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상자
2021년 11월 28일 본문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4:7-9
(4:7)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4:8)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4:9)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형제의 의미는 같은 부모에서 태어난 자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소속이 하나가 되는 겁니다. 이 소속 안에서 ‘나’만 이라는 단독 개념은 챙길 수 없습니다. 이는 곧 개인들의 역량은 하늘나라에서 일찌감치 인정해주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세상은 나와 너 사이의 경쟁이 형성되는 세상입니다.
이는 곧 ‘나의 판단’과 ‘너의 판단’, 혹은 ‘나의 선택’와 ‘너의 선택’ 사이의 가치 비교를 말하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의 판단과 선택이 남긴 것은 ‘하나님을 살해함’입니다. 인간들이 너무나도 각자 자기 위주라서 타인으로부터 한 소리 듣는 것을 죽기보다 더 싫어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나오는 “이미 너희들은 서로 사랑하고 있으니 내가 너희들에게 더 해줄 말은 없다”가 성사된다는 것은 기적에 속하는 바입니다. 인간들의 각자 자신 본성은 모든 게 아담 한 사람에게서 전달받은 겁니다. 따라서 이미 아담이 하나님의 명을 거룩했으면 그 안에서 태어난 모든 인간들은 다 본성적으로 하나님의 명을 거부하게 되어 있습니다.
본디 천국이란 예수님께서 죽지 아니하면 생겨나지 않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만이 이 땅에서 죽었기에 비로소 생겨난 나라가 천국이기에 인간들은 죽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은 너무나도 마땅한 겁니다. 그러나 숨 끊어진다고 해서 다 천국가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죽음을 당해도 마땅한 요소가 발각되면서 죽어야 천국갑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판단과 선택’입니다. 인간들이 성령님을 거스리는 것은 나름대로 자기 의견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판단과 의견이 모아져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거스리는 짓을 했습니다.
이와 같은 인간의 행위를 성경에서는 보편적으로 봐서 그 원인을 알려주십니다. 그것이 시편 115:1-8에 나옵니다. “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옵소서 어찌하여 열방으로 저희 하나님이 이제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
즉 인간은 우상을 그냥 섬기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이상형이라고 여기고 섬기기에 곧 본인과 우상이 동격인 겁니다. 이미 인간은 자신이 신이기에 자신을 대변할 신을 자기 손으로 만들어내는 겁니다. 이는 예수님이나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죽지 않고 계속 살릴 신을 찾는 겁니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말은 곧 자신의 판단과 선택과 그리고 그 결정으로 나타난 결과에 대해서도 자신이 영광받고 싶어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인간들의 개별적 개성이나 가치를 일체 인정해주시지 않습니다. 도리어 성령님께서는 동질성을 확보하십니다. 인간의 선택 말고 하나님의 선택하신 분에 입각해서 동질성을 만들어내십니다.
예수님깨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선택에 의해서 나타나신 분이십니다. 그분 자체가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영원전부터 계획해놓으신 선택과 인간의 선택이 대결구조로 만나게 됩니다. 인간의 선택의 취지는 이러합니다. “내가 판단하고 결정한 그 결과로 나는 살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은 내일을 미리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선택은 곧 결과를 모르는 미래에 대한 도박입니다. 이 세상 어디에는 도박이 안 일어나고 있는 곳은 없습니다. 전쟁터나 교회 안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나고 벌어지고 있습니다. 모든 곳에서 자신의 운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선택하고 결과를 낳아도 성령을 거스리는 일이 될 뿐이요 형제에 속해지지 않는 일들입니다. 그것은 성령께서는 오직 하나의 선택이신 창세전의 영원한 선택만 고수하시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구원에 이르고자 합니다.
하지만 성령이 선물로 임하게 되면, 사람들은 평소 버릇처럼 자기 것으로 삼기 위해서 성령을 취하고 성령을 선물에 담았던 그 선물 상자는 버리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실려온 상자는 곧 창세 전에 약속하셨던 아버지의 아들의 관계를 보여준 상자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도리어 자신의 선택과 판단이 살아 있는 곳을 버리고 그 상자로 옮겨타게 됩니다.
성령께서 하신 일이 바로 이 일이었던 겁니다. 성령께서는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예수님께서 가셨던 그 코스, 곧 죽음으로 통하는 정코스에 들어갈 수 있게 하십니다. 이 코스 안에서 성도는 전에 자신이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를 생생히 느끼게 됩니다. 그는 ‘내가 나를 관리한다’는 식으로 살아온 겁니다.
이렇게 되면 형제라는 것은 어떤 공통성으로 만나게 되는데 그 공통성이란, “나는 내 열심과 요령과 판단 하에 살아왔다”가 성령님을 거스리게 했음을 자인하게 됩니다. 인간들이 죽어서도 자아성을 잃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선택을 영원히 유지시키려 하십니다.
따라서 영원한 사랑의 선택을 받은 분이신 예수님께서 어느 세계에서 죽임을 당했는지를 확실하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십자가 사건을 유발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인간들은 영원히 이 죽음에 대해서 책임져야 할 처지에 있습니다. ”그를 찌른 자도 볼 것이요“(계 1:7)
즉 십자가 보혈의 피는 공짜가 아니었던 겁니다. 천국과 지옥을 통해서 그 취지는 영원히 이어져야 할 내용이었습니다. 자기 판단과 선택을 거부하는 자는 마치 무기물은 돌멩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 하나님이 선택만 있다면 그 돌멩이도 아브라함 자신이 될 수가 있는 겁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9) 영원한 사랑의 선택만이 성도로 하여금 예수님의 세계에 참여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선택만이 우리 안에서 작렬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21-12-06 08:18
15강-데살로니가전서 4장 7-9(선물상자)211205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 7-9절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7-9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여기에 ‘성령을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라’ 8절에 그렇게 나와 있지요. 이 말은 인간 속성에 어떤 요소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을 저버리는 속성이 여지 이 그대로 살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이라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가 인간 속에 하나님을 저버리는 요소가 있는데 하나님은 그 저버리는 요소마저 극복하시고 그 사람을 구출해 내시는 거예요.
