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4) 자아의 파쇄와 생명의 공급/ 영이 나오는 것은 능력이 나오는 것이다
<영이 나오는 것은 능력이 나오는 것이다>
겉사람(혼=혼생명=자신=자아)이 파쇄된 결과는 바로 우리 속의 영이 흘러나오는 것, 곧 우리 속의 능력이 나오는 것이다. 우리의 영이 흘러나오면, 받는 사람에 따라 받아들이는 사람, 거부하는 사람, 그 강도(强度)는 사람마다 매우 다르다. 우리의 일은 사람들에게 신학이나 교리를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으로 사람들의 영을 만질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영적인 일은 지식이나 신학이나 이론이나 교리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영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겉사람이 파쇄가 되면, 우리의 영은 쉽게 흘러나올 수 있다.
우리의 영이 나올 때 우리의 능력이 나오게 된다. 우리의 영이 흘러나와서 다른 사람들의 영에 이를 때 그들에게 생명을 공급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사람을 온전케 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의 영이 흘러나온 후 다른 사람의 영을 만지지 못하면 영은 곧 본인에게 되돌아온다. 마치 그것은 노아가 방주에서 비둘기를 내보냈을 때 비둘기가 쉴 곳을 찾을 수 없어 다시 방주로 돌아온 것과 같다. 다시 말하면 영이 흘러나옴은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말한 오순절의 성령의 은사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이루신 역사에 근거하여, 성령이 위로부터 사람의 몸에 강림한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은 사람의 몸에 임할 뿐만 아니라 또 다른 한 면으로 사람의 속에서부터 새 생명으로 나타나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능력의 정통과 근원이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사역이란 바로 우리 안의 영이 나오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영이 나올 때 우리 안의 성령도 함께 나온다. 신약에서 성령은 사람의 영 안에 거하시며 사람의 영은 성령의 거처가 된다. 성경에서 사용된 영이 도대체 대문자의 영(Spirit)인지 소문자의 영(spirit)인지, 곧 이것이 성령인지 아니면 사람의 영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는 사람의 영이라고 해도 되고 성령이라고 해도 된다. 예를 들면, 로마서 8장의 영은 사람의 영인지 또는 성령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사도 바울은 이 편지를 쓸 때 구분하려는 의도가 없었다. 왜냐하면 거듭난 사람에게 있어서 그의 영은 성령과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억지로 나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하나님은 그분의 영과 사람의 영이 연합되는 것을 기뻐하신다. 영적인 사람의 영과 성령은 연합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는 사람의 영의 역사이며, 성령의 능력은 바로 사람의 영의 능력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로마서 8장을 기도로 읽어 보라. 참으로 놀랍지 않는가?
<사람들에게 생명을 공급함>
우리의 영은 바로 우리의 속사람이다. 우리 속사람(영)은 늘 우리 겉사람(혼)에 의해 포위되어 둘러싸여 있으며, 우리 겉사람에 의해 갇혀 있다. 그러므로 겉사람(혼)이 파쇄되지 않으면 성령의 능력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혼에 속한 감정, 느낌, 기질, 주장, 견해, 지혜, 지식 등이 바로 우리의 속사람(영)을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우리의 겉사람, 곧 혼이 파쇄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속에 있는 영이 도무지 나올 길이 없다. 우리가 환상을 보고, 꿈을 꾸고, 예언하고, 곧 하나님을 위하여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속사람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이다. 말씀의 사역이란 속의 영이 나올 수 있게 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해 주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속사람이 겉사람을 돌파하여 나올 수 없다면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의 기본적인 결격사유가 된다. 우리의 겉사람이 주님에 의해 깨뜨려질 때만이 비로소 속사람이 겉사람을 통하여 나올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입을 열어 말하는 것을 들어 보면 그가 파쇄된 사람인지 아닌지를 단번에 알 수 있다.
우리는 시련과 고난을 통하여 겉사람이 파쇄될 수 있을 뿐이다. 곧 어떤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다루심을 받고 많은 시련을 거쳐 그의 몸에 상처와 흔적과 핏자국이 있다면, 성령은 그의 몸에서 길을 얻을 것이고, 나아가 당신은 그분의 영이 얼마나 쉽게 나오는지를 볼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믿는 이들의 말에서는 단지 생각과 감정과 구변과 지식만을 보게 될 뿐이다.
그들이 하는 말은 단지 주장, 편견, 생각, 지식, 집착, 감정이 섞여 나올 뿐이고 영은 찾아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들의 말은 다만 두뇌 안에서만 맴돌 뿐 영이 나오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은 두뇌만 큰 사람이며, 그의 영은 사람에게 공급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에 의해 파쇄된 사람의 영은 쉽게 흘러나오며, 듣는 사람도 즉시 생명의 공급을 얻을 수 있다.
<사역이란 무엇인가?>
행6:4절에서 베드로는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념하리라”고 말한다. 말씀을 전하는 일(傳道)은 헬라어로 디아코니아 로고스(diakonia logos)라고 말한다. 전(傳)이라는 말은 헬라어에서 봉사하는 것을 말한다. 도(道)라는 것은 바로 말씀이다. 그러므로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마땅히 말씀의 사역이라고 해야 한다.
무엇을 가리켜 말씀의 사역이라고 하는가? 베드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말씀의 사역에 드려야 한다고 말한다. “사역”이라는 말은 바로 봉사, 곧 사람을 영으로 섬기는 것을 말한다. 베드로는 각 사람에게 각양의 사역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역자는 말씀의 사역을 다해야 하며 말씀으로 사람을 섬겨야 한다.
