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에 관한 부분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본래 교회에 대한 가르침은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에 걸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어떤 몇가지 부분을 들어서 교회를 다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실은 부단하게 성경에서 그 모습을 찾고, 그 속에서 배우면서 교회가 진행하는 것이지, 몇가지 이론으로서 우리가 교회에 대하여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상 우리 개인에 관한 문제는, 곧 교회와 관련된 문제이고, 교회에 관한 문제는, 또 나 개인의 문제입니다. 나와 교회는 그런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에 개인적인 교훈을 받을 때에도 교회와 관련시킬 수가 있어야 하고, 교회와 관련시켜 얘기할 때 또, 나 개인에게 적용시켜서 들어야 합니다. 그 중에서 몇 가지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여러분들과 이번 모임에서는 『개혁교회에 대해서 바로 알자!』는 목적으로 가지겠습니다.. 그래서 먼저 잠깐 개혁교회의 과정을 설명하겠는데, 개혁교회와 그 성격을 파악하는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그런 것을 다 시도할 수 없고, 성경에서 보여준 것을 중점으로 하여 교회에 대하여 조금 생각을 하기 위하여 서론적으로 개혁교회에 관한 약간의 이해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 역사적 개혁 교회에 대한 이해
1517년 독일에서 마틴루터로부터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을, 여러분이 잘 아십니다. 그 후 스위스에서 쯔윙글리라는 사람이 1519년 1월부터 취리히에서 마태복음 강해를 시작하여 약 12년동안 하였습니다. 성경전체에 대한 강해를 하기 시작하면서 취리히에서 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의 출발의 특성이라는 것이 취리히에 있어서도 역시 성경연구와 설교라는 점입니다. 1531년에 취리히 시의회에서 캐톨릭 학자들과 개혁신앙과의 논쟁이 일어났는데, 그 논쟁결과 성상을 파괴하고, 미사는 성례가 아니라는 결론까지 나오게되는 큰 개혁의 업적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결국 쯔윙글리는 1531년 10월에 캐톨릭과 대항하다 죽게 됩니다. 그러나 그 밑에서 불링거와 같은 훌륭한 종교 개혁자가 계승하여 그 후 많은 영향을 구라파에 끼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개혁은 계속적으로 번져가고 있었습니다. 역시 윌리엄 파렐 같은 사람도 프랑스에서 개혁을 시도하면서 그 영향을 받아 서서히 개혁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유럽 교회의 상황 하에서 칼빈 선생이 등장을 했습니다. 칼빈 선생이 제네바에 갔을 때 그 인구는 13,000여 명이었는데, 상업적으로 매우 번성을 하던 곳이었습니다. 여기에 칼빈이 이르러서 개혁을 단행할 때에 그의 입장은 성경에서 교회에 관한 모든 것의 설명을 찾고자 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의 여러 가지 규정이나 교회의 여러 가지 신앙의 도리 여러 면에서 그 근원을 성경에서 찾으려하는 철저한 입장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위해서 칼빈 선생은 성경을 강해하고 유명한 기독교 강요라고 하는 대작을 쓰게 되었습니다. 사실상 개혁교회 입장에서 우리는 기독교 강요를 한 번쯤은 다 읽어야 합니다. 적어도 개혁교회 안에 있는 교인이라 하면은 지적인 능력이 있는 분들은 기독교 강요 정도는 읽어야 합니다.
성경 다음으로 우리의 영혼을 엄숙하게 만들고, 경건하게 만드는 책은 기독교 강요만한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칼빈은 그런 유명한 책을 28세에 저술하게 되고, 찬송집을 제작하였는데, 그 동안 캐톨릭은 음악전반에 많은 화성을 넣고해서 오히려 찬송이 가지는 그 가사의 의미보다는 그 기교가 아주 많이 들어간 곡을 지어서 거기에 사람들이 도취해버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 현상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쯔윙글리는 아예 찬송을 부르지 못하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칼빈은 음악적인 재능이 있는 분들의 도움을 받아서 찬송을 지어 사용했는데, 이때의 찬송은 시편이나 그런 내용과 그리고 칼빈이 작시한 내용도 있습니다.
