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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이송이 살구꽃 담 위에 지네
한지에그린 풍경
오랜만에 나무들 사이를 걸으니 죄다 몸채가 가벼워져 있습니다.
봄맞이 가지치기를 해서 다들 간결미가 돋보입니다.
우리집 감나무, 목련나무, 포도나무도 오늘 아침 이발을 했습니다.
겨울나무의 단정함이 군더더기를 덜어내라며 나를 돌아보게 합니다
입춘이 지났지만 거친 바람은 여전한데
봄은 아직 멀었지만
강릉 여행길
저 멀리 높은산 눈은 아직 녹지 않았지만
바람은 햇빛은 달랐습니다
강릉 초당 허난설헌생가
봄날에 이뜰은 하도 예뻐서
오랫동안 발걸음을 멈추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곳은 그렇게
작약이 피어있었고
함박꽃이 피어있었고
수국이 뜰을 평화롭게 했었고
햇빛이 마당가득 고요했었습니다
심상하게 지나치던 시들을 찬찬히 들여다보게 되는건
계절의 힘이 겠지요
400년이 지난 허난설헌 초희(楚姬)의 시를 여러편 적어봅니다
아름답고 때론 슬픈 시 였습니다
허난설헌생가
아름다운 코스와 꼬불꼬불한 길을 지나면 한폭의 그림같은 허난설헌 생가”가 보이기 시작한다.
생가 주변이 숲으로 어루어진 시골 마을인 듯 하다.
조선 선조 때의 문신 허엽이 살던 곳으로 정확한 설립 연대는 알수 없지만
이곳에 잠깐 멈춰 허난설헌 생가를 둘러보는 여유를 담아보자.
생가의 구조로는 ㅁ자형의 본채가 있으며, 본채는 두 대문을 사이에 두어
사랑채와 본채로 구분되어 있고
집 바깥쪽으로는 초가로 된 디딜방앗간이 자리하고 있으며 집 뒤편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자라고 있어
아늑한 자연경관을 보여주고있다.
허난설헌은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시작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여인의 독특한 감상을 노래한 인물로 애상적 시풍의 특유한
시세계를 이룩한 분으로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누이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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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란설헌 (許蘭雪軒)
불운의 여류 천재시인, 허란설헌
허란설헌(許蘭雪軒, 1563∼1589: 명종 18∼선조 22)
면면히 이어져 오는 우리 역사상에 등장하는 다수의 여류시인들이 기녀 시인인데 반하여
정몽주의 어머니, 신사임당과 더불어 몇 안 되는 규수시인의 한 사람이 바로 허란설헌이다.
지난해 봄날
송이송이 살구꽃 담 위에 지네 허난설헌 시처럼
살구꽃마당에 하나가득일때
눈물처럼 살구꽃 흩날릴때 이곳에 들렀습니다
하도 어여뻐서 그 기억 하도 애뜻하여 다시 겨울날
이곳에 들러봅니다
곡자(哭子)
去年喪愛女 지난 해 사랑하는 딸을 잃었고
今年喪愛子 올해에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네.
哀哀廣陵土 슬프고 슬픈 광릉 땅이여.
雙墳相對起 두 무덤이 마주 보고 있구나.
蕭蕭白楊風 백양나무에는 으스스 바람이 일어나고
鬼火明松楸 도깨비불은 숲속에서 번쩍인다.
紙錢招汝魂 지전으로 너의 혼을 부르고,
玄酒存汝丘 너희 무덤에 술잔을 따르네.
應知第兄魂 아아, 너희들 남매의 혼은
夜夜相追遊 밤마다 정겹게 어울려 놀으리
縱有服中孩 비롯 뱃속에 아기가 있다 한들
安可糞長成 어찌 그것이 자라기를 바라리오.
浪吟黃坮詞 황대노래를 부질없이 부르며
血泣悲呑聲 피눈물로 울다가 목이 메이도다.
어린 아들을 잃어버린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드러낸 한시입니다
자식을 생각하는 모정의 피눈물은 듣고 보는 이의 슬픈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특별한 비유나 수식없이 감정을 직설적으로 드러내었다.
그녀는 죽기 전, 자신의 모든 작품을 태워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난설헌의 글이 너무
아깝고 억울하여 동생은 모두 태워 버리지는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녀가 만일 평범한 가정
속에서 한 남자의 아내로서 사랑받고 한 집의 며느리로서 대우 받으며 자식들을 그리 떠나
보내지 않았다면 이렇게 가슴 저미는, 설움 담긴 글들을 우리는 단 한 편도 보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허난설헌의 본명은 초희(楚姬). 별호는 경번(景樊), 난설헌은 호라고 한다.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 명종 18∼선조 22)은 27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놀라운 글로 찬사를 받아왔으며, 당시의 마음에 들지않는 사람을 거부할 수 조차
없었던 사회 속에서의 한을 시에 담아 한탄하며 표출하기도 하였다.
