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르크 그리고「태양의 후예」
문화의 특수성과 보편성
지난 4월 22일 「태양의 후예」가(이하 「태후」) 종영되었다. KBS에서 방영한 이 드라마는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다. 아시아권을 넘어 북미나 유럽에서도 수입해 가며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은 이례적이고도 놀랍다. 물론 자세히 들여다보면 적지 않은 부분에 문제와 한계를 노출한 드라마인 것도 사실이다. 군대의 현실이나 의료계의 기본이 무시되는 등 기초적인 사실관계도 안 맞는 경우가 꽤 있다. 또 과도한 애국주의나 제국주의적 코드가 불온해 보인다는 지적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문화, 특히 자생적 대중문화에 자꾸 그러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그 자체가 또 하나의 불온이 아닌가 생각한다. 돌아보면 대중을 계몽하고 선도하려는 엘리트 비평가들의 노력이 성공한 사례는 잘 없다.
「태후」가 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럽이나 이슬람권에서도 호소력이 있다면, 그것은 한국적 특수성을 넘어 인간 보편적인 무엇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보편성이란 물론 구체적인 무엇으로 개념화하거나 의미화기 어려운, 집단 무의식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태후」에서 건질 수 있는 보편적인 가치를 개념화해본다면 영웅, 모험, 우정, 사랑, 죽음 등을 들 수 있다. 새삼스러울 것 하나 없는 진부한 단어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이미 인류 최초의 문학 속에 깃들어 있다면 진부와 참신의 차원 이전에 본원적인 문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길가메쉬 서사시」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데, 흥미롭게도 「태후」가 이 영웅서사와 닮은 점이 많다.
우르크
「태후」에서 「길가메쉬 서사시」가 연상되는 것은 일단 우르크라는 공간적 배경 때문이다. 이 드라마가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킨 데는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나 쓰릴 넘치는 스토리 외에도 우르크라는 이국적인 이름도 한몫했다. 아름다운 해안 도시이면서 동시에 국제적 분쟁이 끊이지 않는 모순적 풍경이 시청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물론 실제 촬영지는 그리스의 자킨토스 섬과 태백으로 우르크와는 상관이 없다. 그러나 드라마 속에 벌어지는 사건을 보면 이라크나 시리아 같은 중동의 현실에 가까워 우회적으로나마 우르크와 연결되어 있다. 잘 알 듯이 이 지역에 고대 최고의 문명국 우르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우르크를 생생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이 인류 최초의 서사시 「길가메쉬」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고는 「태후」에서 길가메쉬 서사를 읽어내는 모험을 시도한다.
「길가메쉬 서사시」의 의미는 일단,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문학 텍스트라는 데 있다. 그렇게 옛날이야기라면 내용은 원시적이고 유치할 것 같은데, 놀랍게도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말로 하면,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인간의 근본적인 관심사는 크게 달라진 게 없다는 이야기다. 오천 년 전의 인간들도 단순히 먹고 사는 생물학적 조건에만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그 너머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어떤 점에서 보면 현대인들보다 더 심오하고 형이상학적인 고민을 한 것 같다. 게다가 길가메쉬 이야기는 현대의 어떤 소설 못지않게 재미있다. 판타지, 쓰릴, 막장 등 독자를 자극할 수 있는 모든 장치들이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를 들면, 성과 사랑, 우정과 희생, 인간과 신의 관계, 인간과 자연, 생로병사의 문제, 여행과 모험 등, 현대의 우리가 고민하는 모든 문제가 취급되고 있다.「길가메쉬 서사시」는 인문 교양적인 측면에서 봐도 성경은 물론 호머의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의미심장한 텍스트이다.
「길가메쉬 서사시」의 줄거리
길가메쉬는 실제 역사에 존재했던 인물로 기원전 2700년 경 수메르의 도시국가인 우루크를 다스렸던 왕이다. 그는 탁월한 지혜와 선정으로 이미 당대에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죽고 난 뒤 얼마 안 있어 그에 대한 수많은 찬가와 영웅서사시가 나왔다. 그것이 기원전 1300년경에 압축 편집되어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길가메쉬 서사시」의 형태가 되었다. 그러니까, 「길가메쉬 서사시」는 창세기보다 길게는 1000년이나 먼저 쓰인 것으로 서구문학의 원류로 자리 잡고 있다. 그 줄거리를 간단히 요약해보면 이렇다.
