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서도'(관미성)와 '동도'(하남 위례성)
『신당서』 동이열전에 따르면, 백제왕이 동·서 2개의 성에 거주한다고 기록되어 있다(王居東·西二城).
또 『구당서』 동이열전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其王所居有東西兩城).
그런데 『주서(周書)』[북주(北周, 557~581년) 백제전]에서 ‘治固麻城’,『수서(隋書)』동이열전에서 ‘其都曰居拔城’,『북사(北史)』[북조(北魏·北齊·北周·隋, 386~618년)] 동이열전에서 ‘其都曰居拔城 亦曰固麻城’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고마성(固麻城) 또는 거발성(居拔城)이라고 성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나 명칭이 두 가지였을 뿐이지 서로 다른 성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서 2개의 성이 각각 어느 성인지 뚜렸하게 기록된 근거는 찾을 수 없다. 더우기 동·서 2개의 성에 거주했다는 기록이 618년에 수(隋)가 망하기 이전인지, 당(唐)이 건국된 이후인지 아무런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그런데 『삼국사기』백제본기 개로왕21년(475년)에 따르면, '고구려왕이 북쪽 성을 공격한 지 7일만에 함락시키고 남쪽 성으로 옮겨 공격하자 성안이 위험에 빠지고 (개로)왕이 도망하여 나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북쪽 성'이 어디고, '남쪽 성'이 어딘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1512년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새로 간행하면서 많은 내용을 뜯어 고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재간행된 『삼국사기』서술의 특징을 아래와 같기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지명과 지명간의 거리에 관한 기록이 없다.
둘째, 일부 지명은 여러 개의 지명으로 표기하였다.
셋째, 일부 지명의 방향이 바뀌어져 있다.
넷째, 일부 사건의 발생연도가 바뀌어져 있다.
다섯째, 건국연도가 약 200년 늦추어져 있다.
여섯째, 일부 중요한 사건들이 아예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일곱째, 섬 ‘도(島)’는 강줄기로 구획 지어진 내륙이다.
여덟째, 일부 지명은 1512년 당시 조선의 지명이다.
따라서 역사적인 사건들의 전체적인 흐름과 주요 지명의 위치를 몇 개라도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어야 어떤 지명 또는 어떤 구절이 바뀌어 있는지 분별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위사(僞史)와 진사(眞史)를 잘못 구분하여 오류가 발견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백제본기 근초고왕 26년(371년)에 따르면, '왕이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였는데, 고구려왕 사유가 항전하다가 화살에 맞아 사망하자, 왕이 물러났다. 왕은 도읍을 한산(漢山)으로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이 때의 '한산(漢山)'이 도읍지로서 과연 어디인가?
왕왕이 많은 이들은 백제의 도읍지 하남 위례성에서 '한산(漢山)'으로 천도한 것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삼국사기』에 근거하면, 백제가 온조왕 14년(서기전 5년)에 도읍지를 한수 이남의 하남 위례성으로 옮긴 이후, 371년까지 도읍지를 옮겼다는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온조왕 14년(서기전 5년)에 따르면, 온조왕이 도읍지를 하남 위례성으로 옮기고 하남 위례성의 '서북쪽'에 새로 성을 쌓고 '한성(漢城)' 주민을 나누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또 의문이 생기는 것은 하남 위례성의 '서북쪽'은 어디인가?
또 '한성(漢城)'은 '한산(漢山)'인가?
그러나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삼국사기』 서술의 특징 중 여섯째를 고려하면, 쉽게 풀려 질 수 있을 것이다.
즉,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서 다른 곳으로 천도한 기록이 371년까지 전혀 없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중요한 기록인데도 불구하고 아예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있음을 고려한다면, '근초고왕 26년(371년)에 도읍을 한산(漢山)으로 옮겼다.'는 기록은 그 때까지 도읍지였던 곳에서부터 하남 위례성으로 다시 도읍을 옮긴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또 '한산(漢山)'이 바로 '한성(漢城)'으로서 하남 위례성임을 알아챌 수 있다.
그런데 온조왕 14년(서기전 5년)에 도읍지를 하남 위례성으로 옮기고 하남 위례성의 '서북쪽'에 새로 성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서북쪽'에 새로 쌓은 성은 어디인가?
