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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산광역시 시내버스의 역사를 서술하는 문서.
타 지역에 비해 역사 문서의 양이 상당히 방대한데 이는 2014년에 부산광역시버스운송사업조합에서 발간한 <부산시내버스 50년사> 라는 책이 있기 때문이다. 본 문서의 내용 거의 대부분이 해당 책자의 내용을 참고로 한 것이다.
2. 부산 시내버스의 역사
2.1. 부산 버스의 시초
부산에서 언제부터 버스 운송을 시작하였는지는 확실하게 알려진 바 없으나, 일본인에 의해 부정기적인 버스 운행을 한 것이 해방 이후까지 지속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때는 지금과 같은 형태의 시내버스가 아니라 부산과 인접도시를 연결하는 시외버스와 비슷한 형태였고, 행정관리는 경상남도에서 담당했다. 당시 부산 대중교통의 축은 버스보다는 전차였다.
광복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부산의 인구가 폭증하면서 대중교통의 수요 또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에 소규모의 운수회사가 특정지역을 기반으로 주간선 도로를 따라 인구밀집지역과 상업지역을 연결하는 버스의 운행 빈도를 늘리는 수준으로 활성화되었으나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운행체계를 구축하지는 못했다.
버스운행은 늘어났지만 본격적인 대형버스의 운행은 한참 뒤에야 이루어졌다. 그 당시에는 정원이 적은 마이크로버스(합승버스)가 버스운송의 주류였다. 즉, 마을버스로 굴릴 법한 소형버스가 시내버스로 다녔다는 얘기. 이들 업체는 임의단체인 시내합승버스조합을 결성하여 활동하다 차량 대형화의 추세에 맞춰 일부 시내버스 회사가 빠져나가 별도로 시내버스조합을 결성하였고, 나중에 시내합승버스조합을 흡수했다. 국제여객, 삼화운수, 학성여객이 마이크로버스를 운행하다 대형시내버스로 전환한 업체였다.
그때의 부산시는 경상남도 소속이었기 때문에 대형버스는 경남지역에서 부산시내의 간선노선 일부를 운행했다. 즉, 시외완행버스였다. 시내버스도 소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마이크로버스였다.
1950년대 중반에 운수업 종사자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시내버스의 운행계통은 다음과 같았다.
•서면 ←→ 대신동 (40~50대)
•서면 ←→ 초읍 (3대)
•서면 ←→ 당감동 (4대)
•청학동 ←→ 시청앞 (8대)
•동삼동 ←→ 시청앞 (1대)
•영선동 ←→ 시청앞 (2대)
•충무동 ←→ 송도 (3대)
•해운대 ←→ 대신동 (7대)
•동래 ←→ 운동장 (12대)
•해운대 ←→ 온천장 (3대)
운행 계통이라 표현한 이유는 지금처럼 노선번호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산시에서 인가한 운행증(행선지를 기록하고 도장을 찍어 붙여둔 합판 형태의 널빤지)을 차량 내부에 비치해야 운행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승객은 버스가 도착하면 운행증에 적힌 행선지를 일일이 확인해야 했다. 노선번호가 있어도 헷갈리는 마당에 그런 것도 없었으니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즉, 운행증은 행선판 겸 노선도의 역할을 했다.
운행증(통행증)은 업자가 국세청에 버스 보유 대수 만큼 사업용 자동차에 부과된 통행세를 내고 영수증을 받아 부산시에 제출하면 시는 이를 확인한 다음 버스 운행증을 제작 하여 도장을 날인한 다음 업자에게 넘겼고, 업자는 운행증에 행선지와 차량 번호를 기입하여 이를 합판에 붙여 차량 내부에 비치했다.
한편 운행증은 버스업자가 지입 차주로부터 매달 지입료를 받아내는 구실이 되었다. 업체가 미리 운행증을 확보하고 있으면 지입차주는 지입료와 통행세를 업체에 내야 운행증을 받을 수 있었다.
1956년부터 5•8 라인(모든 영업용 자동차에 대한 공급 동결 조치)의 시행으로 증차가 억제 되면서 늘어나는 교통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버스 안은 가축 수송의 단계를 훨씬 뛰어넘는 지옥의 헬이었다.
승객들은 내릴 즈음에는 파김치가 되기 일쑤였고, 정장을 차려 입은 신사나 숙녀, 교복을 입은 여학생의 몰골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 해야 할 지경이었다. 기름을 잔뜩 바른 머리는 폭격을 맞은 모습으로 돌변했고, 남학생의 학모(学帽)가 바닥에 떨어져 짓밟히거나, 상의 단추가 터지거나, 새로 산 신발이나 구두가 짓밟혀 망가지는 건 예사였다. 거기다 소매치기나 성추행도 빈번하여 승객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2.2. 직할시 승격 직후
1963년 직할시 승격 이전의 부산시내버스에 관한 문헌이나 행정 기록은 없지만 5~6개의 업체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부산교통 100년」(부산시, 1999년)에 따르면, 1956년 버스차량 대수는 468대로 영업용이 455대, 자가용이 13대로 기록되어 있고, 버스업체에 관한 기록은 1963년에 6개 업체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의 업체는 일신여객, 신한여객, 명신여객, 삼화운수, 부산합동, 신흥여객 부산지점(현 부산여객)이 있었다고 전해진다(마이크로버스업체 제외). 이 중에서 신흥여객 부산 지점은 충무동로터리 부근에 버스터미널 형태의 정류장을 두고 부산 시내의 일부 구간을 영업운전을 했다. 지금도 마산에서 시외버스를 운행하는 신흥여객이 맞다.
직할시 승격 이후 위에 언급된 운행계통 외에 장림, 개금, 범어사 등으로 노선이 확장 되었고, 통행량이 많았던 노선의 경우 출퇴근시간 2분, 평시 3분이라는 빗자루급 배차간격으로 운행했다. 차량은 앞문과 뒷문에 각각 남자 차장을 배치하여 요금을 받았다.
BIMS가 없던 시절에 배차관리를 어떻게 했냐면, 주요 정류장(온천장, 서면, 범일동, 부산역, 시청앞, 대신동 등)에 배차원을 배치하여 일일이 도착시각과 출발시각을 체크하였다. 당시 배차원은 상이군경회에서 파견 나온 사람들로, 부산시와 업체의 용역 형태로 근무하였다.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하면 정차시각을 확인하는 한편 승객이 없을 경우 호각을 불어 버스를 출발시켰다. 만일 연착하거나 출발신호를 보내도 출발하지 않으면 벌금을 부과했기 때문에 기사들은 한시라도 늑장을 부릴 여유가 없었다.
2.3. 1960년대 후반의 경영난과 파업]
1968년 1월 15일에 운수사업 TO를 개방했는데, 버스뿐만 아니라 트럭, 택시를 대상으로 법적 요건만 충족하면 신규 혹은 증차 면허를 발급해줬다. 시행 5개월만에 230대의 버스가 신규 등록되어 부산에는 총 750대의 버스가 다니게 되었다. 버스 내부의 혼잡은 줄었지만 이번엔 도로혼잡이 문제라는 불평이 끊이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부산전차가 이 무렵에 폐선되었다.
승객이 도로혼잡으로 불편을 겪었다면, 사업자들은 대당 수익금이 줄어든 대신 차량관리비가 눈덩이 처럼 불어나서 도산 위기라고 아우성을 질렀다. 그 당시의 상황을 1968년 3월 4일자 운수시보(현 교통신문)에 실렸던 기사에서 이렇게 전했다.
부산 합승버스 도산 위기
부속값•인건비 과다로
부산시내버스 및 합승들이 각종 부속들이 등귀하여 종업원들 인건비 등을 대폭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적정요금은 인상되고 있지 않아 출혈 운영 보다도 도산 상태에 놓여 있다. 지난 신정을 전후로 부산시내버스 및 합승요금이 불원간에 인상될 것 같이 일간 지상에 보도됐다. 업자들도 이에 커다란 희망을 걸고 있었으나 지금에 와서는 관계 당국의 이렇다 할 눈치가 안 보여 거의 실망 상태에 놓여 있으며, 업계에서는 이대로 몇 달 더 지속된다면 본의는 아니나 부득이 차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될 절박한 시기에 도달했다고 비명을 올리고 있다.