길가메쉬는 들소의 여신과 사람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초인적인 힘을 소유한 우르크의 왕이다. 크고 힘이 세어 우르크의 어떤 장사도 대적하지 못한다. 처음에 등장하는 길가메쉬의 행동은 거의 망나니 수준이다. 주체할 수 없는 힘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을 괴롭힌다. 그의 소행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소위 초야권의 횡포이다. 신혼 첫날밤에 신랑 대신에 자신이 신방에 들어가 신부와 자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폭압에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른다. 신들은 대책 회의를 열어 길가메쉬를 제압할 전사를 만들어 파송한다.
이 전사가 바로 초인적인 괴력을 자랑하는 엔키두이다. 엔키두는 바로 길가메쉬 앞에 나타나지 않고 처음에는 숲 속에서 짐승들과 함께 지낸다. 샴하트라는 신전 창녀가 그를 우르크로 유혹해간다. 즉, 엔키두는 이 여자를 만나 섹스를 하고 빵과 맥주를 먹으며 인간이 된다. 그리고 난 뒤 길가메쉬와 일전을 벌인다. 두 거인은 하루 종일 도시가 떠나가도록 싸우지만 승부가 나지 않는다. 막판에는 길가메쉬가 무릎을 꿇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단순히 패배로 보기는 어렵다. 두 사람은 갑자기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버린다. 예상치 못한 반전이다.
이 둘은 의기투합하여 신들의 휴양지인 삼나무 숲으로 가 산림지기인 훔바바라는 괴물을 퇴치한다. 신들의 걱정이 깊어지는 가운데 길가메쉬는 여신 이쉬타르의 청혼을 매정하게 거절해 그녀의 분노를 산다. 신들은 마침내 엔키두를 제거하는 조치를 취한다. 길가메쉬는 친구의 시신 앞에 엎드려 일주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슬퍼한다. 엔키두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서 길가메쉬는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고 불안에 떤다. 그래서 모든 것을 던져두고 불사의 비밀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이 지난한 여정이 「길가메쉬 서사시」의 근간을 이룬다. 여행의 목적은 바다 너머 땅 끝에 살고 있는 영생자 우트나퓌쉬팀을 만나 불사의 비밀을 알아내는 것이다. 길가메쉬는 수많은 장애와 난관을 뚫고 마침내 우트나피쉬팀을 만난다.
그러나 우트나피쉬팀은, 영생은 더 이상 인간의 몫이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대신 길가메쉬는 노인이 먹으면 젊어진다는 회춘초를 얻는다. 이것을 바로 자신이 먹지 않고 우르크로 가지고 간다. 고국의 노인들에게 청춘을 되찾아 주기 위함이다. 그사이 길가메쉬의 인성이 변화된 것이다. 그러나 샘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사이 회춘초는 뱀이 탈취해 가버린다.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길가메쉬는 통한의 눈물을 흘린다. 결국 길가메쉬는 빈손으로 귀국한다.
그런데 우르크로 돌아온 길가메쉬에게 결정적인 인식의 변화가 일어난다. 웅장한 조국의 건축물에서 새삼스레 인간적 성취의 고귀함과 아름다움을 느낀다. 최종적으로 유한한 인간의 운명을 인정한 뒤에 일어난 인식의 반전이다. 인간은 한계 속에서 땀의 성취와 무상의 아름다움을 누리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 마지막 메시지이다.
「태양의 후예」와 우르크
「태후」에 우르크가 나오는 과정은 이렇다. 드라마가 시작되면 한국 특전사 소속 유시진 대위와 서대영 상사가 DMZ에서 국군 초소를 습격한 북한군 특수부대를 멋있게 제압하는 장면이 나온다. 두 사람은 이에 대한 포상으로 휴가를 받아 외출을 한다. 시내서 놀던 중 오토바이 도둑(김기범)을 발견하고 포획한다. 그 과정에서 도둑이 다쳐 병원으로 실려 가는데, 도둑은 그새 서상사의 휴대폰을 훔쳐간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서상사와 유대위는 분개하여 병원으로 달려간다. 병원에서 유시진은 강모영 의사와 조우한다. 두 사람은 첫눈에 반해 데이트 약속까지 잡는다. 그러나 데이트 중에 본부로 부터 연락을 받은 유시진은 강모영을 남겨두고 주저 없이 달려간다. 국제 분쟁지역인 우르크로 파병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만나자 이별이다.
