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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제주의 오래 전 옛모습
유배의 섬, 탐라제주
유배지로 제주도가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원(元)에 의해서였다. '목마(牧馬)의 섬 제주', '유배의 섬 제주'라는 단초는 제주도가 원의 간섭을 받게 되면서 비롯된 셈이다. 그 후 조선은 제주를 본격적인 유배지, 목마지로 이용하였다. 조선시대 제주도 지역에 유배된 사람은 대략 200명 내외로 추정되고 있다.
▲ 유배지로서의 제주
조선시대 유배지 하면, 연상되는 곳이 바로 제주도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유배지는 도서지방이나 내륙지방 모두가 대상지역이었다. 전국 각지의 유배지역을 도별(道別)로 보면, 경기도(37), 황해도(23), 강원도(26), 충청도(54), 전라도(56), 경상도(71), 평안도(42), 함경도(24) 등 333곳이 모두 유배지였다.
그러나 조선중기 이후에 오면서 정치적인 요인으로 반대파를 완전히 고립시키자는 의도에서 변경이나 내륙지방으로의 유배는 아주 적었고, 대개 유인도나 무인도 등 절해고도에의 유배가 상대적으로 증가하였다. 유배 대상의 섬 중에 서울에서 가까운 강화도나 백령도는 왕족 등 특수한 경우에 국한되었다. 대부분은 전라·경상·평안도의 연안에 위치한 절도(絶島)에 유배되었다. 그 중에서도 제주도를 비롯한 흑산도·진도·완도 등 전라도 연해의 여러 섬이 유배의 대상지로 많이 이용되었다.
무엇보다도 유배지로서 제주도가 주로 이용된 것은 중앙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절해고도의 섬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영토가 넓은 명나라의 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여 시행하였기 때문에 영토가 좁은 조선에서는 그대로 시행하는 데에 무척 어려움이 많았다. 즉, 3,000리 되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따라서 가장 먼 곳인 제주도가 늘 유배의 최적지로 거론되었다. 그리고 서울에서 가까운 곳에 유배를 시키고자 할 때는 형식적으로나마 길을 이리저리 고불고불 돌아서 유배지에 이르는 이른바 곡형(曲刑)이 자주 행해지기도 하였다.
제주 대정 추사적거지에서 추사 김정희 선생 유배행렬 재현 모습
▲ 유배인 관리
유형은 반드시 장형이 뒤따랐다. 즉, 곤장 100대를 치고 2,000리, 2,500리, 3,000리 등 죄인을 3등급으로 구분하여 유배를 보낸다. 유배의 형을 받으면, 유배인을 유배지까지 압송하여 해당 수령에게 인계하기 위한 정배죄인의송성책(定配罪人議送成冊)이 작성되었다. 여기에는 죄인의 성명, 죄명, 유배지, 죄인을 관리하는 보수주인(保授主人)의 신분과 이름, 나이 등이 기재되어 있다. 보수주인은 그 지방의 유력자로서 한 채의 집을 배소로 제공하고 유배인 감시의 책임을 지게 하였다. 그곳을 적소(謫所) 혹은 배소(配所)라 한다. 유배인들은 바로 이 보수주인의 호적에 유배죄인으로 기재되었으며, 관아에서는 이들에 대한 관리여부를 1년마다 중앙에 보고하여야 했다.
유배의 형을 받은 유배인의 압송은 의금부나 형조의 포졸들이 맡아서 지정된 유배지의 수령에게 인계하였다. 수령은 유배죄인을 보수주인에게 위탁하였다. 적소에서의 유배인 생활비는 고을에서 부담한다는 특명이 없는 한 스스로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따라서 이를 위해 가족이나 자신 소유의 노비를 데려오기도 한다. 제주의 경우는 먼 변방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홀로 유배되어 오거나, 노비를 간혹 데려 오는 정도였다. 지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가족을 데리고 유배지에 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유배인들이 살았던 초가
▲ 제주 입도조가 된 유배인들
입도조란 바로 수령이 파견되던 섬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현상 가운데 하나이다. 제주도 외에도 진도나 완도 등에도 입도조가 존재한다. 제주의 토착성씨인 고씨, 부씨, 양씨(가나다 순)를 제외하면, 제주의 성씨는 모두 다른 지역에서 건너온 성씨들이다. 이들이 어떠한 이유로 제주에 들어와 정착했든, 그 후손들은 제주에 최초로 정착한 선조를 입도조라 칭하였다.
