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일 : 2004년 5월 30일
성 경 : 누가복음 17:12-19
제 목 : 고마운 뜻을 표하다
고맙습니다! 인사합니다.
본문 설명합니다.
이 시간 감사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 감사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신16:13-15)
영적 성장에는 8층의 계단이 있습니다. 첫째 계단이 믿음 층입니다. 둘째가 덕 층이고, 셋째가 지식층이며, 넷째가 절제 층. 다섯째가 인내 층이고요. 여섯째 계단이 경건의 층입니다. 그리고 일곱째가 형제 우애고, 끝으로 여덟째 계단이 사랑 층입니다.(벧후1:5) 믿음으로 출발하여 사랑으로 끝나는 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입니다. 신앙은 아주 단순한 믿음으로 출발합니다. 반석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기초 위에 내 신앙의 집을 건축하면 인생의 비, 바람이 불어도 견고히 버틸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예수님 믿게 된 것이 마냥 감사하게만 느껴집니다. 그리고 보잘 것 없다고 여기는 풀잎이나 참새가 지저귀는 소리. 아름다운 세상. 경작하여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드린다는 것은 믿음의 열매입니다. 믿음에는 감사의 열매가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하나님께 고마운 뜻을 표하는 인사는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실오라기 같은 믿음이라도 있을 때 감사가 나오는 것이지 그나마 라도 없으면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성도는 일반인에게 없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의 분량이 따로 있습니다. 넘어져도 감사! 코 빠져도 감사! 자빠져도 감사! 쓰러져도 감사! 그렇게 감사하게 되는 것은 잘못되어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게 할 것을 믿기에 감사하다는 겁니다. 감사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깨달음이 없으면 감사가 없습니다. 어떤 부인이 있었습니다. 이 분의 남편은 20년이 넘도록 식물인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부인은 한결같이 정성을 다해서 남편을 뒤치다꺼리하고 음식을 입에 넣어 주고.....아무튼 너무나 고생을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부인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정말 피곤합니다. 아무리 해도 감사하다는 말이 없기 때문이지요. 남편이 "여보, 고맙소" - 이 한마디만 해 주어도 내가 이렇게 피곤하지는 않을 거예요." 이런 고백을 합니다. 그 감사 한 마디가 이렇게 소중합니다. 감사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연지사로 생각하면 감사가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 낳아서 키우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닙니까. 마땅히 그렇다면 자식으로서 고마울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남편이 아내 위해 수고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습니까. 고맙다고 할 것이 뭐 있어요? 나와 이웃 사이에도 당연하게 여길 때에는 그때부터는 감사가 없습니다. 사장이 종업원에게 월급 주는 것이 당연하고,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감사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는데 무지하거나 당연지사로 나타내지를 않아서 없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누구나 믿음이 있기에 감사의 열매를 맺힐 수 있습니다. 감사에는 계산이 앞설 수 없습니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 가지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이끌림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도록 믿음주신 것에 고마워서 감사하는 겁니다. 남들은 안 믿어진다는데 나는 믿어진다니.. 이것이 기적 아닙니까? 천국에 들어가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감사합니다!! 믿음의 열매가 감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에 대하여 저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고마운 뜻을 감사의 열매로 표하여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는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감사는 향기로운 제사입니다. (창8:21)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살펴본다면 제단에 제물을 올려놓고 제사를 드리면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하는 말씀과 또한, "이는 향기로운 냄새니" 이런 성경말씀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제사 종류와 목적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가 있는데 그 중에 화목제라는 제사는 히브리 원어로 "셀렘" 이라고 하는데 이는 "보답", "응답" 이란 뜻입니다. 화목제사의 목적은 하나님과 경배자의 화목과 화친을 상징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과 구원, 축복에 감사할 때 화목제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짐승을 잡아서 피를 뿌리고 내장을 태우는 제사의 방법 대신 예수님이 곧 "향기로운 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몸과 피를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엡5:2) 그러므로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믿음을 가지고 그 이름을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면 그 기도와 그 감사는 "향기로운 제사" 로 인정되어 하나님께서 흠향하십니다.
신약성서 로마서에는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롬5:1) 예수님이 아니고는 어느 누구든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만들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십자가 밑에 나와서 찬송하며, 영광을 돌릴 때 그것이 향기로운 제사로 흠향하시사 심판을 면하게 하십니다.
셋째, 감사는 행복입니다.(빌4:11-12)
부자라고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부자라도 그 마음에 감사가 없다면 불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일수록 더 감사가 없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욕망의 끝이 없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불행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까? 매사에 감사함으로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매사를 감사로 지내는 사람은 행복을 만들어 가는 사람입니다. 행복은 절로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만들어 가는 겁니다. 내가 행복하기를 노력하고 만들어 갈 때, 눈물도 유익한 것이고, 수고도 보람된 것이고, 어려운 된서리를 맞아도 거기서 뜻을 찾습니다.
