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팔순. 한창 때는 일고여덟 시간, 지금도 하루에 서너 시간은 붓을 잡는다는 김창열 화백. 그의 이름 앞에는 늘 하나의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물방울' 화가. 올이 굵고 성긴 마포(麻布) 위에 영롱한 물방울을 담아온 지 30여 년. 백남준, 이우환과 더불어 세계적인 지명도를 얻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현대 미술작가 중 한 사람. 그의 '물방울'은 이미 보편적 브랜드가 됐을 정도. 서양의 사실주의 기법으로 전통적 정서를 표현하면서, 풍경화와 정물화 느낌을 주는 동시에 초현실적인 인상마저 심어준다는 평을 얻고 있다.
1966년부터 68년까지 미국 뉴욕에서 공부하고, 69년 이래 프랑스 파리와 남프랑스에 근거를 두고 활동하고 있는 김창열 화백을 이번 주 '데스크와 차 한잔'에 어렵사리 모셨다. 그와의 만남은 세 차례에 걸쳐 서울과 부산에서 이뤄졌으며, 각 상황에 맞게 대화를 재구성했다.
내 그림 다시 보면 늘 부족…
고착화 두렵지 않고 생애 끝날 때까지 그릴 것
#'화랑미술제- 부산'과 김창열
지난 18일 오후 '제27회 화랑미술제-부산' 개막식에 맞춰 김창열 선생이 프랑스인 부인 김 마르틴 여사와 함께 부산을 찾았다. 화랑미술제 개막식 참가는 이번이 처음. 부산서 개최된다는 사실에 끌렸다고 했다. 그의 눈에 비친 부산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예전의, 후줄근한 고장 부산에서 '번쩍번쩍'하는 도시가 되었어요. 대형 미술제를 개최할 만큼요. 도시 품격이 높아지려면 각종 문화행사를 많이 개최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산국제영화제 공도 크지요."
40년째 살고 있는 파리라는 도시의 매력에 대해서도 그는 말을 이어갔다. "역사의 깊이랄까, 숨결이 구석구석에서 느껴져요. 미국 사람이건 독일 사람이건 파리에 와서 전람회를 여는데, 그게 바로 파리라는 도시의 품격을 말하는 것이죠."
개막식 테이프 커팅 이후, 김창열 선생을 부축해 전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한 부스에서 만난 선생의 작품 4점. 그런데 선생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한참 동안 굳게 닫혔던 그의 입이 열렸다.
"혹시, 피에르 보나르(1867~1947)라는 화가에 대해서 들어본 적 있나요? 한 번은 그가 자기 그림을 전시 중인 미술관에 가면서 몰래 붓을 숨겨들고 갔대요. 다시 그리고 싶었던 거지요. 나름대로 그림을 완성했다고 하지만 다시 보면 늘 부족함이 느껴져요. 겸손이 아니라…."
그의 말끝이 흐려졌다. 이미 대가의 반열에 올라섰지만 창피한 순간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래선 안되는데 전람회가 급하다거나 화랑에서 그림을 더 필요로 할 경우에는 좀더 빨리 그리지요. 역시 천천히 그리는 그림이 뜸이 들죠(완성도가 높아진다는 의미). 한 번은 옥션에 나온 그림인데 저한테 진짜냐, 가짜냐를 묻는 거에요. 얼굴이 화끈거리더군요. 급한 나머지 그리다만 그림이 나왔던 겁니다."
물론 스스로 생각해도 대단한 그림도 있었다. 늘 똑같아 보이지만 다르다. "반복이라는 게 똑같은 반복은 안되거든요. 반복을 되풀이 하는 동안 조금씩 변해가요. 어떤 때는 '이게 내 그림이었나' 싶을 때도 있었죠. 50대 중반쯤이었나. 아마 90년대 작품일 겁니다."
# '물방울' 화가의 서울 아틀리에
김창열 선생이 서울에 온 건 지난해 12월. 셋째 손자 탄생을 앞두고 '마중'을 나왔다고 했다. 김창열 선생은 현재 큰 아들과 함께 사는 서울 평창동 아틀리에에 머물고 있는데 내달 중에는 파리로 돌아갈 예정이다. 지난 16일 오후 서울 아틀리에를 찾았다.
"보통 한국에 3~4개월, 나머지는 프랑스에 있어요. 서울서 전람회가 있으면 서울에 있고, 파리에서 열면 파리에서 작업을 합니다. 근데 그 작업시간이라는 게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건강 때문이지만…."
그는 수년째 심장부정맥을 앓고 있었다. 그 때문에 약을 상시복용하고 있는데 파리 몽파르나스에 일찌감치 묘자리를 봐놓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유언장을 쓴 지 벌써 10년이 넘었어요. 내가 죽으면 이 그림은 어떤 미술관, 저 그림은 또 다른 미술관에 각각 기증하라고 했어요. 파리에서 죽으면 몽파르나스에, 서울서 죽으면 어머니를 모신 양평에 묻힐려고요. 자녀들이 번거로울까봐서요."
수천 번도 더 들었겠지만 물방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왜 물방울에 집착하는 걸까.
