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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 마을 문화 여행을 기획하면서
11월달에 동기회에서 경주 양동마을과 옥산서원에 대한 답사를 기획한 이유를 들라면 조선시대 영남사람파의 대표적인 가문인 회재 이언적선생의 생가를 탐방하여 조선 중기를 살았던 양반들의 전통적인 가족제도와 생활상을 알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봅니다.
조선 왕조는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워 유교적인 왕도정치를 실현하려고 하였으며, 그 실현의 열쇄를 쥔 자들이 바로 조선왕조를 지배했던 양반들이었다. 양반들의 생할 근거지는 중앙이 아니라, 지방이었으며 특히 17세기 전반 까지도 종법적 가족제도가 정착되지 못하였던 상황에서, 率壻制와 자녀균분 상속의 실시로 촌락 주민의 구성이 친족을 비롯하여 그 여서와 외손들이 공거하는 異姓잡거촌을 이루었던 것이 사회 관행이었다. 명실 상부한 동족 마을은 17세기 후반부터 점차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의 하나가 바로 양동 마을이다.
당시 사회는 男歸女家婚, 子女均分制, 자녀 輪廻 奉祀 이3자를 특징으로 하는 것이 조선 전기의 가족제도 및 상속제도는 서로 인과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남귀여가혼은 결과적으로 딸(사위)과 그 소생(외손)을 아들 또는 친손과 동일시하면서 부처, 부모 자녀 내외손을 각기 대등한 위치에서 간주하려는 쌍계적 친족 제도를 낳게 하였으며, 그러한 혼속과 가족제도는 다시 자녀 균분제를 낳게 했고, 그 균분제는 다시 그 부모의 재산을 균분 받은 자녀들로 하여금 輪奉하는 관행을 낳게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관습은 다시 자 여와 그 내 외손들을 한 마을에 공거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성잡거촌이 양동마을이다.
양동마을 탐방을 통해 조선 시대 양반들의 향촌 지배와 향촌 자치 기구들을 아울러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사림파 집권이후 발달했던 서원과 향교, 향약, 유향소, 동계, 족계 등을 통해 당시 양반들의 혼인형태, 재산 획득 과정과 분배과정을 알 수 있다.
전근대 한국 사회에서의 가족 구조와 혈연의식이 중국과는 달리 매우 독자적이며 오래 기간 안정적 이었다는 점을 알려 주는데 귀중한 자료가 양동마을이다.
(양동마을과 하해마을을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예정임)
상세한 답사 일정은 아래와 같습니다.
답사일정 (2009년 11월15일) - 8시부터 8시 까지 -
08:00 부산교대앞 (한양프라자) 집합/ 집합시간 엄수 바람.
승용차는 동래 지하철역에 주차하시고 1구역 교대방면으로 내려오면 됨.
1일 주차비 5,000원 미만임.
08:00 ~ 09:30 양동마을 이동
간단한 간식을 제공합니다. (음료수, 김밥, 기타)
10:00 ~ 12:00 양동마을 탐방
12:00 ~ 12:20 이동 (10분거리)
12:20 ~ 13:30 옥산서원, 독락당 탐방
13:30 ~ 14:00 화산한우단지로 이동
14:00 ~ 15:30 점심식사 및 휴식
15:30 ~ 16:00 경주로 이동
16:00 ~ 17: 00 대능원 관람 (입장료 1,000원)
17:00 ~ 17:20 안압지로 이동
17:20 ~ 18:20 안입지 관람 (입장료 1,000원)
18:30 ~`부산으로 출발
20:00 구서동도착 금샘 순두부 저녁식사후 해산
이언적 1491(성종 22) 경북 경주~1553(명종 8).
아버지는 생원 번(蕃)이며, 어머니는 계천군(鷄川君) 소(昭)의 딸로 경주손씨(慶州孫氏)이다.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숙인 손중돈(孫仲暾)의 도움으로 생활하며 그에게 배웠다.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경주 주학교관(州學敎官)이 되었다. 이후 성균관전적·인동현감·사헌부지평·이조정랑·사헌부장령 등을 역임했다. 1530년 사간(司諫)으로 있을 때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그들 일당에 의해 몰려 향리인 경주 자옥산(紫玉山)에 은거하며 학문에 열중했다. 1537년 김안로 일파가 몰락하자 종부시첨정으로 시강관에 겸직 발령되고, 교리·응교 등을 거쳐, 1539년에 전주부윤이 되었다. 이후 이조·예조·병조의 판서를 거쳐 경상도관찰사·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 인종이 죽자 좌찬성으로 원상(院相)이 되어 국사를 관장했고, 명종이 즉위하자 〈서계 10조 書啓十條〉를 올렸다. 이해 윤원형(尹元衡)이 주도한 을사사화의 추관(推官)으로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1547년 윤원형과 이기(李芑) 일파가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어 죽었다.