찬송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한다면 찬송이라는 것은, 그 곡과 가사가 찬송에 합당한 곡과 가사를 사용하여야 하는데, 곡에 있어서는 찬송은 장엄한 곡을 사용하여야 합니다. 동시에 가사에 있어서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고자 할 때에는, 신령한 노래(성도간의 교제에 맞는)의 경우가 아닌 예배 찬송일 경우에는 하나님의 보좌에 어울리는 것을 쓰고자 하여야 하고, 또 그 찬송의 가사가 객관성을 띄어야 합니다. 교회의 공적인 예배행위에 있어서는 개인신앙의 경험을 놓고 운운하는 법이 아닙니다. 그래서 찬송은 객관성을 띈 찬송이 합당합니다.
교회가 찬송을 드릴 때, 객관성을 띄어야 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모든 사람이 공히 거기에 같이 고백하는 내용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속성이나, 하나님의 존재하심이나, 하나님의 구속사역이나 그런 사건과 관련이 될 때, 성도들은 다같이 객관성있게 찬송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나 어느날 꿈 속을 헤매며..."라든지,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에 일하러 가세!"라든지, 개인적인 경험이나 요청에 관한 것은 예배시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찬송학에서 다뤄지는 문제입니다(원래 찬송은 신학적으로 다뤄져야 함). 사실은 그런 찬송은 신학적인 차원에서 다뤄지지 않고, 유입되는 과정에서 19C에 미국 부흥운동에서 사용되어진 그런 노래가 현 찬송가에 들어가고 예배시에도 사용되고 있습니다.(통일찬송가 중에는 (합동측) 총회에서 금지한 곡도 있습니다. 이것은 통일찬송가보다 더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과 사역을 높이고 찬양하는 가사가 있다면 사용할 수도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ex. 김홍전 작사작곡, "찬송"(성약)).
칼빈 개혁 당시에는 시편이나 그런 하나님의 구속을 노래하는 객관성있는 내용을 주로 사용한 흔적을 보게 됩니다. 또 교회의 여러 가지 직제나 조직을 역시 칼빈 선생은 재조직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큰 신앙의 도리를 그대로 교회에서 실현하기 위해서는, 직제도 고칠 것은 고쳐나가는 것이 칼빈의 입장이었습니다. 이것이 다른 개혁자들과의 차이입니다.
성공회는 캐톨릭과 개혁교회의 중간적인 입장을 취해서 만들어 놓은 제도의 입장인데, 칼빈 선생은 중간적 위치를 취하지 않고, 조직까지라도 개혁을 하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특히 칼빈선생은 성경 아카데미에서 유명한 개혁 신학자들을 많이 길러내었습니다. 그래서, "존 낙스" 같은 사람도 칼빈에게 배워서 다시 스코틀랜드로 돌아가서 장로교회를 설립하는 큰 일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1559년에 창설한 성경 아카데미에서는 300여 명의 학생을 길러내었습니다. 그 때 칼빈 선생은 주로 성경을 주석하는 일을 담당했습니다. 그 밑에는 나중에 하이델베르그 문답서를 작성한 유명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래서 칼빈 선생은 소위 개혁교회라는 특징을 띄고, 유럽 전체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 독일에서는 루터의 영향을 받고 루터에 의해서 루터파가 생겨났지만, 그러나 개혁파는 칼빈에 의해 시작됩니다. 그래서 개혁교회라 할 때는 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감리교회나 성결교회 및 다른 교파들 또 개신교 아래있는 교파를 다 개혁파라고 하지 않습니다. 개신교회라고는 해도 개혁주의 교회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개혁파 교회는 칼빈 선생의 개혁을 중심으로 하여 그의 신학과 사상을 계승하는 입장입니다. 물론 그것은 더욱 풍요하게 발전하여 오면서 계승되었습니다. 그런 교회적인 문제를 여기서 다 논할 수가 없고 대강 이야기하면, 루터파는 그동안 캐톨릭에서 가지고 있던 악법들을 고치는 정도에서, 좋지 않은 교리를 고치는 정도에서 개혁이 이뤄졌지만, 칼빈의 개혁은 모든 것을 성경에서 근원을 찾을려고 했습니다. 