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버리고 도망하니라 (막14:43∼52)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홀로 기도를 마치시고 제자들에게로 돌아와 이제 때가 되었으니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파는 자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실 때에 곧 열둘 중 하나인 유다가 다가왔지요. 다시금 유다가 열둘 중 하나인 것을 강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예수님이 어디 계신지를 잘 알고 있었지요. 이처럼 예수님은 예고하신 대로 가장 가까이 있던 자의 배신으로 붙잡히시게 됩니다. 아울러 이러한 배신은 단지 예수님을 판 유다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닌, 제자들 전체의 공동의 문제라는 것도 분명히 하구요.
여하튼 마지막 식사하는 자리에서 다른 제자들처럼 ‘저는 아니지요?’라고 묻고는 보이지 않던 유다가 이제 다시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때 유다는 혼자서 돌아오지 않고,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서 파송된 무리를 대동하고 있었지요. 최고의회에 소속된 성전경찰이 동원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예수님의 체포를 위해 당시 유대교 최고 권력기관이 나섰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들의 손에는 검과 몽치가 들려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 듯 망치는 못을 박을 때 쓰는 연장이지만, 몽치는 사람이나 동물을 때리는데 쓰는 길이가 짤막하고 단단한 몽둥이를 가리키지요.
종교가 가지는 폭력성이라고 해야 할까요? 가끔씩 우리는 이단 사이비가 보여주는 극단적인 행동들이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는 보도를 접하곤 합니다. 종교라는 것이 사람의 마음과 헌신을 요구하는 것이다 보니 자칫 그릇된 신념으로 빠질 경우 극단적인 폭력의 형태로 드러나곤 하지요. 따라서 우리 또한 사랑과 평화를 주창하는 종교 안에 감추어져 있는 이러한 폭력적인 힘에 유념하며 주의를 기울일 수 있어야겠지요. 어찌보면 최초의 살인사건이라는 것도 원수가 아닌, 가장 가까운 형제 간에 예배의 자리에서 야기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가인과 아벨).
가룟 유다는 이미 이들과 약속된 군호를 짜고서 왔는데, 자신이 가서 입을 맞추는 자가 그 사람, 나사렛 예수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고 하였지요. 사실 그토록 위험한 인물이라면 당연히 관련자 전원을 잡아가서 심문하고 취조하며, 더 이상 사람들 가운데서 미혹하고 확산되지 못하도록 금하는 것이 마땅하겠지요. 하지만 애초부터 이들은 제자들을 제외시키고 오직 예수님만 잡아가기로 하였습니다. 가룟 유다가 자기 동료들을 위해 특별히 선처를 당부하였기 때문일까요?... 암튼 유다는 그들이 붙잡아 가야할 예수가 누구인지를 입맞춤으로 알려주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다가 특별히 무리에게 당부하였던 말이 이어지는데,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가장 가까이에서 직접 보고 경험하였기 때문일까요? 칼과 몽둥이로 무장한 그들에게 이렇게까지 신신당부를 하다니요. 두려움과 더불어 불안하고 초조한 유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데, 혹여라도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신적인 능력으로 그들의 눈을 가리고서 포위망을 뚫고 도망칠 것을 염려함인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적과 능력을 행하시는 것은 늘상 어려움 가운데 있는 이들을 돕기 위함이었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돌 하나도 빵으로 만들지 않으셨는데 말입니다. 어찌보면 유다는 자신이 예수님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다고, 그러니 행여라도 얕잡아보지 말고 각별히 주의하여 단단히 붙들어 매고서 끌고 가야 한다고 당부를 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는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예수님께로 다가와서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입맞춤을 피하지 않으셨죠. 제자가 스승을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부르는 말과 또한 친근한 사랑의 인사인 입맞춤이 이처럼 배신, 배반의 표가 되다니, 그야말로 역설이지요. 또한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한편으로 자기 스승을 마음껏 조롱하고 능멸하는 행위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마태는 이때 예수님께서 유다를 향하여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마26:50)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그를 친구라 부르셨고, 또한 피하거나 도망가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붙잡힌 것이 아니라 스스로 당신을 대적의 손에 넘겨주셨다는 것이지요.
