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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IF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 탐방기/아스티
토리노 관광을 마친 우리 원우들은 이태리 피에몬테 주에 있는 소도시 아스티를 향하여 1시간여 버스로 달렸다. 아스티는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 ICIF가 있는 곳이었다. 도시가 우리의 읍에 미치지는 못하였고 면보다는 좀 더 커 보였다.
현지 시간으로 오후 7시였고 한국시간으로 23일 새벽 2시인 셈이다. 이 곳은 낮이 길다. 보통 오후 9시 반이 넘어야 서편 하늘에 노을이 진다. 10시가 넘어서야만 비로소 밤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호텔에 여장을 풀고 생선으로 만든 파스타와 빵, 이태리식 소고기 볶음 요리로 저녁을 들었다. 소고기 볶음요리가 좀 짜다. 그렇지만 빵에 찍어 먹으니 비로소 간이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다.
식사를 마치고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1층 호텔 야외 베란다에서 2차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한국에서 가져온 참치캔, 김치, 김, 컵라면, 햄등, 풍성한 가든 파티였다. 물론 팩소주도 가져왔다. 그것도 잎새주로...
우리 원우들은 남도음식의 내노라하는 대가들이 대부분이다. 여수 자산어보 횟집을 운영하시는 김경수 사장님, 나의 룸메이트 이신 람바다라는 큰 회무침식당과 여러 가맹점을 운영하시는 우리 원우회 회장이신 황봉춘 회장님을 비롯하여, 전통식당과 남도 요리학원 원장선생님들이 함께 자리하였다. 김수인 교수님과 박연진 교수님도 우리와 함께 스스럼없이 술자리를 즐겼다. 김이사장님이 젊은이들을 위하여 자리를 양보하셔서 좀 아쉬었지만.........
대부분 여성 CEO들이시다. 술 한잔 은근히 취기가 오르자 내가 입담을 자랑하였다.
[세펴트가 치와와로 변하는 동안, 고양이는 호랑이로 자랐답니다.] 비로소 그녀들이 웃으면서 말문을 스스럼없이 늘어놓았다.
여러 차례 대학 외식산업 CEO과정을 수료하였지만, 남는 건 원우 상호간의 인맥형성과 정보교환, 또 사업에 대해 서로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즉 쉽게 말해 같은 생업전선의 사람들과 친분을 쌓아 돈독한 인간관계를 형성하여 무형의 자산을 일궈내는,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우린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오후 11시경에 술자리를 파했다. 인품 있고 싹싹한 현지 가이드인 이병훈씨의 간곡한 청도 있고 해서 우린 먹고 남은 호텔 야외 베란다의 술자리를 말끔히 청소했다. 마치 2002 월드컵 때 서울 시청앞 광장의 붉은 악마들이 종이 하나 안남기고 깨끗히 청소를 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듯 말이다. 이런 것도 우리 같은 소시민들이 할수 있는 꼬레아에 대한 애국이고, 꼬레아에 대해 이 곳 호텔 종업원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는 돈 한푼 안드는 큰 홍보가 아니고 무엇인가?
23일 새벽 4시에 잠이 깼다. 침실 밖 호텔 베란다로 나가 밤하늘을 바라보니, 촘촘이 박힌 별들이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은 검푸른 천을 드리우고, 별들은 파랗다 못해 희다. 서울의 밤하늘에서는 결코 느껴볼 수 없는 산은 적적하고 달은 청청한 첩첩산중의 아스티란 소도시 밤하늘 풍경이었다. 이름 모를 산새마저 괴기스런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아침 6시에 호텔 측면에 있는 등산로를 따라 새벽 산책을 하였다. 이태리 여행 중 한 번도 이 산책을 놓치지 않았다. 숲길은 삽상한 공기와 나무들이 함께 어우러진 최상의 코스였다. 난 내 눈을 의심하였다. 어찌 그리 우리 한국의 산하와 이리 똑같단 말인가?