성경에 근원을 두지 않는 것을 배격하였습니다. 그래서 철저히 성경중심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루터파는 캐톨릭의 여러 가지를 인용하여 그대로 인정했습니다만, 칼빈은 전반적인 개혁을 시도했다는 데에서 루터파와 다릅니다. 이렇게 해서, 그 당시의 종교개혁이 양대 루터와 칼빈에 의해서 시도되면서 이런 하나의 신학의 큰 흐름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칼빈의 개혁교회의 현상을 살펴보면, 칼빈의 교회와 일치하는 그런 고백서들이 칼빈 이후에 계속하여 나타나게 됩니다. 그의 제자들이나 칼빈의 사상을 계승해 나가는 사람들이 교회를 세울 때에 이 교리를 거기 표시하고, 칼빈의 사상과 일치하는 그런 고백서를 만들고, 그 법에 따라서 짓고 교회를 이루는 일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좀 더 관심있게 생각해야 할 것은 하이델베르그 교리 문답서라든지(1563년), 도르트 신조, 그 다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문답서, 또 스위스 신앙고백 등 이런 것들이 아주 법대로 작성되어 각처에서 교회의 통과를 보데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개혁파에서 칼빈의 영향은 화란, 독일, 프랑스, 영국, 스코틀랜드 전역에 걸쳐서 아일랜드, 카나다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여기서 한가지 또 생각해야 할 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입니다. 영국의 개혁신앙인들이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모여서 그 교회들이 무엇을 믿고, 어떻게 교회를 이루어야 할 것인가 하는 신앙 도리를 공적으로 고백하고 선언해야 할 입장에 서 있었습니다. 그 교회가 믿고 나아가는 신앙고백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다 함께 이런 신앙고백을 한다는 속에서 교제가 이뤄지고, 교회가 이뤄지기 때문에 신앙 고백서는 반드시 필요하게 됩니다.
그래서 1643년 7월부터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모여 그들의 신앙고백서를 작성하고 그의 후손에게 가르쳐서 계승해야 할 문답서를 만들기로 작정합니다. 그때 회원들은 당시에 뛰어난 신학성과 훌륭한 경건성을 겸한 위대한 신학자들이었습니다. 이분들은 하나님의 인도와 철저히 성경에 의해서 세워보고자 하는 입장에서 임하고, 결국 신앙 고백서를 작성하게 됩니다. 이것이 1647년에 얻은 결실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개혁교회들이 이 신앙고백서를 채택하고 이 고백을 자기들의 고백으로 삼고 자기들의 교회를 이루게 됩니다. 바로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요리 문답서에 개혁교회가 믿는 신앙의 내용이 잘 담겨 있습니다. 이것을 작성한 사람들은 다 칼빈의 신학과 그의 교리를 전수하고 그 사상들을 받아서 이뤄나온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 사람들이 이에 앞서 만들어 놓은 여러 고백서를 참고하고 보완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개혁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내용이 잘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들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나 요리 문답서를 주의해서 마음을 기울여서 공부를 차근차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도 과거에 소년 시절 때 공부를 했는데, 그때에는 어렵기도 하고 딱딱하기도 하였는데, 지금에 와서는 그걸 가르치실려고 애쓰시던 집사님이 참 고맙게 생각되고, 그분이 충정을 가지고 교우들을 잘 이끄셨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웨스트민스터 고백서와 요리 문답서를 꼭 하시길 바랍니다(추천 : 최낙재 著,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강해"(크리스챤다이제스트).
