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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재생과 예술이 결합된 성공적인 사례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는 에치고 츠마리 트리엔날레(Echigo-Tsumari Art Triennial 일본어 정식명칭은 ‘에치고 츠마리 대지의 예술제’(越後妻有 大地の芸術祭)이다, 이하 에치고 트리엔날레) 도쿄에서 2시간가량 떨어진 산간지역 에치고 츠마리에서 3년마다 열리는 예술축제이다. 에치고 트리엔날레가 열리는 니가타현은 서울시보다 조금 더 큰 762㎢라는 면적에 겨우 7만5천 명이 살고 있어 심각한 인구 과소화로 인한 공동체의 붕괴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96년 ‘뉴 니가타 마을 만들기’가 조직되었고 에치고 트리엔날레는 '뉴 니가타 마을 만들기‘의 한 분과인 아트 네클레스(Art-Necklace)에서 시작되었다. 1회 축제가 열린 2000년에는 지방정부와 해당지역 주민들의 많은 우려 속에서 두 개 마을만이 참여하였지만 2009년 4회 때에는 200개의 마을이 참여할 만큼 주민들의 호응도가 높아졌다. 1회에 16만 명, 2회 25만 명, 3회 35만 명 등 회를 거듭할수록 방문객과 참여 작가도 꾸준히 늘어 2009년 4회 트리엔날레에는 40만 명을 넘는 외부인들이 방문하였다. 교통도 좋지 않고 외국어 서비스도 되지 않으며 숙박시설도 많지 않은 이 작은 산골마을에 예술이라는 매개를 통해 벌써 10년째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 안에 포함된다”라는 다소 선언적이고 철학적인 에치고 트리엔날레의 슬로건은 도시의 젊은이에게 던지는 산촌 노인의 잠언이자 에치고학(學)으로 명명되는 비효율성의 철학을 표현하는 간결한 메시지이다. “도시 같은 것은 망해도 좋다”고 할 만큼 도시중심의 자본주의화에 비판적인 총감독 기타가와 프람Fram Kitagawa, 1947년 니가타 출생, 도쿄예술대 졸업은 에치고 트리엔날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까지의 공공미술은 그저 주민들이 반대하지 않는 작품을 설치하는 것으로 만족해왔다. 그러나 에치고 츠마리에서는 글로벌하고 버추얼한 상황에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관계들을 회복하고자 했고, 그 관계를 만드는 것에 예술이 관여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하였다. 실제, 이 마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65세 이상 노인들은 자신들의 자식을 자신의 장례식에서나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할 만큼 전망이 없고 외부와 단절되어 있으며 정부에 대해서도 바라는 것이 없을 만큼 자포자기한 상황이었다. 그러던 이 지역 노인들이 타자와 연결되어 무언가를 나누고 소통한다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가장 큰 성과이며, 그 계기를 만들어주는 것이 예술이라는 데에 가장 큰 자부심을 갖는다.” 에치고가 지향하는 철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비효율성'이다. 대부분의 비엔날레들이 짧은 기간 최대한 많은 것을 보게 하는 효율성을 위해 기획된다. 반면 에치고는 미술작품을 에치코 츠마리 전역에 산재시켜놓음으로써, 관람객의 인내와 수고를 요구한다. 1회 때부터 설치되어 350여 점에 이르는 미술작품을 한 번에 다 보겠다는 생각 자체를 아예 못하게 하는 것이 에치고의 정신이다. 작심하고 한 달을 눌러있지 않는 한 어림도 없다. 아니 어쩌면 미술 작품을 다보지 못해도 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 안에 포함된다”는 슬로건을 증명하듯, 에치고에서 예술 작품은 자연 안에 고요히 잠겨있으며 문명∙기술은 인간을 위협하지 않는다. <우부스나의 집>은 100년이 된 거의 쓰러져 가는 집을 구입해 복원한 대표적인 ‘이에프로젝트’ 중 하나이다. 완고한 주인을 설득해 복원함으로써, 이 지역 전통민가를 보존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인이 방문객을 위해 간단한 음식을 판매함으로써 경제활동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이처럼 에치고 츠마리의 프로젝트들은 지역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으며 실질적으로 주민의 이해와 요구 속에서 결정되고 실행되고 있다. 에치고 츠마리를 방문한 많은 사람들은 축제 전반에서 지역민의 자발성과 지역의 정서를 느낄 수 있다.