여기서는 앞서 설명한 『삼국사기』 서술의 특징 중 셋째를 고려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서북쪽'은 본래 '서남쪽'(또는 서쪽)이었으나, 1512년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새로 간행하면서 지명의 위치를 제대로 알 수 없도록 '서북쪽'으로 뜯어 고쳐 놓은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그런데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남 위례성'의 위치를 현재의 산동성 제남(濟南)시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림 1] 하남 위례성과 관미성 등 추정지역
또 백제의 초기 도읍지(미추홀)의 위치를 현재의 산동성 요성(聊城)시로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고구려의 환도성(=안시성)과 국내성, 그리고 마지막 도읍지 장안성 등을 [그림 2]와 같이 추정할 수 있으며, 온조와 비류가 남하한 방향과 지리가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압록수, 패수, 대수 등과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림 2] 환도성, 국내성, 장안성 등 추정지역
[그림3] 패수, 대수 등 추정지역
즉, [그림 2]와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환도성과 국내성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현재의 하북성 석가장시와 정주시 주변 지역을 졸본부여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온조와 비류가 압록수로 추정할 수 있는 현재의 호타하를 남쪽으로 건너서 패수(현 산동성 오경하로 추정)와 대수(현 산동성 도해하로 추정)를 건너 이동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 초기의 강역이 북쪽은 패하, 동쪽은 주양, 서쪽은 해(海), 남쪽은 웅천 등으로 이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지형적 조건이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남 위례성'의 위치로 추정되는 현재의 산동성 제남(濟南)시의 '서남쪽'(또는 서쪽)에 현재의 산동성 요성(聊城)시를 발견할 수 있는데,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하남 위례성의 '서북쪽'을 '서남쪽'(또는 서쪽)으로 바꿔서 고려해야 하는 이유는, 현재의 제남시 서북쪽에 새로 성을 쌓았다고 할 만한 도시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의 산동성 요성시를 백제의 초기 도읍지 미추홀로 추정할 수 있는데, 온조왕 14년(서기전 5년)에 하남 위례성의 '서북쪽'에 성을 새로 쌓은 것이 아니고 '서남쪽'(또는 서쪽)에 성을 쌓은 것이라면, 그 성은 바로 백제의 초기 도읍지 미추홀일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바로 이 곳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392년에 공격하여 함락시킨 관미성(關彌城)으로 추정할 수 있다.
즉, 옛 고대 도시라고 해서 반드시 현재까지 큰 규모의 도시를 이루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옛 도시로서 사람이 살기 편하고 물산이 모이는 지역은 세월이 흘러도 상당한 규모를 유지하고 있는 지형적 잇점이 있다고 볼 수 있으므로, 현재의 산동성 요성시를 관미성(關彌城)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391년 겨울 10월에 군사를 7길로 나누어 20일 동안 공격하여 관미성을 함락시켰다고 한다.
또 개로왕21년(475년)에 '고구려왕이 북쪽 성을 공격한 지 7일만에 함락시키고 남쪽 성으로 옮겨 공격하자 성안이 위험에 빠지고 (개로)왕이 도망하여 나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때의 '북쪽 성'과 '남쪽 성'은 각각 어디여야 하는가?
즉,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여기서도 『삼국사기』 서술의 특징 중 셋째를 고려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북성과 남성이 있었다면, 남성은 하남 위례성으로서 '한성(漢城)'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북성과 남성을 함께 거론하려면, 북성도 도읍지에 버금가는 비중이 있어야할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제남시 북쪽에는 고구려 평양성(낙양)으로 추정되는 현재의 산동성 덕주시에 이르기까지 도읍지에 버금가는 도시가 없다.
따라서 '북성'이 아니라 서남쪽(또는 서쪽)에 있는 관미성(關彌城)을 북성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북성'이 아니라, '서북쪽 성' 또는 '서쪽 성'이었던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관미성을 '북성'이라고 기록한 것으로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또 고구려 광개토왕이 392년에 관미성를 함락시켰는데, 장수왕 때인 475년에 하남 위레성이 함락되었다. 즉, 관미성이 392년에 함락된 후 475년 이전에 백제가 다시 관미성을 되찾았다는 기록은 없다.
즉, 백제가 475년 이전에 관미성을 되찾았다면, 관미성을 '북성'이라고 칭했으며, 475년에 북성과 남성(한성)이 모두 차례차례 함락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백제가 475년 이전에 관미성을 되찾은 바가 없다면, '북성'은 별도로 다른 성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또 관미성을 대방(帶方)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로 추정하고 있는 현재의 산동성 덕주시 일대를 맥국이 있었던 낙랑(樂浪)으로 추정할 수 있으므로, 그 남쪽 지역에 대수(帶水)를 끼고 대방(帶方)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490년에 동성대왕이 대방태수를 임명하였으므로 최소한 490년 이전에 대방으로 추정하고 있는 관미성을 되찾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비록 기록이 없어서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백제가 관미성을 고구려에 392년에 빼았겼다가 다시 475년 이전에 되찾았다면, 관미성이 '북성'으로 칭했던 성이었고 하남 위레성이 한성으로서 '남성'이라고 기록된 것으로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관미성은 하남 위례성의 서남쪽 또는 서쪽에 있었던 성으로서 관미성이 '서도(石)'이었고, 하남 위례성은 '동도(東都)'로서 교대로 도읍지였던 것으로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