말씀의 사역은 바로 봉사, 곧 하나님 말씀을 영으로 섬기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말씀이 없이는 사역을 할 수 없고 사람을 섬길 수 없다. 어떻게 말씀으로 사역하며 사람을 섬기는가? 사람들에게 말씀의 사역이 있으려면 그는 반드시 영 안에서 계시를 얻고 부담이 있어야 하며, 그 사람 안에 주님의 뜻과 위임과 말씀이 있어야 한다.
문제는 그런 다음 어떻게 말할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이 말씀을 말해 낼 때 이것이 바로 말씀의 사역이다. 구약의 예언서에 있는 “묵시”라는 말은 말씀에 대한 부담(burden of the word)이다. 곧 부담이 있으면 묵시가 되고, 부담이 없으면 묵시가 없다. 말씀의 사역을 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먼저 말씀의 부담이 있어야 하고 그런 후에 말해 내어야 한다.
나는 나에게 주시는 말씀의 부담을 지금 글로써 말해 내고 있다. 나의 “나사로 가정교회(구, 어느 가톨릭평신도의 하나님말씀 묵상)”의 글들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부담을 말 대신에 글로써 표현하는 사역인 셈이다. 그러므로 사역자란 신학교 졸업장에 의한 목사나 신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담을 토해내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영 안에서 주시는 부담을 흘러 보내지 못하는 이러한 사람은 바로 겉사람이 파쇄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죽음의 체험이 없는 사람은 사역자가 아니다. 겉사람이 파쇄되지 않은 사람이 말을 하면 그 사람의 부담을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담을 가중시킨다. 그러나 만일 겉사람이 파쇄되었다면 그의 속사람이 흘러나온다.
<오직 파쇄된 사람만이 말씀의 사역자가 될 수 있다>
이해를 위하여 또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이 단상에 서서 말할 때, 말은 줄곧 맴돌고 자신을 부담에 묶어 풀어놓지도 못하고 쏟아 놓지도 못한다. 그의 영 안에 있는 부담이 겉사람을 돌파하지 못하여 마치 밖에서는 밖의 일을 말하고, 속의 영 안에서는 속의 부담을 지고 있는 것과 같다. 속사람(영)이 겉사람(혼)에 묶여 흘러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의 머리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그의 속에 있는 부담을 말로 쏟아 내지 못한다. 그는 단상에서 두 시간을 말했지만, 결과는 듣는 사람들도 힘들어지고 말하는 사람도 역시 힘들어진다. 그의 말은 비록 많았지만 도무지 영이 나오지 않았다. 그 결과 원래의 부담을 지고 와서는 다시 원래의 부담을 지고 돌아간다. 그가 하는 말이 도무지 들리지 않는다.
올 때에도 부담이 아주 무거웠지만 갈 때에도 여전히 부담이 무겁다. 그러므로 우리의 밖의 생각(혼)이 파쇄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이것은 우리가 결코 생각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이 영의 생각으로 기능해야 한다는 말이다. 혼은 반드시 먼저 다루심을 받고 타격을 받아야 속사람이 흘러나올 수 있다는 말이다.
혼은 반드시 먼저 다루심을 받고 타격을 받아야 한다. 그런 후에 비로소 사용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이라야 스스로 주인이 되지 않고 영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말씀의 사역자가 된 사람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부담이 있고 말씀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생각의 다루심을 받아야 한다.
생각이 다루심을 받은 적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고, 독립적이지 않으며, 영 안의 부담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럴 때 말씀이 나오며 부담도 쏟아 놓을 수 있게 된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말이 옳다고 느끼도록 해야 할 뿐 아니라 그 자신 안에서도 반드시 자신의 말이 옳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하다면 당신이 말씀을 전하고 나면 당신의 부담도 쏟아 놓게 되고, 듣는 사람도 만족하고 당신도 만족하게 된다. 오늘날 말씀의 사역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두 종류의 상황이다. 첫째, 어떤 사람은 사역을 할 때 생각이 있으나 영이 나옴이 없고 영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둘째, 또 어떤 사람은 사역을 할 때 영이 있고 또한 영을 사용하지만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이 두 종류의 상황은 다 속과 겉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 것이므로, 이 두 종류의 사람은 다 말씀의 사역을 잘할 수 없다. 첫 번째 사람은 두뇌가 크고 생각이 많은 사람이지만 죽은 노력이요 죽은 생각일 뿐이다. 또한 두 번째 사람은 영 안에 부담이 있지만 말씀이 없고 겉사람은 속사람과 의견이 맞지 않으며 속사람과 불일치한다.
파쇄된 적이 있는 사람의 영은 언제든지 신속하게 나올 수 있으며 맴돌지 않아도 된다. 또한 그의 영이 한번 나오면 곧 사람을 만질 수 있다. 속에 부담이 없는 사람은 말씀의 사역을 할 수 없다. 부담이 있어도 밖의 생각이 협력해 주지 않으면 역시 말씀의 사역을 할 수 없다.
오직 겉사람이 하나님에 의해 타격을 받고 파쇄된 사람만이 좋은 말씀의 사역자가 될 수 있다. 말씀의 사역은 바로 속에 있는 부담을 쏟아 놓는 사역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내가 그동안 얼마나 어려웠는지 이해하시겠는가? 소위 많은 사람들이 이 내용을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자격한 가짜 교사들이 교회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할렐루야! 아멘!
첫댓글 와우 오늘 나누어 주신 바로
자아파쇄와
말씀에 대한 부담을
글로 풀어내어 주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