버스업자들 중 일부 대표들은 오래 전부터 이 요금인상을 실현하려고 중앙당국에 가서 각 방면으로 노력하고 있으며 부산시 당국도 끈질긴 건의를 하고 있어도 별 소득이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부산시내버스 중 완행 입석버스의 경우를 보면 승객 대부분이 학생, 군경 등 할인승객으로서 양정동에서 괴정까지 3구간으로써 학생은 1구간 5원에서 구간을 초과할 때마다 1원씩밖에 추가요금을 더 받는데 그쳤으니 이는 현 물가고 등으로 보아 불합리하지 않을 수 없으며, 시 당국에서 지난 1월에 소위 특급으로 증차 조치한 동래, 해운대 등을 운행하고 있는 특급들은 휘발유엔진임으로 하루 평균 35가롱이라는 엄청난 기름을 소모해야 되나, 소위 특급이란 위신을 유지키 위하여 정원초과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정유소가 적음으로 하루 3~4천원의 적자를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같이 차량이 불어남으로써 일반 좌석버스나, 합승에게도 영향이 커 이대로라면 도산을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1968년 하반기에 부산합동버스를 비롯해서 굵직한 시내버스업체 5개가 부도를 내고 도산했다. 이때 부산시내버스 업체의 사정이 얼마나 안습했냐면, 은행은 이들을 외면했고, 그나마 뒷돈을 대 주던 고리대금업자들도 운수업계와의 거래라면 아예 머리를 흔드는 실정이었다. 대부분의 업체가 이자에 시달리고 있었다.
보다 못한 부산시내버스 업자들은 1969년 3월 전국버스연합회 회장에게 적자 운영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과 요금 인상 실현을 요구하는 호소문을 발송했다. 그 당시에는 운수사업 인가•면허권, 요금조정권이 중앙부처인 교통부(현 국토교통부)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부산의 요금조정 요구는 업계의 중앙조직인 버스연합회를 통해 교통부로 전달하는 식이었다. 호소문 발송과 동시에 연합회의 운휴 결의에 보조를 같이 하고, 세밀한 결의는 시내•합승버스조합 의장단의 결의에 따름을 부산시에 통보하였다. 하지만 부산시는 이를 강력하게 비난하면서 민관군 트럭을 동원하고 업체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행정처분을 내린다고 경고하자 순식간에 데꿀멍했다(…).
하지만 1년 뒤인 1970년 3월 31일에는 요금인상을 요구하면서 6개 업체의 54대[1]가 오전 5시부터 밤 12시까지 기습적으로 운휴에 들어갔다. 이들 버스는 구덕운동장에서 간선도로를 따라 양정, 온천장, 수영(광안리 경유) 등지로 운행했으며, 학생과 서민의 45%가 이용했었다. 이에 대해 부산시는 군수사령부의 협조를 받아 군용트럭을 동원해서 긴급 수송작전을 펼쳤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던 어느날, 6월 12일 부산시는 대륙여객과 화성운수의 사업면허를 취소했고, 그날 밤 운수과 직원을 총동원해서 현장에서 차량의 번호판과 검사증을 회수해 갔다. 당국에 의한 면허취소는 부산시내버스가 생긴 이래 이것이 최초였다.
면허취소의 이유는 부산시의 행정명령을 거부한 부실 업체라고 판단했다긴 보다, 근본적인 이유로는 앞서 3월 31일 파업과, 당국의 허가 없이 학생 군경 할인을 폐지한 것이 위의 2개 업체가 주동이 되어 벌어진 것이라 보았다. 한마디로 2개 업체를 시범 케이스로 조진 것이다. 업계는 부산시의 이런 조치에 경악하면서 사유 재산을 침해로 규정하면서 업체 부실화의 근본 책임이 부산시에 있다고 비난했다.
2.4. 부산버스조합의 출범]
1960년대 부산시내버스는 시내버스와 마이크로버스(합승버스)가 공존하면서 임의단체이긴 했지만 부산버스합승조합(창립시기 미상)과 1967년 일부 대형버스 업체가 빠져나와 설립된 일반좌석급행버스조합이 있었다. 양측 업계는 외형적으로는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되면 관할관청의 개입으로 공멸할 거라는 위기감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양측은 이를 화합으로 해결할 생각을 하지 않고 반대연합을 집어삼켜 본인들만이 살아남는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대형버스 업체는 대업자, 마이크로버스 업체는 소업자라 불리면서 각종 현안을 놓고 대립 하였다. 대업자는 자본 규모에서 상대적 우위를 점하면서 각종 의사 결정 과정에서 관여하여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소업자는 영세한 규모 때문에 일대일 대결에서 밀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사업자 숫자에서 앞서 있던 소업자들은 초대 부산버스조합 이사장 선출 과정에서 업체당 투표권 하나를 부여한 조합 정관을 이용하여 숫자의 위력을 보여주었다. 초대 이사장이었던 신갑득 일신여객 사장도 그 소업자의 중심적인 존재였다.
이때 대업자 사이에는 소위 실력자라는 존재가 있었다. 당시 대륙여객 사장이었던 김정만으로, 버스조합 이사장은 물론 택시, 화물조합 이사장을 전부 역임한 그는 업계는 물론 경찰과 검찰 등 권력 기관과의 인맥이 매우 탄탄했다. 이 때문에 고급 공무원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고, 대륙여객의 차량이 사고를 내도 유야무야 넘어가기 일쑤였다. 다만 그와 공직 사회와의 관계나 인맥 형성 과정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것이 없었다. 또한 부도 문제나 면허권 등 부산지역 운수업체의 생사는 그에게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김정만의 휘하에는 이재헌(삼화여객), 이우봉(삼화운수), 이만호(일광여객), 이석부(학성여객)가 있었으며 이들은 4이씨라고 불렸다. 이들은 매일 아침 대륙교통의 사무실에서 김정만의 지시를 기다렸으며, 그의 지시는 4이씨에 의해 수행되었다. 조폭이냐 김정만이 1960년대 후반에 타계한 이후로는 4이씨가 위세를 날렸다.
한편, 대륙여객은 이후 김정만의 아들이 승계했으나 1970년에 부산시의 기습적인 면허취소를 당해 부도를 냈고, 다른 업체로 양도•양수되는 우여곡절 끝에 유성여객이 창립되었다. 1971년 11월 15일 부산시는 공공 복리와 조합원의 이익을 위해 2개로 나뉘어 있던 버스조합을 상호 평등의 원칙을 바탕으로 통합하라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지입차주 중심의 경영으로는 안정적인 수송체계 확립이라는 중앙정부와 부산시의 교통정책이 뿌리내리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운수사업 직영화, 대형화(기업화) 추진의 발판으로 버스사업자단체의 내실화가 절실했다. 특히 급속한 인구증가로 마이크로버스의 대형화가 추진되는 상황이라서 이들 단체의 통합은 시간문제였다. 당시의 버스조합은 버스운송사업조합(대형 일반시내버스)과 버스여객운송사업조합(마이크로버스)으로 나뉘어 있었다. 업계 자율을 중시하는 정서와 조합 내부의 표결권 차이 등 걸림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여러 차례의 회의 끝에 1972년 2월 29일에 양 조합을 해산하고 3월 18일 창립총회를 열어 이사장, 부이사장을 선출하였다. 초대 이사장에 신갑득(일신여객), 부이사장에 하희정(광성여객), 문화윤(태화여객) 씨가 취임하였다.
1972년 부산버스조합 창립 조합원은 다음과 같다. 출처는 1974년판 교통연감이며, 주소는 당시의 것으로 표기한다.
