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양동마을을 답사하였을 때의 이야기이다. 양동 마을에는 관가정외에도 고택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향단(보물 412호)과 손동만씨 가옥인 서백당(중요민속자료 23)이 유명하다. 나는 이 두 고택을 답사하고 너무도 대비가 되는 건물환경에 놀랐다. 향단은 양동마을 입구에서 잘 보이는 위치에 있으며 합각면을 정면으로 내놓고 합각면의 연속을 강조하고 있는 우리 나라에서는 유일한 독특한 형태를 자랑하고 있다. 멀리서 보아도 쉽게 눈에 띄고 매우 화려하게 보인다. 이러한 외부의 모습과는 달리 향단의 내부는 사랑채에서 바라보는 정경 외에는 집안이 너무 답답하고 보잘 것이 없었다. 나보고 향단에서 살라고 한다면 한시라도 살수 없을 것 같았다. 안채는 행랑채와 안채의 기단 사이에 만들어져 좁은 통로를 지나 반빗간 형식으로 되어있는 부엌을 지나 안채로 들어간다. 안채는 사방 두 칸 밖에 안돼는 안마당을 면하고 있다. 안마당의 규모가 다른 집에 비하여 작은데다가 처마까지 튀어나와 하늘을 가리고 있어 더 답답하게 느껴진다. 어떤 사람은 이 향단을 '화려한 감옥'이라고 표현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표현은 향단의 성격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보고 돌아 나오면서 이러한 집에서 사는 사람들의 심성은 아마도 매우 편협하지 않을까 생각하였다.
향단을 마치고 돌아본 서백당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안채의 안마당은 넓고 밝았고 집이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마을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시원한 조망을 가지고 있었다. 향단과 비교하면 마치 천상세계에 온 기분이었다. 집에 들어가자 매우 편해 보이는 인상을 지니신 집주인(집주인께서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께서 반색을 하시며 우리를 맞아주시면서 '천천히 잘 보고 가라'는 말과 함께 이곳 저곳의 문을 열어 주셨다. 집의 인상과 집주인의 인상이 너무도 닮아있음을 느꼈다. 향단과 서백당의 분위기가 너무도 차이가 나는 것이 인상 깊어 답사를 인도하신 분에게 두 집에 대한 나의 느낌을 이야기하였더니 이곳 마을 주민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마을 사람의 말에 의하며 향단의 주인은 꼬장꼬장한 성격으로 마을일에 매우 비협조적인 반면에 서백당의 주인은 성격이 원만하고 마을일에도 매우 협조적이라고 하였다. 결국 집의 분위기대로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의 성격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깊게 느꼈다.
이처럼 집의 분위기가 사는 사람의 성격까지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여야 한다. 영국의 수상을 역임하였던 윈스턴 처칠이 '사람은 집을 만들지만 집은 사람을 만든다'고 말했다고 한다. 사람이 경험하는 모든 환경은 사람의 사고와 행동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환경이란 자연환경뿐만 아니라 집과 같은 인공환경까지도 포함된다. 집은 아니지만 도구 하나가 우리의 삶에 변화를 주는 예를 보자. 이제 핸드폰은 우리에게는 없어서는 안되는 생활 필수품이 되었다. 이러한 핸드폰이 일반화되면서 우리의 생활도 많이 변화되었다. 우선 기다림이라는 단어가 점점 우리에게 생소한 단어가 되고 있다. 얼마 전까지도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것이 통하지 않는다. 약속시간에 조금만 늦어도 사람들은 화를 낸다. 만남도 마찬가지이다. 예전 같으면 날짜와 시간 그리고 장소를 정하여 만나던 것이 이제는 당일 만남만을 정하고 기타의 것은 상황을 보아가며 정하게 된다. 그리고 설사 약속시간에 조금 늦는다고 해도 전화를 걸어 양해를 구하면 무사히 넘어간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우리에게는 '코리안 타임'이라는 단어가 있었다. 한국 사람들이 약속시간에 자주 늦었기 때문에 생긴 단어이다. 우리가 약속시간을 잘 지키지 못한 것은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하였을 때부터 우리 몸에 밴 시간관념 때문이다. 그러나 서구에서는 산업사회에 들어서면서 시간의 개념이 중요시되면서 시간 약속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예절로 떠올랐기 때문에 얼마나 약속시간을 잘 지키는 가에 따라 사람됨을 판단하기도 하였다. 서구보다는 나중에 산업사회로 진입한 우리에게 시간이라는 개념이 확립되기에는 시간이 필요하였다. 어쨌든 핸드폰이 없는 시절에는 약속시간을 지키는 것이 매우 중요한 매너였다. 그러나 핸드폰이 생필품이 되면서 이러한 상황은 역전되었다. 이제는 약속시간에 늦을 경우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핸드폰으로 사정을 말하면 웬만큼은 용서되는 사회로 변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핸드폰이 없었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변화인 것이다.