8개월 쯤 지난 뒤 강모영은 젊은 병원장의 애정을 거부한 괘씸죄로 해외의료 봉사단에 뽑혀 우르크로 간다. 예상대로 여기서 유시진을 다시 만난다. 이렇게 드라마는 일치감치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를 예고한다. 그러나 이들의 러브스토리는 흔히 볼 수 있는 도회지 문화 속의 로맨스와는 차원이 다르다. 우선 두 사람 다 자신의 직업과 일에 확고한 신념을 품고 있다, 강모영은 친구이든 원수이든 목숨을 구하는 것이 자신의 신성한 책무로 알고 있다. 반면 유시진은 작전에 따라 적은 물론 동료들의 죽음도 감수해야하는 특수부대 군인이다. 그의 전우 서대영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강인한 근육과 임전무퇴의 정신뿐이다. 명령에 죽고 사는 질서의 영웅들이다. 그러니까 우르크는 바로 유시진을 비롯한 특전사 영웅들이 활약하는 가상의 무대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인류 최초의 영웅인 길가메쉬가 활약한 무대이다. 「길가메쉬 서사시」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유한한 인간의 영웅성이다.
원초적 남성미
길가메쉬의 영웅적 활약은 무엇보다 자연 혹은 초자연의 두려움을 극복하는데 있다. 인간은 접근조차 할 수 없던 훔바바라를 괴물을 처치하면서 사람들에게 자연에 대한 공포를 해소시켜준다. 후와와라고도 하는 이 괴물은 신들의 휴양지인 삼나무 숲을 지키는 괴물로서 자연의 위협적인 요소는 다 갖추고 있다. 그런데 이 훔바바는 길가메쉬의 거처인 우르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레바논 숲 속에 있다. 이를 잡으러 가는 것은 일종의 지구적 원정이다. 영웅적 관심이 민족적 차원을 넘어 인간 보편의 차원으로 확장된다. 한국의 특전사가 지구 다른 편에 있는 우르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원정을 가는 것과 유사한 구도이다. 길가메쉬의 원정이 인도적인 목적 외에 레바논 숲의 삼나무를 얻는 목적도 있듯이 알파팀의 우르크 원정도 인도적인 차원 외에 국가적 이해관계를 고려한 것이다.
길가메쉬는 인간 세계에서는 무적이지만 신 엔릴의 산림지기인 훔바바를 이길 수는 없다. 최소한 혼자서는 대적할 수 없다. 훔바바는 그 후광으로 인해 보통 사람들은 보기만 해도 죽는다. 그의 목소리는 폭포수처럼 거대하고 입은 불덩이 같다. 귀가 밝아 120리그 안에서 나는 작은 소리도 다 들을 수 있다. 엔키두도 처음에는 훔바바와 싸우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거부한다. 그러나 둘이 협력하면 승산이 있다는 길가메쉬의 말에 동의하고 따른다. 두 사람의 협력은 훔바바뿐만 아니라 하늘 황소마저 퇴치하는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
말하자면 길가메쉬는 헤라클레스나 현대의 람보 같은 단독자 영웅이 아니다. 협력을 필요로 하는 팀워크의 영웅이다. 이런 의미에서 「태후」의 유시진과 서대영이 길가메쉬와 엔키두에 상응한다. 서상사가 없는 유대위는 생각할 수 없고 유대위가 없는 서대영은 생각할 수 없다. 이 둘도 알파팀을 통해서야 영웅성을 발휘한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 꽃미남이니 그루밍족이니 하며 여성적인 성향의 남성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 자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나 같은 구세대에게 남자들의 여성화는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태후」에 부각된 야성적 남성미가 무척 반가웠다. 여성 시청자들도 군인들의 절제된 언어와 단련된 몸매에 환호했다. 드라마 안에서 웃통을 벗고 구보하는 군인들의 구릿빛 몸을 바라보며 내뱉는 여자들의 탄성이 그리 외설스럽지 않았다. 군인들의 운동은 근육을 만들기 위해 도회지의 닫힌 공간에서 쇳덩이와 씨름하는 경우와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그것은 눈요기용 근육 덩어리를 만들기 위한 단순반복 운동이 아니라 용도가 분명한 생산적이고 역동적인 운동이다.