■ 개혁주의라는 이름이 생기게 된 배경
역사상에 일어난 개혁운동에 대한 구체적인 이름을 개혁주의하고 하는데, 왜 개혁주의라고 하느냐 하면 우선 생소한 분들은 뭘 고치고 나가는 것을 개혁주의라고 하는가보다 하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 입장을 개혁주의라고 16C-17C에 걸쳐 일어난 개혁운동에 붙여진 이름일 뿐이지, 그 입장을 표명하기 위하여 개혁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뿐이지 사실은 성경에서 가르침을 잘 배워서 교회를 잘 이루겠다는 자세입니다.
칼빈에 의해서 종교개혁이 일어나서 칼빈의 사상을 받았기 때문에 개혁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뿐입니다. 그러나 이 개혁주의 일맥을 보아서는 칼빈과 칼빈 후기 개혁주의 신앙고백서, 그러니까 17C에 웨스트민스터 고백서와 요리 문답서 그리고 도르트 회의 신경들을 통해서 계승되었습니다.
▣ 개혁주의 교회의 정신과 계승
개혁주의 교회의 정신은 교회가 성경에 근거해서 자기 행진의 방향이나 교회의 행진의 성격을 검토하고 고쳐나가는데 있습니다. 그런 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또, 교리와 신학으로서는 아까 말씀드린대로 사도신경과 A.D.325년에 니케아신조(예수님의 기독론, 곧 神性과 人性에 대한 아리우스의 도전을 받아 그 주장을 배격하고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한 신조입니다)와 개혁주의 신앙의 영형을 받아서 계속 보완이 되고 만들어져서 나온 벨직 신앙고백(1561년), 하이델베르그(1563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도르트 신조 등 대개 이런 것들을 계승합니다.
오늘날도 이 교회가 개혁교회의 입장에 서 있는 교회라고 말한다면, 이 몇 가지의 신조와 신경문답서를 채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개혁주의 입장으로 세워졌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죤 낙스"가 종교개혁을 해서 칼빈이 가르친 신앙의 도리를 가르치고, 그 도리를 고백으로 가지고 교회를 이루면서 교회 정치체제를 칼빈이 알려준 그대로 했습니다. 이래서 최초의 장로교회가 스코틀랜드에서 형성되었고, 명칭도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그 영향을 받아서 미국의 장로교회가 생기고, 미국의 선교사가 한국에 와서 한국 장로교회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장로교회는 처음 개혁주의를 그대로 계승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교회는 개혁주의 입장에 서 있다고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 역시 대한 예수교 합동도 헌법에서 웨스트민스터 고백서와 소요리 문답서를 채택하였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나라의 장로교회는 여러 가지 면에서, 개혁주의 신앙에서 이탈하는 현상을, 개혁주의를 포기하는 조짐을 상당히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처지에서 우리가 개혁교회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 역사적 개혁신앙을 계승하려고 몸부림치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고, 매우 다행스런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런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것은 어떤 분파주의를 만들자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한계를 정해놓고 우리는 이렇게 해 나간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우리 교회가 표방하고 나가는 그 신앙고백에 따라서, 교회를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 노력일 뿐입니다. 그런 것이지 우리는 별 다른 교회를 하고, 어떤 분파가 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의 행진이라는 것은 같은 의식과 생각을 가지고 나온 계통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역사적 신앙을 고백하고 그것을 간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1.성경에서 교회의 모습을 찾겠다는 입장입니다.