애월읍 곽지리에 있는 김해김씨 좌정승공파 김만희 입도조 묘역
제주 입도조 가운데는 유배된 사람들이 많다.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조선개국에 반대했던 두문동 72인 가운데 제주도에 유배된 한천(韓甸)은 가시리, 김만희(金萬希)는 곽지리에 정착하였다. 이들은 후일 각각 청주한씨, 김해김씨 좌정승공파의 입도조가 된다. 이를 전후해 이미(李美)· 변세청((邊世淸)·허손(許遜) 등도 조선개국에 반대한 이유로 제주에 유배되었는데, 각기 경주이씨 익제공파·원주변씨·양천허씨 입도조가 되었다. 제주에 유배되었던 한천·김만희·이미를 지칭해 제주에서는 끝내 충절을 지킨 사람들이란 의미에서 삼절신(三節臣)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천(韓甸)을 기리기 위한, 표선읍 가시리에 있는 충의사(忠義祠)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커다란 타격을 받은 신덕 왕후와 사촌지간으로 전라감사에 있던 강영은 1402년 제주도 함덕에 유배되었고 신천강씨도 입도조가 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강영은 1398년(태조 7) 8월에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재발할 위험을 모면하기 위해 전라감사를 사임하고 1402년(태종 2년) 유배나 다름없이 제주에 들어왔다고 전해진다.강영이 도착한 곳은 조천읍 함덕포이며, 이후 제주 고씨를 배필로 맞아 새로운 가정을 이루었으며, 주민들에게 충효의 도리와 예의범절을 가르쳐 그가 전한 학문과 교화는 여러 지역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다른 일설에 따르면, 원래 황해도 곡산 사람이며,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윤성(允成)의 조카이다.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신덕왕후(神德王后 ?~1396)의 사촌 오빠란 이유로 사건에 연루되어 관직을 박탈당하였으며, 1402년(태종 2)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고 한다.
강영이 도착했다해서 함덕에 있는 포구를 강녕포 또는 강녕개라 하였다. 강녕개는 조간대(潮間帶) 중층에 붙어 있었다. 사리 썰물에는 그 앞 330m 지점 점심대(漸深帶)에 있는 올렛여에 배를 두었다가 밧여로 수위를 가늠하며 밀물을 타고 서서히 포구 안으로 배를 들여 매었다. 옛날의 강녕개는 완전히 매립되어 지금은 없어졌다.
강영이 도착했던 지금의 조천읍 함덕포구(강녕개)
고부이씨 입도조인 이세번은 조광조의 무죄를 호소하다가 중종 17년(1522)에 대정현 신도리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7년간의 유배생활 끝에 병을 얻어 제주에서 사망하자, 병 간호를 위해 제주에 왔던 가족들은 제주에 정착하여 고부이씨 입도조가 되었다. 인목대비의 폐모를 반대하다가 제주에 유배된 이익(李翼)은 제주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고홍진·김진용·문영준 등 제자를 길러내어 제주 교육발전에 막대한 역할을 행하였다. 그는 제주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경주이씨 국당공파의 입도조가 되었다. 광해군 때에 제주에 유배된 김응주(金膺珠)는 제주에서 소실을 맞아 자손을 낳고 유배에서 풀리자 되돌아가는데, 그의 아들은 제주에 남아 김해김씨 사군파의 입도조가 되었다. 당시 김응주는 제주목사 김여수와 친척이었으므로 유배생활 중에 많은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인조반정으로 제주에 유배된 박승조(朴承祖)는 아들 박자호를 데리고 제주도 곽지리에 정착하여 유배생활을 하다가 유배가 풀리자 본인만 돌아갔다. 따라서 그의 아들은 제주에 뿌리를 내려 밀양박씨 규정공파의 입도조가 되었다.
왕족이었던 회은군 이덕인(李德仁)은 당시 심기원 등이 인조를 거부하고 회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데 당사자로 연루되어 1644년에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1645년에 서울로 압송되어 사약을 받고 사망하였다. 그러나 이보다 일찍이 그의 서자 이팽형(李彭馨)이 현실정치에 회의를 느끼고 제주에 들어와 은둔 생활을 하다가 아들을 낳아 전주이씨 계성군파의 입도조가 되었다. 현종 때에 제주에 유배된 이지달(李枝達)은 서인과 남인의 예송 논쟁에 연루되어 대정현에 유배되었는데, 그는 제주에서 소실을 얻어 아들 이보운을 낳았다. 유배에서 풀리자 그는 아들을 남기고 본인만 올라가게 되면서 수안 이씨의 입도조가 되었다. 숙종 때의 기사환국으로 제주에 유배된 김예보는 유배에서 풀렸지만 돌아가지 않고, 제주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여 김해김씨 회의공 김경서파의 입도조가 된다.<김동전·제주대 교수·hisdjkim@cheju.cheju.ac.kr>
◈참고문헌 고창석, <조선조의 유형제도와 제주도>, ≪탐라문화≫ 5, 제주대 탐라문화연구소, 1986. 양진건, 《그 섬에 유배된 사람들:제주도 유배인 열전》, 문학과지성사, 1999 <끝>
탐라제주의 옛사람들... 갈중이 적삼을 입었다.
마부 두 사람이 안장을 갖추어 지운 두 마리의 제주 조랑말을 바투 잡고 있다. 차림들로 보아 귀한분들을 모시고 나들이를 나갈 참인 것 같다.