맑은 가을 호수에
옥 같은 물 흐르는데
연꽃 무성한 곳
목란배 매어 두고
님 만나 물 건너로
연밥을 던지고는
남의 눈에 띄었을까
반나절 무안했네
허난설헌-(采蓮曲)
貧女吟 (빈녀음) 가난한 여인
豈是乏容色 (개시핍용색) 이 얼굴 박색은 아닌 듯 하고
工針復工織 (공침부공직) 바느질 길쌈 베로 솜씨 있건만
小小長寒門 (소소장한문) 가난한 집 태어나 자란 탓으로
良媒不相識 (양매부상식) 매파도 발 끊고 몰라라 하네
不帶寒饑色 (부대한기색) 추위에 주려도 내색치 않고
盡日當窓織 (진일당창직) 진종일 창가에서 베를 짜나니
唯有父母憐 (유유부모연) 부모님 안쓰럽다 여기시지만
四隣何曾識 (사린하증식) 이웃이야 이내 심사 어이 아리요
夜久織未休 (야구직미휴) 밤 깊어도 베틀에 앉아 쉬지도 않고
軋軋鳴寒機 (알알명한기) 찰칵 찰칵 차거운 베틀 소리에
機中一匹練 (기중일필연) 짜여가는 이 한 필의 고운 비단
終作阿誰衣 (종작아수의) 필경 어느 규수 옷이 되려나
手把金剪刀 (수파금전도) 가위 잡고 삭둑 삭둑 옷 마를제면
夜寒十指直 (야한십지직) 밤도 차라 열 손 끝이 곱아드는데
爲人作嫁衣 (위인작가의) 시집갈 옷 삯바느질 쉴새 없건만
年年還獨宿 (년년환독숙) 해마다 독수공방 면할 길 없네
과년하도록 시집도 못간 채 밤 깊어 베틀에 앉아 비단을 짜는 외로운 여인이야 가난해서
어느 달 빛 그윽한 밤 물방앗간 뒷전에서 더벅머리 총각 만나 속삭일 겨를도 없어서 그렇다
치고, 멀쩡한 유부녀의 몸으로 독수공방 추야 장장 기나긴 밤을 아파해야만 했던 허란설헌…
그녀의 고독이 이 시에는 너무나 진하게 묻어나고 있다.
집뜰을 산책삼아 걷고 돌아보는길
봄날에 뜰을 기억하는일
저 툇마루에 앉아 햇빛보는일
꽃밭보는 일
오래된 문짝
오래된 향나무
오래된툇마루
오래된 냄새
오래된 바람
오래된 햇빛을
바라보는 풍경의 순간
蘭 香 (란초의 향기)
誰識幽蘭淸又香 (수식유란청우향) 그 누가 알리요, 그윽한 난초의 푸르름과 향기
年年歲歲自芬芳 ( 년년세세자분방) 세월이 흘러도 은은한 향기 변치 않는다네
莫言比蓮無人氣 ( 막언비련무인기) 세상 사람들이 연꽃을 더 좋아한다 말하지 마오
一吐花心萬草王 ( 일토화심만초왕) 꽃술 한번 터뜨리면 온갖 풀의 으뜸이오니.
강릉의 명문가에서 두 번째 부인의 둘째 딸로 태어나, 아버지는 경상 감사를 지냈던 동인의
영수이고(화담 서경덕의 제자), 큰 오빠 허성은 이조, 병조 판서를, 둘째 오빠 허봉 역시 홍문관
전한을 지냈고, 홍길동전의 저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허균 역시 형조, 예조 판서를 지낸 인물
이다. 임금은 동생 허균을 너무나 아끼어 역모에 가담하지 않았노라고 말하라며 울며 애원까지
하게 되지만, 결국 허균은 봉건 사회 타파와, 이상 세계 실현에 실패한 것을 슬퍼하며
죽음을 택한다.
저 소나무숲
지금도 살구나무 만나고 가는 바람이
저 숲 솔향기 흔들고 갈까...
솔숲의 적요가 그립습니다
살구꽃 흩날릴때
지난봄 사진
春雨(봄비)
春雨暗西池 춘우암서지
輕寒襲羅幕 경한습라막
愁倚小屛風 수의소병풍
墻頭杏花落 장두행화락
보슬보슬 봄비는 못에 내리고
찬바람이 장막 속 스며들 제
뜬시름 못내 이겨 병풍 기대니
송이송이 살구꽃 담 위에 지네
살구꽃 흩날릴때
지난봄 사진
너무나 아름다운 봄날의 기억
살구꽃 벗꽃
살구꽃 흩날릴때
지난봄 사진
모춘(暮春) 늦봄에
煙鎖瑤空鶴未歸 (연쇄요공학미귀) 안개는 공중에 자욱한데 학은 돌아오지 않고
桂花陰裏閉珠扉 (계화음리폐주비) 계수 꽃 그늘 속에 구슬 문은 닫혔네
溪頭盡日神靈雨 (계두진일신령우) 시냇가는 온종일 신령스런 비만 내리고
滿地香雲濕不飛 (만지향운습불비) 땅에 가득한 구름은 젖어서 날지 못하네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라는 시를 지은 적이 있는데, 그녀는 27세 되던 어느 날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 입고서
오늘 연꽃이 서리를 맞아 붉게 되었다" 하고는 눈을 감았다고 전해진다.
숨막히는 당시 유교 사회에서 철저하게 버림받고 희생당한, 빼어난 미모와 재능의 소유자인
허난설헌의 아픔이 40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녀의 얼마 전해 지지 않는 몇 편의 시와 그림
속에서 배어 나오는 듯 하다. 당대의 학자였던 오빠 허봉에게서 '두보의 소리를 네게서 들을
수 있으리라'라는 극찬을 받았던, 시대를 잘못 타고난 불운한 천재 허난설헌의 삶은 곧 남존
여비,여필 종부 등의 유교적 사상과 가치관에 희생된, 한 여인의 슬픔이라기보다, 한 시대의
슬픔이다...
David Arkenstone - Angels in the S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