우정 혹은 ‘브로맨스’
엔키두는 길가메쉬의 오만과 폭정을 막기 위해 신들이 만들어 보낸 반인반수였다. 그러나 여자를 만나 성을 알고 빵과 맥주를 먹으며 문명을 아는 인간으로 변신한다. 더 나아가 길가메쉬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우정이 부각되면서 초반에 강력하게 대두되었던 성과 사랑은 문제의 지평에서 사라진다는 점이다. 처음에 온 백성들의 원성을 사가면서까지 여체를 탐하던 길가메쉬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다. 그는 절세미인인 이쉬타르의 유혹마저 가볍게 물리친다. 이로서 「길가메쉬 서사시」의 주제는 사랑에서 우정으로 넘어간다.
두 영웅은 협력하여 신들의 보디가드를 죽이고 하늘 황소마저 쓰러뜨린다. 협동하는 우정의 가공할 힘은 신들마저 위험에 빠트린다. 엔키두가 신들의 벌로 일찍 죽자 길가메쉬는 시체 위에 엎드려 일주일 동안 통곡을 한다. 시체에서 구더기가 나와 더 이상 애도할 수 없게 되자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고 동상까지 세운다. 이 두 남자의 우정은 가히 ‘브로맨스’의 원조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러한 ‘브로맨스’는 「태후」의 중요한 화두이다. 드라마의 처음부터 끝까지 유대위와 서상사는 특전사로서 사선을 넘나들며 감동적인 전우애를 보여준다. 드라마에서나 현실에서나 보기 드문 우정이다. 우르크에서 지진으로 실종된 사람을 구조하는 작전에서 두 사람은 서로 놀라운 희생정신을 발휘한다. 여진으로 유시진과 무전이 끊기자 서대영은 만사를 제치고 달려와 “앞으로 살아있으면 바로바로 대답 좀 합니다.”라며 깊은 걱정과 안도의 심정을 표현한다. 두 사람은 휴가를 나가서도 늘 함께 다니는데 “보고 싶은데 어떻게 합니까?”라며 진한 브로맨스를 연출한다. 이들에게 애인이 없었다면 동성애를 의심해도 될 정도이다.
배우 진구는 기자 간담회에서 “중기씨와 눈을 맞추면서 경례하고, 또 호흡을 맞추다보니 울컥하는 부분도 있었다.”라고 고백한 바도 있다. 송중기도 우정이라는 주제에 강한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이 우정은 남녀 간의 사랑이 터치할 수 있는 감성의 폭을 훨씬 확장하며 보편성을 드러낸다. 일찍이 레싱(Lessing)은 인간 사회의 평화를 이룩하는 데는 사랑보다 우정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태후」가 보여준 사나이들의 우정은 남자 시청자들만 매료시킨 것은 아니다.
주체적인 여성상
「길가메쉬 서사시」에는 여러 명의 여성인물이 나오지만 주인공 급은 샴하트와 이슈타르이다. 이 두 인물은 착하고 정숙한 여성상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남자를 주도하는 적극적이고 강한 여성이다. 이슈타르는 그 정도가 심해 많은 남자를 골탕 먹인다. 가히 팜므파탈의 원조이다. 물론 샴하트나 이슈타르나 일차적으로는 육체적인 매력으로 어필한다. 가령, 샴하트는 7박 6일 동안의 섹스를 통해 엔키두의 야수성을 완전히 해체시킨다. 이후 샴하트는 엔키두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이제 지혜로워졌어요. 당신은 신처럼 되었어요. 왜 야수들과 거친 숲속을 뛰어다니는 거지요? 이제 내가 당신을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우르크로 데리고 가겠어요.”