옥산서원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1572년(선조 5) 경주부윤 이제민(李齊閔)이 지방 유림의 뜻에 따라 창건했다. 1574년 사액(賜額) 서원이 되었다. 1871년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경내의 건물로는 정문인 역락문(亦樂門), 이언적의 위패를 봉안한 체인묘(體仁廟), 화합·토론 등 서원 내의 여러 행사 때 사용하는 강당인 구인당(求仁堂),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실(祭器室),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학문을 닦는 곳인 민구재(敏求齋)·은수재(誾修齋), 유생들의 휴식공간인 무변루(無邊樓), 이언적의 신도비(神道碑)를 모신 신도비각(神道碑閣), 내사전적(內賜典籍)과 이언적의 문집 및 판본을 보관하던 경각(經閣)·판각(板閣) 등이 있다. 구인당의 정면에 걸린 옥산서원의 편액(扁額)은 원래 이산해(李山海)의 글씨였으나, 1839년 불에 타버린 구인당을 새로 지으면서 김정희(金正喜)가 다시 썼다. 서원에 보관되어 있는 이언적의 수필고본이 보물 제586호로, 김부식(金富軾) 원저 〈삼국사기〉 완본 9책이 보물 제525호로, 〈정덕계유사마방목 正德癸酉司馬榜目〉이 보물 제524호로, 〈해동명적 海東名蹟〉 2책이 보물 제52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원에서 서북쪽으로 700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이언적이 퇴거하여 수도(修道)하던 독락당(獨樂堂)이 있는데 보물 제413호로 지정되어 있다.
독락당
독락당은 크게 사랑채 영역과 안채 영역으로 구분되는데 이중 사랑채 영역에는 사당, 별채인 계정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 사랑채 영역은 계곡과 숲으로 이루어진 자연에 바로 면해 있다.
독락당이 가진 다른 큰 특징은 바깥에서 집 안까지 단번에 들어갈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바깥에서 집 안 가장 깊은 곳, 그 곳까지는 여러 개의 담과 문이 놓여 있다. 즉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담과 문은 물론 여러 개의 뜰을 거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즉 여러 단계의 절차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독락당이 막 시작되는 곳에는 조그마한 개울이 있다. 비록 강력하지는 않지만 이 개울은 영역을 구분하고 있다. 개울 너머는 다른 영역이다. 조금 과장을 하자면 이 개울은 국경과 같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물론 적대국간의 국경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우호국간의 국경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들어오는 것을 막지는 않겠지만 다른 영역에 넘어 들어온다는 사실은 꼭 짚고 넘어가겠다는 그런 정도의 구분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영역으로 넘어 들어간다는 사실 자체가 부담일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세상과 그만큼 거리를 두는 것이다.
대문과 길, 이 둘은 아주 희한한 관계로
놓여 있다. 길이 대문과 일직선상에 놓여 있지 않고 약간 옆으로 비스듬하게 빠져
있는 것이다. 마치 대문이 사람을 똑바로 보면서 맞이하는 게 아니라 약간 무관심한 듯한 제스쳐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 역시 진입하는 사람에게는 부담이 될 수 있다. 길을 반듯하게 고쳐 놓으면 그 뜻이 달라질 수 있다. 비록 섬세한 차이지만, 그럴 경우 거리를 두려는 뜻은 가지지 않게 될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오른쪽에 꺾인 담이 아주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만약에 담이 반듯했다면 분기점이되 그 내용이 달라졌을 것이다. 독락당의 주요 부분과 행랑채, 둘 중에 행랑채 쪽의 비중이 약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대문 뒤에 있는 마당은 온전히 독락당의 주요부분을 위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행랑채는 곁다리가 될 수 있다. 담의 모양 하나가 장소의 성격을 아주 크게 바꾸어 놓은 것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또 다른 마당과 건물 하나를 마주 대하게 된다. 이들 건물과 마당 또한 진입을 막는 특성을 가진 장소이다. 먼저 이 곳의 분위기는 한마디로 전혀 집 안 같지가 않고 바깥 같다고 말할 수 있다. 기껏 대문을 통해 들어왔는데 건물이 다시 막아서고 있기 때문이다.
