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프에서 퍼왔습니다. ---------------------------------------------------------- 굳게서서(Guest) 조회 : 1,433 점수 : 1,113 날짜 : 2004년 03월 25일 (04시 19분)
나는 전라도에서 났다. 광주민주화 항쟁 때,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80년 광주의 5월의 장면은 헬기에서 정말 아름답게 반짝이며 떨어지던 삐라에 대한 것이 전부다.
그해 10월 난 급성신장염에 걸렸고, 구급차에 병원으로 실려가 보름간 입원해 있다 퇴원한후, 단기 기억상실증이 나타났다. 기억하지 못하는 기간은 바로 80년, 한 해다. 그래서 80년은 삐라의 기억만이 남아있다.
밤마다 창문과 문을 두꺼운 담요로 막고서 잠이 들고 (한밤중 날아다니는 유탄때문에), 집앞으로 지나다녔다는 장갑차나 지프차의 이야기들은 모두 전해들은 것이다.
비록 어렸을 때지만 참혹했던 그 시간을 영원히 잊어버리게 된 것, 어쩌면 축복이겠지만, 그렇지 못한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미안하다.
중학교를 들어가면서, 전두환이 지나갈 때마다, 수업을 중단하고, 근처 모든 중고등학교의 모든 전교생들이 길가에 늘어서서, 손을 흔들고 박수를 쳤던 기억, 그리고 그날 점심에 그 대통령이 줬다던 빵, 아무 생각없이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시절 내내, 광주라는 땅을 떠나, 타지방에 가본 적이 전혀 없었던 난, 중2때, 수학여행을 가게 된다.
어느 지역을 갔을 때다. 놀러온 학생들에게 물건을 파시던 노점상 아저씨가 내게 물었다. 어디에서 왔냐고? 밝게 대답했던 것 같다. "광주에서 왔어요." 그 아저씨가 그 다음에 뭐라고 말씀하셨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분명한 느낌은, 적대감이었다.
전혀 모르는 어른으로부터, 어디에서 왔다는 한 마디 말에 급작스런 적대감을 경험한 열 다섯살 어린 아이는 그 이후 평생, 밝고 명랑하게 어디에서 왔다는 말을 하지를 못하게 된다. 2004년 지금까지도.
광주에서 대학을 다 마치고, 서울오기전부터 난 사투리를 완벽하게 없앴다. 단어는 물론 억양까지도 전혀 남아있지 않도록.
부르디외는 사투리를 억압하고 표준어를 강요하는 것 또한 파시즘의 하나라고 했다지만,
나 같은 전라도 사람들에겐 생존적 본능이 사투리를 박멸해야할 이유였다.
서울 생활 8년 째, 내 주위의 그 누구도 내 말투를 통해 내 고향을 알아내지 못한다. 우연히라도 알게 되었을 때, 다들 의외라는 반응을 보인다.
고등학교를 들어가면서, 80년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 끔찍하고 잔인한 사진들... 망월동의 묘지들... 그리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수많은 유언비어들...
투표권이 아직 없었던 87년, 6월 항쟁이 6.29선언으로 끝이 났을 때, 아직 김영삼과 김대중을 구분하지 못하던 나였지만, 노태우의 그 선언이 사기인 것을 알았다. 나도 신기하다.
그날을 축하하던 많은 사람들의 웃음과 행복한 표정들. 나는 웃지 않았고, 내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들도 비슷했던 것 같다.
그리고 연말 대선이 가까워 오면서, 삼성 라이온즈의 버스가 광주에서 불타고 해태 타이거즈의 버스가 대구에서 불탄 후, 보통사람이라던 그 양반이, 전두환의 그 졸개가, 대통령이 되었다. 말할 수 없던 좌절 내지는 절망이었다.
그리고 이어졌던 총선, 여소야대. 조그만 희망을 보았다. 비록 김종필이 있긴 했지만, 민정당이 아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편 같았으니까.
어느날 뉴스가 나오더라. 3당합당... 난 두려웠다. 정말 두려웠다. 평민당만 빠진 그 3당합당. 다시 한 번 극명하게 나타난 고립. 80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존경하던 영어선생님께 수업시간에 물었다. 다시 공수부대가 오는 것 아니냐고...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른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노태우의 뒤를 이어 김영삼이 민자당의 대선 후보가 되었다.
92년 대선... 김영삼이 승리했다. 금융실명제와 하나회 청산 등등. 하늘을 찔렀던 집권 초반 그의 인기. 광주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집권말에 터진 IMF 외환 위기.
