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내 생의 첫날처럼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산다는 것은 참 많은 마음의 깊고 얕은 산맥을 오르내리게 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시를 잘 써야겠다는 일념으로 올 겨울은 冬安居 하며 보냈지만 생각만큼 쉽지가 않습니다. 욕심이 생길수록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마음의 고통은 더 심해져 틱낫한의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을 보며, 꽃밭이 되기도 하며 쓰레기통이 되기도 하는 마음을 달래며 나를 돌아보고 있습니다.
마음도 원래는 자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비우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어쩌면 내 마음의 안과 밖에 끊임없이 차오르는 욕망을 다스리기 위해 시를 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 성복* 선생님의 사진 산문집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선 하나에 이토록 많은 의미와 세계를 품고 있는 시인의 세계는 감탄과 경이와 生의 아득함까지 자아냅니다.
이 성복 선생님은 현재 생존하는 작가로 삶과 자연을 한데 어우를 줄 아는 최고의 시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과장님께 제가 선물 받은 이 책을 다시 선물하고 싶습니다.
좋은 마음의 선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고, 그리고, 좋은 글 많이 쓰세요.
박 미란**
책을 연다. “오름 오르다”라는 책을. 그리고 본다. 검은색과 회색과 회백색의 사진들을. 그리고 따라간다. 둥근 선의 끝 간 데를.... 책장을 넘기는 손,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들. 임산부, 어둠, 아늑함, 젖 냄새, 어머니, 그리고 어둠을 뚫고 나타나는 해.
수술실에 있는 나. 침대에 눕혀져 실려 오는 임산부. 솟아 오른 배, 한 번씩 연(緣)의 절단에 대한 두려움으로 내짖는 아우성, 마취가 시작되고 오름의 밑바닥에 그어지는 칼, 열리는 문, 장갑 낀 산부인과 의사의 손가락. 피. 찢어지는 자궁의 벽, 쏟아지는 양수, 양수 찌꺼기를 뒤집어쓰고 있는 생명체, 쪼글쪼글한 피부, 울음, 잘리는 연(緣), 아기 침대에 실려 가는 태아, 분홍색 옷을 입은 간호사, 그리고 풀어지는 긴장감....
오름의 선 안에 있는 어둠과 여명, 밝아 오는 빛에 소멸되는 별 빛, 양수 속에 파묻힌 아늑함을 상실하는 듯한 아쉬움, 허나 열리는 자궁 문으로 비처 오는 희미한 밝음, 희망, 고뇌, 절망, 그리고 시작점에 대한 그리움, 사라지지 않는 근원에 대한 희귀 본성, 비릿한 젖 냄새, 엄마, 어머니, 당신...... 어디가 오름 선의 시작점이고 어디가 오름 선의 종점인가?
나는, 내가 양수 속에 파묻혀 있었을 적 내 어머니의 솟아 오른 배를 보고 싶다. 내 발이 자궁벽을 찰 때마다 불뚝거리던 그 오름의 배를 만져 보고 싶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내장 속을 다 들어 낸 저 산굼불이 화산구 같이, 텅 빈 당신의 뱃속이라고 보고 싶다. 되새김한 먹이를 먹이기 위하여 위(渭)를 들어내고, 포동포동한 살을 찌우기 위하여 간(肝)을 들어내고, 그리고 두터운 뱃가죽을 만들기 위하여 창자를 들어낸 당신의 텅 빈 검은 뱃속을, 점점이 희미하게 밖인 횐 점들의 도움을 얻어 보고 싶다.
올인 촬영장 수녀원을 지나 높이 솟은 등대 옆으로 난 길을 따른다. 문득 오름으로 연결되다가 풍덩 바다물 속으로 잠긴다. 그 끝, 흑백으로 처리된 바다를 건너 다시 오름, 어찌 보면 그것은 경주에 널려있는 왕릉을 연상시킨다. 태여 나면서 탯줄의 연(緣)을 하나 끊고, 다시 결혼하여 연을 하나 더 끊더니, 이제 둥근 능속으로 들어가며 다시 연을 끊는다. 오름과 동금과 어둠은 시작과 끝과 마침이 없으며, 아늑함과 젓 비린내와 그리고 안식을 안긴다.
그래, 시간이 연결되면 원(圓)이 되는 모양이다. 탄생과 죽음이 모두 원 속에 있는 모양이다. 결국은 원 속의 어둠에 눕는 것이 삶일 수도 있는데, 그렇게 돌고 돌아 찾아오는 것이 오름의 원 속 어둠일진데, 결국은 양수로 채워진 어머니 자궁 속 같은 그 아늑한 무덤 속 어둠일진데......
까만 오름의 둥근 선 안에 여명을 헤치고 솟아오르는 해를 집어넣는다. 그리고 희끗희끗 별처럼 그려 논 흰 점들에 꼬리를 붙인다. 난자(卵子)와 정자(精子), 다시 오름의 둥근 선은 시작될 것이다. 어디가 시작점이고 어디가 끝점인지도 모르게 그렇게 계속될 것이다.
*: 이성복: 시인. 계명대학교 교수
**: 박미란: 시인. 199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목재소에서”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