광성여객/하희정
중구 보수동2가 75
국제여객/유영모
부산진구 양정동 245-9
금강여객 /김광호
중구 충무동 2-87
금성교통/김의륭
부산진구 초읍동 38
대성여객/김종규
중구 충무동3가 24
대창운수 /정영교
부산진구 양정동 95
동성여객/여홍식
중구 중앙동4가 76
부산여객/김장성
동래구 우동 600
삼신교통/이종묵
부산진구 양정동 245-9
삼화여객/이재문
중구 동광동 4-10
시민여객/이강용
동래구 우동 600
신진여객/여종원
동래구 장전동 318
신한여객/김광호
중구 충무동2가 87
영생운수/강우석
부산진구 범천1동 838-7
영신여객/김성제
중구 충무동3가 63
오성여객/전봉진
동구 좌천동 523
유성여객/김창회
중구 중앙동4가 48
일광여객/박남순
중구 중앙동4가 48
일신여객/신갑득
부산진구 부전동 224
금성여객/김두하
부산진구 초읍동 173-10
삼화운수/이우봉
서구 암남동 335
천일교통/신양화
동래구 중동 1394
학성여객/이석부
동래구 망미동 84-5
태화여객/문화윤
부산진구 주례동 51
2.5. 1973년 도시형버스 도입
부산시는 수송력 증강을 위해 입석, 좌석, 급행, 중형으로 나뉘어 있던 버스의 형태를 입석과 좌석으로 단순화하는 방안을 1972년 초에 수립하여 시행시기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익성이 나은 급행버스를 폐지하는 것에 업체들이 반발해서 시행에 부담을 느끼던 중에 나온 아이디어가 바로 반좌석버스, 그러니까 도시형버스였다.
좌석버스의 좌석을 줄이는 대신 간격을 넓히고, 지지봉과 손잡이를 설치해서 입석승객들이 지지할 수 있도록 했다. 1973년 초 시험 운행에 들어갔는데 시민들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구조상 입석버스와 다를 바 없는 주제에 요금은 성인 25원, 학생 15원으로 입석버스보다 5원이 더 비싼데다 허공에 떠 있는 입석 손잡이가 급정거시 치아를 상하게 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에 부산시는 추가 구조변경을 4월 11일까지 완료하도록 지시했다.
•좌석 등받침 상단에 직경 2.54cm의 철제 파이프로 도금하여 손잡이를 설치하고 등받침과의 간격은 10cm로 한다.
•좌석 1개 뒤의 간격은 직경 5cm 금속 혹은 플라스틱 파이프로 안전보호봉을 설치한다.
•좌석은 적합한 규격 및 쿠션림으로 하고 퇴색된 것은 전면 대체한다.
•1인석 좌석구간은 30cm 간격으로 손잡이를 설치한다.
•실내 상판은 고무 및 비닐로 전면 대체한다.
다양한 논의 끝에 1973년 5월 15일, 새롭게 바뀐 도시형버스가 처음으로 선을 보였다. 버스에 1인석 시트와 손잡이 설치는 국내 최초로 시도되어 관심을 모았다. 지금까지 운행되는 일반 시내버스의 형태가 이 때부터 정립되었다. 이후에도 크고 작은 개선작업이 이루어졌다.
부산시는 도시형버스 보급을 위해 1973년 10월 22일부터 31일까지 5년 이상 된 노후차량 144대를 대상으로 동래구 연산동에 있는 제1지구자동차검사장에서 일제 점검을 실시했다. 안전도가 미비한 30대는 불합격 처분과 동시에 대체 명령을 내렸다. 앞서 부산시는 3월 9일에 차령 5년 이상의 노후버스 점검대상 144대 중 합격 85대, 불합격 30대, 미검 29대로 나타났다. 이 중 불합격과 미검차량에 대해서는 11월 30일까지 대체하도록 지시했고, 합격 차량은 1년 더 연장했다.
1978년 4월 1일부터 새로 등록되는 차량은 러시아워의 원활한 승하차를 위해 앞문과 뒷문을 달도록 하였다. 뒷문이 있어도 안내양을 1명만 배치하기 위해 앞문을 자동문으로 설치하고, 승객은 뒷문으로 타고 앞문으로 내리게 했다. 덧붙여, 지금과 같이 앞문으로 타고 뒷문으로 내리게 하는 방식을 도입한 건 1984년 6월 10일부터였다.
2.6. 차고지 이전
1960년대 당시의 부산시내버스와 차고지는 충무동과 중앙동 등의 도심에 위치해 있었다. 부산시는 1969년 5월 31일까지 차고지를 교외인 동래와 가야 등지로 이전할 것과, 이전하지 않을 경우 행정 대집행을 통해 강제 철거하겠다고 통고했다. 그 전에 4월 말까지 주차장을 옮기도록 지시했지만 업자들이 무시하자 칼을 빼든 것. 충무동에 있던 시외버스정류장도 이 때 동구 범일동 구조방앞 북단 시유지로 이전했다(한참 뒤인 1985년에 2개로 나누어 동래구 온천동과 북구 괘법동으로 또다시 이전한다).
물론 대부분의 시내•시외버스 업체는 차고지 매입 비용과 승객 감소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반발했고, 경남도민들은 교외에서 하차해 시내버스로 이동해야 해서 이중 차비를 부담해야 한다고 차고지 이전을 반대하는 서명이 담긴 진정서를 부산시에 제출하기도 했다. 솔직히 지금도 구 도심권에서 터미널 가기가 무지 힘들다 이어 1974년 7월에는 시내버스 기업화 촉진을 위한 차고지 관리 강화의 방안으로 차량 일괄 입고를 지시했다.
요즘에야 버스가 차고지에 모두 입고하는 게 당연시 되지만 당시는 그렇지 못했다. 물론 면허조건에 차고지 확보가 있었지만, 업체의 여건 자체가 열악한데다 차고지를 확보할 능력이 없는 업체는 증차를 포기하는 실정이었다. 더군다나 차고지 인근이 미개발된 점, 차고지 이용에 관한 법규 준수를 확인할 만한 행정력의 부재, 지역 주민들조차 버스를 아무데나 임의로 주차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정부의 시내버스 직영화 정책이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는 이상 더는 차고지 문제에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차고지만 문제인 게 아니라 낙후된 안내양 숙소도 문제였다(대창운수의 경우 안내양 숙소에 화재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에 1974년 부산시가 차량 일괄 입고를 지시하자 업계가 반발했다. 업체의 90%가 지입제로 운영해서 규모가 영세해 고가의 차고지 확보는 엄두도 못 냈으며, 또한 대지를 구입한다고 해도 도심지는 상가 또는 주거용지로 되어 있어 차고지 건축허가를 받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차고지가 도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공업지역에 위치하고 있는데, 차량 관리자(기점 혹은 사무소)와 차고지와의 거리가 8~25km 가량 떨어져 있어 공차 회송의 문제로 정부의 에너지 절약 시책에 역행한다고 업자들이 주장했다. 또한 공차 회송 거리가 길어지면 1일 운행시간을 1시간 정도 단축 해야 해서 시민들이 불편해지는 것과, 주변 여건이 열악을 넘어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차고지에서 운전자들이 합숙할 경우 충분한 휴식이 되지 않아 사고위험이 높아진다고 주장했다. 업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부산시는 8월 1일 야간 단속을 실시하여 일괄 입고를 하지 않은 차량 200여 대를 적발하여 5일간 운행 정지 처분을 내렸다. 또한 2차 적발시에는 10일간 운행정지, 3차 적발시에는 감차 처분을 경고하자 업체들은 쫓기듯이 차고지 확보에 나서게 되었다.
2.7. 1975년 대규모 증차
1975년에 이르러 증차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수익성이 높은 노선은 증차 욕구를 부추겼지만 전체 시내버스의 수익성은 여전히 형편 없었으므로 조합에서는 증차를 최대한 억제하려고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업체가 증차를 원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은 2월 28일 증차 신청서를 부산시에 보냈다. 부산시는 그해 10월 20일 35개 노선 및 정책 이주지역에 129대를 증차시키기로 하고 11월 말까지 차량구입 및 인가를 받게 했다. 시는 증차의 근거로 시내버스 이용객이 1972년 122만4000명보다 72만8000명(24.4%) 더 늘어났지만 증차는 겨우 23대 밖에 하지 않아 시민의 불편이 가중되고 있다고 보았다. 부산시의 요청으로 한국기술연구소가 실시한 교통량 조사에서도 부산시의 시내버스가 588대 부족하다고 추정했다. 증차 배분은 다음과 같다. 겨우 2대만 증차 받은 업체는 불공평하다고 반발했다.