"물방울은 회화적으로는 점입니다. 처음에는 앵포르멜(informel·2차대전 후 일어난 서정적 추상의 한 경향)운동에 심취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스무 살 때 6.25전쟁을 맞았어요. 그때 중학동창이 120명이었는데 전쟁이 끝나니까 60명밖에 안 남았어요. 이렇게 죽건, 저렇게 죽건 가장 처참한 청춘이었다고 할 수 있죠. 이게 초기작 '상흔(傷痕)' 시리즈입니다."
그의 충격적인 증언은 계속됐다. "6월 28일인가, 29일 미아리고개를 넘어오다 보니까 바람빠진 럭비공 같은 머리가 있질 않나, 서울역 앞 전봇대에 여자 나체가 거꾸로 매달려 있질 않나, 끔찍했죠. 지금도 가끔 꿈에 보여요. 그 상흔이 물방울이 되었고요."
결정적인 물방울의 탄생은 19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날 그림을 수정하려고 물감을 뜯어내다가 캔버스 뒷면에 맺힌 물방울을 발견한 것. 서양화가들과의 차이를 찾고 있던 그에게 그것은 잃어버렸던 유년의 순수함, 향수 또는 불교의 공(空)이나 도교의 무(無)와 같은 의미로 다가왔다고. 첫 물방울 작품은 '20개의 물방울'. 이후 방법론적 측면에서, 소재적 측면에서, 철학적 측면에서, 진화를 거듭하게 된다. 선생에게 있어 물방울은 어떤 의미일까. "물방울은 물방울이지요. 없음에 가장 가까운 존재, 쉽게 말하면 가장 충만한 무의 세계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방울 화가'로 고착되는 게 두렵지는 않았을까. "미술사상에 같은 일을 하다가 다른 일을 하자마자 화단에서 이름이 사라지는 것을 여러 번 봤어요. 꾀꼬리는 꾀꼬리로서, 까치는 까치 식으로 울어야죠. 지금 제 나이 팔십에 새로운 일을, 다른 일을 한다면 저 영감 노망했다고 할 거에요."
혹시, 파리 생활을 청산할 계획은 없느냐고 '당돌하게' 질문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고향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은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고향은 본능적인가봐요. 뉴욕의 굉음 속에서 차를 몰고 갈 때나 파리에서 조용한 뒷골목을 지날 때, 유년시절의 맹산 풍경이 환하게 떠오르거든요. 고향은 인위적으로 바꿀 수가 없는 것 같아요. 늙으니까 나이들수록 더 유년시절 생각이 자꾸 나요."
선생의 유년시절 이야기는 물방울로 이어졌다. "손자 사랑이 조금은 병적일 수도 있지만 물방울을 그리다가 이르는 지점이 거기가 아닌가 싶어요. 물방울 세계는 어린이 세계와 맞먹는 데가 있을 것 같거든요."
# 그림 이외에 그의 유일한 낙, 와인
선생과 마지막으로 자리를 같이한 곳은 18일 저녁 부산 해운대의 모 호텔 일식당. '소식(小食)이면 좋겠다'는 선생의 뜻에 따라 몇 점의 초밥과 함께 와인을 마시기로 했다. 와인이야말로 그림을 제외하고 선생이 갖고 있는 유일한 낙. 지금도 1주일에 세 번씩, 30~40년을 계속해 온 수영은 건강관리 차원이지만 와인은 또 다르다. 그래서 어떤 와인을 주문할 지 상당히 기대했다. 이날 선생은 생선초밥에 어울릴 만한 것으로, 프랑스 브로고뉴 화이트와인 '퓔리니-몽라쉐'(Puligny Moutrachet, 2007)를 골랐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와인과 문학(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 영화('사이드웨이') 이야기로 넘어갔다.
"영화 '타이타닉' 보셨죠? 배가 침몰할 때 포도주 상자가 굴러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게 바로 빈티지(생산연도)에 따라 수천 만원을 호가한다는 '로마네 꽁띠'(romanee conti)랍니다. 똑같은 장면을 보더라도 아는 사람만이 그 진가를 안다는 거죠."
조금 엇나가는 이야기 같지만 선생의 진가는 '인기작가'라는 대중성과 비평계 양면에서 모두 확인할 수 있다. 그것도 당대에. 선생과 헤어지면서 다시 한 번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 "물방울은 언제까지 그리실 거에요?" "반신불수가 되기 전까지는 계속 그려야죠. 허허허." 건강하시길 빌며 맞잡은 손을 한참이나 놓지 못했다.
key66@busan.com
부산일보 : 사진=박희만 기자 phman@
·김창열은 누구
-1929년 평남 맹산 출생·1942년 평양 광성중 입학·1946년 월남.
-1947년 경성미술연구소, 이쾌대 미술연구소에서 그림 공부.
-1949년 서울대 미대 입학·1951년 경찰전문대학 입교.
-1955년 고교 교사자격 검정시험 합격, 서울예고 등에서 미술교사.
-1966~68년 록펠러재단 장학금으로 뉴욕 아트 슈트던트리그 유학.
-1970년 파리 국립미술학교 입학.
-1972년 프랑스 '살롱 드 메 50점 전' 첫 물방울 작품 전시.
-1973년 파리 놀 인터내셔널 첫 개인전서 물방울 작품 30점 발표. 상파울루 비엔 날레에서 명예상 수상, 국제적인 화가로 발돋음.
첫댓글 팔순의 연세로~작품을 보세요~저는 개인적으로 적수가 정말 좋아요~~
물방울이 예술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