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정진(奇正鎭) 찬(撰)
[생졸년] 1798년(정조 22)~1879년(고종 16) 수(壽) 81세
김씨의 관향 중에 그 하나가 영광(靈光)이다. 영광 김씨가 여러 김씨 중에서 번성하지는 않다. 그러나 내가 매양 사족(士族) 집안의 보첩을 열람해보면 오래된 인파(姻派) 중에 영광 김씨를 왕왕 만난다. 이 때문에 그 수봉(受封)한 지가 오래되었음을 알았다.
지금에는 여러 고을에 흩어져 사는 자들이 없지 않으나 모두 각자 일가를 이루고 서로 통보(通譜)하지 않고 있으니 이로써 또 그 파계(派系)가 중간에 흩어졌음을 알았다. 호남에 거주하는 자로는, 장흥을 가장 일가를 이루었다고 헤아려 세준다.
내가 중년 이후로 알고 지내는 남쪽의 사우(士友) 중에 영광 김씨가 많은데, 그중에 불행하게 먼저 세상을 뜬 사람은 김대원(金大源) 윤성(允性)이고, 생존해 있는 사람들은 이름을 모두 헤아릴 수가 없다. 그래서 그 가덕(家德)과 세파(世派)를 상세하게 들었다.
대개 고려(高麗) 때 전서(典書) 태용(台用)이 중간에 파계(派系)를 잃은 후에 가문을 일으킨 선조이다. 경도(京都)로부터 남쪽으로 내려와 장흥에 거주한 자는 현감(縣監) 휘 경의(敬義), 전한(典翰) 휘 찬(瓚), 참판(參判) 휘 필(㻶)인데 모두 그 아들이고, 현령(縣令) 휘 림(琳)은 그 조카이다.
현감공이 남쪽으로 내려왔을 때에는 경향(京鄕) 간에 여전히 정하지를 않았는데, 터를 잡고 거주를 정한 것은 참판공이 용퇴(勇退)하면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그 후로 차츰 번성하고 불어났는데 참판공의 후손이 더욱 커졌다고 한다.
전한(典翰)은 아들인데 소릉(昭陵)을 복위하라는 상소에 참여하여 명교(名敎)에 공이 있었다. 월봉(月峯)은 손자로 기묘사화에 연원(淵源)이 있어 사당에 제향됨에 이르렀다. 헌헌헌(軒軒軒)은 5세손인데, 충성과 공로로 숭품(崇品)에 올랐다.
여강(汝剛)은 전장에서 순국했다. 전한공의 후손은 광범(光範) 이하로 사효(四孝)가 끊이지 않아 모두가 죽은 후에 방명(芳名)을 남겼다. 음관(蔭官)과 산반(散班)도 십수 인이고 대소과에 급제한 사람은 20인이 넘었으며, 무과로 수령(守令), 우후(虞候)에 이른 자도 거의 열 사람이고, 이제 관례를 올린 사람도 5, 6백 명이 된다하니 또한 성대하다 할 수 있겠다.
만약 다른 곳에 사는 영광 김씨 중에 몇 가문이 있어서 모두 장흥 같다면 영광 김씨가 거족(鉅族)이 되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였을 것이니 어찌 옛날에 보계(譜系)를 중간에 잃은 근심이 있겠는가. 나는 이로 인하여 가만히 마음속으로 느낀 바가 있다.
시에 이르기를 “상나라의 도읍이 정연하니 사방의 표준이로다.”라고 하였다. 먼 외지에 사는 사람이 늙은이를 부축하고 어린 아이를 이끌고 와서 일월 같은 선조의 말광(末光)에 가까이 의지하지 못하는 것은 그 마음이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고 형편상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참판공의 집안은 서울에 살 때에는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높고 귀한 직을 두루 거쳤고 집안에는 재산도 넉넉하여 보통사람이 그런 처지였다면 아무 걱정이 없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훌쩍 멀리 떠나서 땅의 끝자락도 싫어하여 큰 바닷가에 은둔하였으니 그 뜻이 무엇이었는가. 반드시 그 심중에 심히 부득이한 점이 있을 것이니, 그 세대를 상고한 후에 알 수가 있다.