저버릴 줄 알고, 저버리는 것이 당연할 줄 아시고 그 저버림까지라도 극복해내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배신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밀치는 것, 그것은 모든 인간들이 다 하는 겁니다. 같은 한 아담을 조상으로 가졌기 때문에 후손들은 다 그런 요소가 있어요. 따먹지 말라 했는데 따먹었잖아요. 그런 성질이 여전한 거예요. 우리한테서 그게 사라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하면 안 믿는 사람도 있지만 믿겠습니다, 하고 안 믿는 사람이 전부지요. 믿겠습니다, 하고 안 믿는 것이나 애초부터 하나님을 안 믿는 것이나 그게 그거지 뭐 차이가 없어요. 그래서 구원받는 사람은 ‘하나님, 나 싫어요. 안 믿어요.’ 그 인간이 할 수 있는 한계, 그 한계를 극복하고 그 사람을 건져내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극복했다는 증거를 우리가 찾아야 되는데 내가 믿어서 내가 구원받 는게 아니라는 증거가 있어야 되거든요.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것은 백 프로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저버리는 요소를 삭제한 적이 없어요. 잃어버린 적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것도 ‘하나님, 이제는 잔소리 그만하세요.’ 하고 내치는 하나의 핑계에 불과해요.
‘내가 알아서 잘 할 테니까 제발 좀, 하나님 믿으라는 잔소리 좀 하지 말라고! 이제 지긋지긋하다.’ 이걸 압축해 보면요, ‘믿습니다.’ 이렇게 돼요. ‘그러니까 간섭하지 마세요.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간섭하지 마세요. 제발~ please~ 가라고, 내 곁에서 떨어져서 좀 가라고!’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그 자체가 주님에 대한 새로운 모독하는 방식이 되는 거지요. 하나님 믿습니다, 예수님 믿습니다, 가.
우리 자신의 믿음을 믿지 말라는 이야기예요! 그것은 뭐 주특기도 아니고 재주도 아닙니다. 50년 믿었다고 자랑하는데 백 년은 아직 왜 못 믿었어요? 아직 50년이 남아 있네요. 안 되잖아요. 분명한 사실은, 천국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죽어서 만든 나라입니다. 따라서 그 나라 가려면 우리가 죽어야 돼요. 이것은 성경적으로 너무나 상식이에요. 이것은 양보 못 합니다.
예수님이 오게 되면 하늘나라 와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예수님이 죽지 아니하면 하늘나라가 이뤄지지 않아요. 하나님마저 하나님이 죽어야 생기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에요. 하나님의 죽음의 나라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도 죽어서 만든 나라인데 감히 우리가 살아서 멀쩡하게 믿습니다, 하고 들어갈 수 있는 나라, 그런 하늘나라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그걸 아시고 네가 하나님을 저버리게 되어 있다는 그 속성을 그대로 들춰내는 거예요. 내가 뭐 주님을 믿습니다, 사랑합니다, 소망합니다, 라고 해도 그것 가지고는 결국은 나 안 죽겠다는 극도의 자기방어에 불과합니다. ‘내가 믿어줄 테니까 제발 날 건드리지 마시고 죽이지 마소서’ 그런 식이지요.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널 거룩하게 한 것은 네 솜씨가 아니고, 네 믿음 소망 사랑 솜씨가 아니고 성령의 솜씨다.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성령의 솜씨다. 성령의 솜씨가 어찌나 대단한지를 알려면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을 밀어버리는 그런 속성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해 줘야 됩니다. 교회 나온다고 그런 속성이 사라진다는 그런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러고 난 뒤에 9절에 보면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이 형제 사랑을 잘 하고 있으니까 쓸 것이 없다는 말이지요. 친히 하나님이 너희들을 형제 사랑하게 했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형제 사랑이라는 것은 뭐냐? 형제라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난 뒤에, 성령에 의해서 구원을 받고 난 뒤에 모인 그 집단이 형제라고 불리는 거예요.
그러니 형제의 특징은 뭐냐? 동질성을 갖고 있습니다. 모두 다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어요. 성령은 모든 인간을 동질하게 만들었습니다. 구원받은 인간을 동질하게 만들었어요. 동질하게 만들 때, 인간을 똑같이 만들 때 거기에 도입되는 것이 뭐냐 하면, 숫자입니다.
숫자는 새삼스럽게 그 사람의 속성을 언급할 필요가 없을 때 숫자가 도입되지요. 만약에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한 아들에게 엄마가 물어봅니다. “얘! 초등학교 1학년 신입반이 몇 명이었어?”라고 묻지요. “우리 반 스무 명이야.” 라고 1학년에 입학한 아들이 답변을 하게 되면 그 20이라는 숫자가 동원되었으니까 그 20명은 모두 다 한 동일성이라는 바구니에 다 포함이 되어버립니다.
집합이지요, 집합. 포함이 되어버려요. 거기서 즈그 아부지 모하시고, 즈그 오매 모하냐,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고 모두 다 같은 학급에 속한 초등학교 1학년이라는 겁니다. 개개인의 가정환경과 성격과 성질, DNA, 이런 것은 다 무시하고 지금 소속이 동일한 소속이라 할 때 숫자가 동원되는 거예요. 천국을 표시할 때 요한계시록에서는 숫자로 표시해버립니다.
14만 4천, 또는 7, 어떤 숫자가 또는 10, 또는 어떤 숫자가 12, 어떤 숫자가 동원되든 12에서 1을 뽑아낼 생각하지 마세요. 14만 4천에서 1을 다시 회수할 생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소속이 나의 1을 대신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 솜씨로 구원받은 게 아니기 때문에 내가 남하고 차이 나는 능력을 발휘해서 너는 탈락하고 나는 구원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이걸 인정한 적이 없기때문에.