개혁주의 교회로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 할 때에 역사상 개혁교회 입장과 아울러서 생각해 본다면, 먼저 성경에서 교회의 모습을 찾아야 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자라나온 모습으로, 경험으로 교회를 생각해서는 안되고, 내가 과거로부터 가져온 습관적인 모습으로 교회를 이룰려고 하면 안됩니다. 내 경험과 익숙한 습관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교회로서 나아가는데 지장(장애)이 된다면 언제라도 개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 "내가 과거에 이렇게 해 왔는데 왜 이것이 갑자기 바뀌어야만 하는가!" 하고 그것을 경험, 습관적으로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성경에서 보여 준대로, 성경에서 보여준 계시의 정신으로 예배도 하고, 성경에서 보여 주는데에 따라서 생활하고, 교회를 이룰 것인가 하는 소원과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언제나 끊임없이 진보가 아니면 정체입니다. 정체는 곧 퇴보인 것이므로 "그냥 이 정도면 됐다! 안심한다! 여기서 머물러도 되겠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전진을 해야 합니다! 곧 성경에서 늘 교회 모습을 배워서 그렇게 교회를 이룰려고 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찬송에 있어서 저희 교회가 다른 찬송을 쓰고 있는데, 물론 기존의 찬송집에도 좋은 내용이 있습니다만, 그것을 분별하고 함께 겸하여 쓰는 일이 불편하여 그 질에 있어서 우수하게 만들어진 찬송을 하나로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김홍전 목사 작곡작사, "찬 송"). 사실 찬송도 자꾸 발전을 하여야 하고, 교회는 좋은 찬송을 만들고 찾아 사용하여야 합니다.
할 수 있으면 성경에서 보여 주는대로 교회가 행진을 하자는 입장을 뚜렷이 가진다면, 우리의 전통을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분별없이 합쳐놓고 그냥 합동시켜 놓은 것이니 나누면 안 좋다던가 하는 평범한 생각을 가지고서 그런 중요한 찬송의 문제를 그르칠 수 없는 것입니다. 교단은 나누면서 찬송만 같으면 뭐합니까? 간혹 습관적으로 교회를 이룰려고 하는 경우가 있는 것을 느낍니다. 그런 것을 고쳐야 합니다. ..
2.역사적으로 계승된 신학과 신앙을 받아서 그 의미를 풍부하게 하겠다는 입장입니다.
두번째로, 역사적으로 계승된 신학과 신앙을 받아서 그 의미를 풍부하게 해야 된다는 입장입니다. 역사적으로 계승된 신학과 신앙을 받아서 그 의미를 풍부하게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칼빈주의나 개혁주의라는 말을 쓰는 것은 우리가 개혁주의 교단에 속하여 있어서도 아니고, 우리가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계승하려고 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그것을 확인하고 그 노선에 서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역사적으로 내려오는 많은 고백서와 신학 입장들이 다 있는데, 우리에게는 객관적으로 역사적으로 내려오는 과정에서 그 신앙고백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믿고 교회를 이뤄 나왔고, 믿고 나아간 교회들의 검증이 있단 말입니다. 그 고백서와 신앙과 신학을 계승했던 그 교회들을 보니까 건강하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것을 검토하여 보고 검증하고서 우리도 그 신앙을 계승하겠다는 입장에 선다는 말입니다.
역사상 교회가 그렇게 성경을 해석하고 그렇게 해석해 나간 바탕 곧, 그들의 해석의 바탕 위에서 가르치고 그들이 나아간 그러한 결과를 역사적으로 증명하고, 그것을 우리가 보면서 그것을 계승하고 해석할 때는 더 확호하게 그리고 풍부하게 해석하여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3.교회의 신앙전통은 항상 새로워 질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세번째는, 교회 신앙전통은 항상 새로워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신앙전통이 항상 새로워 질 수 있다는 얘기는 비판과 위험을 항상 겸한단 말입니다. 개혁주의 교회는 그 비판을 수용하고 항상 허용하고 열려져서 성경을 통하여 그 비판들을 수용하면서 검토하면서 교회를 자꾸 새롭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캐톨릭의 경우는 교황무오설이라든지 마리아 무흠숭배설, 중보설, 승천설, 화체설 등에 대한 비판이 와도 그것을 수용하지 않고 전통을 그대로 계승해 버립니다.
개혁교회는 그런 입장이 아닙니다.
4.교회는 항상 개혁되어간다는 입장입니다.
