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교인들이 성공한 종교개혁가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루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농민들이 목사의 임면권, 십일조(十一條) 폐지, 농노제의 폐지, 공조(貢租)·부역의 경감, 공유지의 확보 등을 요구하며, 교회와, 사회체제의 근본적인 변혁을 원하자, 결국 보수주의로 돌아서서, 제후, 그리고 지주와 결탁하여 농민들을 유혈로 철저히 탄압한다.
그러므로 루터의 종교개혁은 많은 공적에도 불구하고, 결국 교회의 근본적인 변혁과, 봉건체제와의 근본적인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당시 부상하던 부르주아지와 군주ㆍ대지주 사이의 타협을 의미했으며, 오히려 교권주의로의 회귀였다. 중세에 특히 후기에 와서 교황과 성직제도와 타락한 카톨릭 교회에 대항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그것은 명예로운 죽음이 아니라‘이단’이라는 굴레를 덮어쓴 죽음이었다. 이런한 시대 상황 속에서도 루터가 살아남았고, 종교개혁에 성공할 수 있었던 사실 그것만으로도, 루터의 종교개혁은 온전하지 못했음을 역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영동교회 여러분에게 당시 실패한 종교개혁가 얀 후스 (Jan Hus, 1367-1415)를 간단하게 소개하고 싶다.지금까지 한국교회에서의 후스의 종교개혁에 대한 연구는 역사 속에 ‘그가 있었다’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고, 루터보다 후스의 개혁운동을 상대적으로 왜소하게 소개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사실 후스는 실패한 종교개혁자라서가 아니라, 그 보단 분명 진정한 교회개혁의 의미가 후스의 종교개혁 내용 안에 담겨있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목사 자신들의 교권을 흔들 후스의 종교개혁정신 을 성도들에게 가르칠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
중세의 종교개혁 당시의 얀 후스(Jan Hus, 1367-1415)를 단지 루터의 개혁을 위한 나팔수라고 이해하는 사람도 있는데 후스의 종교개혁의 의미를 볼 때, 오히려 그의 개혁적 설교와 신학이 후대의 루터종교에 단초가 되었다고 보여지며, 후스의 종교개혁이 루터보다 오히려 “진정한 종교개혁”이었다고 할 수 있고, 후스의 개혁운동은 한 시대의 사건이 아니라. 그것은 지역과 시간을 넘어 유럽의 개혁적 사고를 지켜낸 것으로, 후스의 개혁정신이야 말로 이 시대교회와 무엇보다, 진정 우리 영동교회가 계승해야할 참 종교개혁정신라고 싶다.
후스는 진정 중세에 죽음에 대한 위협도, 후스의 흔들리지 않는 성서에 기초한 믿음을 무너뜨리지 못할 정도로, 그는 진정한 개혁의 길에서 우뚝 선 인물이었다. 그의 개혁정신이야 말로 오직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것에 있었다.‘사람의 법’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법’에 순종한 진정한 종교개혁자요, 예수를 따른 순교자로 교회사 우뚝 서있었던 후스의 종교개혁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당시의 또 하나의 종교개혁가 존 위클리프(John Wycliff, 1324-1384)와, 중세 11-12세기의 종교개혁의 전조라 할 수 있는 카톨릭 내부의 개혁운동을 태동시킨 발도파(Waldensians) 의 영향을 받은 후스는
성서만이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규준이라고 주장했고, 그는 또한 교회의 세속화를 비판하고 교황권과 연옥설과 면죄부,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 성자숭배(veneration of saints)와 유해 숭배(veneration of relics)를 거부하였으며. 가시적(건축물) 교회의 거룩성을 인정치 않았다 .
그리고, 자격 없는(타락한) 성직자에 의해 거행되는 예배의 유효성을 거부하였다. 그는 복음의 단순성에 큰 강조점을 두었으며 거짓말을 대죄(大罪)로 여겼고 맹세하기를 거절했으며, 인간의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을 불법으로 여겼다. 따라서 그들은 전쟁과 사형제도를 반대하였다.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전(殿,depositaries)으로서 설교할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교황에 대한 굴종, 성자에 대한 일반적 신앙, 소위 그리스도의 대리자 라는 교직자의 절대성의 효력, 지상의 치리자에 대한 복종, 성직매매와 같은 당시 교회의 유력한 교리와 관습을 공격하고, 종교에 있어서 유일한 표준 규칙은 성서임을 강조하였다.
또한 후스는 직분이나 인간적인 선택이 사람을 거룩한 공교회의 구성원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 과정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예정이 교회를 만드는 것이며, 이 예정의 유일무이한 머리는 그리스도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영적 권위는 지상의 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받도록 예정되어 있는 신자들의 총회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후스는 교회의 부와 사치스러움은 사악함과 불신앙의 표징이라고 보았다. 그는 교회가 온갖 비싼 성화들과 성직자의 예전복(vestment), 성배(聖杯)와 종과 오르간을 사용하여 행하는 의식(ceremonies)들을 비판하였다. 후스는 그런 것들은 사람들을 하나님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후스는 스콜라 철학을 신봉하던 독일 교회와 카톨릭에 의해 위클리프의 사상을 “신조화하고. 변호하고, 설교하였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한다. 그는 사형 당하기전 화형 기둥에 묶여 있을 때 다시 한번 철회를 요구받았다. 그러나 그는 단호히 거부하였다. 후스는 그런 요구를 하는 자들에게, 후스 자신이 철회하는 것을 바라느니 “차라리 나에게 맷돌을 매어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편이 더 좋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나에게는 순간의 형벌을 피하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좋은 일이며, 영원한 수치를 당하는 것 보다 불 속으로 던져지는 것이 더 유익하다. 그런 일들은 바로 나를 주님의 팔에 던지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라고 단호히 말하고는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주 예수여! 나의 대적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당신은 저들의 나를 대적하여 행하는 잘못된 증언과 그릇된 기소를 알고 계십니다. 당신의 무한한 자비로 저들을 용서하여주옵소서”
후스는 자신의 기도를 조소하는 군중들의 소리를 들으며 대성당의 중앙에 나무로 설치된 단(壇) 위로 이끌려졌다. 거기서 일곱 명의 감독들에 의해 정죄의식(degradation)진행이 되었다. 후스의 모든 사제복이 벗겨지고 그의 머리에는 “이단의 괴수”(heresiarcha)라는 글귀와 날뛰는 악마의 그림이 그려진 종이 모자가 씌워졌다.
공의회는 자신들의 잔혹함이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가장 거룩한 콘스탄스 공의회는 더 이상 하나님의 교회의 성직자가 아닌 이 후스를 버리고 세속의 재판과 권력에 그를 넘긴다”는 결정을 내렸다.
수천의 사람들이 후스를 거리로 끌고 나와 “악마의 자리”(Devil s Place)라고 명명된 곳으로 데려 갔다. 그가 형장으로 끌려가는 동안 그의 책들은 불살라지고 있었다. 화형 중에도 나무 기둥에 묶인 후스에게 자기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거듭 요청받았다.
그러나 후스는 “나는 내가 설교했던 복음의 신앙 안에서 기쁨으로 죽음을 맞을 것이다”라고 대응하며 거절하였다. 주위에 있던 사람 하나가, 마지막으로 고해성사를 받으라고 요구하였을 때 후스의 대답은 단호했다. “고해할 것이 없소!”마침내 쌓아놓은 장작더미에 불이 붙자 후스는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라고 기도한후 큰 소리로 찬송하며 죽음을 맞이한다.
우리 영동교회도 참 신앙으로 이젠 새로 거듭나야하며, 그리스도로 돌아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