이처럼 도구하나가 우리의 생활을 변화시키는데 하물며 집은 어떠할까. 역시 집도 사람의 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앞장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구조가 완전히 다른 집에서 살아본 사람들은 집에 따라서 자신의 생활이 변화된 것을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집이라는 환경에 자신을 맞추어나가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변화는 행동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정서와 사고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햇볕이 들지 않는 집에서 살아본 사람은 자신의 성격이 우울해지는 것을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일조량이 적은 겨울에 우울증환자가 증가한다는 의학의 통계와도 일치한다. 그리고 등산을 하여 본 사람이라면 계곡을 지날 때는 답답하다가도 능선에 올라가면 마음이 탁 열리는 느낌을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감정들이 누적된다면 이러한 감정들이 우리의 정서로 고착될 것은 분명하다.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 집을 세 번 이사하였다는 맹모삼천(孟母三遷)의 이야기는 집과 주변의 환경이 성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교훈을 보여준다. 이만큼 집이라는 존재는 우리의 생활과 정서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면 집이 한국인의 정서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첫 번째로 한국 사회에서 상하관계가 강조되는 중요한 원인은 유교의 질서의식에서 나오는 것이긴 하지만 상하관계를 보다 강하게 하는데는 집의 구조도 얼마만큼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과거 한옥의 온돌은 지금의 바닥난방과는 구조가 다르다. 지금의 온돌은 더운물을 바닥에 깔려있는 파이프를 통해 순환시켜 바닥을 데운다. 바닥에는 파이프가 일정한 간격으로 깔려있고 더운물을 펌프로 강제로 순환시키므로 방바닥이 골고루 따뜻하다. 그러나 과거의 온돌은 불길이 직접 닿는 아궁이 쪽과 연기가 빠지는 굴뚝 쪽의 온도차가 매우 심하였다. 구들이 잘 들여진(시공된) 집에서는 이러한 온도차이가 적지만 제대로 구들을 들이지 못한 집은 온도의 차이가 매우 심하여 겨울에는 윗목은 앉기조차 힘들 정도로 매우 차가웠다. 이러한 상태가 되고 보니 방안에서도 바닥의 온도에 따라 자연스럽게 상하석이 구분되었다.
이러한 바닥의 온도차이는 파이프로 바닥 난방을 하는 집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요사이 집에서 방석을 잘 사용하지 않는 것은 난방이 과거와 다르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온돌의 난방이 일정하지 않았던 경우 방석은 너무 뜨거운 방바닥이나 너무 차가운 방바닥의 상황을 적절히 조정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지금의 온돌은 너무 뜨겁지도 차지도 않는 상태이기 때문에 방석이 없이도 편하게 앉을 수 있어 굳이 방석이 필요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태이고 보니 아파트나 요사이 지은 집에서 아랫목과 윗목의 차이를 느낄 수 없다. 따라서 집에서 상석과 하석의 구분은 애매모호하다. 상석의 위치는 설날에 세배할 때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세배를 받는 사람이 앉는 곳이 그 집에서 느끼고 있는 상석이다. 대개는 문과 멀리 떨어져 장을 배경으로 앉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안방에 침대를 들여놓은 경우는 상석과 하석을 굳이 찾을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그 곳에서는 사람이 모여 앉아 있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상하석을 찾을 이유가 없다. 거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곳에서 상하석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굳이 찾으라고 한다면 텔레비젼이 잘 보이는 곳이 상석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외에는 특별히 상하를 구분하여 앉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십여 년 전만 하여도 유치원에서 온돌에 관련된 노래를 가르쳤다. 가사를 보면 '윗목에 앉아라 아이 차가워, 아랫목에 앉아라 아이 뜨거워'라는 가사인데 전통 방식으로 만든 온돌을 체험하지 못한 우리 아이는 노랫말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였다. 결국 노랫말에 생활을 담지 못하다 보니 노랫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집이 우리의 생활에 영향을 준 또 다른 예로 가족간의 유대관계 부분이다. 한옥은 매우 잘 지어진 집이라도 어쩔 수 없이 외풍이 있기 마련이다. 