똑같은 숫자로 표시를 해주는 겁니다. 14만 4천이라고 할 때 14만 4천이니까 나는 14만 3998이고 너는 14만 3999고,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너도 너 하나 자체가 14만 4천을 표현해주고, 너도 너 하나가 14만 4천을 표현해주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12로 표시되거든요. 12제자, 12제자들이지 베드로는 열두 제자의 하나가 아니에요. 베드로가 열두 제자의 일원이기는 하지만 베드로가 방출하는 것은 열두 제자의 본질이고 그리고 다른 제자 야고보도 열두 제자의 본질이에요. 하나하나가 모여서 12가 아니고 하나하나가 12입니다. 12를 표상하고 있습니다. 12를 드러내는 이미지지요. 그렇다면 그 12라는 것은 전체로 하나가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12지파라 하거든요. 12지파라 할 때 말라기, 말라기라는 것은 구약성경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예언서가 말라기입니다, 그 말라기에 보면 말라기 선지자에 의해서 하나님의 계획이 있어요. 그 계획이 뭐냐? 그 이스라엘 전체 12지파를 단 하나로 1로 만드는 겁니다.
말라기 2장 10절에 보면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여기에 아버지 하나를 이야기하고요, 15절에 보면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찌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하나만 만드신 이유가 경건한 자손 하나를 고집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하나를 고집하는 거예요.
그러면 설교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인간은 성령을 거스르는 본능을 갖고 있습니다. 아담의 자손은 다 그래요. 왜 성령을 거스르느냐 하면, 여럿이 하나가 되기는 싫고 나만 달랑 하나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이것은 모든 인간이 타고 났습니다.
어린 자식이 생일 당하면 온 식구가 전부 다, 아빠 엄마도 어울리지도 않고 머리에 들어가지도 않는 고깔모자 뒤집어 쓰고 생일 노래 불러가면서 축하파티를 해주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는 하나라는 것을 어릴 때부터 확인시키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너는 남의 집 자식이 아니고 내 자식이야. 우리는 하나야.’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억지를 부리는 것은 생일잔치 받는 자식이나 해주는 부모가 여차하면요, 그 하나의 가정됨의 그 하나를 거스르는 본성이 언제 어디서 툭 튀어나올지를 모르기 때문에 사전에 그것을 예방한답시고 그저 결합해주려고 계속 “너 어려울 때 아빠 찾아오너라. 엄마 찾아와 용돈 내가 줄게” 이게 뭐냐 하면, 억지로라도 하나 되기 위해서 하는 거지요.
그러면 자식은 그거 하나 받고 자기만 하나에요. 바보입니까? 챙길 때 챙겨줘야지요. 아빠 엄마가 언제까지 돈 번다고요. 줄 때 딱 챙겨놓고 인간은 본인만 하나에요, 본인만. 이게 타고났습니다. 뭐 이런 재주는 가르쳐줄 필요도 없어요.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그 1등이 바로 나예요. 나 혼자 있을 때는 그 1등이 나예요.
이거 본인이 못 고칩니다. 아니 고치기 싫어요. 왜? 사는 보람이, 나답다는 여기에서 사는 보람이 있기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놓고 뭐 결혼해서 하나가 된다고? 어디서 그런 구라를…….
뭐가 부부가 하나입니까? 꿈꿀 때 하나였던가요? 각자 다른 꿈 꾸고 그 꿈은 차마 아침에 이야기를 못 하지요. 겁나서. 깨질까 봐 차마. 각자 딴 꿈 꾸고 있는데. 인간이 어떻게 꿈마저 하나가 될 수 있는 그러한 희한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형제라는 것도 인간의 힘으로서는 성립이 안 됩니다. 하나밖에 없는데 무슨 형제가 있어요? 자기 밖에 없는데요.
그런데 여기 ‘형제 사랑’을 언급하는 이것은 사도바울이 인간의 힘으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알고 있지만 성령이 계시잖아요. 주님이 살아계시지 않습니까. 그냥 살아계십니까? 하나님께서 형제 만드는 작업을 하시면서 살아 계시는데 그 형제가 보고 싶다 그 말입니다. 사도가. 인간의 힘이 아니고. 인간은 내가 뭐라는 것을 뻔히 아니까요,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을 아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가 발생 된다는 그 놀라운 기적에 대해서 사도는 데살로니가교회에 그런 모습이 있다니까 반가운 거예요. 다를 수밖에 없는 너희들끼리 어떻게 공통점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 공통점은, 인간이 주님을 거스르고 반대하고 저지하고 밀쳐내는 그걸 극복한 성령의 능력으로만 형제가 이뤄지는 겁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밀쳐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이력이 있어요.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터졌다는 말은, 어느 인간도 하나님을 받을 요량이 없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을 믿고 살 요량은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할 생각은 충분해요. 그것은 뭐 부처가 되었든 다른 신이 되었든 다 믿고 싶어요. 하지만 하나님이 나 대신하는 것, 그것은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우리는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이용할 생각은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내가 사라질 생각, 우리는 그런 생각을 갖고 교회 온 적이 없어요. 나는 영원히 나니까. 그래서 인간은 힘들고 어려울 때는 이렇게 합니다. “난 칵!……” ‘칵’이 나와야 돼요. “칵 죽었으면 좋겠다. 칵 죽었으면 좋겠다.”
여호와 증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인간은 칵 죽어서 인간이 소실된다는 것, 없어진다는 거예요. 그러나 인간은 영원토록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야 지옥이 지옥답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아성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습니다.
부자가 지옥 가도 그 부자가 자아성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 누가복음 16장에 있는 것 지난 시간에 들었지요. 인간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없어지지 않는 인간이 영원해야만 하는, 영원 안 하고 싶어도 해야만 하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인간을 구원한 그 주님의 십자가 값이 영원하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을 구원하는 그것은요, 공짜가 아닙니다. 영원한 대가를 치러서 주어진 것이 용서하는 십자가의 보혈의 피에요.