대나무와 쑥, 소나무, 아카시아, 그리고 길가의 잡풀들도 우리가 한국의 들길이나 산길에서 흔히 볼수있는 품종들이었다. 버찌와 살구나무도 똑 같았다. 단 하나 틀린 것은 양귀비가 지천으로 피어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이곳 이태리의 양귀비는 마약성분의 점액이 없는 그런 종자여서 사실상 잡풀이었는데도, 그래도 양귀비는 양비귀인지라 화사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한참 홀로 산길을 걷고 있는데 전남도립대 정규진 교수님이 따라 오셨다. 정교수님과 지난 세월 살아 온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아스티는 산악도시였다. 높은 산중에 이태리 대저택과 조그마한 주택들이 주위경관과 어울려 그리 아름다울 수 없었다.
아침식사 시간이 7시인지라 그 시간대에 맞추기위해 산책로를 되돌아 갔다. 디카를 가지고 나오지 못한게 후회스러웠다. 호텔 식당에 도착하니 원우들이 거의 식사를 끝내고 자리가 비어있었다. 정교수님과 나는 간단히 빵 몇조각에 우유로 아침을 끝냈다.
룸에 들어가 뒤늦은 세면을 하고 옷을 갈아 입고 허겁지겁 버스에 올랐다. 원우들이 박수로 열렬히 나를 환영하였다. 5유로 5유로를 연호하면서..... 이리하여 난 첫 지각 패널티를 내는 희생자가 되었다.
버스를 출발시키면서 우린 이 곳 이태리의 인사를 나누었다. 이태리의 인사는 '본조르노' 다. 낮이 긴 이곳은 마치 우리의 '안녕하세요' 처럼 모든 인사가 '본조르노'로 통한다. 전세 버스를 운전하는 기사의 이름은 천사를 뜻하는 안젤로였다. 가이드가 발음 훈련을 시켰다. 이태리 말을 잘 하려면 영어와 같이 R발음을 잘해야 한다. 가이드가 " 아르 아르" 하며 혀를 굴리는 R발음 연습을 시킨후 '조르'에 악센트를 주어 우리를 위해 고생하시는 버스 기사 안젤로씨에게 인사를 하라고 말했다. 우리 원우들이 합창하 듯 "본조르노, 안젤로" 라고 인사를 건넸다. 안젤로가 화답했다. '본조르노'
버스는 40분여를 달려 같은 아스티 지역에 있는 요리의 성 이탈리아 대표요리학교에 도착하였다.
이 학교는 천년이 넘은 고성을 정부로 부터 값싸게 불하받고 또 운영자금도 정부의 보조를 받아 설립된 이태리 요리학교였다. 외국인을 위한 세계 3대 요리학교중 하나라 한다.
우린 천년이 넘은 고성의 지하 성채를 먼저 구경했다. 여러 식품과 와인을 저장하는 일종의 저장고인 셈이다. 실내 온도가 제법 서늘하다. 현지 가이드를 통해 학교 직원에게 물으니 평균 18도를 유지한단다.
천년이 넘은 고풍스런 지하 성채를 구경하고 요리 강습을 받으러 1층 으로 올라가니 놀랍게도 우리 한국의 젊은 유학생들이 오늘 우리가 주문한 점심 정찬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따뜻한 인사를 모처럼 우리말로 전했다. 모국어는 이래서 좋은 언어이다.
오늘의 요리 강습 일정에 대해 아리따운 학교 여직원과 우리의 호프 이병훈 가이드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병훈 가이드는 우리가 그들과 작별할 때 이 여직원으로부터 따뜻한 감사의 키스를 받았다.
이 지면을 빌려 우리의 호프 가이드 이병훈씨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부산 출신의 성악도다. 이곳 이태리로 성악을 공부하기 위해 8년 전 유학을 왔다. 음대 성악과를 졸업하고 같은 유학생인 현재의 부인과 결혼 부인의 뱃속에 예쁜 딸이 자라고 있다고 자랑스러워 하는 아빠다. 이태리는 태아의 성별을 부모에게 가르쳐 주며 천사같은 딸이니 잘 잘 키우라는 병원측 이야기를 듣고 기분이 좋았다고 말했다.
그는 비록 생계를 위해 당분간 가이드를 하고 있지만, 성악가로 대성하여 무대에 서는 것이 꿈인 성실한 청년이었다. 그리고 그는 박학다식한 사람이었고, 다정다감한 모범 청년이었다. 그리스, 로마 문명사로 부터 시작해서 역사의식도 투철했고, 이태리의 사회관습과, 문화에 대해서도 막힘이 없었고, 스포츠, 마피아등 모든 면에서 시원스럽고 재미있게 이야기해주었다.