탐라제주의 주요유배인 연표
▲1392년=한천, 김만희 조선개국 반대 ▲1402년=이미(조선개국 반대), 강영(왕자의 난) ▲1409년=민무구, 민무질 형제(왕자의 난) ▲1469년=민수, 세조실록 사초 수정 ▲1496년=김순손, 연산군 비난 ▲1498년=홍유손, 무오사화 ▲1504년=홍상(갑자사화), 유헌(유자광 탄핵상소), 김양보(명령거부) ▲1520년=김정, 기묘사화 ▲1522년=이세번, 조광조 무죄옹호 ▲1547년=유희춘, 벽서사건 ▲1555년=이희손, 을묘왜변 패전 ▲1565년=보우, 유림의 탄핵 ▲1594년=소덕유, 정여립사건 연루 ▲1608년=이홍로, 대북파의 탄압 ▲1612년=이태경·송상인, 역모혐의 ▲1614년=정온, 영창대군의 사망에 대한 부당성 호소 ▲1618년=노씨(칠서의 옥), 원종(허균의 역모), 이익·조직(인목대비 폐모반대) ▲1623년=박승조, 인조반정 ▲1628년=인성군·이건 광해군 복위 혐의 ▲1637년=광해군 강화도에서 이배 ▲1644년=이덕인, 역모혐의 ▲1646년=홍무적, 소현세자빈 강씨 탄압 반대 ▲1647년=소현세자의 세 아들 이석철·석린·석견 유배 ▲1673년=신명규·이정기, 남인의 탄핵 ▲1680년=유혁연, 경신환국으로 영해에서 이배 ▲1689년=송시열, 기사환국 ▲1689년=김예보(기사환국), 김진구(중전 민씨의 폐위 부당성 상소) ▲1694년=장희재·김덕원(갑술환국) ▲1702년=오시복, 무고의 옥 ▲1703년=민시준·송성·오석하·이성휘·이수철, 과거시험 부정행위 ▲1706년=김춘택, 폐비윤씨 복위관련 ▲1721년=조성복(소론의 탄핵) ▲1722년=신임·유성추·김수천·김학손(신임사화) ▲1723년=조승빈(신임사화) ▲1725년=윤지·이현장·서종하(신임옥사) ▲1727년=임징하(탕평책반대) ▲1731년=조관빈(이광좌 탄핵상소) ▲1740년=김원재(위시보관사건), 이규채(탕평책 반대) ▲1751년=이존중(탕평책 반대) ▲1754년=조영순(탕평책 반대) ▲1756년=최학령(탕평책 반대) ▲1757년=조중명(탕평책 반대) ▲1777년=조정철(정조 시해 음모) ▲1791년=권일신(천주교 신해 박해) ▲1801년=이치훈(천주교 신유박해), 정난주(황사영 백서사건) ▲1840년=김정희(윤상도 옥사 재론) ▲1849년=이하전(왕위계승실패) ▲1853년=이명혁·최봉주(김수정 모반사건) ▲1861년=염희영(철종외척 사칭연좌) ▲1862년=백낙신(진주민란 원인 제공) ▲1862년=김시연(진주민란 문책) ▲1864년=구성희(과거시험 부정) ▲1865년=심이택(부정부패) ▲1870년=정만식(이필제의 난) ▲1873년=최익현(계유상소) ▲1875년=김복성(과거시험 부정) ▲1876년=조병창(개항반대), 정태호(부정부패) ▲1879년=이희당(과거시험 부정) ▲1880년=남정호·박영훈·민영서(과거시험 부정) ▲1881년=이태현(부정부패), 김평묵(만인소 상소문) ▲1882년=백낙관·윤상화(개화반대) ▲1890년=박영로·정석오·조종룡·고영중(과거시험 부정) ▲1893년=안효제(상소내용 부도덕) ▲1895년=한기석·김국선·박진수·허엽·김명호·장덕현·최형순(이준용 역모사건), 이민굉·이충구·전우기·노흥규(왕비시해 복수기도) ▲1896년=서주보·정병조·김경하·이범주·이태황·홍우덕(아관파천), 정원노·임록길·안관현(어윤중 피살사건) ▲1897년=이근용·김낙영·김사찬·장윤선·이용호·한선회(친러정권 타도 모의), 김윤식(민비시해사건), 이승오(을미사변연좌) ▲1907년=박영효(대신 암살음모) - 제주의 마지막 유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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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간략하지만 솜씨좋은 글발로 제주의 역사를 요약했군요, 전공과 밥먹고 산 세월은 다른데 다만 아쉽군,조중동 삼사중 한곳의 편집국장은 노미네이트 ,,,,,,,아쉽군요 우리captin! 허나 당신이 있어 이공간이 넉넉한걸느낍니다.
울 우정의 늪 카페지기 하고 있으면 어느 자리도 부럽지 않습니다.
과찬이지만, 하여간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