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굉『李汯,1441년(세종 23) ~1516년(중종 11)』
가선대부 개성 유수 이공 신도비명 병서(嘉善大夫開城留守李公神道碑銘 幷序) - 황효헌(黃孝獻).
공의 이름은 굉(汯)이고 자는 심원(深原)이며 본관은 고성(固城)이고, 고려 때 시중(侍中) 문정공(文貞公) 행촌 선생(杏村先生) 암(嵒)의 4대손이다. 25세 되던 을유년(1465)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돌아가신 부군께서 벼슬에서 물러난 뒤 안동의 농장에 살면서 고을의 나이 많고 어진 사람들과 우향계(友鄕禊)를 맺고 날마다 즐겁게 노닐었는데, 공은 곁에서 모시면서 오로지 봉양에 힘써서 어진 자제라고 칭찬을 받았다.
일찍이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자 사림들이 그가 오랫동안 뜻을 이루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겼다.
나이 40에 이르러 경자년(1480)에 병과에 급제하여 금의환향하였으나, 어버이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해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상을 마치자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다. 모친의 나이가 60이 넘어 외직을 청해 봉양코자 했으나 이조에서 기피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윽고 조정의 의논이 품계보다 낮은 벼슬을 주는 것도 혐의스럽지 않다고 하여 군위 현감에 제수되었다.
신해년(1491)에 체직되어 사포서에 임명되고, 세자시강원 문학, 사간원 헌납, 사헌부 지평으로 옮겼으며, 이어서 상소 때문에 공조 정랑에 제수되었고, 또다시 외직을 구해 청도 군수가 되었다. 기미년(1499)에 임기를 마치고 사재감 첨정이 되었고, 봉상시 부정, 사헌부 집의, 예빈시 정, 승문원 판교 등으로 옮겼다. 계해년(1503)에 통정대부에 올라 상주 목사에 임명되었다.
갑자년(1504)에 조카 주(胄)가 사간원 정언일 때 상소 때문에 죄를 입어 영해(寧海)로 귀양 갔다. 병인년(1507) 가을에 중종반정의 은혜를 입어 용서받고 첨지사에 임명되었으며, 병조 참지에 임명되었다가 참의가 되었다. 정묘년(1508)에 특명으로 가선대부 충청도 병마절도
사가 되었으나, 모친 봉양을 위해 사직을 청하여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 바꾸어 주는 은혜를 입었다.
기사년(1510)에 모친상을 당하여 상기를 다 마친 뒤 동지사, 한성부 좌윤, 개성부 유수에 임명되었고, 계유년(1514)에 치사하자 동지사로 바꾸어 주었는데 곧 병 때문에 안동의 농장으로 돌아왔다. 여러 차례 은퇴를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하다가 더욱 간절히 청하여 비로소 윤허를 받았다.
드디어 낙동강 상류에 정자를 짓고 ‘귀래(歸來)’라는 편액을 달아두고 날마다 그곳에 거처하며 편안하게 지냈다. 정자 주위의 경치는 실로 영호루와 서로 다툴 만하였으나 한적한 멋은 더욱 뛰어난 감이 있었다. 선부군께서 일찍이 터를 잡아 별장을 만들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공께서 이 정자를 만들었으니 이 역시 조상의 유업을 이은 한 가지 일이었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영특하고 침착하며 말이 적어서 관후한 장자長者의 풍도를 갖추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으며 벗과 사귀고 남을 상대할 때 각각 마음과 예법을 다하여 모두에게 환심을 얻었다. 시와 글을 지으면 평이하면서도 담담하여 동료들의 추앙을 받았는데, 일찍이 귀래정을 노래하여 그 회포를 붙인 율시 2수를 지었는데, 시는 다음과 같다.