건물에 놓인 문이 하나가 아니고 셋이란 점 또한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어느 문으로 가야 할지 정확한 정보를 주지 않는다. 이것이 또 하나의 제지가 될 수 있다. 세상과 떨어지려는 뜻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계정으로 가기 위해서는 독락당이란 이름을 가진 건물을 거쳐야 한다. 이곳은 독락당이 주인인 독립된 영역이다. 이 영역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 부담일 수 있다.
이 영역을 통과한다 해도 또 하나의 담과 문을 만나게 된다. 그만큼 계정은 쉽게 연결이 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계정은 아주 특이한 구조로 되어 있다. 계정의 절반은 집 안쪽에 있고 나머지 절반은 숲 속에 있다. 집과 자연 양쪽 세계에 걸터앉아 있는 형태이며 사람 사는 세상과 자연, 이 두 세계가 만나는 곳인 경계에 놓인 것이다. 이 구조는, 사람 사는 세상인 속세보다는 자연에 포함되려는 뜻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양동마을 소개
월성 양동 마을은 경상북도 경주군, 강동면, 양동리에 있는 지정 민속 마을이며, 하회마을과 더불어 양반들의 생활상과 주거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민속마을이다. 그러나 하회마을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대조적이다.
하회마을은 강물이 마을을 휘돌아가는 마을이라면, 양동마을은 산을 의지하는 마을이다. 그리 고 하회마을은 풍산 류씨의 단일 동성부락이지만, 양동마을은 여주 이씨와 월성 손씨의 두 씨족이 있는 집성촌이다.
하회에는 동제의 일부로 별신굿이 전해지지만, 양동에는 이렇다 할 동제가 없고 2∼3년에 한 번씩 정월 보름이나 추석 전후에 줄다리기하는 세시행사 정도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양동마을은 두 씨족의 집성촌인데, 조선시대 초기에 입향(入鄕)하여 지금까지 세거(世居)하여온 여주 이씨와 월성 손씨 양대 문벌을 이루며 그들의 동족집단 마을로 계승하여왔다.
두 집안에서는 각각 걸출한 인물을 배출했는데, 이씨 집안에서는 동국 18현의 한 분이시고 좌찬성(종1품)까지 오른 회재 이언적 선생를 배출했고, 손씨 집안에서는 벼슬이 정 2품 우참찬에 까지 이른 우재 손중도 선생이다. 손씨 집안에서는 이언적이 10세 때 손중도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하여, "우재의 학문이 회재에게 전수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씨 집안에서는 이를 부정하면서 두 가문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고 한다. 양동마을의 형태를 보면 '勿'자형의 생김새를 가지고 있다. 설창산에서 내려오는 능선과 골짜기의 형태가 한자의 물(勿)자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마을의 안쪽 골에는 손씨와 이씨의 대종가인 서백당과 무첨당이 위치하고 있으며, 바깥쪽 골에는 손씨와 이씨의 파종가인 관가정과 향단이 위치한다. 이 마을의 가옥들의 형태는 'ㅁ'자 형태이고 가옥의 위치를 보면 골짜기를 따라 가옥이 위에서 아래로 위치하는데 가장 위쪽에는 대종가 또는 파종가가
100여 가구가 한꺼번에 줄어들었으며 공업화와 근대화로 그 수가 감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하회마을과 더불어 규모와 질에 있어서 이처럼 우리의 전통가옥이 많이 밀집되어 있는 곳은 없을 것이다.