이렇게 가녀린 샴하트가 야수적인 엔키두를 문명인으로 개화시킨다. 처음에는 성력으로 제압하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샴하트는 자신의 옷을 엔키두에게 나눠 입히고 목동들의 마을로 데리고 가 빵 먹는 법과 맥주 마시는 법을 가르친다. 한마디로 그녀는 원시적인 남자를 지혜롭고 문화적인 인간으로 변화시키는 교육자가 된다. 그렇게 변신한 엔키두는 사람들에게 큰 이득을 가져다주는 영웅이 된다.
이슈타르도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여성 인물이다. 수메르 문명권에서는 이난나라고 하는 이슈타르는 미, 사랑, 전쟁을 관장하는 여신이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는 반드시 차지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아주 도전적인 여성이다. 길가메쉬가 훔바바를 처치하고 장엄한 모습으로 귀국하자 이렇게 청혼을 한다.
“이리 오세요, 길가메시여. 그대는 내 남편이 될 것이니, 그대가 갖고 있는 육체의 아름다움을 내게 주세요. 그대는 내 남편이 될 것이며, 나는 그대의 아내가 될 것입니다. 나는 그대를 위해 청금석과 금으로 만든 전차를 마련해 줄 것이며, 폭풍의 신령들이 당신 노새의 마구를 채우게 하겠어요! 내 집으로 오세요.”
「태후」에 나오는 두 여성 역시 자아와 주관이 강한 인물이다. 청순가련형이나 신데렐라와는 거리가 멀다. 강모영은 유시진을 더 없이 사랑하지만 자아를 희생하며 남자에게 빠질 생각은 전혀 없는 여성이다. 첫 만남에서 유시진의 데이트 신청을 ‘쿨하게’ 받아들이지만, 상명하복의 군대논리를 이야기하며 목숨조차 하찮은 듯 말하는 유시진에게 바로 반박하며 돌아선다. “난 의사다. 생명은 존엄하고 그 이상을 넘어선 가치나 이념은 없다고 생각한다. 미안하지만 내가 기대한 만남은 아닌 것 같다. 즐거웠다.”
의사로서 강모영의 정체성은 확고하다. 우르크의 재난 현장에서 보여주는 그녀의 활동은 헌신이나 봉사라기보다는 강한 소명의식의 발로이다. 모두가 위험한 우르크를 하루 빨리 탈출하려는 것과는 달리 환자를 버려 둘 수 없다며 스스로 귀국을 늦춘다. 지진의 여파로 발전소가 무너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구두의 굽을 부러뜨리고 달려간다. 또 환자를 살리지 못해 죄책감에 빠져 있는 후배 의사(온유)에게 합리적인 판단이 뭔지 냉정하게 가르친다. 생사가 걸린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그녀의 이성은 흐트러지지 않는다. 한 마디로 강모영은 한 남자의 애인에 머물고 마는 여성이 아니다. 그녀에게 사랑과 일은 ‘either-or’의 선택이 아니라 ‘as well as’의 결합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여성 일반의 소박한 꿈을 하찮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
“난 그냥 아침 출근길에 주차를 거지 같이 해놓은 인간 때문에 열 받았고, 점심엔 김치찌개를 먹을지 된장찌개를 먹을지 고민이고, 택배가 안와서 안달이 나고, 하~ 난 그냥 그런 시시콜콜한 것들을 얘기하고 싶은데.”
「태후」의 또 다른 여주인공 윤명주도 예쁘고 착하기만 한, 그래서 남자들의 관심에 의존하는 여성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강모영보다 더 도전적이고 입지적인 인물이다. 육사 출신의 군의관 장교가 검정고시 출신의 상사가 마음에 든다고 적극적인 공세를 펴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게다가 그녀의 아버지는 특수부대의 사령관이다. 그런 아버지에게 일개 상사를 애인으로 데려갈 수 있는 딸은 많지 않을 것이다. 윤명주는 사랑 하나만 믿고 엄청난 현실적 난관을 뚫고나간다. 그렇다고 그녀가 사랑에 목을 매며 자아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군의관으로서 시종일관 투철한 사명감을 발휘하며 타의 모범이 된다. 지진으로 서대영이 잔해 안에 갇혀 있을 때도 흔들리지 않고 환자 치료에 전념한다. 배우 김지원이 말한 것처럼 서대영을 사랑하는 윤명주도 멋있지만 “군의관 윤명주는 더욱 멋있다.” 그녀에게도 사랑과 일은 양자택일의 관계가 아니라 협력관계이다.
