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비출 빛이여! 아씨시의 聖女 글라라
(년도별 성녀의 ....)
1. 1194
이탈리아 아씨시의 귀족 파바로네(Favarone)와 오르똘 라나(Ortolana) 사이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빛’이라는 의미를 지닌 글라라의 이름은 어머니가 기도중에 온세상을 밝게 비출 빛을 낳으리라는 약속을 받은데서 비롯되었다.
과연 그녀는 열심한 기도와 착한 행실로 주위를 밝게 비추며, 늘 하느님의 은밀한 부르심에 귀 기울였다.
2. 1206-1211
프란치스코의 회개과정을 목격하고 1210년 그의 사순절 설교에 감동되어 몇 차례 프란치스코를 만나 자기뜻을 밝힘.
3. 1212년3월18일
밤에 글라라는 자기집을 몰래 떠나 뽀르지웅꼴라에서 프란치스코 앞에서
그의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착복식을 하고 순종을 서약함. 임시로 바스띠아의 성 바오로에 있는 베네딕토회 수녀원에서 머물다가 얼마 후 수바시오 산 아래 성 안젤로 베네딕토회 수녀원으로 자리를 옮김.
(이 사실을 알게 된 부모가 글라라를 집으로 데려가려 하자, 그녀는 축성의 표시인 삭발한 머리를 보여주며 자신의 뜻을 단호히 밝혀 부모의 애원을 뿌리쳤다.)
얼마후 동생 아녜스마저 언니 뒤를 따르자 친지들은 아녜스를 강제로라도 집으로 데려가려 했으나, 글라라의 간절한 기도로 12명의 무장한 장정들에게서 동생을 보호할 수 있었다.
이렇게 첫 자매를 얻은 글라라는 성 프란치스코의 도움을 받아, 성녀 글라라는 친동생 아녜스를 비롯한 몇몇 자매들 과 함께 성 글라라 수도회의 모태가 된 성다미아노 수도원의 봉쇄 안에서 복음적 가난과 사랑의 공동체 생활로 ’하느님의 구원 성업을 거드는 짝이며 성교회의 심장으로서 그 연약한 지체를 떠받치는 받침대’가 되는 프란치스칸적 관상의 삶을 시작하였다.
클라라는 이제 그 어떤 외적인 것과도 인연을 끊고 온전히 하느님의 일만을 생각하려는 것입니다.
이제로부터 영원히 그녀를 세속과 멀어지게 하는 행위 하나하나는 곧바로 참되고 영원한 행복의 언약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누이요 정배이며 어머니가 되어 마치 이른 봄날 대자연이 터뜨리는 환호성마냥, 한 영혼을 온전히 소유하신 주께서 허락하시는 것으로 그분만이 주실 수 있고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새로운 기쁨을 옷 입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관상하는 동정녀 - 성녀 클라라, 66쪽)
4. 1212-1213
글라라는 아녜스와 동료 몇 명과 함께 자기들을 위하여 프란치스코가 마련한 성 다미아노 수녀원으로 이주하여 이곳을 ‘가난한 자매들의 회’ 모원으로 삼음.
프란치스코는 자매들을 위하여 ‘생활양식’을 써줌.
5. 1215
성 다미아노 공동체는 제4차 라테란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베네딕토회 회칙을 따르게 됨.
이에 글라라는 프란치스코의 명에 따라‘원장’이라는 명칭으로 원장직을 맡음.
6. 1216
글라라는 인노첸시오 3세로부터 ‘가난의 특전’을 얻음.
1218 시토회 출신인 암브로시오가 성 다미아노 수도원의 순시자로 임명됨.
7. 1218-1219
프란치스코와 작은 형제들의 정신에 따라 성 다미아노 공동체와 같은 공동체들이 여러 곳에서 발생함.
이 자매들은 처음에 ‘다미아니떼’라고 부름.
8. 1219
우고리노 추기경이 성 다미아노 수녀원이나 다른 다미아니떼 공동체들을 위하여 고유한 회칙을 씀.
이에 따라 자매들은 1219년부터 1247년까지 우고리노의 회칙을 따라야 했고 법적으로 베네딕토회의 회칙을 써야 했다.
9. 1227
우고리노 추기경이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되어 순시나 기타 제2회를 돌볼 책임을 작은 형제회에 맡김.
10. 1228
프란치스코의 시성식 관계로 아시시로 간 그레고리오 9세가 글라라를 만나 그녀의 요청을 받고 9월 17일자로 “가난의 특전”을 재확인함.
11. 1230
글라라는 친동생 아녜스를 피렌체에 있는 몬티첼리 수녀원의 원장으로 파견함.
12. 1247
인노첸시오 4세 교황이 제2회 자매들을 위하여 새 회칙을 작성하여 인준함.
내용은 우고리노 회칙과 큰 차이가 없지만, 회칙 안에서 베네딕토 회칙의 법적인 효력을 폐지시키고 프란치스코의 회칙을 서약할 것을 결정함.
따라서 교회법상 제2회 자매들이 처음으로 프란치스칸들이 되었음.
또한 교황은 자매들을 작은 형제회에 직속시켰음.
13. 1248
6월 17일에 라이날도 추기경이 글라라회의 “보호자 추기경”으로 임명됨.
14. 1252
글라라가 인준 받은 프란치스코의 회칙을 관상생활에 적용하여 자매들을 위하여 직접 고유한 회칙을 씀. 라이날도 추기경이 교황의 이름으로 9월 16일에 이 회칙을 인준함.