무첨당은 물봉골의 남향 언덕에 위치한 이씨 대종가의 별당채인데, 이언적 선생의 손자인 이의유가 지었다고 하는데 그의 호가 '무첨이었다고 한다. 보통 별당은 외부인의 눈에 잘 안 띄고 접근이 어려운 곳에 두기 마련인데 무첨당은 살림채 입구에 있고 규모도 커서 별당이라기 보다는 큰 사랑채 격이다.'ㄱ'형의 건물로 몸채는 가운데가 6칸 대청이며, 좌우로 방이 하나씩 있고 앞으로 나 온 부분은 누마루로 구성된 간단한 구조이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지붕은 아주 작은 합각지붕인 반면 몸채 오른쪽은 박공면에 부섭지붕을 덧붙여 마감했다. 옛날 이곳에 대원군이 잠시 머물렀다고 하는데, 그 때 그가 쓴 '左海琴書'라는 글이 있는데, 여기에 '左海'는 왼쪽에 바다가 있다는 것으로 영남지방을 뜻하며, '琴書'는 거문고와 책을 뜻하는데, '무릇 선비란 풍류와 알고 책을 읽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향단은 회재가 경상감사로 재직할 때 지은 것으로 중종이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그가 전임하면서 그의 동생인 이언괄에게 물려주어 그의 손자인 이언관의 호를 따 서 향단이라고 이름 짓고, 그의 후손들이 살게 됨에 따라 여주 이씨의 파종가가 되었다. 향단은 일반 가옥과는 상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몸채를 '月'자로 하고 여기에 'ㅡ'자형 행랑채와 칸막이를 둠으로써 전체 평면은 '用'자를 이룬다. 이것은 '用'자가 '日'자와 '月'자가 합쳐진 모양이므로 하늘의 해와 달을 지상에 있게 함으로써 생기를 북돋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부귀공명을 누리게 된다는 풍수사상 때문이었다. 행랑채는 정면 9칸 측면 1칸의 기다란 맞배집으로 동쪽 두 번째 칸을 문으로 사용한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중앙에 대청을 두고 좌우로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사랑채 정면을 나란한 두 개의 맞배지붕으로 마감하고 풍판을 달았는데 그 외관이 멀리서 보면 아주 멋있다. 안채는 두 개의 방이 안대청과 한 면을 접하면서 모서리끼리 만나고 있으며 각 방의 서쪽에는 부엌이 딸려있다. 그리고 특이하게 안대청이 안마당을 향하지 않게 하고 행랑채 지붕을 보도록 하였다. 아마도 안마당과의 기능적인 관계보다 전망을 중시했기 때문이라고 보여 진다. 집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사대부의 검소함과는 거리가 멀다. 마을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입지에 있으며 특이한 외관, 일반적인 격식을 과감히 벗어난 대담성 등은 그런 느낌을 만들어 준다.
서백당(書百堂)]
서백당은 안골의 산중턱에 위치한 손씨 집안의 대종가이다. 이것은 마을의 입향조인 손소가 25세 때 지은 것으로 사랑채의 이름을 따서 '서백당' 또는 '송첨' 이라고 하였다. 행랑채, 몸채, 사당의 3영역으로 나누어지며, 그 평면은 행랑채가 'ㅡ'자형, 몸채가 'ㅁ'자형, 그리고 사당채가 'ㅡ'자형이다. 몸채는 행랑채와 전후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고 몸채는 오른쪽 안쪽의 한 단 더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마당의 오른쪽에 사랑채 쪽에 작은 담을 쌓았는데, 이것은 여성들이 거주하던 곳과 구별하기 위해서 쌓아놓은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당시의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조선시대의 양반의 생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또한 마당의 맨 오른쪽엔 손소가 집을 지을 때 심었다는 500년 된 향나무가 있는데, 오래되어서 그런지 군데군데 시멘트로 쓰러지는 것을 방지한 흔적이 있지만 아직까지 죽지 않고 여전히 잎이 푸르며 큰 가지를 드리우고 있다.
서백당의 안채에 들어가 보면 맨 오른쪽에 작은 문이 있는데, 여기에 '삼현선생지지'(三賢先生之地)라고 이곳에 세 사람의 현인이 태어날 것이라는 것으로 풍수적으로 전해오는 말이 있다. 이곳에서 우재가 태어났고 이언적 또한 여기에서 태어났다. 이제 두 명의 현인이 태어났으니 손씨 집안의 사람들은 남은 한 사람의 현인이 손씨 집안에서 태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으며, 다만 회재 이후로 외손이 큰 인물이 된다면 다른 문중에 현인을 뺏기는 것으로 생각하여 시집간 딸이 몸을 풀러 친정에 와도 산만은 다른 집에서 시킨다고 하며, 외부인이 들어와도 절대 보여주지 않는다고 한다.