광성여객(9대) : 3번(5대), 66번(4대)
국제여객(12대) : 110번(2대), 만덕(10대)
금강여객(5대) : 18번(4대), 51번(1대)
금성교통(14대) : 28번(3대), 31번(5대), 119번(2대), 120번(1대), 121번(2대), 금곡(1대)
대성여객(5대) : 19번(4대), 51번(1대)
대창운수(4대) : 2번(4대)
동성여객(5대) : 67번(3대), 86번(2대)
부산여객(17대) : 39번(5대), 40번(4대), 24번(2대), 27번(6대)
삼신교통(4대) : 50번(4대)
삼화여객(2대) : 58번(2대)
삼화운수(2대) : 61번(2대)
신진여객(4대) : 19번(4대)
신한여객(7대) : 13번(3대), 88번(4대)
영생운수(2대) : 38번(2대)
영신여객(3대) : 17번(3대)
오성여객(4대) : 107번(4대)
유성여객(2대) : 60번(2대)
일광여객(2대) : 5번(2대)
일신여객(7대) : 51번(5대), 55번(1대), 155번(1대)
태화여객(17대) : 18번(2대), 59번(5대), 116번(3대), 117번(7대)
학성여객(2대) : 57번(2대)
1970년대 중반까지는 증차에 대해 기준과 원칙이 없었던 걸로 알려졌다. 교통부가 교통량을 근거로 증차 대수를 정해서 부산시에 하달 하면 부산시는 대수에 맞춰 증차 계획을 짜는데 그 과정이 매우 비합리적이었다. 회사별로 보유 대수와 증차 대수를 집계한 장부를 만들어 시장에게 결재를 올리는데, 이 때 증차대수를 빈칸으로 남겨둔다. 그러면 시장이 빈칸을 채워놓는 식이었다.
그러던 중 1977년 박영수 시장이 기존 증차 행정의 불합리성을 지적하며 통계적으로 객관화 하는 방안을 연구 하라고 지시했다. 담당 공무원들은 며칠을 고심하다 마침내 아이디어를 내놨는데, 당시 화두였던 추세에 따라 업체마다 보유하고 있던 차량 중 직영 차량의 대수 비율을 따져 그 순위대로 증차를 허가해주는 것이었다. 업체 자율로는 그 현황을 제대로 보고할 리가 없었기에, 세무서의 연간 업체 영업감찰 결과를 근거로 사용했다. 직영차량과 지입차량에 대해 세금을 달리 부과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증차에 대해 뒷말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2.8. 노선별 분리독립 정책
1960년부터 10여 년 동안 교통부가 수차례 시내버스 직영화 고시를 공포했고 1970년대부터 서서히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지만, 지입제를 근절하는 데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전근대적인 경영, 업체와 지입차주 간의 분쟁, 불법하도급 경영이 1970년대 후반까지 만연했다. 교통부는 분규업체를 정비하기 위해 1976년 6월 29일 「버스여객자동차운송사업직영요령」을 공포하면서 직영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이에 1977년 4월 21일 부산시는 기업화 시책에 따른 부담감을 줄이고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업체의 신청을 받아 일부 시내버스의 노선별 분리 독립 허가를 내줬다. 특히 신설법인에 대한 면제 시기가 다가오면서 업체들은 분리 독립을 서둘렀다. 대형업체보다는 소형업체일수록 업체의 양도•양수가 용이한 점과, 세법이 바뀌어 차량 보유대수가 많을수록 중과세 대상이 되어 이를 회피하기 위해서라도 많은 업체들이 분리독립에 나섰다. 하지만 노선별 분리독립이 마냥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분리독립이 결정된 업체의 소액주주들이 크게 반발했고, 새로 출범하는 업체에 대한 지분율을 두고 차주와 경영진 간의 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1977년에 1차로 노선별 분리독립을 신청한 업체는 신한여객 등 6개 업체로, 총 507대의 차량이 10개 업체로 분리독립했다.
•신한여객(대표이사 김광호) 68대
•금강여객(대표이사 김광호) 38대
•한진운수(대표이사 김병철) 32대
•삼화여객(대표이사 이재헌) 50대
•동성여객(대표이사 정필로) 42대
•아성여객(대표이사 이자용) 38대
•세진여객(대표이사 조복래) 31대
•금성교통(대표이사 김의륭) 95대
•금성여객(대표이사 김의륭) 65대
•대진여객(대표이사 김청륭) 48대
이후에 일신여객(대표이사 신갑득)이 51번과 21번의 분리 독립을 신청했고, 추가로 분리 독립하면서 업체 수는 기존의 24개에서 29개로 늘어났다. 이 때 분리 독립해서 설립된 업체로는 동남여객(신한여객에서 분리), 시민여객(부산여객에서 분리), 화신여객(일신여객에서 분리), 세진여객(동성여객과 삼화여객의 일부 노선이 분리)이 있고, 이듬해인 1978년에는 화진여객(오성여객에서 분리)이 설립된다. 마침내 1979년 4월 12일, 부산시는 「버스여객자동차운송사업의 직영화 보완조치」(일명 4•12조치)가 시행되면서 기존 의 30개 업체에서 신규면허를 포함하여 67개 업체로 늘어나기에 이른다.
이 조치는 부산시내버스 업계의 세력 개편을 초래했다. '노선은 곧 젖줄', '형제간에도 노선은 나누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고수익 노선은 곧 업체의 생명줄이나 다름이 없었기에 이런 노선을 얼마나 많이 가져가느냐에 따라 업체의 희비와 흥망이 엇갈렸다. 회사 내력이 깊고 좋은 노선을 많이 확보하여 흑자경영을 이어온 부산여객, 신한여객 등은 여러 업체를 분리 독립시켰지만 업계 선두로 자리매김했다.
이 과정에서 업체들은 크게 진통을 겪었다. 정부 시책이라 하더라도 주식회사를 경영해 본 경험은 전혀 없었던데다 지입회사 대표와 차주들의 지분율을 어떻게 배분 하냐를 놓고 갈등을 빚었기 때문이었다. 지입 업체의 사장은 말이 사장이지 하는 일은 세금 대납•차량 등록• 주차장 제공•행정업무 등이 고작이었고, 배차•정비•사고보상 등의 실무를 지입차주가 도맡아 했었기에 서로 유리한 쪽으로 끌고 가기 마련이었다. 이런 분쟁은 삼신교통의 사례가 본보기가 되어 업계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당시의 상황을 삼신교통 유용주 회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갓 30을 넘긴 총각 사장이 양정동 회사 사무실의 단상에 앉아 20~30명의 지입 차주들과 담판을 벌였다. 말이 담판이지, 비슷한 회의를 수도 없이 계속해 온 끝에 어렵게 회사의 지분율을 21% 수준으로 정하는 데 합의를 하였다. 지입차주들을 설득하는 데 애를 먹었다. 그들은 '회사가 지입료 받는 것 말고 하는 일이 뭐가 있느냐'며 공격하였는데, 나는 '회사가 주차장을 제공하고 세금을 대납하는 등 행정처리를 해 온 점'을 들어 회사 역할의 중요성을 조목조목 설명하여 이윽고 회사가 21% 지분율을 확보하는 데 차주들의 동의를 받아 냈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 상당수 지입회사에서는 회사의 지분율을 그에 못 미치는 수준으로 정하자는 차주들의 목소리가 높아 삼신의 협상 타결 소식에 놀라워하는 분뤼기였고, 실제 여러 지입회사 사장들이 전화를 걸어와 협상에 관해 문의를 하곤 하였다. 1980년 4월까지 분리독립된 업체는 다음과 같다. 괄호 안의 인명은 당시의 대표이사다.