외풍이 무조건 좋지 않다거나 또는 한옥만이 외풍이 많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과거의 집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단열과 기밀성이 현재의 집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지금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기밀성이 떨어진다는 의미이지 당시의 다른 나라의 집과 비교하여 절대적으로 기밀성이 떨어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또한 외풍이 어느 정도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환기를 유도하여 실내의 공기를 깨끗하게 유지하게 함으로서 오히려 건강에 도움이 된다. 어쨌든 간에 외풍 등의 문제로 추운 겨울에 방안에 들어서면 온돌의 아랫목을 찾게 된다. 아랫목에 이불을 깔고 그 속에 발을 집어넣고 있노라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다. 이러한 온돌의 구조는 자연스럽게 사람을 한곳으로 모으는 기능을 하게된다. 이렇게 모이다보면 살결이 맞닫는 살가운 풍경을 만들어내면서 얼굴을 마주 보면서 자연스럽게 가족간의 대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나이가 드신 분들은 겨울에 아랫목 이불 밑으로 발을 넣고 앉아 가족간에 오순도순 이야기 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다보면 가족간의 유대가 깊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와는 다른 예지만 집은 정서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한국인의 정서를 만들어 가는데 한옥의 분위기는 많은 영향을 주었다. 창호지에 비치는 달그림자의 정취는 한옥에서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 우리의 옛 시조나 시에는 발자국 소리에 대한 표현이 많이 있다. '밤비'라는 대중가요에서 '님이 오시나 보다 밤비 내리는 소리 님이 오시나 보다 님의 발자국소리'라는 가사가 있고 예리성(曳履聲:걸어갈 때 땅에 신이 끌리는 소리.)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러한 단어가 있는 것은 한옥의 마당에 깔린 백토와 무관하지 않다. 한옥에는 안마당에는 화초나 잔디를 심지 않고 단순히 백토를 깔아 햇빛을 반사하게 하여 집안 전체를 밝게 만들고 쓸데없는 곤충들이 집안에 서식하는 것을 방지한다.
사람들은 누구를 기다릴 때나 긴장하고 있을 때는 소리에 매우 민감하다. 특히 발자국 소리에 대해서 민감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밖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에 매우 깊은 인상을 얻는다. 시인과 소설가는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기다림의 아름다움을 발자국소리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자국소리도 바닥의 흙의 종류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입자가 고운 흙이 깔린 땅에는 발자국소리가 날 리가 없다. 이러한 환경에서 살던 사람들은 발자국소리가 그리움을 표현하는 대상이 될 수 없다. 한옥의 마당에 깔리는 백토는 모래에 석비레를 섞은 것으로 입자가 굵어 걸을 때 소리가 나기 때문에 기다리는 사람에 대한 정서를 발자국소리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일본 건축가인 니무라 카주유키는 '일본 전통문화공간의 현대적 창조'(한국인의 삶과 미래 주택:101쪽)라는 글에서 일본의 전통가옥에서 느낄 수 있는 비의 정취에 대해서 기술하였다. 지붕과 처마가 있는 일본의 전통가옥은 우리의 한옥과 같은 공감대를 느낄 만한 부분이 많이 있다. 그가 기술하고 있는 비가 만들어내는 다양한 모습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간에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낯설기만 할 것이다. 비가 만들어낸 다양한 모습을 느끼기 위한 전제조건은 처마가 있어야 한다. 처마가 없는 집에서는 들이치는 비를 막기에 급급하여 비를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없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다양한 빗물의 모습과 그 소리만으로도 혼자의 시간을 즐기기에 넉넉하다. 장대비의 세찬 낙수소리로 뿐만 아니라 비가 끄쳐 갈 무렵 한 방울씩 떨어지면서,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져 가는 낙수소리까지, 비와 처마가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정경은 한참을 보고 듣고 있어도 지루한 줄 모른다. 이러한 때는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한옥의 머름대에 기대어 턱을 괴고 보는 것이 더 어울린다. 그러나 아파트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빗소리는 아무런 감흥을 일으키지 않는다. 단지 베란다에 있는 선홈통 속으로 떨어지는 공명소리 뿐 낙수를 바라보는 즐거움을 찾을 수 없다.