네번째는, 개혁되어진 교회가 아니라 계속 개혁되어가고 있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간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니까 계속 개혁되어가고 있는 교회입니다. 자기 연약과 부족을 항상 인정하므로, 교회가 만약에 개혁교회이고, 개혁되어졌다라고 한다면 그 시간부터 또한 개혁에 대한 씨가 뿌려져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개혁주의 입장은 개혁이 완료되어 버린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개혁되어져가는 자기행진의 한 성격입니다. 이런 입장을 개혁교회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혁교회는 새로운, 새롭게 출발하고 시작한 교회가 아니라 이미 아담에서부터 있어왔던 교회인데, 그 교회가 새로워져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지, 전에 교회가 없었는데 새롭게, 새로운 교회를 하나 시작했다는 그런 입장이 아닙니다. 과거 일찌기 역사 초기부터 계속 되어온 교회를 성경적으로 계속해서 개혁하여 나가는 자기 진행의 방식을 취하는 것이 개혁주의 입장입니다. 개혁주의 교회는 교회가 완전하게 성경적일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리고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항상 개혁하는 태도를 가집니다.
5.전통적 신앙을 기계적으로 계승하지 않고, 살아있는 자신의 역사로 전승하겠다는 입장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전통적 신앙은 기계적으로 계승해서는 안됩니다. 살아있는 자신의 역사로 전승해야 합니다. 요즈음 장로교회가 큰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냥 명제적으로 웨스트민스터 고백을 받아들이고, 그냥 과거 문서로 취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의 고백서라고 그냥 기계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개혁교회가 되느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개혁신앙의 내용 곧 그들의 피, 땀나는 노력과 그것으로 교회를 아름답게 세워온 그런 결과가 있는 그런 교회들의 신학 전승들을 소홀히 받아 들여서는 안됩니다. 그런 것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이는 교회 전통을 무시하고 가볍게 여기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갑자기 이 세상에 핵폭탄이 터져서 다 파괴되어 완전히 잿더미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용케 살았습니다. 기어 가다가 무엇에 걸렸는데 보니 성경이었습니다. 이 세상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성경책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과연 그가 그 성경책 하나 가지고 신앙생활을 바르게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역사적으로 계승되어온 신앙을 우리가 소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리적으로 배타적인 생각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잘 계승해서 그것을 기계적으로 전수하지 말고, 그 교회와 그들이 조리있게 설명해 놓은 전통들이 무얼 의미하고, 또 그런 부분들을 왜 규정해 놓았는가 그 의미를 찾고 풍부하게 설명을 해서 살아있는 자신의 역사로 전승해 받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함께 공감하고 함께 공유하고 자신의 역사의 자체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혁주의 교회라 하면서, 그런 전통적 개혁신앙에 대해서 연구하지 않고, 살피지도 않고, 그냥 개혁주의 교회, 개혁파다 하면서 그것이 오순절파가 가지고 있는 것인지, 어떤 파에서 하는 것인지 검토하지 않고 받아들여 놓고서, 그것이 세대주의 종말론인지 아닌지 구별을 못하면서도 그냥 따르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한 무책임한 교회에서는 개혁교회라는 것은 세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자꾸 확증하여 그런 신앙의 내용들을 공감하고, 공유하는 그런 입장에서 그것을 연구하고 파악해서 자기 것으로 연구하고 파악해서 자기 것으로 상고해서 자기들의 교회 자체로 만들어 내야 합니다. 그런 교회가 개혁교회입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통일성이 생기고, 그러한 사상과 정신의 일치성을 느끼는데 그것을 일컬어 다른 경향과 구별지어 개혁신앙이라고 vs의상 부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학과 신앙은 교회라는 실체에서 전달되어져야 합니다. 즉, 이 교회가 개혁교회라고 한다면, 이 교회 성도들이 그런 신학과 신앙을 자기 것으로 삼아서 그렇게 믿고 나아가는 몸부림이 거기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잘 이해하고 깨달으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공감하고, 공유하고 그래서 그것을 잘 설명해서 계승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개혁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개혁교회라는 말을 쓰든지 안쓰든지 여하간 성경에서는 교회라는 기관에 대해서 매우 중대하게 여기는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 무엇하러 왔다가 무엇하고 갑니까? 