앞서도 우리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기점으로 예수님의 삶과 사역의 성격이 바뀌었다고 나눈 적이 있지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이끌어 오셨던 예수님께서 이후로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이 되신다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점점 더 상황에 이끌려 주도권을 내어주실 뿐 아니라 급기야는 이처럼 대적들의 손에 붙잡혀 자신의 몸까지도 맡기게 되시지요. 이러한 모습을 일컬어 ‘수동적 희생자’가 되셨다고도 하는데, 이제는 마치 예수님의 운명이 대적들의 손에 달린 것처럼 보입니다.
이처럼 유다가 약속된 플레이를 충실히 이행함으로 함께 온 무리들이 예수님께 손을 대고 붙들게 됩니다. 어두운 밤 사람들이 보지 않는 외진 곳에 있을 때 칼과 몽둥이로 무장을 하고서 온 것을 보면 아마도 이들은 제자들이 맞서서 맹렬히 저항할 것을 예상했나 봅니다. 실제로 예수님 곁에 있던 한 사람이 칼을 빼어들고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그 귀를 떨어뜨리지요. 마태는 오히려 예수님께서 흥분한 무리들을 진정시키고서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한다’며 칼을 도로 칼집에 넣으라 명하셨다고 합니다. 만약 무력으로 이 상황을 타개할 것이었다면 아버지께 기도하여 12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게 했을 텐데, 만약 그렇게 하신다면 ‘어떻게 성경이 이루어지겠느냐?’고 하시면서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그대로 평생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삶을 사셨지요. 그리고 이제 마지막 대적들에게 붙잡히는 그 순간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스스로 무력함에 처하시고,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으신 채 순순히 그들의 손에 당신을 내어주십니다. 그리고 의사였던 누가는 이 순간까지도 치료자로서 예수님의 사역을 기록해 놓았는데, 눅22장에서 종이 다친 것은 오른쪽 귀였고, 예수님께서는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시며 그의 귀를 만져 낫게 해주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공관복음보다 요한복음에 보다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요18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구를 찾느냐고 물었고, 당신께서 스스로 나사렛 예수임을 밝히시지요. 그러면서 ‘너희가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며, 자신이 붙잡히는 대신 제자들만큼은 무사히 돌려보내고자 하십니다. 물론 그렇게 하신 것 또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다’고 하신 말씀을 응하도록 하려 함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제자들을 안전하게 돌려보내기 위해 애쓰실 때, 오히려 베드로가 나서서 칼을 빼어들고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의 오른편 귀를 베어버렸다고 합니다. 특별히 누가와 마찬가지로 요한은 종의 ‘오른쪽 귀’를 베었다고 밝히는데, 이것은 베드로가 왼손잡이가 아닌 이상 정면에서가 아닌 뒤에서 그를 공격하였다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붙잡히는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해 그 앞을 막아서며 당당히 싸웠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비겁한 행동일 수 있다는 것이죠. 물론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자신만큼은 끝까지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한 자신의 맹세를 지키고자 애를 쓰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여전히 예수님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칼을 도로 꽂으라고 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붙잡혀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이 아버지의 뜻인 것을 아셨던 것이지요. 그리고 아버지께서 주신 이 잔을 당신께서 기꺼이 마시겠노라며 담대히 나아가십니다. 지난 주에 보았던 것처럼, 겟세마네의 기도에서 승리하신 주님께서는 이처럼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향하여 흔들리지 않고 결연히 발걸음을 내딛으십니다.