•분리된 업체
광성여객(하희정) → 광성여객(하희정), 현대여객(김영택), 광진여객(김영수)
국제여객(유남주) → 국제여객(유남주), 일성여객(한천희), 국일여객(강민조)
금강여객(양태식) → 금강여객(양태식), 금강운수(김준곤)
금성교통(윤용원) → 금성교통(윤용원), 대경교통(강태후), 세륭교통(이상수), 흥성교통(김의륭)
대성여객(김종규) → 대성여객(김종규), 칠성여객(양종수), 남부여객(최홍규), 금정여객(양태식), 신성여객(이상준)
대진여객(김청륭) → 대진여객(조옥제), 아진여객(김두하)
대창운수(정영교) → 대창운수(정영교), 제일여객(채수석)
동남여객(성재영) → 동남여객(성재영), 창성여객(장홍식)
부산여객(김연수) → 부산여객(김연수), 해동여객(손광준), 부일여객(성봉섭)
삼신교통(유용주) → 삼신교통(유용주), 창신교통(백춘흠)
삼화여객(이재헌) → 삼화여객(이재헌), 금동여객(조광래)
삼화운수(이우봉) → 삼화운수(이우봉), 대도여객(도종이)
세익여객(김일환) → 세익여객(김일환), 한일여객(서준영), 진성여객(홍인섭), 대원여객(김인식)
세진여객(정필로) → 세진여객(이재헌), 세신여객(정필로)
시민여객(이강용) → 시민여객(이강용), 용화여객(김현두), 삼성여객(김장성)
신진여객(이원환) → 신진여객(이원환), 신진교통(심기하)
신한여객(성한경) → 신한여객(성한경), 태종여객(임종석)
아성여객(배세환) → 대명여객(김권식), 금화여객(김언현)
영생운수(강재만) → 동화여객(강재만), 신아여객(성병춘)
유성여객(김창회) → 유성여객(김창회), 감천여객(박문호)
일광여객(박근수) → 일광여객(차치환), 경동여객(박근수), 월성여객(민형식)
일신여객(신갑득) → 일신여객(신갑득), 동래여객(김부기)
태화여객(문화윤) → 태화여객(문화윤), 태화교통(이일영), 9태화운수(권영승)
화진여객(김정호) → 화진여객(김정호), 금진여객(김부정)
분리되지 않은 업체
동성여객(이기함→이재문)
영신여객(박인서)
오성여객(전봉진)
학성여객(이석신)
화신여객(김준종→최상복)
사명을 변경한 업체
신부산자동차(김연수) → 부산공항여객(전도율)
신규 면허발급 업체
동래산성교통(강청자)
2.9. 1980년대의 고난
1980년대는 업계 전반을 뒤흔든 직영화 정책이 본격적으로 자리잡은 시기였다. 하지만 지입제 관행을 떨치는 과정은 그야말로 내우외환이었다. 외부적으로는 노선권 확보를 둘러싸고 업체 간의 경쟁이 끊이지 않았고, 내부적으로는 차량 인수에 들어가는 비용 문제로 자금 압박에 시달려야 했고, 차주에게 인수 대금을 어음으로 주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 이 때문에 크고 작은 분쟁에 시달렸고, 어렵게 차량을 인수 해도 유가인상, 인건비인상, 승객 수 정체 등으로 직영으로 운영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부도를 맞기도 했다. 지하철 1호선이 개통하기도 전에 사라진 월성여객(1982), 금강운수(1983), 금동여객, 신진여객, 칠성여객(이상 1984)이 이런 케이스였다.
더욱이 1985년 부산 도시철도 1호선의 개통은 시내버스 업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지하철이 지나가는 구간의 승객 감소를 더이상 견뎌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업체가 부실화 되어 고통을 겪었고, 심지어는 이를 못 버티고 도태되는 업체도 나타났다. 대성여객(1987)과 제일여객(1988)이 이런 케이스였다. 한편으로는 업계 스스로 부실 업체를 정리하고 인수•합병하는 등으로 극복해 나갔다.
1970년 4월 신한여객에서 분리 설립된 대성여객은 1984년까지 부산에서 황금노선으로 불렸던 18번과 19번을 운행하고 있던 업체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타 노선의 간선도로 운행으로 인한 노선 침해로 과거의 영광이 퇴색된 채 운송수익금은 날로 떨어져 갔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1981년 금정산성 추락사고 때문에 경매로 내놓은 동래산성교통을 인수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다른 곳으로 노선변경을 하려 해도 해당 지역을 지나는 노선을 보유한 업체가 이를 수용할 리가 없었다. 더는 버틸 수 없어 회사를 매각하려 해도 부채가 자산을 초과하는지라 인수에 나서는 업체가 없었다.
이에 부산시와 조합은 직원 인건비를 해결하기 위해 대성여객의 자산을 대신 처분했고, 법인 소유 부채는 그대로 둔 채 차량만 나머지 업체들에게 1~2대씩 분산 매각했다. 또한 고용 보장을 위해 1대당 2명씩의 승무원을 승계하도록 인수조건을 걸었고, 차량은 인수업체의 노선에 투입시켰다. 이로써 대성여객의 법인체는 1987년에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인수 업체에 입사한 대성여객 출신 승무원들은 업체를 불신하고 분규를 일으켰다. 해동여객은 노조 간부 출신자를 받아서 1년 내내 소송에 휘말려 인건비 손실을 초래했고, 신한여객은 대성여객 출신 승무원이 사사건건 노사 분규를 일으키는 등 회사가 이를 해결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다.
2.10. 공동배차제 시범시행과 무산]
기사에 따르면 부산은 1990년에 대구광역시 시내버스가 공동배차제를 시행할 무렵 부산도 이에 발맞춰 시내버스 공동배차제를 시행하려고 했다. 우선 사하구 지역에만 임시적으로 시행하고 점차 범위를 넓혀나가 1991년 중순 즈음에는 부산 전체에 공동배차제가 시행될 예정이었다. 그리하여 시범적으로 시행한 사하구의 5개 업체가 기존에 운행하던 노선들을 모두 공동배차로 운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업체간 차량 배차 및 수입금 배분 문제로 하루가 멀다하고 회사간의 분쟁이나 다툼이 일어났고, 결국 보다 못한 부산시는 공동 배차제를 폐지하여 5개 회사도 기존 자사 노선을 가져가 기존처럼 고정배차로 운행하게 된다.
3. 각종 운행 요소들
3.1. 마이크로버스
50~60년대 초반의 시내버스는 대형버스와 마이크로버스(합승버스)로 이원화되어 있었고, 5~6개의 대형버스 업체, 10여 개의 마이크로버스 업체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마이크로버스는 지역별로 운행구간을 정해 하루 40~50회 운행했고, 노선 거리는 10km 남짓으로 지금의 마을버스보다 더 짧았다. 정원은 16명이었지만 실제로는 12명 밖에 태우지 못했다. 진짜 16인승이 나중에 등장했고, 더 나중에는 25인승도 등장했다.
마이크로버스의 차량 제작은, 차체는 드럼통을 곧게 펴서 철판을 만든 다음 이어붙인 것으로, 도색을 다시 해서 겉으로는 새 차처럼 보였다. 하지만 주요 부품은 거의 낡은 것을 썼기 때문에 운행도중 멈춰서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면 부품을 교체하고 다시 운행하고 또 멈춰서기를 반복하면서(…) 약 6개월 가량의 삽질 안정화 기간을 거쳐야 비로소 정상적으로 운행할 수 있었다.
마이크로버스를 운행하고자 하는 사람은 신진공업사에서 차량을 주문해서 구입한 다음 마이크로버스업체 사장을 찾아가 지입차주로 계약하였다. 다수의 지입차주는 직접 운전했으나 일부는 별도의 운전사를 두기도 했다.
시내버스 업체가 제법 큰 자본이 투입되어 법인체의 형태를 갖췄지만 마이크로버스 업체는 현재의 마을버스 업체와 비슷하게 영세성을 면치 못했다. 업체는 간판만 내건 수준이었고, 개인 차주 중심으로 업체가 운영되었을 뿐 아니라 상당수의 차주는 직접 차를 몰았다. 그러다 보니 대형버스를 보유하는 시내버스 업체는 알게 모르게 마이크로버스 업계를 하대하고 무시했다.
3.2. 지옥 같은 지입제
1960년대 지입차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100만원의 계약금과 월 1만5천원의 지입료를 업체에 내야 하는 조건이 붙었다. 이런 이유로 차주가 버젓이 있음에도 차량의 법적인 소유권은 지입업체 사장에게 있었다. 지입업체 사장은 법적인 지위를 마음껏 누렸다. 계약금과 지입료는 꼬박꼬박 받아내면서도 실제 차량운행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차량운행은 모두 지입차주의 책임이었으며 사고 발생시 모든 배상 책임을 지입 차주가 졌다.