97년 난 서울로 옮겨왔다.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쪽이라는 이회창이 대선후보가 되었다.
87년과 92년 대선을 통해 전라도 사람들이 배운 것이 있다면,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다.
대선 날짜가 하루 하루 다가와도 전혀 움직이지 않기, 누가 가르쳐주거나 강요하지 않았어도 이 역시 신기할 뿐이다.
난 주위에 아무말도 하지 않고, 투표전날 집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투표하고 바로 고속버스를 타고 올라왔다.
십몇만표차로, 죽어도 극복못할 것 같았던 그 차이를 극복하고 국민의 정부가 시작되었다.
드디어 한을 풀었던 거다. 그리고 잊어버렸다. 정치에 대한 모든 관심을 접었다.
615선언을 보면서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97년 대선이 내가 했던 마지막 투표였다. 총선때에는 한 번도 투표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국민의 정부가 허덕대다가 2002년 대선이 다가왔다.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나몰라라 할 수 없었다. 새해 벽두부터 신기하게도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누가 이회창의 대항마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김근태와 노무현이 떠올랐다. 둘 다 무지 약했지만,(내가 느끼기엔) 단일화가 된다면 가능성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단일화가 안되었다. 그러면 그렇지 하며 다시 관심을 껐다. 그리고 경선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김근태 의원이 경선자금을 고백했고, 민주당 경선이 새로와지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노사모라는 단어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회창이 다음 대통령이 된다면, 정말 이나라에서 어떻게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까 고민하며 티비를 바라보던 내 눈에 비친 플랫카드 문구...
'이민가지 마세요, 노짱이 있습니다.'
???
!!!!!!
그 날부터 노하우는 내 이불이 되었고 침대가 되었다. 수없이 많은 밤을 수많은 글들을 보며 하얗게 지새고 절망이 아닌 희망을 발견하고 기뻐했었는지...
얼마 안되는 월급에서 온라인으로 후원한 후원금이 30만원이었다.
부산에서 자꾸 낙선하면서 실패자로 낙인찍히고 내 관심거리 바깥으로 밀려났던 바로 그 노무현이 어떤 사람인지, 그가 걸어온 삶이 어떤 것이었는지 사실을 깨달은 후에, 난 그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드디어 노빠가 된 것이다.
노빠가 되었다는 것은 그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맹목적인 부분이 있다. 왜? 사랑이기 때문이다.
난 감정이 없는 사람이다. 어린 시절 자라왔던 가정 환경 때문일지 모르지만, 감정을 드러내고, 받아들이는 것이 정말 힘겹다.
심리검사를 해보면, 감정의 영역이 열등하다고 결론이 나올 정도다. 그런 이유로, 아무리 힘겨운 상황을 만나도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지 않는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가정이 깨어지는 순간에도, 난 결코 운 적이 없다.
울고 싶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슬프지가 않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냥 현실을 현실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뿐.
하지만 그런 내가 운 때가 있다. 그날은 2002년 대선을 며칠 앞 둔 때였다. 그곳은 부산이었다.
지금은 탄핵 무효의 외침이 메아리 치고 있는 그곳, 서면에서의 유세. 난 노무현의 서면 유세 동영상을 보면서 울고 말았다. 결코 슬퍼서 운 것이 아니다.
그의 진정성에 감동되었고, 그가 보여주는 희망에 감동되었기 때문에 난 울었다. 그것은 기쁨이고 감격의 눈물이었다.
노무현을 보면 눈물이 흐른다. 왜?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가 상징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가 상징하는 승리하는 정의와 진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올의 말대로 그는 가장이다. 가족을 대표하고 책임지고 있는 존재라는 말이다. 그를 믿고, 그를 신뢰한다. 소소한 결정에서 실망할 수도 있고, 놀랄 수도 있지만, 큰 그림에서 가족의 안녕을 위해 존재하는 분임을 믿는 것이다.
한때 노무현의 실정(?)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마음이 답답했던 때가 있었다. 뭐가 안되니, 지지를 철회하겠다 모 이런 이야기들 말이다. 이렇게 해 줄 줄 알았는데, 막상 대통령 되고보니 안그렇더라, 그러니 내가 선택을 잘못한 것 같다는 식의...