에치고의 재정의 많은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기업의 후원이다. 3회 때부터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베네세 그룹은 '오헤비일본어로 큰뱀 후쿠다케베네세그룹 회장의 이름 위원회’를 설립하여 후원하고 있다. 민간후원인 ‘팬클럽제도’ 역시 주요한 재원이 되고 있는데 1만 엔의 회원가입비로 에치고를 후원할 수 있으며 주로 이에프로젝트와 같은 대규모의 예산이 투여되는 프로젝트들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재정 확보의 많은 부분을 책임지고 있는 기타가와 프람은 주변의 기업인에게 후원을 독려하면서 “기업은 망하면 그만이지만 당신에게는 고향이 있지 않은가?”하면서 설득한다고 한다. 기타가와 프람의 다소 과장된 유머가 담긴 이 말 속에는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도시인과 산촌마을 사람들이 함께 고민하고 나누는 연대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담겨있다. 이러한 신념은 불가능할 것 같은 간극-도시와 농촌, 젊은이와 노인, 자연과 문명과 같은-을 뛰어넘어 함께 소통하면서 공동체의 미래를 이야기하게 만드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에치고의 성공신화 속에 숨어있는 진정한 힘은 무엇일까. 15년이라는 기간 동안 변하지 않은 에치고의 지향점과 그로 인해 더욱더 가치 있어진 에치고적인 것들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특히, 니가타현을 구성하는 2개의 시(애초에는 6개시였으나 2개시로 통합됨)의 공무원과 주민조직을 어떻게 설득했는지 그 노하우가 궁금했다. 이에 대한 기타가와 프람의 대답은 매우 명료했다. 1996년 ‘뉴 니가타 마을 만들기’의 자문위원으로 시작된 에치고와의 인연은 4년 후 1회 트리엔날레로 이어졌지만 오픈할 때까지만 해도 누구도 프로젝트에 대해 확신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오픈을 앞두고 공공예산의 투입이 결정되지 않아 정작 프람 자신은 개인의 돈으로라도 해야겠다는 각오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니가타의 공무원과 의원이 예산을 집행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려 2000회의 설명회를 가질 만큼 그 누구도 말릴 수 없었던 기타가와 프람의 예술에 대한 신념과 열정이었다. 2000회라는 경이적인 숫자는 공무원들로 하여금 예술이 지역재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확신보다, 그것을 하고자 하는 한 인간의 노력과 열정에 대한 선택이었음을 증명해 준다. 아트 네클리스가 운영된 후로부터 15년의 시간이 지났고 그 사이 많은 사람들이 에치고를 다녀갔다. 65세 이상 노인이 인구의 30%를 차지하던 이 지역의 주민들에게도 작은 변화들이 일어났을 텐데, 주민들에게 예술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에 대해 기타가와 프람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분들에게 예술은 여전히 어렵고 귀찮은 것일 수 있다. 그렇지만, 예술이라는 것 때문에 고립되어 있던 자신들의 마을에 새로운 사람이 찾아오고, 그로 인해 산업화가 되면서 젊은이들이 살게 되었다. 이런 변화들은 이곳 주민들에게는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된다. 마츠다이 농무대 앞 계단식 논에 설치된 이리야 타바노프의 작품 이야기를 하자면, 그 밭에 작품을 세우는 것에 대해 땅주인은 굉장히 반대했다. 원래 그 땅에 주인은 농사를 짓지 않고 있었는데, 작가가 많은 설득과정을 거쳐 농부의 모습을 조각상으로 설치했다. 그 작품이 설치된 후 땅주인은 다시 농사를 짓게 되었다. 물론, 우리는 이것만으로 예술의 긍정성을 설명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예술은 어떠한 계기를 만들었고 그는 지금 농사를 짓고 있다.” |
첫댓글 속도를 거슬러 관계를 만들다.그 말처럼 유행됐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