그 영원함을 거스른다면, 그 영원한 예수님의 보혈의 피의 가치를 위해서 거스르는 자는 영원히 지옥에서 죽지 말아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 그 값이 계속 지옥에서도 천국에서도 살아 있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본인이 순간순간 판단하고 선택하면서 모든 결과를 만든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선택한 거예요. 인간은 자기밖에 없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도 내 행동을 내가 선택하는 겁니다. 선택하기 전에 판단을 하고, 판단하고 선택하는 거예요.
그래야 그 결과의 모든 것에 대해서 홀로 영광 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흉내 내는 거지요. 그런데 그렇게 홀로 살면서 인간은 어릴 때는 집에서 부모가 다 돈 대주니까 자기는 멋있는 것만 꿈꾸면 되지요. 유치원 애들에게 장래 희망이 뭐냐고 하면 “백설 공주!” 하고 툭 튀어나오지요. 백설 공주.
왜 백설 공주냐 하면, 옷이 예뻐서라는 거예요. 얼마나 단순하고 솔직합니까? 백설 공주가 입었던 그 옷이 중국산이라는 것은 전혀 생각을 안 하고 있어요. 그런데 커서 내가 백설 공주가 된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백설 공주처럼 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부터 인간은 뭘 깨닫느냐 하면, 돈 버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겁니다. 돈 버는 것이 너무 힘들어요. 돈 벌어서 쓰면 참 좋겠는데 돈 버는 것이 너무 힘들어요.
그래서 어떤 초등학교 1학년 애한테, 유치원인데 이제 막 1학년이 되었는데 그 인터뷰 하는 내용을 봤어요. 장차 너 뭐 되고 싶나 하니까 자기는 건물주가 되고 싶다는 거예요. 왜 건물주가 되고 싶으냐 하니까 가만있어도 돈이 들어오고 자기는 쓰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건물주가 되고 싶은데 자기가 자기 보기에도 염치없는 것을 아는지 “좀 염치없지요?” 이러고 있다고요.
돈 버는 것이 너무나 힘든 겁니다. 그러나 돈 버는 것이 힘든 그것보다 더 힘든 것은 다른 대안이 없다는 거예요. 이렇게 힘들게 돈 버는 것 외에 수월하게 돈 벌 수 있는 대안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인간이 힘든 것을 그냥 참기만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그러면 뭐 하느냐? 도박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들은 매순간마다 도박을 해요. 이 세상 자체가 도박 세상입니다. 도박이 안 끼어든, 도박판이 아닌 그러한 구석은 이 세상에 찾아보라면 한 장소도 없어요. 모든 게 도박이에요. 회사 가도 경쟁이고, 개인 사업하면 거기도 도박이고 불확실합니다. 불확실하기 때문에 그저 긍정적으로 희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들어가는 거예요.
이런 도박하는 습성, 도박해서 결과가 이렇게 나오면 내가 선택 잘했다는 나의 영광 받는 그 성질 그대로를 가지고 어디로 오느냐? 교회 와요. 교회 와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 믿습니다.” 왜? 그것도 도박이니까. 일단은 믿어보고 천국 없으면 그만이고. 일단은 도박이니까 별로 손해 되는 것 아니니까.
교회는 이러한 교인들의 도박 습성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도박하는 이 사람들을 이용해서 보이스피싱 같은 전략을 보입니다. “구원은 예수 피로 받는데 가짜 신자가 아니라 제대로 된 진짜 신자가 되려면 여러분이 십일조를 내야 됩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오랜만에 이 이야기 들어봐요? 다시 말해서 교회 쪽에서는 속으로 ‘이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돈 내고 믿어야지. 예수 피 믿고 우리는 손가락만 빨까? 목사는 손가락만 빨아? 돈 내야지. 공짜가 어디 있어?’ 돈 낸 만큼 그 사람은 다른 교회 안 갈 것이고요. 자기 돈 낸 것 있지요, 또 그 교회에서 부조 낸 것까지 생각해 보세요. 자기 딸 10살인데 서른 살 될 때까지20년 동안 뿌리면 부조가 얼마인데요? 그것 다 거두기 전까지는 다른 교회 못가지요. 교회는 그걸 알지요.
그러니까 이게 내가 한 도박과 내가 한 선택이 성공 짝이 되기 위해서는 나는 그 장소를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어차피 도박이니까, 어차피 나만 믿으니까, 어차피 나의 선택만 믿을만 하니까, 나의 선택 외에 일체 다른 것은 믿지 않으니까, 나의 결정 외에는 예수 믿는다는 결정하기 잘했다는 자기 자신을 계속 유지해야 되니까요.
그게 바로 성령을 거스르는 거예요. 예수 믿는데 자기가 믿었다는 거예요. 자기가 결정했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성령을 거스르는 거예요. 그것은 형제가 아닙니다. 성도일 수가 없어요. 그게 무슨 공통점입니까? 주님과의 공통점이 되겠어요?
지금까지 제가 이야기한 것은, 인간은 어떠한 몸부림을 쳐도 이미 인간 자체가 하나님을 밀친 적이 있어요. 잔소리하지 말고 저리 가라고. 예수님을 밀친 이유가,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내가 선택한다니까요’ 이것이 변하지 않습니다. 변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 쪽에서 나한테 좋은 제안을 하게 되면 그것을 내가 검토해서, 결재서류 검토하듯이 해서 믿을만하네, 그래서 결재해서 믿겠다는 거예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이게 한계입니다. 이게 전부예요. 그 외에는 못합니다.
세상에 나가서 도박하고, 교회에 와서도 도박하고. 하나님을 상대로 도박하는 거예요. 판돈은 뭐냐 하면, ‘아담 크라우드’ 아담의 모든 데이터, 인류가 만든 모든 데이터를 총 모아놓은 그 크라우드, 구름같이 모인 그 데이터에서 뽑아내서 사는 거예요. 이게 내 성과입니다. 내 열심입니다. 내 충성이고, 이게 내 예배참석이고, 이게 바로 내 중보기도고, 이런 식으로 내놓는 거예요.