방폐장이나, 새만금이나, 파병 결정 등등, 이런 식의 양자택일적 의제에서는 모두가 만족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니, 반드시 원하는대로 안되서 실망하는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살아온 삶들이 서로 다르기에 중요시하는 가치가 다르고, 비록 내가 죽더라도 안되는 것은 안되는 일이 있을 수도 있고, 그런식으로 결사반대(?)할 사건이었는데, 막상 뜻대로 안되는 걸 보니, 에이 내가 잘못 짚었다 싶은 일들이 어찌 없을 수가 없겠는가? 그런 식의 선택과 표현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문제는 노무현이 정치인으로서는, 그것도 최고 통치자로서는, 지금 우리나라의 유일한 대안이라는 사실이며, 적어도 그의 5년의 임기 동안에는 그것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누군가가 앉아있었다면(그중에서 특히 이 모씨) 더 나아졌을거라고 말할 사람이 제정신은 아닐테니까...
인류의 역사가 BC와 AD로 갈리듯이 이제 이후로 대한민국의 정치사는 분명히 노무현 이전과 이전으로 갈린다. 영원히...
그렇다면 결론은 뭘까? 결론은 믿어주는 것이다. 신뢰해 주는 것이다.
나는 종교인이기에, 인간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사랑이라고 믿는다. 법으로 사람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악으로 한정할 뿐이지, 결코 최대한의 선을 만들어 낼 수가 없는 것이 법이 지닌 한계다. 악이 아니라 선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변화이지, 마지못해 악을 선택하지 않는 것은 결국에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게 할 뿐이다.
무슨 소리냐 하면, 노무현이 살아온 평생을 너무 자세하게(?) 알아버린 이 시점에서는, 그가 어떤 선택을 하던 믿어주고 신뢰해 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왜? 그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알게 되었기에 믿게 되었고, 이미 그 믿음은 혹시라도 나중에 그를 믿을 수 없는 상황이 찾아온다고 해도, 결코 흔들리지 않을 만하게 충분히 커다랗게 자라 있다.
그가 한 말대로, 강물이 때로 굽이쳐 흐르지만, 결국엔 바다로 흘러가듯이, 아무리 굽이굽이 꼬이고 또 꼬여도 중력을 이겨내지 못하는 그 강물처럼, 노무현은 그가 살아온 삶과 그 자신안에 녹아있는 진실이라는 중력을 결코 이겨내지 못할 사람이라는 것을 난 알게 되었기에, 때로는 굽이친다해도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룰 것" 이라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노무현을 절대 오류가 없다는 식으로 맹신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도 인간이기에, 신이 아니기에, 실수할 수 있는 것이다. 잘못 결정들을 내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실수이지, 거짓이 아니기에, 커다란 그림 속에서, 전체적인 문맥과 주제 속에서, 노무현은 옳으며 옳은 길로 갈 것이라는 신념이 내겐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를 향한 지지를 철회할 수 없다. 남은 4년 동안 그를 대신할 만한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분명히 믿기 때문이다. 하루이틀 한달두달 잘못하고 실수할수도 있지만, 5년의 시간 속에서는 반드시 성공할 것을 말이다.
지금 노무현의 지지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사랑으로부터 출발한다. 대선전 밤마다 우리를 눈물짓게 했던 그 무엇이 우리로 그를 사랑하게 만들었지 않는가? 사랑한다면, 믿어줘야 한다.
노무현은 매트릭스 속의 Neo다. 그가 선택을 받았고 능력과 책임이 그에게 주어졌다. Neo처럼 스스로 의심하기도 했겠지만, 이제는 자기 자신도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있으며, 그럼에도 끊임없이 회의하고 질문하는 진실한 태도를 그는 가지고 있다.
그럴 기회가 많이 있었지만(?) 인류가 아직 멸망하지 않았고, 심지어 더 진보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전체적인 인류의 희망을 예견할 수 있듯이, 떨어질듯 떨어질듯 하면서도 용케 안떨어지고 아직까지도 희망을 부여잡고 있는 노무현을 보면서, 담대하게도 전체적인 우리나라의 희망 또한 장담해 본다면 너무 지나친 것일까?
물론 그러다 실패할지도 모른다. 줄에서 떨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그 아슬아슬한 곡예를 아주 오랫동안 떨어지지 않고서 해내었던 한 사람을 기억하고는 다들 줄 위로 펄쩍 펄쩍 너도 나도 뛰어오르고 싶어질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더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을 것이다. 청출어람이니까...
노무현, 그는 반드시 정의로운 승리의 상징이 될 것이다.
왜? 그의 뒤에는 내가 있고, 그의 뒤에는 우리가 있으며, 그의 뒤에는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History Maker, 노무현!!!
나는 그를 신뢰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