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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무단으로 퍼갈 수 없습니다. 서동요의 전설-궁남지 글/사진: 이종원
궁남지 부여시내의 남쪽에 자리 잡은 궁남지를 찾았다. 궁남지는 634년에 만들었으니 우리나라 연못 중에서 가장 먼저 조성된 인공연못이다. 경주의 안압지보다 40년이 앞섰고 안압지의 원형이라고 하니 눈이 부라려진다. 지금의 연못은 원래 연못보다 많이 축소 되었다고 한다. 연못 주변에 연꽃단지가 있는 걸 보니 연못은 그곳까지 펼쳐졌을 것이다. 연꽃이 가득 피는 8월이면 전국의 사진쟁이들이 그 장면을 담으려고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이기도 하다.
삼국사기를 보면 '백제 무왕 35년에 궁의 남쪽에 물을 파고 20여리밖에서 물을 끌어다 채우고 주위에 수양버들을 심고 못한가운데 섬을 만들었는데 방장선산을 모방하였다.' 라는 말이 나온다. 천년 전 책에 나온 내용과 내가 보고 있는 것과 똑같이 들어 맞는다. 연못 주변엔 수양버들이 하늘거리고 가운데는 섬에 있어 포룡정이 앉아 있기 때문이다.
서동요 삼국유사에도 궁남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비 남쪽 연못가에 궁궐에서 혼자 사는 여인이 있었는데 궁남지에 사는 용과 교통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백제 30대왕 무왕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용은 왕을 말하는 것이겠지.) 그 여인은 생활이 어려워 마를 캐다 팔았기에 그 아들 이름을 서동이라고 불렀다. 서동은 점점 자라서 효성이 지긋하고 기골이 장대한 장부로 성장하였다. 어느날 궁궐에서 늙은 신하가 찾아와서 왕의 밀명이라고 하면서 서라벌에 잠입하여 신라 궁정을 탐지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서동은 서라벌로 들어가 마를 파는 사람처럼 살면서 백제의 스파이가 된다. 그렇게 열심히 정보를 수집하다가 진평왕의 셋째딸인 선화공주를 길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의 눈이 짜리릿.......첫 눈에 반한 것이다. 그러나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국적과 신분이 달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된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노무현의 아들이 김정일의 딸을 사랑하는 것이겠지. ^^ 역시 정보부소속 답게 서동은 아이디어를 짜낸다. 서라벌 아이들에게 서동요를 퍼뜨린 것이다.
소문은 꼬리를 물고....대궐까지 퍼졌다. 결국 진평왕은 선화공주를 귀양보내고 서동은 기다렸다는 듯이 선화공주를 데리고 백제로 귀향하여 행복하게 살았다는 얘기다.
국경을 초월한 애뜻한 사랑이야기가 천 4백년이 지난 오늘날 궁남지 연못에 퍼져 있다.
스님 한 분이 포룡정에서 대금을 연주한다. 피리속에서 서동의 사랑이야기가 흘러나오는 듯 하다.
궁남지 바깥엔 노란 벼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 백제인의 후예가 오늘도 삶의 터전을 일구고 있다.
계백장군 동상-부여시내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다.
황산벌이냐? 탄현이냐 ? 신라와 당나라가 육지와 바다로 포위망을 좁힌다. 위급함을 느낀 의자왕은 긴급국가보회의를 개최한다. 적을 막을 해결책이 나오지 않자 의자왕은 귀양 보낸 흥수한테 자문을 구한다. 흥수는 "평야에서 싸우면 승산이 없습니다. 엄폐물이 있는 산에서 싸워야 이길 수 있습니다." 황산벌이냐? 탄현이냐? 절대절명의 위기다. 백제군은 산악전투에서 쓰라린 패배의 경험한 적이 있었다. 경주 여근곡에서 전원 몰살의 기억이 의자왕을 괴롭혔던 것일까? 왕은 결국 황산벌을 선택했다. 백제군 5천과 신라군 5만명...객관적인 전력이야 질 수 밖에 없던 형국이다. 그러나 후대의 이순신장군도 그렇듯 정신력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지 않던가? '여기서 물러서면 우리나라는 끝장이야. ' 황산벌 전투 4전 4승 ..기적적인 승리였다. 신라군은 당황했다. 뭔가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결국 소년병인 화랑을 총알받이로 앞세운 것이다. 아니 화살받이... 아들 같은 소년군이 창을 들고 장렬하게 죽는 것을 보고 신라군은 다시 정신력으로 무장하게 된 것이다. 결국 계백장군과 5천의 결사대는 황산벌에서 장렬하게 산화한다. 역사는 늘 가정이 따른다. 만약 흥수의 말을 듣고 탄현에서 게릴라 전투를 했다면... 신립장군의 충주 배수진과 더불어 ....아쉬움이 남는 역사다.
오천결사 충혼탑 궁남지 근처에 오천결사 충혼탑이 서 있다. 계백장군과 5천결사대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헤 2002년 세워졌다. 입구 탑은 백제치미를 형상화 했으며 중앙 연결부위는 인동문을 조각했다. 죽음을 무릎쓰고 돌진하는 5천결사대의 모습에는 긴장감이 서려 있다.