또 우리의 팔도 사투리도 능수능란하게 해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고, 내가 경상도 사나이의 박력을 지닌 남편과, 살림 잘하고 음식 쏨씨 좋은 전라도 여자의 아내, 참 환상의 콤비라고 칭찬해 주었더니 그는 내 말에 동의하며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하여튼 그가 미혼이라면 사위를 삼고 싶을 정도로 성실한 청년이었다.
외국인을 위한 세계 3대 요리학교답게 주방시설이 정말 잘 정돈되고 청결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태리 여러 식품업체들이 이 학교에 물심양면 도움을 준다고 한다. 정부의 지원도 많다고 한다. 이태리 여러 와인어리에서 와인을 무로로 제공해주고 물을 비롯한 음료수는 물론 각종 식자재, 양념 소스까지 이 학교를 산학연계로 도와준다고 하니 학교도 좋고 또 식품업체들은 자기 회사를 홍보하는 효과도 얻고 서로 륀윈작전이 아니고 무엇인가? 한식 세계화의 전초병의 임무을 안고 이곳에 온 우리로서는 참 부러운 일이었다.
와인 감별대이다. 품종이 다른 5가지 와인을 이 책상위에 올려놓고 와인의 맛과 바디, 색상을 구별하기 위한 책상위의 흰 발광판이 이채를 띠었다. 유학생들은 이 와인 학습과정을 잘 마쳐야 이태리 요리의 첫 걸음마를 잘 내딛을 수 있으리라.
드디어 이 학교 총주방장이 우리에게 이태리 요리 만드는 과정을 시연해 보이고자 주방에 도착하셨다. 파스타와 후식요리인 돌채의 일종인 푸딩과 양고기 요리등 총 4가지의 요리 시연이 시작되었다.
질의 응답도 오갔다. 제일 먼저 파스타 요리가 시작되었다. 물론 우리들 책상앞엔 이태리어로 된 레스피가 놓여 있었지만 그건 무용지물이었다.
한국인 유학생도 많으니 우리같은 특별 게스트들에겐 한글로 된 레스피를 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학교측의 작은 배려가 없는 점이 아쉽기만 했다.
파스타가 완성되어 오븐기에 들어갔다. 다음 코스는 후식 요리인 푸딩이었다. 예로부터 알프스 북부지방인 이곳은 초코렛 산지로 유명 하단다. 그래서 푸딩도 초코렛 푸딩을 만든다는 것이다. 통역을 통해 푸딩 제조법을 강연하고 있었으므로 쪽지에 메모를 했다.
요약해 보면 이렇다. 오븐을 미리 가열해 놓는다/ 설탕 150G을 가열된 오븐위에 적당량의 물과 함께 부어넣는다/ 우유를 데운 상태에서 계란을 쪼개 넣는다/ 계란이 끓는 상태에서 쪼코렛과 카카오을 부어 넣는다. 카라멜은 갈색머리 정도의 색상을 유지시키도록 한다./ 푸딩 잘 익게끔 접시 중간에 넣고 오븐에 80도 정도의 불로 굽는다./ 식힌다.
도대체 알것 같으면서도 잘 알수가 없다. 이태리 주방장이 실제로 요리를 만들고 있는데도 말이다. 우리 원우 대표 한 두명이 통역을 통해 직접 요리의 시연을 벌인다면, 그리고 우리들은 그 원우들을 둘러싸고 눈으로 목격하며 익힌다면 이해가 빠르기도 하련만....... 그러나 나중에 시식할 때, 이 푸딩의 맛은 그만이었다.
