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의 역사
유럽의 어느 곳에서든 로만, 게르만, 켈트족의 축제는 겨울의 시작을 알렸다. 삶에 대한 새로운 약속을 제시하고 세상의 새로운 빛이 예수 그리스도에 있음을 알리면서 고대 기독교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4세기부터는 종교적인 축제를 기준으로 하는 달력이 서서히 제도화되었다. 종교적인 축제는 고대의 제식과 이교적인 축제를 밀어내고 대신 그 자리에 들어앉았다.
크리스마스는 기독교 전례상 12월 24일 밤부터 25일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성하는 탄생의 축제다. 현대 프랑스와 캐나다는 과거의 전통을 잊지 않고 아직도 크리스마스 축제와 연관된 신앙 및 종교적 관습을 생생하게 유지하고 있다.
크리스마스라는 말의 의미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고대 유대교적 기원
-(그리스도의 탄신일)와 관련된 라틴 종교적 기원
-<동지>에 해당하는 (새로운) (태양)이라는 갈리아 이름에서 유래된 켈트적 기원

1. 기원
기원 후 초기 몇 세기 동안 기독교가 형성될 때, 성탄절은 존재하지 않았다. 교회에서는 부활절에 엄숙하게 치러지는 부활제만을 인정했다. 예수의 탄생 즉 를 경축한 일은 4세기에 서양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데, 그때 기독교는 대다수 서양인의 종교가 되어 있었다. 성탄절의 목적은 민중의 농사 축제와 12월에 치러지던 <기독교 이전의 제식>을 기독교화하는 것이었다. 특히, <세계의 빛> 혹은 <정의의 태양>이라고 불린 예수가 페르시아의 태양신 미트라 를 대체했다. 성서의 해석이 그리스도의 생애, 특히 탄생의 장면들을 재현시키는데 영향을 주게 된다.
리베루스 교황이 12월 25일을 <성탄절>로 규정한 것은 354년의 일인데, 그 당시 동양의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탄생일과 그리스도가 세례를 받은 1월 6일을 주현절이라 하여 기념하고 있었다. 사실 성탄절을 정한 것은 로마 제국민으로 하여금 우상화로부터 등을 돌리게 하려는 교회 신부들의 과도한 욕구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런데 5세기부터 성탄절은 기독교 세계에서 너무나도 큰 중요성을 띠게 되어, 교회의 회계년도가 성탄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렇게 진행되다가, 11세기에 대림절 기간이 크리스마스 축제 기간에 덧붙여짐으로써 그때부터는 대림절의 첫번째 일요일이 교회의 새로운 회계년도의 시작이 되었다

2.고대
기독교 이전의 종교 의식 기독교 이전에 종교적 혹은 이교적 축제는 12월 25일 주변에 많았다. 가장 유명한 축제는 12월 17일부터 24일까지 치러지는 <사투르누스제>, 12월 25일의 미트라 예배식, 그리고 12월 말에 치러지는 <인장(印章)제>였다.

로마 시대의 종교 축제인 사투르누스제는 12월 17일부터 24일까지 로마를 비롯한 로마 제국의 각 지방에서 치러졌다. 이 축제는 파종과 농업의 신인 사투르누스의 지배를 기념하는 축제였다. 이것은 역으로 뒤집힌 세계와 자유를 경축하는 축제 (libertas decembris) 였다. 로마 노예의 자유의 날에, 노예는 주인이 되었고 주인은 노예에게 복종했다. 사투르누스제는 중세 <광인 축제>에 그 흔적을 남기게 된다