이제 청각 외에 시각의 정서를 살펴보자. 한옥으로 만들어지는 시각의 정서로는 장독대에 소복이 내린 눈의 풍경과 저녁 초가집의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나즈막히 깔린 마을의 풍광,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초가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의 풍광 등 수없이 많다. 이러한 모습은 아파트의 삶에 익숙해져 버린 사람들에게는 설명되지 않는 광경이다. 특히 초가지붕의 선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만의 선이다. 부드러운 산하와 함께 부드러운 초가의 곡선은 다른 곳에서는 체험할 수 없는 선이다. 또한 장독대와 초가에 소복이 내린 눈도 같은 감각의 맥락에서 읽을 수 있는 선이다. 이러한 선들에 대한 감각이 조선 백자에서 볼 수 있는 양감있는 풍만함을 만들어 내는 근간이 된다. 이러한 부드러운 선에 익숙해지고 나면 경직되어 보이는 직선 또는 날카로운 예각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집에 들어갈 때 신발을 벗는다는 것도 우리의 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신발을 벗고 생활하는 것과 신을 신고 생활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우리 나라에서는 회사에서 근무할 때도 신발을 벗고 별도로 실내화를 신고 있는 경우가 많다. 서구에서는 집 밖에서 신발을 벗는 것이 결례이다. 이러한 차이는 실내와 실외와의 생활의 구분이 명확한 우리의 집과 그렇지 못한 서구의 집과의 차이 때문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신을 벗고 사는 기간이 대부분이라 신을 신는 것을 답답하게 여긴다. 또한 내외의 구분이 명확하기 때문에 실내인 사무실에서 신을 벗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서구인은 집에서조차 신발을 신고 있기 때문에 신을 벗을 경우 발냄새 등의 이유로 신발을 벗는 것이 힘들다. 이러한 변화는 신발의 구조에도 영향을 준다. 군대 생활을 한 분은 군화 옆에 별도로 지퍼를 달아 군화를 벗기에 편하게 개조한 경우를 많이 보았을 것이다. 군화는 발목을 보호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신발이기 때문에 발목 부분이 높게 만들어졌다. 따라서 신을 신고 벗는데 매우 불편하다. 이러한 군화는 침상에서 생활하도록 지어진 우리의 병영에는 맞지 않는다. 따라서 신고 벗는 불편을 해소하기 위하여 병사들이 생활에 맞도록 군화를 개조하였다. 신을 신고 벗는 상황이 많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집의 구조 때문에 일반인들이 신는 신발도 신고 벗는데 편리하도록 만들어졌다. 옛날에 신던 고무신이나 짚신을 보면 신고 벗기가 편한 구조로 되어있다. 또한 조선시대의 관복의 신발을 보면 발목까지 올라오게 되어 있으나 발목부분이 넓어 신을 신고 벗기에 편하도록 되어있다. 일본인들이 전통적으로 신고 있는 '게다'나 '조리'라는 신발도 좌식생활을 하는 일본의 주거환경에 맞추어 변화된 신발이다. 이처럼 집의 구조는 생활 곳곳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좌식생활은 신체의 구조에도 영향을 준다. 좌식생활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가부좌를 틀고 앉는 것을 하지 못한다. 요사이 우리 나라에도 가부좌 틀고 앉는 것이 잘 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대부분 어렸을 때부터 의자에 앉아 생활하였던 사람들이다. 또한 침대를 사용하고 의자를 사용하는 생활에 많아짐에 따라 요사이 요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다. 의사들은 푹신한 침대와 의자에 장기간 앉아있는 것이 요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미국 버클리 대학의 교수인 갤런 크렌츠는 바닥에서 활동하는 좌식생활과 온돌을 의자생활보다 더 좋은 생활로 추천하고 있다. 또한 마루바닥이 사교를 위한 무대로서 의자보다 훨씬 더 개방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는 실제적인 움직임이 의자가 있는 것 보다 자유롭기 때문에 폭넓은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으로 설명하고 있다.(의자:김문호 옮김:260-271)
이와 같은 좌식생활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좌식생활이 사람의 보수적 기질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서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기대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만큼 사람의 속성은 편안함을 추구한다. 좌식생활은 사람들의 활동성을 높이는데 그리 좋은 생활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생각하기'에는 매우 좋은 환경을 제공한다. 동양의 '선'은 바로 앉음에서 시작한다. 의자에 앉는 것보다는 훨씬 생각을 집중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것은 좌식생활의 성격이 동적(動的)이라기보다는 정적(靜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정적인 생활은 생활에서의 활동성을 줄게 하며 사고의 개념도 보수적으로 회귀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집과 집으로 형성되는 환경에 대하여 이야기 해보자. 우선 집의 배치가 우리의 생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알아보자. 공동주택인 아파트나 연립 주택의 경우 집이 남향으로 일렬로 배치되는 것보다는 ㄷ자나 ㅁ자로 배치되면서 각 동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중앙광장을 통해서 들어갈 경우 주민간의 유대가 돈독해진다. 주민간의 유대관계가 돈독해지는 이유는 자주 만나기 때문이다. 집으로 둘러싸인 광장을 통해서 드나들기 때문에 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경우 눈에 익은 사람들끼리는 눈인사라도 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보면 다른 만남으로 이어지게 되어 친근해 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자로 배치된 아파트 단지의 경우 이러한 만남의 기회가 적기 때문에 서로를 알 기회가 근본적으로 차단되어 의도적으로 접근하지 않는 이상 친근해 질 수 없다.