바울 사도는 어려운 처지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이 고백은 만족하고 사는 법을 배웠다는 말씀입니다. 감사는 만족에서 나옵니다. 매사에 만족하게 살기 때문에 행복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부요한 사람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가장 부요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지금 많은 재산은 없다고 하더라도 하루 세끼 먹고 살 수 있다면 만족해야 하고, 주일에 교회에 나와 예배드릴 수 있는 건강을 주셨으니 감사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마음을 지키게 되었으니 행복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불만스럽게 산다면 이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무엇이 화를 자초하는 겁니까? 탐욕입니다. 구약성서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아간과 같은 탐욕은 멸문지화를 당하고 맙니다. 욕심을 갖고 살면 만족할 수 없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나면 만족하게 살 수 있고 만족하게 사는 이가 행복한 사람입니다. 거기가 천국의 삶입니다. 거기서 감사가 나옵니다.
우리는 큰 것에 감동하고 놀라기보다는 사소하고 작은 것에서부터 감사를 찾아서 적은 것으로 감사하여 행복한 인생이 되십시오.
<탈무드라는 책에 어떤 랍비가 나귀를 타고 닭 한 마리와 등불과 천막을 싣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가고 가도 집은 없고 해는 저물어 캄캄한 밤이 되었습니다. 천막을 치고 나귀와 닭은 천막에다 묶어놓았습니다. 닭을 가지고 다니는 이유는 시간을 알기 위함이었고, 등불을 들고 다니는 것은 성경을 읽고자 함이었습니다. 불을 켜고 성경을 보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 등불을 넘어뜨려 불이 꺼졌습니다. 그는 기도하고 잠을 청하였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맹수들이 나귀를 잡아 죽였습니다. 또 알고 보니 자기가 잠잔 곳에 가까운 동네가 있습니다. 그래서 동네에 들어갔더니 온통 아수라장입니다. 어제 밤에 강도 떼들이 들어와 동네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강탈해 갔습니다.
랍비는 생각해보니 그 자리에서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닭이나 나귀가 살아 있었더라면 강도들이 쳐들어와 자기 목숨을 해쳤을 것이고, 불이 켜 있어도 발각 되었을테고, 잃어버린 게 많아도 그것이 은혜였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은 나의 미래도 책임져 주신다는 확신을 가져야 감사하게 되고, 이런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감사는 행복을 주는 원료입니다. 감사로 인하여 행복해지는 삶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 감사는 구원을 가져옵니다. (눅17:19)
문둥병자는 고침 받은 것에 감사하여 예수님께 감사하러 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축복하십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이 사람은 병도 치료받고, 마음놓고 거리를 활보하며 생활할 수 있는 가정과 일터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원은 건강의 구원, 사업의 구원, 생명의 구원뿐만 아니라 영적인 구원이 있습니다. 시편 50편 23절 말씀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이 감사를 바로 할 때 하나님은 구원의 은총을 허락해 준다고 약속하십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 중에서 감사하며 찬송했더니 옥문이 열려서 구원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역대하 20장에 여호사밧왕 때에 모압과 암몬이 연합군을 형성해서 유다를 쳐들어왔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여호사밧 왕은 근심하며 두려움에 떨면서 성전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의 힘으로는 이 연합군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애기를 배었지만 해산할 힘이 없는 것처럼 우리나라가 그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하고 기도할 때에 야하시엘이라는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찬양대를 동원하여서 옷을 입히고,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렇게 찬송하면서 전쟁터에 나가라 고 하였습니다.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찬양대를 조직했습니다. 가운을 입혔습니다. 앞서나가게 했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고 크게 찬송하며 싸움터로 나갔습니다. 이 찬송이 시작될 때 연합군이 자기들끼리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끼리 찌르고 칼로 베고하여 여호사밧 왕은 칼 한 번 쓰지 아니하고 대승리를 얻었습니다. 전리품을 거두는데만 3일이 걸렸습니다.(대하20:22) 순탄할 때 감사해 보세요. 내내 감사할 수 있는 은총을 입게 될 것입니다. 어려울 때 감사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환경을 바꿔주실 것입니다,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해 보세요. 이것만이 축복을 유지하는 길입니다.
맺는말
감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감사는 계절도 시간도 없습니다. 감사는 어느 곳에서든 캐낼 수 있는 마음 따뜻한 선물입니다. 어느 때든 어느 곳에서든 감사를 캐어내면 감사가 되고 불평을 캐어내면 불평이 나옵니다. 감사는 주어진 조건이 아닙니다. 부족하여도 감사를 잉태한 자는 감사를 낳고 풍족하여도 불평을 잉태한 자는 불평을 낳습니다. 소유에 비례하는 감사는 소유에 비례한 불평을 낳고, 믿음의 감사는 조건에 메이지 않아 세상을 행복하게 하고 자신을 풍요롭게 합니다. 감사는 은혜를 아는 자의 마음의 열매이며 감사한 만큼 삶은 여유 있고 따뜻합니다. 죽은 사람을 볼 때 살아있는 것이 감사하고, 병든 자를 볼 때 건강함을 감사하고, 오늘도 아침을 볼수 있음에 감사하고, 아직도 사랑해야할 가족과 친구들이 있음을 감사하고, 아직도 내게 주어진 시간이 남아 있음을 감사하고, 이 시간을 사용할 수 있는 건강이 있음을 감사하십시오.
감사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향기로운 제사입니다. 행복입니다. 구원을 가져옵니다. 감사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