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쉽기만 하단다. 그럴 만도 했다. 지금도 자신 때문에 1993년 LG의 한국시리즈 진출이 좌절됐다고 보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1점 차로 뒤진 상황에서 3루 주자로 있으니까 평범한 내야땅볼이라도 홈으로 들어와야 하는 책임이 있었어요. 조금씩 리드 폭을 넓히는데 삼성 김용국 선배가 그걸 알아챘던 모양입니다. 아, 글쎄.”
“페인팅을 썼지요.”삼성 김용국 2군 수비코치의 말이다. “어떻게 하든 3루 주자의 홈인을 막아야 하니까 전진수비를 하고 있었어요. 당시 LG가 주루플레이가 아주 좋았어요. ‘아, 이거 평범하게 수비하면 3루 주자 홈인을 막지 못하겠다’싶더라고요. 그래서 머리를 짜냈습니다. (박)충식이가 투구하기 위해 발을 들 때 마치 견제구를 받는 것처럼 3루로 뛰어가면 (김)선진이도 얼떨결에 3루로 되돌아오겠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용국의 예상이 맞았다. 박충식이 발을 들자 김용국은 3루로 향했고, 박충식의 동작을 견제로 판단한 김선진은 홈으로 뛰려다 3루로 돌아왔다. 그때였다. 타자가 배트를 휘두르고 “딱!”하는 소리가 났다.
“3루로 몸을 틀다가 1루 땅볼이 되자 다시 몸을 돌려 홈으로 질주했습니다.” 김선진의 기억이다. “당시 1루수가 타구를 역동작으로 어렵게 잡았어요. 평상시 같으면.” 김 코치의 회상이다.
“평상시 같으면 세이프였겠지요. 하지만 당시 무릎이 완전하지 않아 급하게 몸을 돌리지 못했고 빠른 걸음으로 홈을 향해 뛸 수도 없었어요.” 김선진은 이 대목에서 아쉬운 듯 한숨을 토해냈다.
“스타트가 늦었던 탓이지요. 김선진이 홈으로 질주했지만 타이밍이 늦어 홈에 오기도 전 아웃되고 말았습니다.”지금도 김 코치는 3루에서 주춤하던 김선진을 떠올리면 묘한 감정이 든단다.
7회 이후 다시 찬스는 찾아오지 않았고 그대로 스코어가 굳어져 삼성의 한국시리즈 진출이 확정됐다. 성난 LG팬들은 김선진을 비난했고 코칭스태프 역시 그에 대한 믿음을 접는 듯했다. “구단도 저를 방출 혹은 트레이드 시키려고 여기저기 알아본 모양입니다.” 김선진의 말이다. 실제로 구단 프런트는 김선진과의 ‘결별’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2000년 은퇴 때까지 줄곧 스트라이프 유니폼을 입지 않았나.
“구단에서 절 자르려고 할 때 공교롭게도 결혼을 했어요. 상대요? 구단 홍보팀 직원이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구단 직원과 결혼한 1호 야구선수일 겁니다.”김선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팀과의 ‘결별’을 앞두고 ‘결혼’을 했으니 상심이 클 만도 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결혼이 저를 살렸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긴데 구단 내부에서 ‘결혼한 지도 얼마 안됐는데 방출하면 신혼부부의 생계는 어떻게 하느냐. 그건 너무 가혹하다’는 소리가 나왔대요.”
LG는 방출 대신 1년 더 기회를 주기로 했다. 만약 LG의 인내심이 없었다면 1994년 태평양과의 한국시리즈 1차전 연장 11회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LG의 한국시리즈 마지막 우승은 1994년이 아니라 1990년으로 기억됐을지 모른다.
1994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뒤 챔피언 반지를 들고 있는 김선진. |
“양팀이 연장 11회까지 1-1로 팽팽히 맞섰어요. 그날 태평양 선발 김홍집이 물러나고 다시 왼손 투수가 나오면 한 번은 대타로 나갈 거란 예상을 하고 있었어요. 끈질기게 기회가 오길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김홍집이) 좀 잘 던졌습니까. 연장 11회 가만히 있는데 ‘대타 김선진’하는 거예요.”
김선진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유가 있었다. “김홍집의 미세한 쿠세(투구습관)를 읽고 있었습니다. 글러브 모양을 보고 구종을 눈치 챈 거지요.”김선진이 예상한 초구는 슬라이더였다. 잔뜩 어깨에 힘이 들어간 김선진이 초구를 향해 힘차게 배트를 휘두르고.
미국야구에 이런 말이 있다. ‘베이브 루스가 위대해도 베이스볼보다 위대하지 않다.’적절한 말이다. 베이브 루스가 제 아무리 위대해도 때론 무명선수의 홈런이 더 극적이고 감동적일 때가 있는 법이다. 그 타석에 터진 김선진의 홈런이 그랬다.
“정신없이 홈까지 들어온 것 같습니다.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귀가 ‘멍멍’했던 기억만 나요.” 김선진의 홈런으로 1차전 승리를 따낸 LG는 이후 4차전까지 연승에 성공하며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안았다.