다음으로 골목길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서울의 북촌마을이나 가회동 등과 같이 한옥이 밀집해있는 지역을 가보면 길이 그리 넓지 않다. 길이 넓지 않은 것은 당시의 이동수단이 때문이다. 대부분은 걸어다녔고 일부 부유층만이 가마 또는 말을 타고 다녔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길이 넓을 필요가 없다. 길의 폭은 교통수단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자동차가 우리의 생활이 중요한 도구로 자리 잡으면서 길의 폭이 넓어진 것이다. 차가 거의 없던 초기에는 차 한대가 지날 정도였던 길의 폭이 차가 점점 늘어나면서 2차선, 4차선, 그리고 10차선 이상의 도로까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차가 다니는 곳은 사람이 다닐 수가 없다. 예전에는 마을길과 골목길에는 어린이들이 나와 뛰어 놀았던 마을의 마당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모습을 시골에서조차 볼 수 없게 되었다.
아이가 놀던 마당인 길에는 늘 할머니나 또는 어머니가 따라나와 아이들은 돌보았다. 그렇게 되다보면 아이들 노는 동안 어른들은 가벼운 잡담과 한담으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예전에는 이러한 모습을 도시나 농촌 할 것 없이 어느 곳에서든지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모습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차가 도로를 점령하고 나서부터 동네의 골목길조차 안전한 곳이 되지 못하였다. 그렇다보니 아이들은 집으로 쫓겨 들어가게 되고 어른들도 아이들과 함께 집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얼굴을 마주한 대화가 없는 곳에서는 공동체의 삶이 있을 수 없다. 도시의 삭막함이 더 하여가는 것도 바로 이러한 환경 때문이다.
어쨌든 집과 주변환경 안에서 생활하면서 시각, 청각 그리고 기타의 모든 감각기관 등을 통하여 체득되는 경험들 하나 하나가 모여 우리의 정서를 만들어간다. 이러한 경험들이 계속 쌓여 가면서 구체화되고 형질화되어 한국인만의 고유한 생활과 미감을 만들어 낸다. 우리의 한옥이나 그 안에서 사용된 가구나 도구들에서 직선이나 예리하게 각이 진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삶의 환경에서 비롯된 덤덤함은 이제는 치밀치 못한 것으로 치부되어 지금 사람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한다. 그러나 이제는 다시 생각해 볼 때가 된 것이다. 지금과는 다른 눈으로 바라보면 새롭게 보인다. 어쨌든 세대간의 감성의 차이는 그들이 살아온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지금의 환경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부모의 세대와 자식의 세대가 감성은 다를 수밖에 없다. 또한 한옥에서 살던 사람과 아파트에서 살던 사람의 감성이 같을 수가 없는 것은 생활하여온 환경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환경에 의하여 우리의 생활과 사고가 변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면 집이 사람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를 알게된다. 집은 단순히 우리가 먹고 자는 곳이 아니다. 집은 우리의 생활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 집에서 자라난 사람들은 그 집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미래의 집과 한옥
집을 하드웨어라고 하면 생활은 소프트웨어이다. 앞으로의 집은 급변하는 소프트웨어를 어떻게 하드웨어가 수용할 수 있는가가 핵심이 될 것이다. 근대에 이르기까지는 소프트웨어인 생활의 변화가 그리 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의 변화가 그리 많지 않았다. 한옥을 보아도 20세기초기에 지은 집은 이전에 지어진 집과 크게 다름이 없었다. 몇 가지 변화라고 한다면 마루가 서양건축의 영향을 받아 장마루로 깔린 점과 남녀 유별 의식이 약화되면서 사랑채와 안채의 구별 모호해지면서 사랑채가 안채로 들어온다는 점 정도이다. 