15. 1253
글라라는 프라하의 아녜스에게 넷째 편지를 보냄. 글라라가 유언을 씀.
8월 9일에 인노첸시오 4세가 글라라가 쓴 회칙을 인준함.
8월 11일에 글라라가 회칙을 가슴에 안고 세상을 하직함. 그의 유해는 성 제오르지오 성당에 안치됨.
16. 1255
교황 알렉산드로 4세가 아시시 대성당에서 글라라를 성녀품에 올림.
17. 1255-1256 토마스 첼라노가 글라라의 전기를 저술함.
18. 1260 10월 3일에 글라라의 유해는 성녀를 위하여 건축된 글라라 성당(예전:성 제오르지오성당)에 안치됨.
19. 1850 글라라의 시신이 상하지 않은 채로 발견됨.
20. 1893 글라라의 회칙의 원본이 성녀의 수도복 속에서 우연히 발견됨.
- 수도원 생활 -
"42년의 수도생활 중 28년이란 세월을 병상에서 보냈으면서도 "저를 창조하신 주님, 찬미받으소서" 라고 자신을 창조하시어 거룩하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셨으며 아기를 사랑하는 엄마와도 같이 사랑해 주신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오롯한 응답의 삶을 사셨으며, 공동침실 한쪽 문 옆에 글라라가 누워 있었던 자리는 글라라 성녀의 극도의 가난한 삶 속에서 그리고 모든 사물 안에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던 생애를 말해 주고 있다.
글라라는 관상이란 더 많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사랑하는 것임을 몸으로 가르쳐준다.
사실 관상이란 하느님을 맞대면하는 것이기에, 사랑이신 하느님을 맞대면하려면 사랑을 통할 수밖에 없다는 단순한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클라라는 모든 성인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극히 엄격하면서도 아래 수녀들에 대해서는 자비로운 어머니와 같이 인자했다.
그래서 그녀의 덕을 사모하여 그 지도를 바라며 각지에서 그녀의 산하에 모여드는 소녀들이 날로 증가했으며 그 대부분은 귀족 출신이었다.
클라라의 어머니 오르톨라나디도 남편의 사망 후 그 수도원에 와서 딸 밑에서 수도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녀의 굳은 신뢰심으로 극히 궁핍할 때에는 가끔 기적도 일어났다.
예컨대, 빵 한개로써 많은 수녀들이 충분히 먹을 수 있도록 많아진 기적이며, 혹은 십자가를 그음으로써 비어 있던 기름단지에 기름이 가득 채워진 기적이다.
그레고리오 7세 교황에 당선된 당시의 추기경 후고리노가 그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식사때에 클라라는 추기경의 강복을 청했으나 오히려 추기경이 클라라에게 강복하기를 명하므로 겸손한 그녀는 곧 그 명대로 한 십자가를 그으며 식탁을 강복하자 갑자기 그 위에 놓여 있는 빵마다 조그마한 십자가 표시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녀의 강복으로 중환자가 기적적으로 완쾌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1240년 독일의 황제 프리데리코 2세와 동행한 사라센 대군이 움브리아 지방의 스포레트와 각 도시, 마을을 점령하고 아시시에까지 침입했을 때, 클라라 수녀원도 위험한 처지에 놓여졌다. 그때 그녀는 성당에 들어가 제대 앞에 엎드려 "주님, 저는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동정녀들을 보호할 힘이 없습니다. 하오니 당신이 직접 그 전능하신 힘으로 그들을 보호하시어 적의 손에 넘기지 말게 해 주십시오"하며 뜨거운 기도를 바치고 일어나서 성광을 모시고 천천히 적군들 앞으로 향했다.
그러자 그 손에 쥐여진 성광에서 기이한 빛이 발사되어 이교도인 적들은 눈이 부셔서 겁을 집어먹고 어디론가 도망쳐 버렸다.
클라라는 교황 및 성 프란치스코의 엄명에 의해 수도원 총장이 되었으나, 그녀의 겸손은 감소됨이 없었다.
하루는 그녀가 다른 수녀원에서 온 수녀의 발을 씻겨주고,그 발을 친구하려고 했다. 깜짝 놀란 그 수녀가 발을 웅크리다가 잘못하여 클라라의 얼굴을 차서 상처를 입혔다. 그러나 조금도 안색을 변하지 않고 미소를 띤 채 그녀는 다시 그녀의 발을 잡아 부드러운 친구를 했다고 한다. 이 얼마나 겸손지덕인가!
클라라는 성 프란치스코를 영적 아버지로, 또 자기는 그의 작은 싹으로 생각하고 항상 그를 존경했으며 그의 높은 덕을 볼때마다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또 프란치스코도 클라라의 뛰어난 종교적 소질을 보고 이를 열심껏 지도했으며, 기회 있는대로 좋은 훈계를 베풀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그런데도 그들이 만나는 예는 극히 드물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임종시에 클라라와 그 수녀들에게 사후에 만날 것을 약속했다. 그 약속은 곧 이루어졌다.
자매들에 둘러싸여 죽음을 맞이하는 클라라, 성녀의 유해
즉 성인이 제자들에게 한 것과 같이 클라라회 수녀들에게 일일이 사랑의 축복을 해 주며 1253년 8월 11일 아침에 잠들 듯이 조용히 이세상을 떠났다.
살아있는 성녀라고 불리던 클라라는 사후 2년만에 교황 알렉산데르 4세에 의해 정식으로 성인품에 올라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