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기억을 더듬어 보며...
나는 3남매의 막내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용인 태생
우리 엄마는 수원 여자.
그렇게 둘이서 만들어낸 작품이 우리 삼남매 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용인의 부자집 외아들로 태어나 그 어려운 시절에도 일본 중앙대학 토목과 까지 나와
지금도 일본에 존재하고 있다는 큰 일본 토목회사에 다니는 수재였고
회사에서 만주로 발령 받아 만주에 큰 토목공사는 모두 맡아 하셨다는 분인데...
해방이 되고 고향이 그리워 한국으로 돌아와서
1950년 저 두살때 6,25가 터져 아버지는 이북으로 납치 당해 가셔서 아직 생사도 모르고...
엄마는 그 당시 수원서 서울 여상을 기차로 통학한 인텔리 여성.
엄마는 남편 떠나 보내고 자식들과 살자고 약사 면허증을 따서 수원과 서울서 약방을 경영하며
우리 삼남매를 모두 최고 학부까지 졸업을 시켰는데....
큰오라버니...
한마디로 말해 "애비없는 후래자식" 본보기 였습니다.
구두 끈 딱 매고 엄마에게 손벌려 용돈 안주면 집 유리창 날라가는....
예능에는 재주가 있었던지 서라벌 예대 연극영화과를 나와 신상옥 필림 전속 배우도 했었고
TV 처음 생겼을때 TBC 탈렌트로도 합격해 얼마 다니다 집어 치우고...
군대 안가려고 돈으로 계속 무마하다 나이드니 영장도 안나오고...
친구들 꾀임에 빠져 사업 한답시고 엄마가 일구어 놓은 재산 몽땅 다 날리고..
큰 오라버니는 사귀던 여자가 배가 남산 만해지자 집으로 데리고 와서 조카 둘 낳고 살았지만
바람끼는 사라질줄 몰라
처 자식 외면하고 선산 잡혀 가며 다른 여자들과 살림을 차린 숫자를 헤아릴수도 없고....
결국
큰 오라버니와 살던 올케는 이혼하고 미국으로 떠나 버리고..
두 조카는 친정 엄마를 모시고 사는 저의 차지 였습니다.
그래도 정신 못차리고 조상 에게서 물려 받은 땅 잡혀가며 다른 살림 차리기를 5번
오빠가 아니라 왠수 였습니다.
나
그동안 시댁 눈치 보며 두 조카 성장시켜 큰 오빠와 이혼한 미국에 사는 올케에게 보내고 한동안 마음 편하게 살았는데...
4년전 노숙자가 되어 우리집 으로 돌아온 오빠는 다시 내 차지 였습니다.
엄마는....
두 오빠들이 있었지만 서로 모시지못할 형편들만 이야기 하고....
제가 20년을 모시고 살던중 13년전 췌장암으로 세상을 쓸쓸이 떠나시고....
작은 오래비
큰 오래비가 워낙 어릴적부터 말썽쟁이라 과부인 엄마는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작은 오빠 에게 목숨걸고 사셨고....
그 당시만 해도 돈 많은 장관집이나 국회의원 아이들만 한다는 대학 총학생회장 까지 시켰지만 ...
결혼 하기 전 까지 그리도 효자였던 작은 오빠가 엄마도 모르는 척 살아온 세월들이 너무 서러워
작은 오빠를 원망하는 고해성사를 신부님께 해 보지만..
신부님은 나에게 내리시는 벌
성서 쓰기
성당 청소하기
그런 세월 속에서 ........
저의 큰 오래비는
만성 신부전증.
패혈증.
방광암 으로
의사도 손을 쓸수 없다는 결론으로 중환자 실에서 죽음을 하루 하루 기다리고 ....
조카들이 미국에 있지만 아직 자기 엄마 휘하에 있기에 자유롭지도 못하고...
자식들에게 아버지 노릇도 못한 오빠였기에....
간병인만이 병실을 지키고 있었고...
석달간 병실에 누워있는 오빠를 만나러 가서 하루는
"내가 누구냐고 " 오빠 몸을 흔들어 대며 소리 치니
입은 하늘만큼 벌어지고 뜨지도 못하는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는것을 보고
지금 죽으면 안된다고...
소리치며 대성 통곡을 했습니다.
이제 말도 못하고
의사도 손을 놓은 상태에서...
멀리 보낼 각오는 하지만
인간이 태어나 제대로 사람 노릇 한번 해보지 못하고 남 못할짓만 시키고 가는 오빠가
불쌍 하기만 했습니다.
오빠가 흘리는 눈물의 의미는 무얼까?
여동생 하나 있는것
그리도 힘들게 하고 살더니...
자식들도 없는 장례를 치르자니 긴 한숨만 나옵니다.
형제는 일촌 인데..
형이 마지막 가는 길에 한번도 얼굴 내밀지 않는 작은 오래비에 대한 증오만 쌓이고...
마음을 다잡아 보았습니다.
나에게 부여된 운명
다시는 올수 없는 먼길 떠나는 오빠를
웃으며 보내는 마음의 여유를 부려 볼 용기를 달라고 기도도 해 봅니다.
결국 오라버니는 운명 했고 남의 큰일에 한번도 가본일이 없는 큰오래비를
어떻게 보내야하나를 고민하다 상조회사에 맡겨 장례식장도 차리지 못하고
그냥 먼 곳으로 보내고 .....
돌아오는 길에 하늘을 쳐다보며 혼잣말을 했습니다.
"엄마. 큰오빠가 엄마 곁으로 불쌍하게 갔으니 잘 다독거려 주세요"
2011년 3월 17일
<지난 메모장에 쓴 글을 올려 보았습니다.>
첫댓글 생전 안보이시던 엄마가 어젯밤 꿈에 보이기에...
이 글을 올려 보았습니다.
아카시아님
운명
한편의 극을 보는 듯 하고 한편의 소설의 소재도 되고 남을 내용 입니다.
운명이라고 접어 버리기에는 안타 까움이 남을것 같습니다.
좋은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나 온실에서 곱게 성장하신 줄로만 알았습니다.
몇자 올려 위로를 해 드리겠습니다.
"가장 훌륭한 어머니는, 자식 앞에 눈물을 보이지 않는 어머니"
"가장 훌륭한 아버지는, 남 몰래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
"나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타인을 용서하고,
나를 다독거리는 마음으로 타인을 다독거려라.
보내는 사람 야박하게 하지말고
떠나는 사람 뒤 끝을 흐리지 말라.
어련 하시겠습니까 마는 맏 오라버님 편하게 보내드리세요
(계속)
내 자식의 부모가 되어보니 알겠습니다.
참으로 어리석게도 이제야 알아차린
당신의 가슴과 그 눈물을 가슴에 담고
당신의 사랑이 무척 그리운 이 시간에
지금은 하늘 나라에서 지켜 보시는
고마운 두 분께 외쳐봅니다.
사랑합니다.....내 어머니, 아버지 -淨峰-
맑은 봉우리님
지금도 가끔 하늘을 쳐다보며 엄마에게 혼자 중얼 거리는 습성이 있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살아온 저라 외로움도 , 서러움도 많이 타는 습성에 젖어 있습니다.
똑똑한 둘째아들만 잘 키워 놓으면 당신과(엄마) 막내 딸(저)은 편안하게 잘 살줄알던 우리 엄마가 지금도 한없이 불쌍한 생각이 들기에 어버이 날은 가끔 눈물이 나곤 합니다.
위로의 글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