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범의 내러티브, 스토킹은 지고지순한 사랑이었다]
“10년을 하루처럼 옛사랑을 맴돈 한 남자의 지긋지긋한 사랑 혹은 지고지순한 집착의 시작과 끝.
그 찬란하고 애틋한 기억을 만난다!”
- 영화 <나홀로 휴가> 줄거리 중
‘사랑’?, ‘지고지순한’?, ‘찬란하고 애틋한’?
스토킹은 여전히 이따위 수식어가 붙어 유통·소비될 수 있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오늘 서울동부지방법원에서도 그랬다.
지난 4월 서울 가락동에서 발생한 스토킹 살인사건의 1심 선고 전 마지막 공판이 진행됐다.
피고인 변호사는 피고인 신문을 진행하면서,
지고지순한 사랑, 집착의 시작과 끝의 드라마를 써내려갔다.
“이별의 깊은 상처가 있는 피고인은 피해자를 만나 치유되었다고 느꼈고,
피해자와 결혼을 생각하며 돈을 모으고 지극정성으로 대하며 피해자를 많이 사랑했다고.
그런데 피해자의 배신으로 피고인은 좋았던 꿈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과거처럼 비참하게 헤어짐을 당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심한 말을 하기도 했지만,
바로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피해자 가족에게도 사죄를 했다고.
스토킹이나 협박이 아니라 피해자를 깊이 사랑했기 때문이었고,
‘관계회복을 위한 노력’이었다고.
그러나 피해자의 헤어짐에 대한 마음이 확고했고, 이에 우울증이 심해져 자살을 결심했다고.
자살도구를 가방에 넣고 다니며 죽음을 준비하면서, 살인사건 당일에 피해자가 보는 앞에서 자살을 하러 간 것이라고.”
그렇게 살인범은 지고지순한 사랑에 배신당한, 이별에 따른 마음정리를 못한 ‘상처받은 자’로 스스로를 위치 지웠다. 피해자에게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와 고통의 기억이었을 폭력의 시간들을 ‘아픈 사랑과 그 비극적인 결말’인양 떠들어댔다.
“너를 많이 사랑해서 그래”, “다 너를 위해서야”, “사랑한다면서 이것도 못해줘?”,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데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니?” 데이트폭력 가해자들이 폭력을 행사하면서 많이 하는 말들이다.
가해자들은 ‘사랑’의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하거나 이해를 구하고, ‘사랑’을 배반한 피해자를 단죄한다. 그리고 스토킹을 ‘구애행위’나 ‘마음정리의 과정’ 정도로 미화한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사랑한 죄밖에 없다”라는 가해자들의 외침.
문제는 이러한 외침이 여전히 아무렇지 않게 여기저기를 활보하고, 설득력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그 자체가 폭력인 이따위 가해자들의 내러티브를
더 이상 이 땅에 발 딛게 해서는 안 된다.
그건 사랑도 뭣도 아닌, 폭력이다.
친밀해서 더욱 치명적인 범죄이다.
다가오는 10월 6일, 선고 공판이 진행된다.
끝까지 스토킹과 협박, 계획적인 살인 범행을 부인하는 가해자에게
재판부는 엄중한 처벌로 응답해야 할 것이다.
* 당신과 함께하는 기억의 화요일 ‘화요논평’ 20160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