안압지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연못.
안압지 /위에서 본 안압지
신라 왕궁의 후원(後園)으로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조성되기 시작하여 674년(문무왕 14)에 완성되었다. 1975~86년의 발굴조사에 의해 유구가 밝혀졌는데 연못을 둘러싸고 있는 석축호안(石築護岸)과 서쪽 호안변에서 5개의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부정형(不整形)의 석축호안은 서쪽 호안선만 직선으로 되어 있고 나머지 호안은 굴곡이 심한 곡면을 이루고 있다. 입수구(入水溝)는 동쪽과 서쪽의 호안이 만나는 곳에 설치되어 있고 출수구(出水溝)는 북쪽 호안에 있으며, 연못 안에는 3개의 섬이 있다. 연못의 바닥에서 신라 왕족과 귀족이 썼던 일상생활 유물인 목선(木船)·목상(木像)·장신구·주사위 등과 불교미술품인 불상, 광배, '조로 2년'(調露二年:680)이라는 명문이 씌어 있는 보상화문전 등 다수가 발굴되어 번성했던 통일신라시대의 문화를 보다 총체적으로 복원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안압지는 한국조경사에서 통일신라시대 원지(園池)의 원형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지구에 위치하는 신라의 무덤.
천마총 /천마총(신라), 경북 경주시 황남동
제155호 고분이라고 불려왔으나 1973년 문화재관리국에 의한 발굴조사 결과 무덤 안에서 자작나무껍질에 채색으로 천마(天馬)를 그린 말다래[障泥:국보 제207호]가 발견되어 천마총이라고 명명되었다. 거대한 봉토로 덮인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서 봉토의 바닥지름은 47m, 높이는 12.7m에 달한다. 무덤의 축조방법은 먼저 지면을 고른 뒤 바깥둘레돌[外護石]을 돌리고 그 안에 점토와 자갈을 다져쌓기[版築]해서 올린 후 여기에 덧널[木槨]을
서원
조선시대에 성리학의 연구와 교육을 목적으로 지방에 세운 사학(私學)의 명칭.
조선 초기의 교육제도는 지방의 향교, 중앙의 사부학당, 성균관으로 이루어지는 관학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고려말부터 대두하기 시작한 소규모 서재(書齋)의 사학도 인정되었으며, 국가에서 그러한 사학을 장려하기도 했다.
향교 (지방에 설치한 국립 교육기관)
향약
조선시대의 향촌규약이나 그 규약에 근거한 조직체를 일컫는 말로, '일향(一鄕)의 약속(約束)'을 줄인 말로 중국 남송의 주희가 정리한 향약 또는 그를 바탕으로 향촌사회의 사정에 따라 내용을 바꾼 것을 가리킨다. 향약은 사족 중심의 자치규범이기도 하며 유교가치관에 기초를 둔 4강목을 통해 구체적인 행위규범을 설정하여 공동체적으로 강제 규제하는 향촌통제조직이기도 했다. 그러한 향약은 소농경영을 기초로 하는 봉건경제구조가 유지되고 상하의 신분제적 질서가 지켜지는 사회를 이루고, 그러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유교적 가치관에 입각한 인간을 형성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동계
마을의 공동재산 관리, 동제(洞祭), 농업협동(두레), 공동작업, 상호부조 등을 행하는 자치조직. 또는 향약의 마을, 동리 단위조직을 지칭하기도 한다. 1동리 내에서 혹은 몇 개 리(里)를 합하여 시행한다. 동계의 주된 기능, 내용과 구성, 운영방식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따라서 명칭도 다양하여 향촌결계(鄕村結契)·동린계(洞隣契)·동리계(洞里契)·동중계(洞中契)·이중계(里中契)·촌계(村契)라고도 한다. 향약조직일 때는 족계(族契, 族楔)·동약(洞約)·동규(洞規)란 말을 많이 쓴다. 대동계(大同契)도 동계의 일종이다. 재원은 구성원에게서 얼마씩 갹출하여 기금을 조성하고 이를 자본으로 이식(利息)활동을 하여 조달했다.
조선 시대 가족 친족 제도 연구 현황
가족 혹은 친족 제도는 한국 사학계보다는 사회학 혹은 인류학 영역에서먼저 관심을 보여온 분야이다. 그러나, 이 분야는 한국 사회사의 이해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여러 연구들이 축적되어 왔다.