더욱이 버스운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노선권을 사장이 쥐고 있었다. 이 때문에 지입료를 임의로 올려 받기도 했고, 업체에 비협조적인 차주들에게는 영업이 부진한 노선에 배당하기도 했다. 나아가 사장이 돈이 필요하면 차주와는 상의도 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회사 차량을 담보로 설정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러다 회사가 부도가 나면 담보로 설정된 지입 차량이 압류를 당하게 되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일만 하던 지입 차주들에게는 청천벽력이나 다름 없었다. 재산권을 주장해도 누구 하나 인정해주지 않았고, 법원에 소송을 제기해도 법적으로 업체(법인체)의 재산이라는 이유로 지입 차주의 권리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지입 차주는 알거지가 된 채 내쫒겼다. 이러다 보니 지입제 시내버스업체는 분란이 끊이지 않았다. 다수의 지입 차주가 모여 업체가 구성되었으나 업체 대표자는 따로 존재했기 때문에 의사 결정 과정이 지극히 비효율적이고 비민주적인 건 말할 것도 없었고, 운영 전반에서 차주와 업체, 차주와 차주 간에 얽힌 이해 관계 때문에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같은 업체 소속 차주라 하여도 일단 운행에 나서면 승객을 최대한 많이 태워야 벌이가 나아지기 때문에,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 하면 승객이 승차해도 가만히 있다가 뒷차가 정류장에 도착할 때쯤에 승객을 마저 태우고 도망치듯 정류장을 빠져나가는 일이 일상적으로 벌어졌다. 심지어 같은 구간을 운행하는 같은 회사 소속의 선행 차량을 추월해 정류장에 먼저 도착해서 승객을 태우는 일도 허다했다. 이 때문에 주요 정류장에 배차원을 배치하여 짱박기 대기 영업을 못하게 감시했으나 차주 간의 분쟁은 끊이지 않았다.
같은 시내버스 한 대를 소유한 차주라도 어떤 노선을 운행하느냐에 따라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었다. 소위 황금알이라고 부르는 노선을 운행하는 차주의 수익은 높은 반면 그렇지 못한 노선을 운행하는 차주의 수입은 자신의 인건비도 건지기 어려웠다. 그러니 노선을 둘러싼 갈등은 필연적이었다. 차주와 업체, 차주와 차주 간의 시비, 분쟁, 소송은 계속 거듭되었다.
이런 이유로 업체는 정상적인 경영을 할 수 없었다. 차주가 급여(일당) 외에도 전체 운송 수익금 중에서 지분 형식의 배당금을 추가로 가져가니 업체에 남는 것이 없었다. 또한 자금력이 취약하여 은행 등의 금융권을 이용할 수가 없었다. 워낙 영세하기도 했지만 운수업을 부실산업, 사양산업으로 취급하는 시대 분위기도 작용했다. 60년대에 자가용도 제대로 없는 시대인데 벌써 사양화라니 운수 업체는 차주들이 빌려주는 사채나 일수, 고리채 등을 많이 이용하였다. 사정이 이러니 부실이 더욱 가속화 되어 다수의 업체가 부도를 내고 도산하거나 일부 차량의 양도와 양수가 빈번하여 또다른 부실로 이어지곤 했다. 여기에 운수행정이 부실했고 그마저도 현장에까지 제대로 영향을 미치지 못해서 버스 운행에 임의성이 만연해 있었다. 이런 이유로 업체 간, 사업자 간 경쟁이 극심하였다. 이 때문에 정부와 부산시에서는 60년대부터 운수업의 기업화•직영화를 추진하기 위해 각종 정책을 내놓았지만 효과는 신통치 못했다.
1968년에 운수업 TO가 개방되어 업체들이 증차 혹은 신규 먼허를 신청했지만 승객 수요나 합리적 운영보다는 철저하게 수익에만 골몰하기 일쑤였다. 업체 명의로 면허를 유지하면서 지입료와 함께 행정관리 명목으로 돈을 받는가 하면, 세금 역시 차주에게 돈을 받아 업체에서 처리하다 보니 문제가 잦았다. 업체가 수익을 못 내 체납하는 경우지만 차주로부터 세금을 받고는 중간에 가로채는 업체를 가장한 천하의 개쌍놈들도 있었다. 체납하면 차량에 딱지가 붙어 운행을 할 수 없게 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해당 차량의 차주는 업체 사장을 고발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입차주와 업체 간의 갈등이 유난히 심했던 부산합동버스였는데, 1968년 6월 24일 세금 미납으로 차량 12대가 압류되자 빡친 지입 차주들이 업체의 횡령을 문제삼으며 부산시경에 진정을 냈다. 결국 부산합동버스는 당좌수표 부도를 맞았고, 차주 측은 대표이사를 비롯하여 집행부를 새로 선출해서 경영권 인계를 요구하였으나 사측은 기 발행한 수표를 모두 회수해야만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맞섰다. 하지만 그해 10월 17일 800만원에 이르는 각종 세금 체납으로 차량 83대 전부가 몽땅 압류 당해 결국 회사가 사라지는 운명을 맞았다. 이 때문에 하단, 다대포, 구포, 감천 등 서부산권 주민들은 큰 불편을 겪었다. 1976년에는 부산시가 직영화 추진을 위해 자진 신고 방식으로 업체별 직영, 지입 차량현황을 조사하였다. 신고가 마감된 7월 31일 당시의 결과는 직영 346대, 지입 1091대, 차주미신고 28대, 총 1465대로 집계되었다.
업체 | 계 | 직영 | 지입 | 미신고 |
광성여객 | 56 | 15 | 41 | - |
국제여객 | 60 | 12 | 48 | - |
금강여객 | 70 | 14 | 53 | 3 |
금성교통 | 103 | 12 | 89 | 2 |
금성여객 | 105 | 10 | 95 | - |
대성여객 | 90 | 5 | 85 | - |
대창운수 | 47 | 4 | 43 | - |
동성여객 | 94 | 13 | 81 | - |
부산여객 | 142 | 142 | 0 | - |
삼신교통 | 79 | 11 | 68 | - |
삼화여객 | 67 | 2 | 65 | - |
삼화운수 | 39 | 2 | 37 | - |
시민여객 | 24 | 24 | 0 | - |
신부산자동차 | 5 | 5 | 0 | - |
신진여객 | 35 | 4 | 31 | - |
신한여객 | 78 | 2 | 73 | 3 |
영생운수 | 34 | 2 | 32 | - |
영신여객 | 37 | 3 | 34 | - |
오성여객 | 40 | 29 | 11 | - |
유성여객 | 50 | 2 | 48 | - |
일광여객 | 49 | 2 | 47 | - |
일신여객 | 65 | 12 | 53 | - |
태화여객 | 75 | 17 | 38 | 20 |
학성여객 | 21 | 2 | 19 | - |
현재와 같이 직영제가 완전히 정착된 것은 1970년대 후반 들어서였다.
3.3. 디젤엔진 버스의 도입]
1960년대 버스의 운행수입은 신통치 못했다. 낡은 엔진(가솔린)을 고쳐쓰는 정도로 운행하다 보니 연료 소모가 극심하였다. 물론 수익이 높은 황금 노선은 그걸 메우고도 남았겠지만 대부분의 버스가 유류비 부담으로 높은 수익을 올리지 못했다. 1969년 일본 도요타로부터 디젤 엔진 차량이 들어오면서 버스운송사업에 변화가 일어났다. 디젤엔진에 쓰는 연료는 가솔린의 60%에 불과했기 때문에 유류비 부담이 획기적으로 줄었고, 위기에 빠진 버스운송사업자에게는 구세주와 같았다.
시장에 나온 디젤엔진은 100% 중고품이었다. 베트남 전쟁에 투입되었다가 파괴된 일본차의 엔진만 빼와 GMC(당시에는 '제무시'라고 불렀다)의 하체에 얹어 조립한 형태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까지 운행했던 가솔린엔진 버스에 비하면 성능이 월등히 뛰어났고, 유류비 절감 효과도 확실했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신진자동차가 있던 전포동으로 향하는 서면 일대는 여기에 소요되는 부품 따위를 파는 시장이 형성되었다.