내가 구제하고, 내가 교회 봉사하고, 자기가 만들어놓은 자기의의 비축된 창고 그 크라우드에서 뽑아내서 ‘목돈 이거면 복 주시겠습니까?’ 들이미는 거예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신밖에 모릅니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4장 7절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이 부르심이라는 것이 나와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인간을 알아요. 인간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돈 버는 것도 힘들고 돈 버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는 것도 힘들지만 그 힘든 그 바탕은 뭐냐 하면 내가 나다움을 못 버리는다는 이것이 인간의 비극이에요. 그저 뉴질랜드 이민 가면 좋고, 호주 가면 좋고, 캐나다 가면 좋다는데 어디를 가도 좋은 자연환경 맞습니다. 좋은 환경입니다.
캐나다 같은 곳은 단풍이 유명하니까 좋아요. 단풍이 유명하면 뭐합니까? 그 깨끗한 단풍에 썩어질 내가 포함되어버리는데. 나다움이 캐나다 가면 캐나다 다 버려놓는 거예요. 호주 가면 호주 버려놓고 뉴질랜드 가면 뉴질랜드 버려놓아요. 왜? 나는 나다움의 도박을 거기서 벌이기 때문에. 나 자신을 판돈으로 걸고, 나의 명예와 체면을 걸고 나는 이거 안되면 칵 죽을 거야, 자살할 거야, 막 이런 엄포를 놓아가면서 세상에서 돈 버는데 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돈이 있어야 백설 공주가 되니까.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니까 부르심이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불렀다는 거예요. 정말 불신자는 이 대목 매직으로 누가 안 볼 때 지웠으면 좋을 거예요. ‘주님이 부르지 마시고 내가 알아서 찾아갈 테니까 좋은 이야기, 약속들만 해놓으세요. 내가 알아서 그 약속이 좋다 싶으면 내가 결정하고 선택해서 내가 믿어서 갈 테니까.’ 이러고 싶지 누가 일방적으로 나를 불러준다는 것에 대해서 인간의 본성상 달갑지 않아요. 반갑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이런 겁니다. 아버지가 자식보고 “야, 너란 존재 누가 만들었는지 알아? 내가 만들었어” 아버지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요, 아버지와 엄마한테 고마워하라고 그런 이야기 하잖아요. 그러면 자식이 뭐라고 합니까? 글자로 쓰면 ‘아버지는 아들에게 고마워하라고 이야기했다.’ 그다음에 문장이 글자로 쓰면 ‘아들은 아버지에게 고맙다고 이야기했다.’
글자로 쓰면 이게 분간이 안 돼요. 그런데 말로 하면 이렇게 돼요. “너 나에게 고마워해라.” 이렇게 하면 자식이 말하기를 (비아냥 대는 소리로)“예~ 고~맙습니다.” 그냥 글자로 쓰면 안 틀리는데 가만 들어보면 아버지나 어머니는 기분 되게 나쁜 거예요. (비꼬면서 마뜩지 않은 투로) “예~ 고~맙습니다. 이런 자식 낳아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할 때 눈이 쫙 내려가요. “대~단히 고맙습니다. 뒤에다가 ‘기껏……” “니 방금 뭐라켔노?” “아니아니, 안 했습니다”
그래 이런 자식 낳아놓고, 거기다가 DNA까지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놔서, 이런 더러운 DNA를 해가지고 “고~맙습니다!”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너를 부르셨다.” (비아냥으로) “예, 고~맙습니다.” 해 놓고 ’불러주면 뭐하나? 내가 백만 원 번다고 개무시 당하기나 하고’ “고맙습니다, 하나님! 아이고 찬미 드립니다.” 해놓고 ‘돈 백만 원 버는데 이게 개도 아니고 완전히 괴물 다 되게 만들고’ “아이고 고맙습니다. 주님, 정말 고맙습니다.”
주님이 듣고 있다가 “너 지금 나한테 화내고 있나?” “아닙니다, 아닙니다. 찬미 드립니다.” 찬미치고 톤이 좀 이상한 것 같애. 백날 교회 다니면서 뭔가 영적 흉내 내도 소용없어요. 영적 흉내 내도 소용없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은 자꾸 자기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거예요. 모든 것을 외부에서 다 조달해주고 자기는 그냥 즐기기만 하는 신처럼 대우받았던 그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절대로 십자가로 돌아가지를 않는 거예요.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그런데 성경은 뭐냐? 인간을 십자가로 돌아가게 만들어요. 그 십자가가 뭐냐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했던 그 선택의 자리로 돌아가게 합니다. 인간은 선택을 하고, 하나님도 선택을 하고, 이 선택에서 알력싸움, 힘겨루기가 시작되는 거예요. ‘인생은 내가 선택했어.’ 천당 가는 것도 내가 선택할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선택으로 단박에 끝내느냐, 그 싸움이에요.
왜 십자가에서 인간이 알지 못하는 선택을 했느냐 하면, 십자가라 하면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아들을 영원히 선택했거든요. 인간이 선택하는 것은 짧은 그 순간순간의 선택이지만 예수님의 선택은 영원한, 그것도 단번에 끝내버린 영원한 선택이에요.
지금 우리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아들을 선택할 때 단번에 영원히 선택한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선택 받은 자로서 이 땅에 오셨고 그 선택의 취지를 이 땅에서 완성시켰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선택받은 자만이 가는 그 천국을 만들어내신 거예요.
문제는 그 예수님의 영원한 선택이 어떻게 우리의 단편적인 선택을 극복하고 이겨내느냐 그 문제에요. 그 문제 할 때 주님의 선택에 의해서 선택될 자와 영원한 선택되지 않을 자를 추려내는 작업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해내신 겁니다. 모든 인간은 도박입니다. 미래에 대해서 자기 목숨을 걸고 거기다가 투자를 해요. 그 방법 외에는 인간이 살아가는 것에 다른 방식의 아무런 대안이 없습니다.