집의 변화가 크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생활이 변화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서양의 건축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고 우리 나라의 경제가 급속히 발전되면서 집의 변화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되어갔다. 거주형식도 단독주택에서 공동주택인 아파트도 변화되었다. 또한 아파트도 연료가 연탄에서 기름, 가스 그리고 지역난방 등으로 변화하였다. 난방방식도 도입 초기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던 패널히팅이 아파트 전체가 패널히팅으로 난방이 되고 있다. 아파트의 평면도 최근에는 2bay 아파트에서 3bay 아파트로 신속하게 변화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가 이루어진 시간은 30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만큼 우리 생활과 사고의 변화가 급속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한참 논쟁의 중심이 되고 있는 아파트의 재개발의 문제도 바로 이러한 변화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건물의 내구연한과는 관계없이 집이 사회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집에 대한 가치가 떨어진 것이 재개발의 근본 원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재건축을 제재하기 위하여 무조건 내구연한 만을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처럼 최근의 집은 사회의 변화속도에 적응하고 못하고 있다. 이것은 내구재 성격을 갖는 집의 특성상 변화에 대한 대응이 신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몇 몇 건축가들이 건축의 상황 대처 가능성에 대하여 깊게 탐구하였다. 그러나 그 성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인간의 삶은 예측이 불가능 할 만큼 변화가 많고 또한 건축의 변화적응성이 근본적으로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하여도 건축의 변화적응성향상의 문제는 집을 지을 때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사항이다.
어쨌든 사람의 생각과 욕구가 변하는 이상 집은 변화하여 갈 수밖에 없다. 김태일교수는 미래의 주거의 변화를 다음과 같은 4가지 관점에서 보고 있다. 첫 번째는 고령화사회에의 대응 두 번째는 IT(Information Technology)와 공학기술에 의한 변화 세 번째는 고층화 추세 네 번째는 지역문화와 자연환경 중심으로의 변화 등이다.(한국인의 삶과 미래주택:연세대출판부:137-144) 이러한 관점은 인류 사회의 급속한 고령화, 인구증가, 기술의 발전 그리고 자연환경파괴에 대한 자성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변화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여 볼 때 미래의 집은 크게 두 가지로 방향으로 변화될 것이다. 첫 번째의 방향은 과학의 발전과 엇물려 보다 기능적이며 진화적 성격이 강화될 것이고 두 번째는 자원의 보다 효율적인 사용과 환경보전의 의미가 강조되어 자연친화적 성격이 강화되어 갈 것이다.
첫 번째의 방향인 기술적인 측면에서의 발전 방향은 쉽게 예측할 수는 없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고령화사회로의 변화는 지금보다는 다른 종류의 집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우선 사회적 측면에서 볼 때 인구의 급격한 증가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도 훨씬 고밀도의 공동주택이 다양한 방향으로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 밀집화의 방향은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일차적으로는 고층화가 시도될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지하화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또한 노년층의 증가로 실버산업이 활성화되면서 다양한 노인 주거의 형태가 개발될 것이다. 미래에 지어지는 집에는 지금보다는 한층 고도화된 IT기능이 강화되어 홈오토메이션 기능과 전자통신 기능이 지금보다는 훨씬 다양하게 사용될 것이다.