넓디넓은 이 세상을 집으로 삼았으니(乾坤納納卽爲家)
칠십에도 당당하여 늙은들 어떠하리(七十堂堂奈老何)
술 깨는 날 적다 해도 도리어 기뻐하며(猶喜世間醒日少)
고민할 때 많다는 말 행여나 하지 말게(莫言身外悶時多)
물안개에 무성한 숲 드문드문 비치고(長林隱映烟籠水)
달빛 아래 오래된 절 아련하게 흩어지네(古寺微茫月印沙)
일신의 뭇 괴로움 쉬는 게 약일지니(便覺五勞閒是藥)
배 띄워 낚시하며 이내 생애 만족하네(一竿漁艇足生涯)
정자 하나 높이 솟아 속세와 떨어지니(孤亭兀兀隔人家)
짧은 노에 작은 배는 그 흥이 어떠한가(短棹輕舟興若何)
강가에는 아득하게 푸른 이내 피어나고(江上杳冥靑靄合)
산속에는 상쾌하게 하얀 구름 가득하네(山中怡悦白雲多)
뉘런가 그 삿갓에 저녁노을 부서지고(誰將篛笠衝殘照)
손에 쥔 낚싯대는 모래사장 긁고 가네(獨把漁竿弄晩沙)
부귀가 온다 한들 나는 이미 물렀거니(富貴倘來吾已退)
짚신 신고 날마다 강가에서 노니네(芒鞋日日傍江涯)
공이 서울에 있을 때 영의정 문성공(文城公) 류순(柳洵)과 우찬성 한산(漢山) 이손(李蓀), 판서 안침(安琛), 참판 김선(金瑄) 등 10여 분은 모두 공과 함께 소싯적 남학(南學)에서 공부한 오랜 동료였다. 이때 모두 70이 넘었으므로 기로회(耆老會)를 결성하여 좋은 시절을 만나면 서로 번갈아 집에 모여서 담소하며 마시고 강론하며 즐겼는데, 당시의 사대부들이 모두 감탄하고 우러르며 성대한 일이라고 손꼽아 낙중기영회(洛中耆英會)에 견줄 정도였다.
물러나 살 때는 대부의 벼슬을 버리고 시골에 사는 사람이나 고을의 점잖은 늙은 선비들과 진솔회(眞率會)를 만들어 좋은 계절이면 번번이 모여 즐겁게 술잔을 나누곤 하였다. 집에서는 조용히 지내면서 살림살이에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손님이 오면 대접할 음식을 재촉하고 은근히 정성을 쏟으며 하루를 다 보내는 것을 일상으로 삼았다.
공은 정통 신유년(1441)에 태어나 76세에 병으로 집에서 돌아가시니, 정덕 병자년(1516) 4월 6일이었다. 그해 겨울 귀래정 남쪽 기슭 곤좌(坤坐) 간향(艮向) 언덕에 장사지냈다. 아버지 증增은 현감으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할아버지 용헌(容軒) 원(原)은 좌의정을 지냈고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증조부 평재(平齋) 강(岡)은 대제학을 지냈고 시호가 문경(文敬)이니, 바로 행촌(杏村)의 아들이다. 어머니 이씨(李氏)는 관찰사 희(暿)의 따님으로, 익재(益齋) 제현(齊賢)의 후손인데, 역시 경주의 명망 높은 가문이다. 공은 첨지 송의(宋衣)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녀를 낳았는데, 딸은 함양 군수 안서(安㥠)에게 시집갔다.
