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발령은 을미개혁이 추친되며 시행되었는데,
이때 단발령을 시행한 것은위생에 이롭고 활동하기 편하다는 이유에서 였지만
수백년의 역사를 지닌'신체발부수지부모'라는 (뜻은 말안해도 다들 기본적으로 알고 계시겠죠?)
유교적 효 사상은 결코 무너뜨릴 수 없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반대를 했습니다.
지방의 어떤 양반은 아들이 단발을 하고 온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자살했다는 기록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에 대해 다른 주장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애초에 상투는 유교윤리와 상관없는 우리의 풍습이므로 단발령에 반대한 것은 유교윤리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삼국지 동이전에 상투에 관련된 구절이 있어 상고시대 때 부터 상투는 있었다고 추중 된다고 합니다. 또한 고구려 고분벽화나 신라의 도기에 나오는 인물상을 보면 고대의 상투모습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상투의 역사가 오랜 것이라면 상투는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부모에게서 받은 머리털을 보존하려는 유교사상에서 나왔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근거로는 상투를 틀 때는 정수리 부분의 머리털을 완전히 깎아 내고 나머지 머리털만을 올려 틀었습니다. 본래 상투 자체가 부모에게 물려받은 머리털을 잘라버리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유교예식에 어긋나기 때문에 단발령을 반대한다는 것은 다소 모순된 이유가 되는듯 싶습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ds26.cafe.daum.net%2Fdownload.php%3Fgrpid%3DveRc%26fldid%3D5FtT%26dataid%3D158%26fileid%3D1%26regdt%3D20051210032434%26disk%3D34%26grpcode%3Djoucheol%26dncnt%3DN%26.jpg)
그렇다면 이시대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상투를 지키려 했던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신분간에 구분이 뚜렷했던 우리나라는 상투를 통해 수직적인 신분질서를 나타내는 풍습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가장 큰 이유는 일본에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는 자존심의 표현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때 최익현의 "내 목은 자를 수 있으나 내 머리는 자를 수 없다"는 탄식을 시작으로 전국의 유생과 지방민들은 의병을 조직하기도 하였는데 명성황후 시해와 더불어 의병봉기가 그의 이유였다고합니다.
게다가 단발령을 주도한 총리대신 김홍집은 광화문 거리에서 돌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있기도 하였는데 그는 단발령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직접 설득하러 나섰다가 변을 당한 것이라 합니다.
단발령에 대한 반발이 거세어지자 고종과 태자는 눈물을 머금고 단발을 하고 그 후 나라에서는 백성들의 민가에까지 가서 강제로 상투를 자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제가 중고등학교때 계속 단발령인 두발규정이 있는 학교를 다녀서 인지 그맘 잘 압니다.
선생님이라는 세력에 반발하고 싶고 머리로써 내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했던 그 마음...
지금은 두 모교 두발 자유화가 되었다고 하네요...어찌나 배가 아픈지 ㅋㅋㅋ
단발령이라는 것이 시행된지 백년이 훨씬 지났지만 여전히 그 그림자는 우리생활 구석구석에 아직은 남아있는 것 같아 마음이 씁슬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