대개 아들 딸 낳고 그저 평민으로 살면서 다시 세상과 접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누가 이 마음이 실은 겸손하면 이익을 얻는다는 복을 기르고, 후손의 상서로움을 불러오는 것일 줄 알았겠는가. 나아가는 것이 반드시 나아가는 것은 아니고, 물러나는 것이 반드시 물러나는 것도 아니니 대개 영광 김씨에게서 이를 본다.
또 들으니 “방안에 빈 데가 없으면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다투게 된다.”라고 하였다. 고부간에는 본래 서로 다투는 처지가 아닌데 방에 텅 빈 공간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지금 영광씨가 장흥에서 마을마다 웅거하고 있으니 거의 빈 곳이 없는 지경에 가깝다.
그러나 그 돈독한 정과 화목은 다른 씨족과는 남다르니 실로 백대로 내려가도 한 집안 같은 정의가 있다. 이로써 보건대 영광씨의 창대함은 끝이 없을 것이다. 족보는 친의를 돈독히 하고 화목을 강명하는 것이다. 영광 김씨는 수보하기 전에 친의가 이미 돈독하였고 화목을 이미 도모하였는데 어째서 족보를 만들었는가.
타인의 족보는 족보로 친목을 구하는데 영광 김씨의 족보는 친목을 족보 자체로 삼았으니 이름은 같지만 내실은 같지 않다. 김한섭(金漢燮)과 한기(漢驥)가 나에게 서문을 청하고 늙은 벗 원룡(元龍)과 내량(乃良)이 또 이웃에 살면서 재촉하므로 혼자 힘으로 거절하지 못하고 늙어서 정신이 흐릿함을 억지로 무릅쓰고 이와 같이 쓴다.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ㆍ조선대학교 고전연구원 | 박명희 김석태 안동교 (공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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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靈光金氏族譜序
金氏貫鄕。其一靈光也。靈光氏在諸金。未爲蕃衍。然不佞每閱士族家譜牒。久遠姻派。往往遇焉。以此知其受封蓋久。於今非無散處列邑者。而皆各自爲家。不相通譜。以此又知其派系中散。其居湖南者。則長興最稱家數。不佞中歲以還。所識南方士友。靈光氏爲多。其不幸先逝者。金大源允性。其存者不能悉名也。是以聞其家德世派爲詳。蓋高麗典書台用。其中佚後起家之祖。自京都而南居長興者。縣監諱敬義。典翰諱瓚,參判諱㻶。皆其子也。縣令諱琳從子也。縣監公之南也。京鄕猶未定。卜基奠居。自參判公勇退始。自是厥後。浸以蕃息。而參判公之後益大。典翰子也。參復昭陵疏。有功名敎。月峯孫也。有己卯淵源。至於祭社。軒軒軒五世孫也。以忠勩躋崇品。汝剛之死綏。典翰公之後。光範以下四孝之不匱。皆有芬芳於身後。蔭調散班十數人。大小科榜踰二十人。武科至守令虞候者殆十人。今勝冠者至五六百。亦可謂盛矣。若使他居之靈光氏。有數三家皆長興。則靈光氏之爲鉅族。厥惟久矣。豈有疇曩譜系中佚之患乎。不佞因是而竊有感於中。詩云商邑翼翼。四方之極。遐外之人。不能扶老挈幼。依近日月之末光者。其心非不願也。勢不行也。參判公之家住京輦。早年科第。歷敭華顯。家又饒於財帛。以恒人處其地。可謂百不憂矣。而一朝翩然遠引嫌地盡頭。蹙於大海岸。其意何居。必其中有甚不得已焉。考其世而後知之。蓋欲生男生女。夷爲編戶。不復與世相接也。而孰知此心實養謙受之福。來似續之祥也歟。進者未必進。退者未必退。蓋於靈光氏見之。抑又聞之。室無虛空。婦姑勃豀。婦姑本非勃豀之地。而室無虛空使之。今靈光氏之於長興。村村雄據。幾於無虛空矣。而其惇睦異於他族。實有百世一室之誼。由此觀之。靈光氏之昌大。蓋未艾也。譜者所以敦親講睦。靈光氏修譜之前。親已敦矣。睦已講矣。奚譜之爲。他人之譜。以譜求親睦。靈光氏之譜。以親睦爲譜。名同而實不同也。金漢燮,漢驥徵序於不佞。老友元龍乃良。又隔隣炒煎。獨力不能阻搪。強其昏耄而書之如此。<끝>
노사집 제19권 / 서(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