먼저 가족 유형, 거주형태, 재산, 제사상속, 족보체제, 양자제도 등의 검토를 통하여 17세기 중반 이후의 가족 제도 친족제도는 그 이전과 매우 현저한 차이가 있음이 지적되었다. 17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유교적 통치이념이 가족, 친족제도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장자 우대상속, 양자제등이 보편화되고 동성 동본 조직인 부계조직화의 원리가 확립됨으로써 ‘가족 친족 제도의 재구조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최재석)
앞의 연구가 사회학의 방법을 이해하여 17세기 친족 구조의 변화상을 추적했다면 역사학적 방법론에 입각해서 이 분야에 대한 본격적으로 분석한 연구도 나왔다. 이 연구에서는 영남지방에 산재한 각 가문의 고문서를 이용하는 방법을 통하여 영남사림파의 사회적 경제적 기반을 조사하여 15세기로부터 17세기까지의 사림파의 가족 구성과 주거 특성, 그리고 친족 제도의 변화상을 검출하였다. 그 결과 17세기 전반 까지도 종법적 가족제도가 정착되지 못하였던 상황, 솔서제와 자녀균분 상속의 실시로 촌락 주민의 구성이 친족을 비롯하여 그 여서와 외손들이 공거하는 이성잡거촌을 이루었던 사회 관행, 명실 상부한 동족 마을은 17세기 후반부터 점차 형성되었다는 것을 새롭게 밝혀냈다.
이에 따르면 남귀여가혼, 자녀균분제, 자녀 윤회 봉사 이3자를 특징으로 하는 것이 조선 전기의 가족제도 및 상속제도는 서로 인과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남귀여가혼은 결과적으로 딸(사위)과 그 소생(외손)을 아들 또는 친손과 동일시하면서 부처, 부모 자녀 내외손을 각기 대등한 위치에서 간주하려는 쌍계적 친족 제도를 낳게 하였으며, 그러한 혼속과 가족제도는 다시 자녀 균분제를 낳게 했고, 그 균분제는 다시 그 부모의 재산을 균분 받은 자녀들로 하여금 윤봉하는 관행을 낳게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관습은 다시 자 여와 그 내 외손들을 한 마을에 공거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수건)
이러한 주장은 곧 바로 영남 사림파 가운데 대표적 가문이라 할 수 있는 퇴계 이황가와 회재 이언적가의 정착 과정, 혼인 형태, 재산 획득과정과 분배문제등을 검토함으써 한층 구체화 되었다.
이 밖에 姓貫문제 또한 친족 가족제도와 관련하여 주목되었던 주제였다. 15세기라는 시기를 한정해서 살펴볼 때 鉅族이나 신흥사족 및 상급 향리층을 막론하고 그들의 출신 뿌리가 모두 각 출신 군현의 토성 이었다. 그리고 15세기 이래 본관의 개편과 변질이 가해지면서 15세기 말부터는 종래 세분된 본관이 점차 주읍 중심으로 통합되었는데, 이러한 추세에 짝하여 한미한 토성들의 改貫 冒貫 행위가 자행되어 기존성관의 대대적인 통폐합이 이루어졌다. 성관의 통폐합은 당시 관념상 改姓은 換父 易祖행위로 간주되어 죄악시되었으나. 동성은 동조에서 나왔다는 의식이 강함으로 稀貫 避貫의 명관으로 개관이 비교적 자연스러웠다는 데에서 가능하였다.
토성 분화와 개관 성행은 성의 의식과 족보편찬에도 영향을 끼쳐 족보의 편찬 체제는 15세기 전반 이전의 譜牒類와 한국 최초로 간행된 족보인 ‘안동권씨 성화보’(1476년) 를 중심으로 한 조선 전기족보 및 17세기 후반 이후의 조선 후기 족보 등 크게 세 시기로 구분 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족보편찬의 변화는 그 기저에 남귀여가혼, 자녀 균분제, 자녀 윤회봉사라는 17세기 후반 이전의 가족 및 상속제도의 변화상이 놓여있다는 점에서 혈연의식 또한 가족 친족제도와 밀접히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가족 친족 제도사에서 이룩한 연구는 전근대 한국 사회에서의 가족 구조와 혈연의식이 중국과는 달리 매우 독자적이며 오래 기간 안정적 이었다는 점을 밝혀낸 점에 의의가 있다.