그런데 일거에 주님의 선택은 그 자체가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것을 그냥 밀어붙입니다. 인간이 선택하는 이유는 인간에게 있는 시간과 공간을 자기 임의대로 차용하기 때문에 그런 사달이 벌어진 겁니다. 사달이라는 말을 했는데요. 지금 인간이 지옥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요, 하나님이 사람 되었다는 그 자체로 사달이 나서 그래요.
하나님이 그냥 하늘에 계시면 아무 일 없어요. 우리 인간끼리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살다가 그냥 죽으면 그만인데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버렸어요. 그때부터 우리는 위기를 당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뭔가 지적을 당하기 시작해요. 네가 너한테 진짜냐, 라고 물음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내가 가짜일 수 있다는 그러한 환경이 마련된 거예요.
하나님이 이 땅에 사람까지 되셔서 찾아옴으로 말미암아 그럴 때 인간이 사용했던 그 시간과 공간, 그 시간과 공간은 인간이 사용하라고 준 게 아니고 하나님 주님이 사용하라는 시간과 공간이었을 뿐이에요. 인간에게는 내일이라는 것은 있어본 적이 없어요. 항상 내일 되면 오늘이 되기 때문에 내일은 없어요. 그다음날 되면 또 오늘이 되기 때문에 내일이 없어요.
인간은 내일이 없기 때문에 도박할 수밖에 없고 도박이니까 내일이 잘될 것이라는 나를 위한 선택 외에는 다른 대안이 전혀 없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과 공간은 너를 위함이 아니고 예수님을 위한 시간과 공간이라고 이야기했고 그리고 십자가에서 선택이 완료됨으로써 더이상 이 세상에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동네가 되고 말았어요.
시간과 공간이라는 게 성도한테는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미 다 이루었고요, 공간은 뭐냐? 예수 안이라는 공간으로 확정 났기 때문에 공간이라는 자체가 없어요.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여러분에게 누가 선물을 줄때에 우리는 ‘야, 이 선물 받아서 내일의 내 삶을 보장받고 내일은 평안하게 맛있는 쇠고기나 구워 먹어야 되겠다’ 해서 쇠고기 포장된 것을 선물로 받았다 칩시다.
그러면 선물을 소지해 가지고 내일을 대비해서 내가 오늘을 또 유지하려고 시도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주는 선물은 뭐냐 하면, 선물을 챙기라고 준 게 아니고, 즉 성령을 챙기라는 게 아니라 그 선물이 온 선물 통 있잖아요, 선물상자, 그 선물상자에 그 안에 네가 들어가 버려라, 그 말입니다. 선물상자에. 성령이 오신 그 공간에.
그것은 주님의 공간이거든요.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 사용된 그 시간과 공간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 선물을 넙죽 내 소유화시키지 말고 내가 그 선물에 담겨서, 우리에게 전달되었던 그 통 안에 내가 소유 당하면 되는 거예요. 내가 그 안이 기어들어 가면, 기어들어 가든지 그냥 들어가든지, 하여튼 그냥 들어가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나 자체가 선택이고 나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 되는 겁니다.
그 선물 보니까 그 선물에 다른 형제들도 와 있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서 자동적으로 동질성이 되는 겁니다. ‘옛날의 나는 미래의 계획과 나의 목적이 있었는데 모든 미래의 계획과 목적은 다 이렇게 거룩하게 해주시고 하나님께서 천국 백성 되게 해주신 하나의 하나님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우리를 이렇게 불러모았다. 너도 그래? 나도 그래.’
성령을 선물로 받기 전에는 내가 나를 관리하려고 했거든요. 그래서 내가 나를 관리하니까 나는 목표를 내가 정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목표 정해서 세상에 나가 보니까 추잡하고 더럽고 개같이 돈 버는데 정말 벌다 벌다 돈 버는 게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 하다가 나중에는 좀 즐기려 하니까 또 몸이 아프네. 그리스나 어디 지중해로 크루즈여행 가려고 했다가 요양병원에 가버리는 거예요. 요양병원 여행하고 있어요.
코로나 백신 1차, 2, 3차까지 맞았지요. 이제 내년 되면 4차 또 맞아야 돼요. 내년 여름 되면 5차 맞아야 되고요. 내년 가을되 면 6차 맞아야 되고, 내년 겨울 되면 7차 맞아야 되고요. 나중에 팔에 주사바늘 자국이 죽 나 있을 거예요. 본인이 본인다움을 버리지 못하는 이것보다 더 큰 비극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없어요. 남이 돈 대주면요, 죄를 안 짓습니다. 부자들이 죄를 안 짓는 이유가 돈이 느긋하게 있기 때문에 굳이 죄지을 필요가 없어요.
그러나 세상에는 죄짓지 않으면 돈이 벌리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불의한 청지기에요. 사기 치지 않고서는요 돈 벌 재주가 없어요. 이 세상은 그런 세상입니다. 지금 내가 대신 이야기해 드리는 거예요. 여러분이 다 그 이야기하고 싶은데 제가 대신 이야기해 드리는 거예요.
그러면 무슨 사기를 치느냐 프로크루스테스라는 침대가 있어요. 프로크루스테스라는 침대가 뭐냐 하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침대를 바꿀 생각 안 하고 침대를 딱 맞춰놓고 사람마다 잣대로 평가를 해서 다 잘라버려요. 내 침대에 맞도록, 내 마음에 맞도록 사람을 다 평가해 버리는 거예요.
왜? 내 침대는 내 것이니까. 남이야 팔이 잘린다고 아프나 마나 그런 것은 신경 쓸 것 없어요. 내 마음에, 내게 이익이 되어야 합니다. 내게 무슨 이익이 되느냐? 내가 누울 나의 침대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남들로 하여금 강요하는 거예요. 네 기준 좀 버리고 내 기준에 맞추라고 강요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불의한 청지기 아닙니까? 이게 바로 사기꾼 아닙니까? 이게 도박꾼 아닙니까, 예?