갑자기 황새가 훠이 날아간다. 오천결사대의 원혼인가?
정림사 5층석탑 현재 남아있는 백제탑은 미륵사지탑과 정림사지 5층석탑이 전부다. 익산 미륵사탑이 수많은 부재를 엮어 만든 목탑의 형식이라면 정림사탑은 그 목탑형식을 더욱 단순, 세련되게 정제시킨 석탑이다. 구한말 서양에서 양복이 처음 들어왔을 때 가다마이(양복상의)에다 바지저고리를 입은 모습을 드라마에서 본 적이 있다. 바로 정림사 5층석탑이 그렇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탑이기에 혹자는 석탑의 시원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정림사탑은 목탑의 흔적이 여럿 보인다. 단층인 기단은 지붕돌에 비해 좁고, 모서리 기둥이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면서 목조건물의 배홀림기법을 사용했다. 지붕의 받침돌은 건물의 둥근 보처럼 둥글게 다듬어 놓았다. 지붕돌은 얇은 판석을 깔았고 처마만 살짝 반전시켜 놓은 것이다. 백제 목탑의 형식을 추정할 수 있어 아주 귀중한 문화재다. 백제는 망했어도 장인의 손맛은 변함이 없나보다. 고려의 탑들도 정림사 탑을 그대로 본땄으니 말이다. 강 건너편의 장하리 삼층석탑 , 부여 무량사탑, 서천의 비인오층석탑 , 익산의 왕궁리오층석탑도 백제의 후예들이 만든 것이다.
정림사의 백제의 이름은 ? 1942년 발굴 당시 '대평8년...정림사...' 라는 기와조각이 발견되었다. '대평8년'이면 고려 현종 19년을 말한다. 결국 정림사는 고려때의 이름이다. 백제 때도 정림사란 이름을 가졌을까? 영원한 수수께끼다. 솔직히 백제의 유적지를 둘러보면 짜증이 난다. 남아 있는 역사도 변변치 못하고 굴러다니는 돌조각을 몇편을 가지고 유추해석을 해야 하니 말이다. 역사의 패배자이기에.... 지금 강당만 복원이 되었다. 백제 치미를 올렸고, 아마 봉정사 극락전 건물을 본따 올린 것 같다.
강당엔 보물인 석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머리가 없어 후대에 맷돌을 갈아 올렸다고 한다. 어쩐지 앞 뒷모습이 납작하다. 손 역시 헤져서 볼 수가 없다. 망국의 한을 그려낸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연꽃문양이 세밀한 대좌가 볼 만하다.
정림사 문화해설사인 이만식선생님이시다. 평범한 시골의 촌로처럼 보이지만 이 분의 설명은 막힘이 없다.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 오랫동안 귀한 말씀을 들었다. 지방에 가면 이런 향토사학자들을 만나 무척이나 행복하다.우리 역사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석탑의 시원인 정림사탑과 헤어져야 한다. 해도 뉘엿뉘엿 기울어져 가고 있다. '백제는 갔어도 백제 땅은 남아 있습니다. 부디 이 땅을 지켜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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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 스님 예전에 낙화암에서 뵈었었는데... 여기저기 다니시나봐요? 가는 발걸음을 붙잡을 정도로 매력적인 대금연주였는데... ^^ 잘 보구 갑니다 행님 ^^
우와~~~ 나도 그 대금소리 듣고싶네 ^^
보내주신 멜로 자세히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놀에 오니 매일 소중한 자료가 제게 배달 되는군요. 작년 여름 아이들과 함께 부여와 익산 답사를 몇 군데 했는데 시간상 궁남지를 못 가고 대신 계백장군묘를 보고 왔습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에는 백제의 슬픔이 남아 있습니다.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것을 기념하다'라고 쓴 글이 남아 있습니다. 석탑의 시원은 미륵사지석탑이 아닌가요? 제가 그렇게 알고 있어서 여쭤봅니다.
부여는 울 외갓댁이라 여러번 갔었죠..그러다가 아주 오랜만에 지난 6월에 남부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가봤습니다..먼저 부소산의 고란사와 낙화암등(정자에서 얼린맥주한캔!와~우 좋습니다)보구 조각공원(조각작품과 푸른잔디랑 사진 정말 잘 나오더군요)..그리고 정림사지탑보고 궁남지보구..당일로 다녀왔는데.
참으로 알찬여행이였고...추천하고픈 코스였답니다...대중교통이나 자가용을 갖고가기에 모두! 예전에 비해 교통시간도 무지 단축되었거든요...
별모레님 석탑의 시원은 미륵사지가 맞습니다. 미륵사지는 목탑에 가깝구요..보다 간결하고 세련된 것이 정림사지지요.그런데 미륵사지와 정림사지 중에서 어디가 먼저 만들어졌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석탑의 정형중에도 가장 오래된 것은 정림사지가 아닐까 해서그렇게 글을 쓴 것 같습니다.^
이종원님 ...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