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영월이라는 곳에서 2남5녀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읍사무소 뒷동네 큰길과 평행하게 나란히 배치된 방 세 개, 어지럽게 널려진 쌀가마니들, 시장 입구의 번잡함 등이 떠오릅니다. 넷째 누나가 소개해 준 스탕달의 ‘적과 흑’이라는 책을 힘겹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돌이켜보면 이것은 제법 큰 사건으로 오랫동안 나를 따뜻하게 만들어주곤 하였습니다. 기차역으로 세 정거장 떨어진 함백으로 집안이 이사 가는 바람에 태어난 고향에서 하숙을 해야 했습니다. 작은 다리 동강 가에서 천주교 오르는 길옆에 위치한 하숙집에서 외로움을 경험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배구를 무척 좋아해 우리 팀 9명의 중앙을 주로 담당하며 큰소리를 쳐가며 다른 반 팀들을 이겼던 기억이 납니다.
서울로 시집 간 둘째 누나 덕분에 중학교 졸업을 몇 달 앞두고 뜬금없이 어머니와 함께 서울서 살게 되었습니다. 텔레비젼을 처음 보았고, 종로의 영어 학원도 다녀 보았고, 누나 소개로 원효로 산동네에서 세 여학생들 틈에 이방인이 되어 공부하기도 했었습니다. 작년에 용산 전자상가 뒤편 남정초등학교 근처에서 어머니와 살던 단간 방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좁고 어두운 골목길 쪽으로 난 녹슨 창틀이 40여 년 전의 것 그대로인 것 같았습니다. 저녁이 되면 온 동네로 일수 다니시던 어머니에게 3만원이나 하던 최고급의 외제 테니스 라켓을 조르던 일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밤엔 거절하셨지만 다음 날 아침에 돈을 건네주시던 기억은 지금도 가슴 저리게 합니다. 주체할 수 없는 그리움에 과외 집 가는 골목길을 지나 효창운동장 넘어가는 길을 한참 따라가 보았습니다. 삶의 곳곳에서 겹겹이 내 편이 되어주셨던 어머니 생각에 한동안 눈물이 났었습니다.
군대를 마치고 복학해 어느 교수님의 연구실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 분의 추천으로 생각해보지도 못했던 캐나다 생활을 졸업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대서양을 면한 ‘프레더릭턴’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공원을 산책하고 스쿼시도 하고 주말 늦은 아침엔 브런치라는 고상함을 경험했던 신세계였습니다. 가끔 한국과 어머니가 그리워 그곳 시골 공항에서 비행기의 이륙 모습을 하염없이 쳐다보곤 하였습니다. 몇 년 지난 어느 해 한국에서 식을 올리고 미국에서 신혼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남자 아이들 둘을 갖게 되었고 10여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서울로 불러 준 누님은 지금 치매를 앓으면서 요양원에 머물고 계시고 나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적과 흑을 소개했던 누님은 힘든 결혼 생활을 하시다 10 여 년 전 유방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가끔 나머지 누님들과 만나 돌아가신 부모님과 영월 얘기를 나눕니다. 얼마 전 막내 누나가 내 어릴 때 사진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 아이가 고스란히 노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가끔 신봉동 뒷산을 넘어 동천동을 거쳐 분당까지 산책을 하곤 합니다. 탄천을 걸으며 하늘도 쳐다보고 구름 덩어리를 한참 추적하기도 합니다. 구름 덩어리들이 모여 하늘을 이루듯 이런 작은 얘기들이 모여 나를 이루는 모양입니다.
가끔 스탕달이 그의 묘비에 남긴 글귀 ‘나는 살았노라’의 의미를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15년 4월 이 우성
첫댓글 한 편의 짧은 소설을 읽는 느낌입니다.
함께 추억의 골목을 걷는 것 같습니다.
스땅달의 '적과 흑'이라는 소설에 대한 언급이 인상적이네요.
공감해주시는 것 감사드립니다. 지난 날들을 되돌아볼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