양고기 요리를 끝으로 거의 시간 반이 넘은 요리 강습과정이 끝났다. 이태리 주방장은 활달하고 유머가 넘치는 친구였다. 자기 삶에 대한 자신감이 넘치는 남자들이 갖고 있는 그런 자부심이리라. 그는 세계 요리을 점검코자 출장도 자주 다녀 한국도 잘 알고있다고 했다. 한국의 갈비와 탕 문화를 격찬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곳 출신의 한국인 제자가 서울에서 이태리 빵집을 오픈하여 가게를 열세개나 확장한 성공한 제자도 있다고 하였다. 요리 강습 도중 정규진 교수가 그를 거들어 주었는데 정교수가 농담조로 팁을 요구하자 그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자기가 만든 맛있는 요리를 먹는 걸로 대신해 달라고, 제발 좀 봐달라고 말하며 익살스런 표정을 지으며 웃어넘겼다. 유머가 넘치는 인간이었다.
그 주방장이 만든 요리를 우리 모두가 조금씩 시식랬다. 한 요리가 두접시에 담겨 나왔는데 8명씩 5열로 42명이나 앉아 있는 우리 원우가 다 맛보기 위해서 한 점씩만 맛을 보았다. 그랬더니 맨 뒷열에 앉은 원우들의 음식양이 많이 남아 있었다.
우린 이학교 식당으로 점심 정찬을 먹으러 갔다.
식당의 원탁 테블이 호텔급 수준으로 정갈하다. 우린 이태리에 와서 처음 이태리 정찬을 먹게되어 가슴이 제밥 설렜다.
5품인지 6품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우린 와인을 곁들어 코스별로 나오는 이태리 점심 정찬을 먹어보는 호사를 누렸다.
식사를 하면서 테블 서빙을 하는 한국유학생들이 당연 인기를 끌었다. 이 학교는 3개월, 6개월, 1년의 정기 코스별 요리강습 과정이 있다고 했다. 세계 여러나라의 유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었다.
유학비용을 물어봤더니 한국의 ICIF 분교에서 3개월 정도 수습과정을 마친 후 이곳에서 6개월 과정을 수료하는데 우리 돈으로 한 3천만원 든다고 한다. 나이를 물어봤더니 놀랍게도 한 처녀는 낙랑 18세, 또 다른 처녀는 낙랑19세였다.
그렇게 어렵게 대학 나와도 취업이 잘 안되는 실정하에서, 이렇게 어려서부터 첨단 기술을 익혀 열정을 가지고 사업에 평생 매진한다면, 그리고 그 열정의 땀을 자양분으로 하여 꽃이 활짝 핀다면, 차라리 그녀들이 선택한 진로가 더 축복받는 인생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를 잘해 소위 명문대라 일컬어지는 SKY를 나와도 물론 그중에는 극소수의 성공한 인사도 나오겠지만, 대부분 월급쟁이 신세로 전락하여 정년을 마치기 일수이다. 그나마 요즘 정년을 마칠때까지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은 희귀동물을 넘어 독종이다. 직장이 중요한 세상이 아니고 어떤 직업을 갖느냐가 가장 중요한 현실이다. 자고로 巧者는 卒之奴라 하였거늘, 낙랑 18세, 19세 한국의 두처녀의 앞날에 무한한 영광 있을지어다.
식사가 끝나고 우린 학교 현관 출입구의 계단에서 전 원우가 기념촬영을 하고 그들과 작별하였다. 난 이 자신감 넘치고 자기 직업을 천직으로 여기고, 유머러스한 이 학교 총주방장인 이 친구와 기념사진을 남겼다.
학교를 빠져 나와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걸어가면서 아쉬운 마음으로 천년고성을 뒤돌아 보았다. 6월의 이태리 햇빛이 찬란하다. 그들이 " 오! 나의 태양, 너 참 아름답다." 하는 이유를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이 직감과 관조로, 온 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천년 성채로 가는 마을의 길바닥은 대리석을 캐다 남은 부산물로 이렇게도 아름다운 또 다른 대리석 길을 연출하고 있었다. 우리처럼 인도나 차도를 수시로 뜯고 고치는 그런 흠집 투성이의 길이 아니었다. 이 조그마한 길도 예술성이 살아 숨쉬는 장인정신이 돋보이는 깔끔하고도 멋있는 길이었다. 더군다나 밀라노나 토리노의 길거리에 그렇게 흉물스럽게 널려있는 담배 꽁초도 이 길에서는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끝>
2009.7.8 작성 골드리버
다음 이야기/ 루네쌍스의 발상지 피렌체(플로렌스)를 향하여 아펜니노 산맥을 넘다.-이태리 여행기 제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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