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존엄사 vs. 비존엄사
살고 싶을 때까지만 살 수 있는 권리는 아무에게나 있는 게 아니다.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다"는 말을 스무살 청년이 했다면 어떻게든 그에게 방법을 찾아주든가, 흠씬 패서라도 살아가게 하는 것이 옆 사람의 도리다.
그러나 육신의 고통이 크고, 치유하기 위한 과정은 더 힘들며, 그나마도 회생할 가능성이 없을 때, 그리고 좀 더 솔직히 그가 고령이라면 '죽을 권리' 혹은 '더 이상 살지 않을 권리'를 말할 수 있다고들 생각한다. 이른바 존엄사의 기초 조건에 해당한다.
그런데 세상 모든 문제가 그렇듯 이런 문제에서도 난제는 각론(各論), 디테일(detail)이다. 환자의 고통을 리히터지진계처럼 정확히 계측할 수 있을까, 그의 소생 가능성을 '김 노인, 0.023%' '최 중년 15.4%' 식으로 정확히 예측할 수 있을까.
김훈의 단편 '화장'은 삶 혹은 고통의 지긋지긋한 구체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뇌종양으로 아내가 세상을 뜬 날, 남자의 육신을 괴롭힌 건 방광에 가득 찬 오줌이었다.
전립선 비대증으로 밤새 오줌을 누지 못한 그는 아내가 사망하자, 딸에게 전화해 개밥을 주라고 얘기하고, 비뇨기과에 가서 요도에 관을 꽂고 오줌을 빼내기 시작한다. 방광의 고통이 사그라지자 남자는 잠에 빠진다. 그 순간, 오래 앓은 아내의 죽음보다 더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것은 방광의 고통, 그리고 해소였을 것이다.
지난해 말, 법원이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김 할머니(77)에 대한 연명치료 중단을 허가하면서 존엄사는 중장년층에게 '나도 곧 선택해야 할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얼마 전 밥 자리에서 만난 한 언론사 간부는 "아침에 유언장을 쓰고 왔다. 인공호흡기 같은 건 절대 쓰지 말라고 써놨다"고 했다.
"벌써 쓸 필요가 있는가" 하는 얘기가 나왔지만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인생"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주변에서도 이런 비슷한 서약을 한 중장년들은 적지 않다. 본인들은 자기 철학에 기반을 둔 심사숙고한 결정이겠지만, 사회현상으로 본다면 일종의 '유행'이 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에 사람이 개입하면서 존엄사 문제는 좀 더 다양한 양상으로 고민을 안겨주고 있다. "난 어떻게든 오래 세상에 머물고 싶다. 내 혹 의식을 잃고 깨어나지 않더라도, 살 가능성이 적다고 말한대도, 너희들이 최선을 다해서 나를 살려다오." 이런 당부를 했다가는, '존엄하지 않게 삶에 집착하는' 사람으로 취급당하기 좋은 분위기다.
'깨끗하게 죽고 싶다'는 결정이 '힘들게라도 오래 살고 싶다'는 의지를 헛헛한 욕망으로 만들어 버리는 셈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치료와 간호에는 시간과 사람과 돈이 든다. 때문에 돈이 넉넉지 못한 이들이 "연명치료 말라"고 선언하는 건 존엄사의 제1조건에 해당하는 '100% 자의'라고만 볼 수는 없다.
다행인 점은 존엄사에 관한 구체적 각론을 마련할 기회를 우리 사회가 얻고 있다는 점이다. 23일 세브란스병원에서 인공호흡기를 뗀 김 할머니가 자발 호흡으로 또 하루를 넘기고 있다. 그야말로 할머니는 이제 '순리'에 의해 삶의 길을 더 걷거나, 걷지 않게 되신 셈이다. 이 소식을 들으면서 사회 각계에서는 존엄사와 관련한 가이드 라인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존엄사 결정 여부와 관련, 어떤 전문가 몇 명이 결정을 내릴지, 가족들의 입장은 얼마나 반영돼야 하는지, '환자의 고통'이라는 추상적인 단어를 어떻게 구체적인 항목으로 바꿀지도 빨리 논의되어야 한다. 존엄사라는 용어도 생각해봐야겠다. '존엄'이라는 단어는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단어처럼 그걸 선택하지 않은 이들을 '비존엄' '비양심'으로 구분하려는 경향을 갖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존엄사에 관한 실질적·철학적 질문을 많이 풀어야 하게 됐다. ▣ 25일자 조선일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