미트라 예배식
페르시아에서 유래된 미트라 예배식은 기원전 3세기부터 4세기까지 널리 퍼졌다. 이 예배식은 세례라든가 성체 빵이라든가 일요일의 휴식 등 기독교 전통 및 관례와 많은 유사점을 보여주었다. 12월 25일, 사람들은 황소를 제물로 바침으로써, 어린 태양신 미트라의 탄생을 가리키는 (무패의 태양)을 축성했다. 이 태양은 갓 태어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바위나 동굴에서 솟아난다고 했다.
3. 중세
중세에, 성탄절에는 여러가지 행사가 벌어졌는데, 그 행사가 차차 발전하여 동화나 전설, 연극, 크리스마스 캐롤 등 현대 종교적 풍습의 기원이 되었다.
경외(經外) 복음서에 따르면, 13세기에 Jacques de Voragine가 작곡한 <황금빛 전설>은 그리스도의 탄생 및 어린 시절에 관한 전설과 일화들을 파급시키는 데 기여했다. 광인 축제와 같은 기타 대중적인 축제들은 <기독교 이전의 예배식>을 상기시킨다.
중세의 이교 축제
중세에, <광인 축제>와 <당나귀 축제>는 매우 대중적이었다. <광인 축제>는 12월 25일 성탄절이나 정월 초하루나 아니면 주현절에 치러졌다. 이것은 로마의 <사투르누스제>를 상기시키는 축제로서, 이 자유의 시간 동안 하인은 주인이 되고 주인은 하인이 되었다. 이 단 하루 동안, 사회의 기존 가치들이 뒤집히고 종교는 웃음거리가 되었다. <당나귀 축제>는 일부 도시에서 크리스마스 이브에 혹은 12월 25일에 치러졌다.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여, 아이를 품에 안은 한 처녀가 당나귀 등에 올라타고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미사 동안 모든 기도문은 으로 끝났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교회는 외설적인 성격을 띠어가는 이 축제를 금지시켰다.
4. 15~18세기
15 세기부터 17세기까지의 크리스마스
중세 프랑스에서 교회의 연극, 종교 의식, 그리고 처음에는 교회에서, 그 다음에는 광장에서 행해지던 각종 놀이 등이 현재의 성탄절 풍습의 기원이 되었다. 15세기 이탈리아에, 그리고 16세기 프랑스에 등장한 초기의 교회 풍습이 중세 종교 의식의 연극 놀이를 대체했다. 인쇄술의 도입으로 유럽 문화의 중요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책 덕분에 성서와 크리스마스 캐롤이 쉽게 모든 사람에게 널리 유포되었다. 크리스마스 캐롤은 가장 대중적인 성탄절 기념 행사 중에서도 가장 널리 퍼진 요소다. 16세기부터, 크리스마스 캐롤은 (라틴어로 된) 예전(禮典)과는 유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역 언어로 출판되었고 행상인들에 의해 파급되기 시작했다.
성탄절 관련 이야기는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행상 문학에서 매우 많은 저작물들을 찾아볼 수 있다. 한편 행상인들은 성탄절 관련 그림과 찬송가가 들어 있는 목판화도 판매했다.
최초의 축제 기간인 12일간의 성탄절은 즐거운 축제의 시작이었다. 공현절 때까지 펼쳐지는 밤샘 축제 기간이 크리스마스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캐나다에서는 저녁 식사가 끝난 후, 번갈아가며 부모와 친구와 이웃 사람들을 맞아들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바이올린, 아코디언, 기타와 각종 악기 연주자들이 연주하는 즐거운 곡조를 들으면서 마음껏 즐겼다. 필시 라틴 기질을 띠고 있는 까닭이겠지만 퀘벡인들은 축제에 대한 감각이 있었다. 그들은 즐거이 지그 댄스를 추고 노래를 흥얼거렸으며, 모인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재미있는 이야기나 동화를 들려주기도 했다. 아직 오늘날까지도 <좋았던 시절의 철야식>이라고 불리는 이 나날들은 활기차고 화기애애했다. 이러한 가족간의 축제는 구세주의 탄생을 기념할 뿐만 아니라, 대림절 기간 동안 교회가 부과했던 오랜 금욕과 속죄 기간의 끝을 의미하기도 했다.
캐나다 뉴프랑스의 성탄절 기념 풍습은 프랑스 식민자들과 선교사들로부터 유래되었다. 따라서 아메리카 인디인들 및 프랑스어권 지역의 캐나다인들이 전통적으로 자정 미사를 올리는 관습은 가장 먼저 캐나다에 온 이들로부터 전해진 것이다. 신교도이든 구교도이든, 영어권 지역 캐나다인들에게, 이러한 종교적 축제 의식은 18세기 캐나다에 도착했을 때 이미 풍습 및 관습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의 공동체 축제
프랑스 전통 사회에서 성탄절 준비는 집안 대청소를 의미했다. 집안의 유지 및 보수 작업이 완성되어야 했다. 그리하여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성 토마를 위해 빵을 구워라,
홋이불을 빨아라
있다면 살찐 돼지도 잡아라
그대가 돼지를 잡으면
곧 크리스마스가 올지니
어느 지방에서든, 밤샘 동안의 놀이와 수수께끼, 노래, 동화와 전설 등은 자정 미사 및 전통적인 만찬의 시간이 올 때까지 참고 기다릴 수 있게 해주었다. 프로방스, 알자스, 프랑슈 콩테에서는 성탄절 풍습도 지역 특성에 따라 발전되었다. 그중에는 현재의 기독교 풍습과 특별 시장도 있다.
5. 19~20세기
19세기와 20세기 19세기 프랑스의 농촌 사회에서, 성탄절은 12일간의 축제 기간을 중심으로 짜여졌다. 축제 행사는 선물 주고받기, 성탄절 관련 인물의 연극화, 전통적인 음식 요리법, 크리스마스 만찬을 위한 케익류 준비 등을 통하여 치러졌다.
캐나다에서, 1880년대는 성탄절 축제 기념상 결정적인 전환기를 맞이했다. 이 기간부터 도시 중심지의 영어권 부르주아 계급에는 새로운 풍습이 등장했다. 크리스마스는 그저 종교적인 축제만이 아니라 시민이 향유하는 축제의 상징이 된 것이다. 이러한 모든 변화에서 주된 인물은 뭐니뭐니해도 산타클로스다.
그렇지만 대다수 프랑스어권 지역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변화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이루어졌다. 부지불식간에, 마음씨 좋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오래지 않아 여흥의 중심이 되었고, 그를 중심으로 하여 공동체의 다양한 행사들이 펼쳐졌다.
축제 기간 동안, 여러 교회와 자선 기관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어려운 사람들에게 전통적인 크리스마스 만찬(구운 칠면조, 야채와 후식)을 제공했다. 1910년에 감리교 사제였던 파이크 신부에 의해 창설된 비셀 센터는 거의 90년 동안이나 공동체를 위해 일해왔다. 이 기관은 불우한 주민들에게 매일 도움을 주고 있다. 1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정월 초하루의 만찬에 참석하고, 수많은 자원 봉사자들이 기쁨과 나눔의 정신에서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출처 : http://www.franc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