31살에 주전이 되다
1994년 한국시리즈 이후 김선진은 코칭스태프와 팀의 신임을 얻기 시작했다. 이듬해 후반기 에는 붙박이 1루수 겸 4번 타자로 출전하기 시작했다. 이해 그가 기록한 성적은 타율 2할9푼4리, 9홈런, 39타점이었다. 다음해가 더 기대되는 성적이었다.
그러나 김선진이 정작 주전 자리를 따낸 건 그의 나이 31살 때인 1998년이었다. 이해 부상으로 주전 1루수 서용빈이 팀에서 이탈하자 김선진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김선진은 역대 개인시즌 최다인 115경기에 출전하며 타율 2할8푼2리, 8홈런, 46타점을 기록했다. 이해 LG의 포스트시즌 진출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이가 바로 김선진이었다.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에 주전이 됐으니 왜 기쁘지 않았겠습니까. 연습 때 스윙을 1천 개 이상씩 했던 기억이 나더군요. 남들 쉴 때 스윙하고 남들 스윙할 때 2배로 스윙한 게 도움이 됐습니다. 그때 한창 힘들 때 본 후배가 최동수였어요.”김선진의 최동수에 대한 칭찬이 이어졌다.
“무척 성실하고 우직한 선수에요. 이런저런 생각하지 않고 야구에만 몰두하는 친구였지요. (최)동수가 무명일 때 하도 열심히 훈련하니까 주변에서‘바보 같다’는 소릴 할 정도였어요. 하지만 그때 땀을 흘린 게 오늘의 최동수를 만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야구는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종목이잖아요.”
어쩌면 최동수에 대한 찬사는 스스로에 대한 격려인지 모른다. 김선진이나 최동수나 같은 질량의 땀을 흘렸고 결국 서른이 넘어 꽃을 피웠다. 오늘의 절망은 그저 한 타석에 지나지 않는다. 내일 타석에서 희망을 쏘아 올릴 수 있는 게 야구인 것이다.
김선진은 주전 때의 화려했던 기억보단 대타로 나설 때를 더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대타로 나갈 때 부담이 큽니다. 경기 초반에는 대타를 쓰지 않아요. 경기 중후반 찬스 때 나가게 마련인데 ‘이 타석에서 모든 게 결정된다’는 생각을 하면 생각이 많아져요. 현역 때는 줄곧 그런 생각만 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아니어도 동료들이 있다. 잡생각 하지 말고 내가 할 일만 최선을 다하자.’ 그런 생각이 대타로 성공하는데 도움이 된 듯합니다.”
‘내가 아니어도 동료들이 있다’는 과거의 다짐을 요즘 LG경기를 보면서 다시 떠올린다고 한다. “예전 LG는 신참이 잘하면 고참이 그걸 시샘하지 않고 잘 밀어주고, 신참은 고참의 벽을 꼭 넘어야지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승부욕이 있어요. 그런 승부욕이 가능했던 게 팀워크를 우선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봅니다. ‘내가 아니어도 동료들이 있다’는 생각으로 똘똘 뭉치면 (LG가)올시즌 최하위지만 반드시 좋은 성적을 거두리라 생각합니다.”
김선진은 2000년 은퇴 뒤 서울 중대 초등학교 감독으로 부임해 유소년 야구를 지도했다. 그리고 성남 성일중학교에서 2005년까지 감독으로 재임하며 그해 전국소년체육대회 우승을 끝으로 지도자 생활을 접었다.
“제 고향이 전남 광주입니다. 2005년 야구계를 떠나면서 고향으로 내려왔어요. 얼마 전까지 자동차 충전소 사업을 하다가 지금은 새로운 사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 그는 아직도 LG를 '우리팀'이라고 부른다. |
김선진은 최근까지 야구계로부터 부름을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다시 야구계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대신 초등학교 5학년 아들에게 야구를 시키려고 했단다. “그런데 영 운동에는 소질이 없네요. 오히려 아들보다 중학교 1학년인 딸이 운동신경이 좋아요. 여자야구를 시킬 수도 없는 일이고.” LG의 리더에서 이제는 한 가정의 리더로 변신한 김선진은 사람 좋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아직도 ‘우리팬’이라고 부르는 LG팬들을 향해 꼭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제 현역시절을 돌아봐도 우리팬들은 팀 성적에 관계없이 항상 과분한 응원을 해주셨습니다. 비록 요즘 팀 성적이 좋지 않지만 예전처럼 응원해주신다면 후배들이 꼭 좋은 성적으로 보답하리라 믿습니다. 한 번 바람 타면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게 우리팀의 특징입니다. 기다리고 지켜봐 주십시오. 과거 우리들처럼 후배들도 팬들을 속이지 않을 겁니다.”
김선진은 덧붙여 그의 각별한 후배인 최동수에게도 덕담을 잊지 않았다. “(최)동수야, 항상 하던 데로 성실히 운동하길 바란다. 야구선수는 유니폼을 입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언제까지나 LG 유니폼을 입고 네가 좋아하는 그라운드에서 뛰길 바란다. 나처럼 말이다.”
야구선수의 성공비결은 의외로 간단하다. 과거 김선진이나 지금의 최동수처럼 정해진 훈련시간 외에도 혼자서 훈련을 하는 것이다. 지금 LG에게 필요한 게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