두 번째로 앞으로의 집은 자연친화적인 방향으로 발전될 것이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환경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앞으로 더욱 증대될 것이다. 최근 들어서 의·식·주에 관련된 모든 것이 자연환경과 친화되고, 지속가능한 환경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결국 인류공멸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사람들이 인식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공존해야될 대상이 사람에 국한하지 않고 자연환경과의 공존으로 확대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생각에 대한 연구의 일환으로 집의 자연친화 문제도 서구에서 활발히 연구되고 있으며 일부는 실험적인 형태로 구체화되고 있다. 독일의 예를 보면 완전히 자연순환이 가능한 집이 개발되어 일부 환경친화적 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도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발전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연의 파괴를 전제하고 있다. 산업혁명 이래로 눈부시게 이루어진 문명의 발전은 유한한 자원을 무제한적으로 소비함으로서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가 짓는 집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제는 일방적인 발전이라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자연환경의 보전과 지속가능한 발전에 중점을 두어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시도가 건축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기술발전과 자연환경 보전이라는 둘의 장점을 취하여 변화하려는 노력이 같이 병행되고 있다. 영국의 경우 디지털 기술과 환경보전을 동시에 고려한 인티져하우스(intelligent+greenhouse)가 1998년 완공되었다.(상기의 책:150)
지구는 유한한 자원이다. 지구가 가지고 있는 자원을 얼마만큼 균등하게 또는 지속하여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서 현재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고민하여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인간의 개발능력을 과신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사람들은 지구라는 곳이 인간이 필요한 모든 자원을 필요한 만큼 무한히 제공하여 줄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지금과 같이 소비지향의 삶 또는 투쟁하듯 독식하려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인류가 공멸에 이르는 첩경이라는 인식이 우리 자신에게 각인되어야 만 새로운 삶의 방법을 탐구하게 될 것이다.
자연과 공존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목표로 하게 되면 우리의 집도 변화하게 된다. 지금의 집은 소비지향의 삶에 맞추어 설계되어 지어지고 있다. 지금의 대표주거인 아파트는 편안함과 에너지 소비지향의 건축이다. 인간의 본성인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소비지향의 건축은 반드시 재고되어야 할 부분이다. 끝없는 고층화, 쾌적함을 만들어 내기 위한 인공환경 등은 에너지 소비와 자연파괴를 전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파트의 구조체를 만드는 시멘트는 백두대간의 허리를 잘라내는 대가로 만들어지는 것이며, 아파트를 시원하게 만드는 에어컨이나 고층을 오르내리기 위한 엘리베이터의 에너지원은 석유나 원자력 등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집안의 가구 대부분에 사용되는 플라스틱은 석유에서 추출되는 것이다. 이외에도 온수, 수세식변기 등 어느 하나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리고 세면기나 변기 개수대에서 나오는 생활하수가 하천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별도의 정화시설을 건설하고 운영하는데 우리가 직접 보고 느낄 수 없지만 많은 자원과 에너지가 소비되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이러한 에너지 자원이나 자연자원이 계속해서 공급될 수 없다는데 있다. 지구의 자원은 한계가 있다. 그간 많은 문명들이 부침해왔다. '문명의 흥기(興起)는 인간이 주위의 자연환경을 이용하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의 증대에 발맞추어 진행되었다. 또한 문명의 몰락은 주위 자연 환경과의 조화와 균형 상태를 유지하는데 실패함에 따라 진행되었다(고대 문명의 환경사: 도날드 휴즈:51쪽:사이언스 북스)'고 한다. 자연환경의 파괴와 문명의 발전과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결과 황허 유역도 이전에는 나무로 우거진 곳이었고, 그리스의 산도 과거에는 숲으로 우거졌으며 지금은 사막화한 메소포타미아 지역도 과거에는 공중정원을 자랑하는 숲으로 우거진 곳이었다고 한다. 또한 거대한 석상이 있는 이스터 섬도 과거에는 숲이 울창하였으나 사람들이 숲을 파괴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변화된 것이라고 한다.