3.4. 시내버스의 소화물 운송
모든 것이 허술하고 열악했던 1960년대에 시내버스는 여객뿐만 아니라 화물도 수송했다. 변두리 차고지에서 숙박을 하고 첫차 운행을 위해 차에 오르면 시내 중심지역으로 보내야 할 화물들이 기다리고 있는 때가 허다했다. 예컨대, 동래에서 생산된 미나리를 국제시장 등지로 내다팔기 위해 이른 시간 운행하는 버스에 부탁하는 식이었다. 이런 식으로 버는 부수입이 꽤나 짭짤하여 운전 기사의 월수입을 넘을 때가 많았다. 부지런한 운전기사는 차주 보다 낫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물론 불법이었지만 누구 하나 제지하거나 문제삼지 않았다. 당시 운전기사의 증언에 따르면, 시내버스를 이용하여 새벽시장으로 실어날랐던 주요 품목은 동래의 미나리 외에도 구포의 재첩국, 영도 동삼동의 갈치 등이 있었다.
3.5. 차장과 안내양
직할시 승격 이전에는 남자 차장이 승차근무를 했다. 매일 미어터지는 승객들을 밀어넣은 후 차를 출발시켰는데, 승객들로 넘쳐나다 보니 문을 닫지도 않은 채 매달려서 오라이를 부르짖기 일쑤였다. 그러면 운전기사는 출발 직후 도로 한가운데로 나와서 한번 크게 핸들을 꺾는다. 그러면 버스는 한쪽으로 기우뚱하게 되고, 관성의 법칙에 의해 내부의 승객들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출입문에 매달려 있던 승객들이 내부로 밀려 들어가면서 탑승에 성공하게 된다(…). 이를 갈지(之)자 운행 혹은 S자 운행이라고 하였다. 1959년 서울에 여자 차장이 처음으로 도입되면서 부산을 비롯한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한동안 남자 차장과 여자 차장이 공존했지만 직할시 승격 무렵에 남자 차장은 대부분 더 나은 수입을 찾아 산업 현장으로 떠나면서 사라졌다. 안내양이라는 말이 이 때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3.6. 좌석버스와 직행버스
1960년 부산시는 좌석 수를 지정하고 정원까지만 승차시키는 좌석버스와, 정차하는 정류장 수를 줄인 직행버스를 도입했다. 현재 운행중인 좌석버스(1978년 도입)와 급행버스(2007년 도입)가 이를 완벽하게 계승하는 건 아니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이와 비슷한 형태의 버스를 운행하고 있어서 부산에서의 좌석버스, 직행버스는 알고 보면 상당히 오랜 기원을 갖는다. 더욱이, 현재 2000번과 1011번, 1005번에서 시행하는 입석금지 정책을 시대를 앞서 실시했다.
이 때부터 부산시내버스는 기존의 완행버스인 일반 입석버스, 마이크로버스, 좌석버스, 직행버스의 4개 종류로 재편되었다. 나중에 해운대, 온천장 등 유명 관광지의 중간 정류장을 최소화하여 신속하게 운행하기 위해 특급버스가 도입되었다. 1968년 3월 6일에는 급행버스가 운행을 시작했다.
나아가 정부와 부산시는 교통량 증가에 따른 시내버스의 수송력 증강, 차량 종류 단순화 및 서비스 증진을 이유로 마이크로버스 퇴출 방침을 정하고 노선 개편, 차량 대폐차, 증차, 신규면허 발급 등의 방법을 통해 유도했다. 일반 입석버스와 마이크로버스의 흉악한 가축 수송에 질린 시민들은 좌석버스와 직행버스의 도입을 환영했지만, 적지 않게 문제점을 드러냈다. 출퇴근시간을 제외한 낮 시간에는 승객이 급격하게 줄었고, 정차 정류장도 적다 보니 요금을 올려 받아도 도저히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일부 좌석버스 기사가 꼼수를 부렸다.
정원을 초과하여 승객을 태우는가 하면, 일반 입석버스만 정차하는 정류장에 정차해서 승객을 받았다. 심지어 중간 정류장에 장시간 정차(짱박기)해서 일반 입석버스보다 운행시간이 늦는 엽기적인 일도 벌어졌다. 이 때문에 바쁜 용무로 멋 모르고 좌석을 타면 일반 입석버스에게 추월당하는 아찔한 경험을 했다. 이렇게 빅엿을 먹은 시민들은 점차 좌석버스를 외면했다.
부산시도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니었다. 이들의 행위는 운행질서 문란과 더불어 부산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1969년 8월 입석버스를 불법으로 좌석버스로 구조변경한 시내버스 17대(명신여객 8대, 천일교통 4대, 부산합동버스 3대, 일신여객 2대)에 대해 10일간 운행정지 처분을 내렸다. 원래 차량 구조변경은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10일간의 행정처분 기간 동안 입석으로 원상복구하지 않으면 더욱 강력한 행정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경고도 덧붙였다.
이어 부산시는 서민의 요금부담을 줄여준다는 명목으로 기존 185대의 입석버스에 추가로 175대의 입석버스를 증차시켰다. 이 175대는 좌석버스 중에서 정비불량 차량과 시설불충분 차량에서 전환하여 충당하였다. 당시 부산시내버스는 입석이 185대인 것에 비해 좌석은 무려 602대, 직행 105대, 특급 120대였다. 그 전 해인 1968년에 부산전차가 폐선되면서 추가로 입석버스 180대를 증차했지만 이게 몽땅 좌석버스로 둔갑해 버렸으니.
1969년 10월 부산시는 시내버스 구조변경을 단행했다. 전체 좌석버스 중 88대를 운행하던 금성교통, 삼화운수, 태화여객 등 14개 업체에게 좌석에서 입석으로 바꾸도록 지시했다. 사업면허의 20% 이상을 입석버스로 운행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이들 업체는 좌석버스를 상당히 많이 운행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나중에는 좌석버스의 증차를 억제하기 위해 입석버스 2대에 좌석버스 1대를 허가하게 된다. 그해 11월에는 특급버스가 폐지되고 직행으로 흡수되었다. 특급이란 명목으로 일반차량을 추월하거나 복잡한 도로를 고속으로 달려 사고위험이 높다는 것이 이유로, 10일간에 걸쳐 기존 특급버스 정류장에 단속원을 배치하였다.
1970년 4월 15일 급행버스가 직행버스에 흡수통합되었고(하지만 급행과 직행의 차이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미미했기 때문에 한동안 직행과 급행이 혼용되었다), 종전의 특급버스 요금이었던 1구간 20원, 2구간 30원으로 인상했다. 또한 교통난 완화를 위해 정류장 간격을 입석은 500m에서 1000m로, 직행은 1000m에서 2000m로 넓혔다.
1971년 부산시는 1968년부터 운행해 온 급행버스 207대를 교통부 방침에 따라 입석버스로 순차적으로 전환하였다. 업체들이 여러 이유를 들어 반발했지만 이미 시내버스의 입석화는 시대의 대세였다. 당시 급행버스의 운행계통은 온천장~구덕운동장 113대(22.8km), 해운대~구덕운동장 59대(24.4km), 구포~서대신동 35대(24.7km) 등이 있었다.
또한 같은 해 부산시는 노후차 대체 지원자금을 교통부에게 72대분을 신청했는데 49대분을 배당받았다. 원래 49대 전부를 좌석버스의 입석 대차분으로 활용하려 했으나 32대밖에 신청희망이 오지 않았다. 업체별로 살펴보면 동창여객 20대, 학성여객 8대, 부산여객 4대, 일신여객•한성여객 3대, 금강여객•삼화운수 2대, 국제여객•대창운수•삼화여객•삼신교통•시민여객•신한여객•일광여객 1대였다.
1972년 2월부터 좌석버스를 없애고 직행버스의 구간제를 없앴다. 하지만 1구간 25원, 2구간 30원 하던 게 일률적으로 30원을 받았으니 사실상 요금인상이나 다름없었다.
지금과 같은 형태의 좌석버스는 1978년 9월 5일에 운행을 시작했다. 당시의 명칭은 시내직행버스. 3개 노선이 개통되었으며 요금은 150원이었다. 차량은 69대 모두 새한 BF101이었으며 현대 HD170은 한대도 없었다. 또한, 좌석 수는 44개에 안내양을 배치하지 않아서 불친절 시비가 없었다고 평했다.