비극 혹은 희극
「태후」의 회수가 더해가면서 인기는 더욱 상승했고, 그럴수록 많은 시청자들은 드라마의 결말에 대해 걱정 아닌 걱정을 쏟아냈다. 혹시 이야기가 ‘비극’으로 끝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었다. 종영이 다가올수록 걱정은 불안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 사실 특전사라는 직업상 두 주인공에게 어떤 돌발 상황이 일어나도 엉뚱하다고 할 수는 없는 정황이었다. 15회로 넘어가면서 실제로 비극으로 기우는 분위기였다. 작가의 처음 의도도 비극을 배제하지는 않았던 것 같고, 드라마의 구도를 보면 비극이 더 논리적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나 많은 드라마 작가들이 그러하듯이 「태후」의 작가도 시청자들의 열화 같은 간청을 이겨내지 못한 것 같다. 작가는 네 명의 주인공 중 최소한 한 명은 죽일 생각이었다고 하지만 종내 아무도 죽이지 못했다. 대신 유시진과 서대영을 ‘반 죽여 놓는’ 선에서 타협을 본 것 같다. 그 내막은 이렇다.
알파팀은 외국에서 민간인 구출작전을 마치고 귀국하다가 갑자기 적의 공격을 받는다. 유시진과 서대영이 총격을 받고 쓰러진다. 교전이 끝난 뒤 둘러보니 이들의 흔적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다. 시신을 못 찾은 대원들은 귀국하여 사망으로 보고한다. 두 사람의 귀국을 학수고대하고 있던 강모영과 윤명주에게도 전사통지가 간다. 모영을 찾아온 박중령은 기밀상 유시진의 전사를 교통사로 처리해야 한다며 서류에 사인을 부탁한다. 이에 모영은 오열하며 반문한다.
“그 사람의 죽음이 누군가의 생명을 구했나요? 그 사람의 죽음이 어딘가에 평화를 지켰나요? 그 사람의 죽음이 조국을 위한 일이었나요? 그럼에도 그 사람의 죽음은 이 서류에 사인을 시키는 거에요?”
애인을 잃은 두 여자의 아픔과 고독을 통해 비극의 효능인 카타르시스가 어느 정도 획득된다. 즉, 모영과 명주의 슬픔과 아픔을 통해 시청자들은 비극적 정화작용을 경험한다. 홀로 남은 두 사람은 미친 듯이 일에 빠져보기도 하고 술도 마셔보지만 애인의 부재가 도무지 극복되지 않는다. 이것이 드라마에서는 1회 안에 처리되지만 실제로는 8-9개월 동안 이어지는 비애의 과정이다.
흠 없는 주인공의 희생이나 죽음은 시청자들에게 연민의 아픔을 전이시키면서 정화작용을 한다. 동시에 냉혹한 삶의 현실 앞에 겸허하게 고개 숙이게 한다. 이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길가메쉬 서사시」에서 친구를 잃은 길가메쉬의 슬픔과 고통이 독자들에게 주는 비극적 의미와 다르지 않다. 다만 길가메쉬의 슬픔과 고통은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인 죽음에 대한 질문으로 넘어간다는 데서 큰 차이가 있다. 잘 알듯이 엔키두의 죽음 이후에 이어지는 서사는 불사의 비밀을 찾아 나서는 길가메쉬의 여행기로 이루어진다.
안타깝게도 「태후」에서 잠시 제공되었던 비극적 카타르시스는 곧 거두어진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유시진과 서대영이 1년 뒤에 불사조처럼 각자의 애인 앞에 등장한 것이다. 비극이 희극으로 급전환되는 코미디이다. 드라마 전체에서 가장 어설프고 현실성이 떨어지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비극을 수용하지 못하는 시청자들의 성향 때문인 것 같다. 「태후」가 「길가메쉬 서사시」와 결정적으로 어긋나는 부분이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비극 수감력이 몹시 약하다. 젊은 시청자들은 드라마를 보다가 비극적 조짐이 보이면 집단적으로 작가나 제작진에게 압력을 넣는다. 시청자들의 표피적인 감상에 휘둘려 내적 논리도 리얼리티도 포기해 버린 경우가 허다하다. 현대 한국 문화의 '비극'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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