그리고는 무리를 향하여 말씀하시는데, 마치 강도를 잡는 것같이 칼과 몽둥이를 가지고 왔느냐고 책망하십니다. 당신께서 죄 없으신 분이심을 분명히 밝히시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으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정말로 당당하다면, 그들이 말하는 대로 예수님께서 죄를 지었다고 한다면 낮 동안 성전에 있을 때에 붙잡았어야 맞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며 꾸짖고 쫓아내었는데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오히려 그들이 지금 예수님을 강도취급하며 검과 몽둥이를 가지고 잡으러 왔습니다. 유다와 마찬가지로, 당시 종교지도자들 또한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하고 오해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지요. 여하간 예수님의 생애 막바지에 있어서 가장 눈에 띄게 강조되는 것이 이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하나하나 이루어 가신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처럼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붙잡히신 이 모습이 제자들을 실망시켰는지도 모릅니다. 너무나도 연약하고 무력하였고, 그들이 기대하고 바랐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으니까요. 이스라엘을 해방하기는커녕 자신의 목숨을 구하려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무리를 이끌고 나타난 가룟 유다를 보고 받은 충격보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이 그들을 더욱 당황스럽게 만들었지요. 그리하여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고 맙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이미 예고한 바이지만, 그것이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이렇게까지 빨리 이루어지다니 읽는 우리들도 당황스럽지요. 다른 제자들도 하나같이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결코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큰소리치며 자신하였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보면 요18장에서 보았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의 도망갈 길을 터주신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암튼 제자들은 자신들의 말을 지키지 못하였고, 예수님께서 예고하셨던 대로 다들 선생님을 버리고 도망합니다. 말로만 큰소리를 쳤을 뿐, 예수님께서 기도부탁을 하셨던 그 순간조차도 육신의 피곤함을 이기지 못한 채 졸았던 제자들의 당연한 모습이라 할 수 있겠지요. 기도한 예수님과 기도하지 않은 제자들이 고난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이처럼 전혀 다른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끝으로 마가는 51∼52절에서 부끄러울 수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을 기록해 놓았는데,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자 벗은 몸으로 도망하였다는 것이지요. 물론 명확하게 나오지 않아 누구라고 단정짓기는 어렵지만, 이 복음서를 기록한 마가 자신이지 않았겠냐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그가 누구이든 간에 분명한 것은 이는 벗은 몸으로 달아날 정도로 두려움과 공포에 짓눌려 도망하기에 급급하였던 제자들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죠. 당시 제자들이 어떠한 처지였을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까? 선생님의 안위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두려움에 떨고 실망감에 한숨지으며 아무런 경황도 없이 도망치기에 급급한 그들의 모습을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앞서도 이야기하였지만 처음부터 무리는 군호를 짜 맞추고서 유다가 보내는 신호를 따라 예수님만을 붙잡으러 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함께 있는 제자들을 잡으려는 의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달아나기에 급급했다는 것이지요. 이로써 모두가 주를 떠나가고 예수님은 철저히 혼자가 되셨습니다. 홀로 남겨진, 아니 버려진, 그리고 외로이 끌려가는 예수님의 모습이 안타깝고 처량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오늘 우리는 배신한 가룟 유다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예수님을 배신하고 버리는 자들은 누구일까요?... 분명한 것은 배신하고 버렸다고 하는 것은 불신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있다는 것이지요. 마치 제자들이 큰소리쳤던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늘상 자신의 이익과 안위만을 구하며, 세상적인 것들; 지위와 명예와 인정과 재물을 탐하고 집착하는 사람들은 아닐런지요? 그리고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지요?
결연히 고난의 길을 향하시는 예수님 vs. 굳은 각오에도 이내 버리고 도망가는 제자들... 그 결정적인 차이가 결국은 치열하게 기도를 하였던 예수님과 아무런 긴장감도 없이 피곤함을 이기지 못한 채 깨어 기도하지 못하였던 제자들의 모습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을 배신하거나 버리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를 수 있길... 그것이 세상적인 성공을 바라는 우리의 기대와 전혀 다른, 오히려 무기력하고 연약한 실패자의 모습처럼 보일지라도 좁고 험한 진리의 길을 온전히 걸어갈 수 있길...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 말씀에 사로잡히고 기도에 승리함으로 날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일산호수교회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