1978년 최초의 시내직행버스 노선은 다음과 같았다. 참고로 정차 정류장은 이게 전부였다.
•온천장선(301번) : 부산대~온천장~서면~시청앞~운동장(배차간격 5분, 25대)
•해운대선(302번) : 해운대~남천동~문현동~부산역~시청~충무동(배차간격 6분, 22대)
•구포선(303번) : 구포~서면~부산역~법원앞~에덴공원(배차간격 8분, 22대)
1979년 7월 13일에는 4개 노선이 추가로 개통되었다. 이 때부터 2차 도입 분으로 현대 HD170 및 소수의 HD160 차량[5]을 들여오기 시작한다. 이후 현대버스의 비중이 크게 높아진다.
•태종대선(305번) : 태종대~청학동~시청앞~부산역~서면~영남유지~대동병원~동상동~반송(30대)
•범어사선(306번) : 팔송~동래고속버스정류소~거제동~부전역~부산역~남포동~송도(23대)
•만덕선(307번) : 사상~북구청~만덕~온천장~거제동~부산여대~수영로터리~해운대(23대)
•장림선(308번) : 장림~감천~송도중학교~미공보원앞~부산역~부산상고앞~당감(20대)
시내직행버스가 처음 생겼을 당시부터 번호가 부여된 것은 아니었다. 그때는 차량에 행선지만 열거했었다. 시내직행버스에 번호가 부여된 것은 1980년 6월 1일이었다. 시내직행버스와 더불어 공항버스·산성버스도 같이 번호가 부여되었다.
또한 번호를 부여하면서 새로이 동상동~명륜동~거제리~하야리야부대~서면~부산역~시청앞~청학동~태종대 노선이 개통되어 304번의 번호를 부여받는다. 다만 304번은 유사한 노선이던 305번(태종대선)과의 경쟁에서 밀려 신설 4년만인 1984년에 폐선 되고 기존 노선 중에서도 적자가 심하던 303번과 308번이 1985년에 폐선 된다.
시내직행버스 도입이 마냥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여객운수사업 차량 구조령은 시외버스는 좌석, 시내버스는 도시형버스를 운행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부산시의 생각은 달랐다. 당시의 부산 시가지는 양정, 문현고개를 넘어가면 그야말로 동네마다 몇 집 정도만 있을 정도로 허허벌판이기 때문이었다. 말이 시내버스지 사실상 시외버스나 다를 바 없었다. 더군다나 구포, 해운대, 에덴공원 등 기종점 근방의 주민이 버스를 타면 거의 앉아서 가는 데 비해 이후 승객은 내릴 때까지 서서 가는 것도 문제로 지적되었다. 근데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정이 이렇자 부산시에서 생각한 것은 좀 더 많은 사람이 앉을 수 있고 고급형의 좌석을 적용한 시외버스와 같은 사양의 시내버스였다. 계획은 성립되었지만 상급부처의 허가를 받아야 하기에 교통부에 지역의 특수한 여건을 이유로 직행좌석버스 운행을 허가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번번히 불가하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결국 부산시는 상급부처인 교통부의 방침을 씹고(!!!) 직행좌석버스 운행허가를 내줬다.
당연히 교통부의 반응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는 바, 부산시는 중앙정부의 감사를 받게 되었는데 당연히 버스행정에 집중되었다. 직행좌석버스 허가가 중앙정부에게는 권한남용, 지시불이행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담당 공무원들은 감사관들에게 문책을 당할 처지에 놓였다. 그러자 공무원 중 한 명이 감사관들에게 이렇게 항변했다고 한다.
"지난번 총리실 지시공문에 따르면 공무원이 의욕을 갖고 추진하는 일은 다소 문제가 있어도 일이 되도록 하라고 하였는데, 이번 사안의 경우 사실 문제라고 해봐야 행정 규정에 맞지 않을 뿐 지역주민의 교통편의에 적극 부응하는 것이다. 총리실 지시를 참고한다면 문책사안이 아니라 오히려 표창을 수여해야 할 사안이 아니냐."
감사관들은 어이없어하며 웃어넘겼고, 이 용자 덕택에 시내직행버스는 이렇게 자리를 잡았다. 이것이 현재 대한민국에 운행하는 좌석버스라는 모든 개념의 시작이 되었다. 이 분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좌석버스는 없었을 지도 모른다.
3.7. 회수권과 토큰
부산에서 현금 이외에 승차권(회수권)을 도입한 것은 1960년대 초반 정부의 지시로 시행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회수권은 시행 당시에 여러 가지 문제로 골치를 썩히고 있었다.
당시에는 차장(안내양)이 직접 승객에게 요금을 거두는 식이다 보니 출퇴근시간에는 터질 것 같은 버스 안에서 마구잡이로 내미는 회수권을 일일이 확인하기란 불가능했다. 일부 승객은 이를 악용해서 회수권 대신 종이조각을 손에 쥐어주지 않나, 10개로 인쇄되어 있는 승차권을 11등분으로 잘라 차익을 떼먹는 짓도 비일비재했다. 이는 학생회수권 도입 이후에도 그대로 반복 된다 멀쩡한 회수권조차 회사로 가서 요금통을 개봉하면 상당수가 못쓰게 된 종이 조각이 되기 일쑤였다.
차장들도 회수권을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이유가 가관이었다. 삥땅이 힘들어서(…). 회수권은 부산시와 조합이 직접 회사를 방문하여 일일이 수량을 확인한 다음 현금으로 바꿔주었으니 빼돌린다 한들 현금화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승객들이라고 회수권이 마냥 편했던 것도 아니었다. 버스 정류장 인근의 구멍가게나 담배가게, 신문 가판대에서 회수권을 팔았는데 정해진 판매시간을 지키지 않고 심심하면 문을 닫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부산시는 1967년 2월 회수권 매표제 실시 보완계획을 공포해서 매표자 시간엄수, 회수실적에 따른 차장자격 박탈과 업체에 대한 행정조치 등을 강력하게 단속했으나 이것으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다 부산시는 1976년 9월 1일부터 학생회수권제를 도입한다고 발표했으나 업계에서는 60년대의 실패 사례 때문에 반발했다. 하지만 이듬해 토큰의 유통이 실시가 학생회수권 발매의 빌미가 되었다.
정부는 1977년 10월 16일 승하차 시간 단축, 요금 시비 방지, 현금취급 부조리를 방지하기 위해 토큰제를 실시한다고 발표했으며, 그해 12월 1일 서울에서 실시되었다. 이후 1978년 3월 1일에는 부산뿐만 아니라 대구, 인천, 광주, 대전, 마산, 진해에서도 토큰을 쓰기 시작했다. 진해가 여기 끼어 있는 이유는 토큰 시행지역을 시내버스 인가대수 100대 이상의 도시로 규정했기 때문에.
부산시의 토큰 초도물량은 일반용 3750만개, 학생용 1150만개, 할인용(국민학생) 100만 개였고, 일반용 가격은 30원이었다. 오전 7시 이전과 오후 10시 이후에는 현금승차도 허용했지만 10원의 할증요금을 받았다. 이 때문에 토큰 이용률이 80%에 달했다. 토큰 판매상에게 지불하는 수수료는 일반용 2%, 학생용 1%였다.
문제는 요금이 오를 때였다. 요금인상 공고가 뜨면 판매상이나 시민들은 토큰을 미리 사재기했다가 인상 후에 사용했고, 판매상은 인상 후의 가격으로 이를 판매하여 차익을 남겼다. 요금인상분 중 손실액이 무려 1억원에 달했다. 또한 토큰 판매실적에 따라 토큰을 판매했기 때문에 사재기의 여파로 토큰 구하기 힘들어져 유통에 혼란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조합은 토큰을 회수하는 대신 학생회수권을 발매했고, 학생용 토큰(은색) 2999만개를 미리 제작하여 총 3150만개를 확보해 두었다가 요금이 인상될 때 일반에게 판매했고, 일반용 토큰(황색)을 회수했다가 다음번 요금인상 때 판매하고 학생용 토큰을 회수했다. 이 조치로 일반인의 토큰 사재기는 사라졌고 판매상의 사재기도 그 수량이 미미하게 되었다.
한편 할인용 토큰은 이용률이 극히 적어 유통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