예수? 내 마음에 맞춘 예수, 예수님을 내 침대에 맞춰서 다 팔다리 잘라버렸어요. 팔다리 다 잘라요. 예수도 아니지요, 뭐. 엉터리 예수지요. 내가 우상이거든요. 이사야 45장에 보면 우상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길게 이야기 안 하겠습니다. 우상 이야기하면서 뭐냐? “우상, 그것은 금이고 은이고 동이고 철이고 나무다. 그러니까 그것은 헛 것이다.” 해놓고는 그 헛것과 그것을 만든 너하고 동격이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 보시기에 우상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상을 동원 시켜서 우리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시편 115편 8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 시편 115편에 4-7절에 보면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
이게 뭐냐 하면, 너희들은 눈 달렸고 귀 달렸고 코 달렸는데 왜 하나님의 음성을 못 알아듣느냐. 네가 우상이거든요. 네가 섬기는 우상하고 너하고 동격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알아듣지를 못해요. 이미 자기가 신이기 때문에 다른 신은 이용대상이지 그 신과 내가 바꿔치기 할 대상은 아니라고 본 겁니다.
자,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 선택받았다는 것, 이 자체는, 그 하나님의 선택은 에베소서 1장에 보면 예수 안에서 영원 전부터 선택된 자가 등장해요. 그게 성도거든요. 하나님의 선택은 반드시 짝을 들고 등장해서 나오는데 로마서 9장 11절에서 13절에 보면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가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나와 있습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선택입니다)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하나님이 선택할 때는요, 선택되지 않은 자와 짝을 이뤄서 등장해요. 선택되지 않은 에서, 자기 힘으로 구원을 이루려고 하는 자가 바로 에서 같은 선택되지 않은 사람의 특징이에요. 그들은 그들대로 또 공통성을 유지합니다. 짝이 맞으니까. 반면에 야곱은 그들이 태어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사랑이 주도권을 쥐고 야곱의 주인 노릇을 하는 거예요. 주님의 사랑이, 주님의 용서하심이 그 사람의 주인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야곱은 본인이 주인 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의 선택이 내 주인이에요. 주님 자체가 주인이니까 주님의 선택하심이 나의 선택을 극복하고 이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더 강하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의 선택이! 그래서 성도가 어떠냐 하면, 내 선택과 주님의 선택을 항상 비교하는 겁니다. 내 뜻과 주님의 뜻을 비교하는 거예요.
그렇게 비교해보게 되면 내가 얼마나 나 위주로 나를 관리해왔다는 것, 내 인생의 계획에 어떤 목표가 있다는 것, 이게 다 허망한 짓인데 그 목표와 목적을 위해서 우리는 스스로 자기를 우상시하면서 살아온 거예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이사야 45장, 성경에서 아주 중요한 말씀이에요. 이사야 45장 15절에 보면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하나님은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에요. 인간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 인간이 하도 자기 선택을 하니까 선택하는 인간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 숨어 계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숨어 계시는 분이 드러날 때는 뭐냐 하면, 주변에 있는 것들을 전부 다 쳐내요. 주변에 있는 것들을 전부 다 쳐내게 되면 주변에 있던 것들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다가 그게 중요하지 않은 시시한 일로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그냥 007 영화 보면, 백두산 천지 같이 생긴 곳, 거기 물이 있는 것이 아니고 페인트칠 해놓은 거예요. 그 사화산의 중앙 그곳이 좍 갈라지면서 거기서 미사일이 올라오잖아요.
주변 것을 쳐내면서 안에 숨어 계신 주님이 올라오는 겁니다. 부르심이 우리 안에, 성도안 에 있거든요. 성령에 의해서 있다는 말이지요. 부르심이 부르심값을 하고 그 취지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주변 것을 제켜버려요. 그 제킬 때 제킴 당한 자가 누구냐? 바로 우리 자신이 찢어져야 돼요. 우리 자신이 나한테, 우리 자신에게 버림 받아야 되지요. 그렇게 내가 나에게 소중하고 귀중했던 그 내가 버림 받아야 되는 거예요. 내가 나한테. 내가 나한테 조롱 받아야 된다 그 말입니다. ‘네까짓 게 뭘 할 줄 안다고’라는 인상을, 우리가 우리에게 그런 판단을 내려줘야 돼요.
여러분이 1년에 한 번씩인가 병원에 가서 정기검사 때에 시력검사 하잖아요. 시력검사표 한번 보세요. 위쪽에는 글자가 커다랗게 쓰여있어서 쉬워요. “자, 오른쪽 가리시고 왼쪽 눈 먼저 합니다. 뭡니까?” “5!” 소리도 막 커져요. “이건 어느 쪽으로 열렸습니까?” “이쪽이요”(동작을 크게 하면서) 죽 하다가 점점 내려가면 숫자가 희미해지고 작아집니다.
벌써 1.0 내려가면 미간이 찌푸려져요. 진짜 컨닝 막 하고 싶어요. 미리 외워놓고 싶고요. 점점 더 내려가게 되면 숫자가 안 보여요. 희미해져요. 주님이 주님답게 주님의 선택이 뚜렷하게 드러난다는 것은 나의 선택이 갈수록 희미해지고 작아지고 내 뜻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기도를 하나 뭘 하나 내 뜻, 내 목표, 내 계획이 개뿔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갈수록 점점 더 희미해지는 거예요. 그런 공통점을 갖고 있는 사람을 가지고 형제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형제.