한마디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잘 이루다가 세상 떠나가는 것이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서 교회 잘 이루다가 세상 떠나는 것이 사명입니다. 여기에는 상당한 설명과 함축된 내용들이 있어서 많은 해석을 가해야 하지만, 한 마디로 말해서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이룬다고 할 때, 막연하게 이룰 것인가? 많이 있는 교회들의 모습처럼 우리도 숫자나 늘리고, 무엇도 많이하고, 한 가지라도 사명이라고 붙잡고 해야 할 것인가? 우리 신학과 개혁신앙은 오늘 우리만 독불장군식으로 그것을 받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발견하고 우리가 소원하던 그 신앙의 고백과 교리와 내용들이 앞서간 자들에게 이미 있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같이 믿고 물려주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개혁교회는 당대 무엇을 다 이룰려고 하지말고 역사적인 책임을 또한 느껴야 합니다. 200-400년, 한 교회가 미래에 대한 책임을 갖고 반드시 그 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 책임을 전혀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그 교회를 이룰 때 거기에서 어떤 하나님 나라의 사명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한국적 상황에서는 개혁주의 교회에 중추적 역할을 해야 할 교회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칼빈 선생같은 위대한 인물이 우리 한국교회에 100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한 개의 확실한 개혁교회 신앙입장에 서서 나아가는 교회가 필요합니다. 지금 이 땅에 많은 석학들이 신학과 아주 신령한 목사님에게서 배우고 배우는데서 끝나 버린다는 얘기입니다. 그분을 존경하는 것으로 끝나고, 교회가 진리를 깨달아 교회답게 서지를 못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배우고 그 결과로서 교회를 내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목사님 밑에서 목사님을 배워서, 목사님의 어떤 신선한 도덕력을 보고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 가르침을 따라서 교회가 이루어지고 그 교회가 잘 갖추어 나갈때에 그 교회 속에서 인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오늘날 어려운 점이 무엇인가 하면 어떤 훌륭한 목사님에 대한 경험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그런 교회에 경험이 없다는 점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어떤 교회상에 대한 파악이 되어 있으면 훨씬 쉬울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경험이 있어야지요. 경험이 있어야 되는데 경험이 없습니다. 경험(척도)이 없으니까, 어떤 분기점이 없으니까 결국은 이렇게 해야 교회인가, 저렇게 해야 교회인가? 자꾸 우왕좌왕하고 그래서 어떤 모델케이스를 따라서 자꾸 교회의 방향이 옮겨지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성경으로 돌아가서 성경에서 찾아서 교회를 이루어 놓아야만이 우리의 후배들이 우리와 같은 악순환을 거듭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를 이루는 자들의 책임이라는 것은 참 막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고통도 오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점에 대해 우리가 소홀히 한다면, 우리 자손들도 역시 어떤 교회상에 경험되고 눈에 보여야 하는데 안보여지니까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교회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신학교수가 있어도 교회 아니면 이론에 불과한 것입니다. 신학이 무엇입니까? 교회를 이루기 위한 하나의 과정입니다. 교회를 못 이루는 신학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교회가 바른 교회 이루기 위해서 교회자신이 신학교라는 기관을 만든 것입니다. 신학교와 교회가 병립되어 나란히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태가 바른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 신학이라는 기관을 만들어서 결과적으로 교회를 이루는 현실로 발전하여 나아가야 하고, 그런 교회 속에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며는 몸으로, 경험으로, 현실적으로, 가시적으로 얼마든지 교리를 배워나가며 신학을 배우고 신학의 정수를 배워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은 개개인 몇 사람이 이뤄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라는 집단적 양상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므로 공동체 안에서 지체 하나하나의 책임입니다. 우리 교회가 어디로 나아가는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런 행진의 발자취가 한걸음 한걸음 있어야 합니다. 그런 노력도 없어서는 안됩니다. 일보일보라도 그쪽을 향해 나아갈려고 하는 열망을 공동체가 공통적 성격으로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있어야 교회가 되는 것이지 그것없이 막연한 생각으로 교회를 이룰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