무분별한 자연의 훼손은 결국 우리자신에게 화살로 돌아오게 된다. 지금까지의 환경훼손은 지역에 국한된 문제였지만 이제는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지구상 어느 곳도 사람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게 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지구 전체의 나무를 순식간에 없애버릴 수 있는 힘이 사람에게 있다. 이럴 때일수록 사람은 자연의 힘에 겸손해 질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겸손이다. 개인의 욕심을 채우려는 삶보다는 공존하려는 지혜가 절실한 시점이 온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의 삶과 앞으로의 집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이다. 따라서 사람은 자연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을 본능에 지니고 있다. 또한 환경에 따라 몸을 변화시켜 왔다는 증거가 과학에 의하여 밝혀지고 있다. 추운 지방에서 살아온 사람과 더운 지방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신체구조에 차이가 있다. 예전 '도전지구탐험대'라는 텔레비젼 프로그램에서 에스키모의 생활을 경험하는 내용이 있었다. 그 프로그램에서는 영하 10도 정도의 추위에서도 에스키모 사람들은 웃옷을 벗고 순록의 털가죽만을 덥고 자는 모습이 나온다. 그러나 한국에서 간 사람은 두꺼운 털옷을 입고 털가죽을 덥고 자면서도 벌벌 떨고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더운 지방에서는 영상 18도 정도의 기온에서도 얼어죽는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심심하지 않게 듣는다. 이러한 예는 사람들이 주변 자연환경에 어떻게 적응하는 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와는 조금 다르지만 의학의 자료를 통하여 사람이 환경에 적응하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독일의 한 의학자가 형제가 여럿이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질병에 걸리는 정도를 연구하였다. 그 결과 형제가 여럿이 있는 사람들이 질병에 강하다는 결과를 밝혀냈다. 연구한 학자는 이러한 결과에 대하여 '형제가 많은 사람들은 어렸을 때 상대적으로 형제가 적은 집단보다는 오염된 환경에 노출이 많이 되어 세균에 견디는 힘이 길러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결과는 예방주사를 맞아 세균에 견디는 능력을 만들어주는 것처럼, 깨끗한 환경에서 자라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세균에 노출되는 것이 면역력을 키우는데 더 효율이 있다는 것이다. 위의 예들은 사람도 생명체인까닭에 어떠한 환경에서도 자신을 환경에 적응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연과 집 그리고 사람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편안함만을 추구한다면 집의 구조는 점점 환경에 대한 부조화의 방향으로 변화되어 갈 수밖에 없다. 지금 미래를 꿈꾸는 많은 사람들은 과학의 발전을 향유하는 모습으로 미래의 주거를 꿈꾸고 있다. 늘 희망이 넘치고 풍요가 우리를 감싸는 미래가 우리에게 펼쳐질 것으로 생각하며 살고 있다. 건축을 전공하는 사람들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지금보다 팽창하는 인구를 수용하기 위하여 수백 층 아니 수천 층 높이의 집을 구상하기도 하였다. 또는 지하로 팽창하는 집을 구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을 조금 뒤집어 보면 이것 또한 자연환경의 훼손이다. 지구는 하나이다. 지구의 자원도 한계가 있다. 모든 사람이 원하는 만큼 풍족하게 살수는 없는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미래의 모습은 영화 '베트맨'이나 '로보캅' 또는 '블레이드 런너'에서 그려진 것처럼 '가진 자의 풍요와 못 가진 자의 빈곤'으로 표현되는 극단의 삶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삶의 모습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욕심을 버리고 절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이러한 생각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될 때 우리의 집은 다시 변신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되면 우리는 한반도라는 자연환경 속에서 우리의 삶의 그릇이었던 한옥이 우리 미래의 집에 있어 매우 중요한 가이드가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한옥을 다시 돌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역사를 공부하고 또 한옥을 공부하는 것은 단지 자신의 지식을 충족시키고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은 아니다. 굳이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논어'의‘위정편(爲政篇)' 에 나오는 말로서 옛것을 연구하여 거기서 새로운 지식이나 도리를 찾아내는 것이라는 뜻)을 거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자연에 순응하는 삶이 우리 미래의 일부분이 된다고 한다면 한옥은 우리에게 중요한 지침이 될 수 있다. 앞서 여러 부분에서 강조했듯이 한옥은 자연과 순응하는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한옥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과거의 집이 현재의 집과 다르듯이 미래의 집도 현재의 집과 같을 수 없다. 지금까지 강조하여왔듯이 생활과 생각이 변하면 집도 변화한다. 생활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집도 우리의 생각과 기술의 변화에 따라 변화한다. 그러나 그 변화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에 따라 집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이 달라진다. 지금과 같이 지구의 자원을 낭비하는 것은 후손이 사용할 미래가치를 현재에서 낭비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우리의 후손-가깝게 본다면 우리의 아이들에게 쓸 자원을 많이 남겨주는 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점에서 집도 같은 방향으로 발전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미래의 주택이 중심에는 '자연'이 들어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연'이 사고의 중심에 자리잡게 되면 집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렇게 생각이 변화되면 집은 지금보다는 훨씬 자연친화적이면서도 에너지 저소비의 방향으로 발전될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인류 전체로 확산될 때 인류 전체가 공존할 수 있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하면서도 미래를 지향하는 사회환경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