왜 그렇게 해야 되는가? 내가 희미해지게 되면 주께서 생각하는 그 하나, 그 하나 됨이 점점 더 윤곽을 드러냅니다. ‘아, 우리는 모두 다 한 형제구나.’ 하나님께서 생각한 한 분 되시는 그 예수 안에 들어 있는 같은 선물 포 안에 들어 있는 선물상자 안에 들어 있는, 옹기종기 모여있는 하나로만 지칭이 되는 자들의 집합체, 그것이 온몸으로 만끽해지고 느껴지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내세워서 남하고 비교한다는 것은 본인이 도저히 용납 못 할 일이지요. 내가 남하고 비교한다는 자체가.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천국은 예수님마저도, 하나님마저도 죽지 아니하면 생겨나지 않는 것이 천국입니다.
그렇다면 천국 간 우리는 마땅히 우리가 작아지는 정도가 아니고 죽어야 되겠지요.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목숨 끊어지는 죽음도 있지만 나의 판단과 나의 선택이 무의미해지는 것도 우리 자아의 죽음이에요. 그것을 흔쾌히 기쁨과 감사함으로 우리는 그것을 충분히 용납하고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 때문에, 그 부르심이 미사일처럼 튀어나오기 때문에, 주님의 부르심이 강렬하기 때문에 나의 선택은 그 앞에 빛을 잃어버리지요.
‘아, 이렇게 창세 전부터 불러주니 너무 감사합니다. 되어지는 모든 것이 주의 선택을 위함이지 나의 선택의 결과를 위함이 아닌 것을, 왜 전에는 그걸 슬퍼했을까? 감사할 것인데.’ 그러한 성령의 역사, 그 성령의 역사를 제일 먼저 신약에서 소개한 분이 누구냐?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이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마태복음 3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7절에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하나님의 모든 일은 공짜가 아닙니다. 값을 받아내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1장 7절에 보면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그 값을 다 찾아내는 거예요.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공짜로 줬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공짜가 아닙니다. 이제 너는 죽었어,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에서와 같이 자기의 행동으로 착하게 살아서 천당 가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메시아를 믿는 자기 선택, 도박하듯이 자기의 결정과 마음의 결심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자들이 바리새인 사두개인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서 세례요한이 뭐라고 극단적으로 비교하느냐 하면, 아브라함이 너희 조상이라는 그런 생각은 어림도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 자손이 되게 하신다.
이 돌, 돌이 뭐냐? 무기물이에요. 돌은 너무 자기가 없는 거예요. 나라는 의식이 너무 없는 것, 극단적으로 없는 그 물체가 뭐냐? 돌멩이입니다. 돌이에요. 생각도 없고 감정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돌멩이에요. 그냥 존재 그 자체에요. 남도 몰라요. 그냥 있는 그 자체, 그걸 즉자존재(卽自存在)그 자체에요. 그냥 있음 그 자체, 즉시로 있다는 그 자체.
돌멩이가 뭐 율법을 공부했어요? 돌멩이가 십일조를 냈습니까? 없어요. 돌멩이가 예배 참석했습니까? 없습니다. 헌금했습니까? 안 했어요. 전도했습니까? 안 했어요.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냥 돌멩이는 돌멩이에요.
그러나 그 돌멩이라도 하나님이 불러줬기 때문에 비로소 그 돌멩이는, 그 인간은 본인이 돌멩이에 불과함을 뒤늦게 그걸 알고 감사가 나오는 겁니다. ‘나는 돌이었습니다, 주여. 돌이었습니다.’ 돌이 무슨 자존심이 있고 체면이 있습니까? 돌에 무슨 자아성이 있어요? 나라는 것이 있어요? 돌이 무슨 선택을 해요? 돌이 무슨 도박을 합니까? 자기 인생을 걸고.
“야, 아버지 지켜봐. 이 아버지가 10년 뒤에 사장될 거니 두고 봐라.” 왜 자식을 보고 도박을 걸고 그럽니다. 무슨 객기가 그런 객기가 있습니까? 자식이 있다가 ‘내가 장담합니다. 아버지 20년 뒤에 지옥 가는 것을 내가 장담합니다.’ 이렇게 나올걸.
인간은 자기 목표를 정할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 권한도 없어요. 제가 아침에 운동을 하는데 왔다갔다 하는 기구가 있어요. 아이고, 벌써 내가 노인이 다 되었네. 거기에 게이트 볼 구장이 있거든요. 어느 날은 거기 공사를 해요. 뭘 하나 싶어 그다음 날 보니까 거기 있던 흙을 다 들어내고 인조잔디를 깔아서 깨끗하게 줄을 그어 놨어요.
인조잔디를 밟아봤어요. 밟아보니까 어떤 특징이 있느냐? 인조잔디의 특징은요 내 발자국이 남지를 않아요. 본질성이에요. 이게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성령께서 예수님이 십자가 졌다는, 그리고 너는 영생 얻었다는 그 근거에 의해서 동일하게 모든 사람에게 그 근거, 십자가의 피에 근거해서 동일하게 모든 사람에게, 택한 자에게, 야곱에게 사랑의 증표로서 성령을 주셨기 때문에 성령 안에서는 내 발자국이 없습니다. 주님의 발자국밖에 없어요. 주님의 행하심밖에 없어요.
그걸 내놓을 때 형제간에 동질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형제간에 이야기할 때는 나는 내 잘난 체 하다가 이렇게 깨졌다. 그 이야기를 내어놓으면 돼요. 이걸 영어로 이야기해볼까요? ‘before after same.’ 번역도 해 드려야 되겠어요? 나중에 구원받고 보니까 내가 돌멩이였고 내가 바로 주님을 밀쳤던 주님을 밀친 그와 같은 동류였다는 사실을 우리가 발견하게 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제는 어느 누구 앞에서 나만의 개성을 남한테 자랑질 할 수 없는 그런 죄인인 것을 알게 된 거지요. 나의 판단도 죽었고 나의 선택도 죽었다면 주께서는 그것을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하셔서 주님이 죽으셔서 만든 그 하늘나라의 백성은 바로 그와 같다는 것을 우리를 통해서 동질화되어 세상에 나가서 증거케 하시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