사족(양반)의 향촌 지배와 자치기구 연구 현황
조선 시기 향촌 사회의 연구의 시발은 ‘향약’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다. 연구 성과의 양적이 면을 보아도 향약 연구가 향촌사회 연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이다. 1980년대에 이르러 이전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많은 수의 향약 관련 논저가 발표되었다. 그 가운데는 종래의 방법을 따르는 수준에서 작성된 것도 있었지만, 새로운 시각과 방법을 도입하여 향약에 대한 이해를 확충 심화시키는 연구들이 나와 질적인 면에서도 크게 진전되었다
중종조 향약 보급에 대한 연구는 향약 연구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이 연구는 士林 연구의 일환으로서 주로 향약의 성립과 변천에 새로운 초점을 맞추어 온 기존의 연구 경향을 한 걸음 더 전진시켜 당시의 경제변동에 대한 ‘사림계’의 대응에 주목한 것이다. 呂氏鄕約의 보급 운동을 사회적으로는 사람들이 중소 지주의 이해 관계에 입각한 향촌 사회의 재구성을 모색 하는 운동으로 이해하고, 사상적으로는 小學 실천운동으로서 성리학이 정착 할 수 있는 사회적 토대를 딱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연구는 향약 연구에서 사회 경제적 배경에 대한 관심과 신분적 계급적 관점의 필요성을 부각시킴으로써, 향약을 공동체 성원간의 상부 상조의 기구로서 이해하는 막연한 통념의 차원을 넘어 재지 사족의 향촌 지배 내지 향촌 운용의 시각에서 이해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이태진)
이후 연구에서는 향약의 신분적 계급적 성격을 좀더 적극적으로 강조하는 경향이 많아졌다. 즉 재지 사족의 향촌사회에서의 지배력 여하가 향약 시행의 전제 조건이 된다는 인식아래, 사족들이 법률적 지배권을 보유한 향약 기구를 배타적 독점적으로 장악하면서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달성 시켜 나갔다고 보는 것이 그것이다. 결국 이러한 견해는 향약을 본래부터 사인 사족의 기구로서 규정하고 향약의 본질을 계급성에서 이해 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 사족 집단의 자치적인 신분적 기구’로 파악하면서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향약을 포함한 사족 중심의 지배체제가 전체적 수준에서 확립 되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향약과 유향소가 사족의 일향지배와 관련 된 것이라면 洞契 族契등은 촌락 단위의 것이라는 점에서 구별 될 수 있다. 16세기 안동 지방의 동계에 대한 연구는 농민의 계는 점차 사족의 조직에 의해 흡수 되거나, 파괴되어 가고, 사족 중심의 동계 족계는 임진왜란후 대체로 촌락내 하층민이 참여하는 上下 合契의 형태인 동약으로 발전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어서 이와 같은 향촌 사회의 조직들 유향소, 향안, 향규, 향약, 동계, 족계와 함께 서원 향교 또한 재지 사족의 향촌 지배 조직과 규약으로 통일하여 이해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조직들은 지역적인 특성에 따라 유무와 내용을 달리하기도 하고 체계적으로 구성 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재지 사족의 향촌 지배 장치로서 병렬적 상호 보완적으로 기능하고 있었고, 대체로 16세기 후반 이후에는 이러한 장치들의 정비가 가능하였다는 것이다.(정진영)
조선 시기 향촌 향촌사회 연구는 향촌 사회 조직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특히 1980년대 이후 상대적으로 활발하게 진행 되어왔다. 그 결과 이들 조직에 대한 실증적 분석의 측면에서 커다란 진전이 있었고, 해석의 측면에서는 사족 중심의 지배 기구로서의 기능이라는 관점에서 그 성격을 파악하는 입장이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EH한 조선 전기 향촌 사회에 대한 이해는 대개 향촌 사회 조직의 복합적 제 측면과 그 사회 경제적 배경에 중점을 두고, 관련 분야인 지장 행정 제도사의 연구 성과에서 밝혀진 중앙정부 또는 재경세력의 지방 통제의 여러 측면을 보충 활용하는 방식으로서 그 연구 영역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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