둘째 부인은 첨지 장적(張籍)의 따님으로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효칙(孝則)은 봉사로 공손하고 삼가서 몸가짐이 바르고 글을 잘 지었으며, 딸들은 각각 봉사 변형손(卞亨孫)과 영의정 성희안(成希顔)에게 시집갔다. 효칙의 아들은 봉사 명정(命貞)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철성이씨 가문이(鐵城李)
대를 이어 현달했고(世顯隆)
스스로를 다듬으니(能自約)
덕업 이미 통달했네(業已通)
행실 먼저 닦느라고(先行實)
과거 급제 늦었지만(取科遲)
부모 봉양 급히 여겨(急奉檄)
낮은 관직 나아갔네(官無卑)
맡은 일에 힘을 쏟아(職所履)
칭찬 소리 자자했고(見聲績)
가선대부 되셨으니(都嘉善)
지위 또한 드높았네(位云奕)
평소 성품 담백하여(雅恬淡)
미련 없이 사직하니(乞骸勇)
몸은 점점 편안하고(身逾寧)
이름 더욱 드러났네(名逾重)
낙동강 귀래정이(亭洛涘)
절경을 차지하여(形勝擅)
호젓이 앉았으니(寄蕭然)
세월이 남아있네(居諸遺)
천수를 누렸으니(終天年)
일흔여섯 살이고(七十六)
무덤에서 영면하니(永安宅)
부끄러움 없으시리(無感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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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嘉善大夫開城留守李公神道碑銘 幷序 - ⿈孝獻.
公諱浤, 字深源, 固城人, 高麗侍中文貞公杏村先生嵒之四代孫也。 年二十五, 中乙酉進士。 先府君辭職, 居安東田舍, 聚鄕中耆老, 名其契曰友鄕, 日與遊遨, 公侍左右, 專務爲供, 俱稱爲賢子弟。嘗屢擧不中, 士林雖服其材就行熟, 亦恨其抱屈之久。 至强仕, 捷庚子丙科, 錦還鄕里, 以親老不赴朝。 是歲, 遭內憂。 服闋, 拜典籍, 父年逾六十, 乞外便養。 銓曹有所避, 不獲願。 俄而朝議用降授無德, 除軍威縣監。 辛亥, 遞拜司圃, 遷世子侍講院文學、司諫院獻納、司憲府持平。 尋以言事除工曹正郞, 又求補外, 除淸道郡守。 己未, 考滿, 拜司宰僉正, 遷奉常寺副正、司憲府執義、禮賓寺正、承文院判校。癸亥, 陞通政, 就拜尙州牧使。 甲子, 以猶子胄正言時言事加罪, 謫寓寧海。 丙寅秋, 蒙靖國恩宥, 拜僉知事, 移兵曹參知, 尋授參議。 丁卯, 特陞嘉善、忠淸道兵馬節度使, 以歸養辭職, 恩許換慶尙左道水軍節度使。己巳, 丁外憂。 喪畢, 拜同知事、漢城府左尹、開城府留守。 癸酉, 以老致仕, 換拜同知事, 卽移病歸安東農莊, 屢乞骸, 不得, 懇乃許。 遂作亭洛水之上流, 扁以歸來, 日偃臥其中, 寄傲焉, 湖山景致, 實無映湖相甲乙, 其爽塏之勝、蕭散之想, 亭殆過之。 先府君嘗卜此, 欲置別墅而未就, 公用就之, 是亦肯搆之一端也。公天資英毅, 深沈寡言, 寬厚爲長者。 孝於父母, 友於兄弟, 待友接人, 各盡情禮, 咸得歡心焉。 爲詩文平淡, 頗爲儕輩所推。 嘗作二律題其亭, 寓其懷詩曰: “乾坤納納卽爲家, 七十堂堂奈老何? 猶喜世間醒日少, 莫言身外悶時多。 長林隱映煙籠水, 古寺微茫月印沙。 便覺五勞閑是藥, 一竿漁艇足生涯。 孤亭兀兀隔人家, 短棹輕舟興若何? 江上杳冥靑靄合, 山中怡悅白雲多。 誰將蒻笠衝殘照? 獨把漁竿弄晩沙。 富貴倘來吾已退, 芒鞋日日傍江涯” 公之在京師也, 文城柳領相洵、漢山李二相蓀、安判書琛、金參判瑄十餘公與公, 皆少時南學舊儕, 至是年俱逾七十, 結爲耆老會, 嘉辰令節, 輪聚諸第, 談飮講勸, 士大夫咸咨嗟景慕, 指爲盛事, 以比洛中耆英會焉。 其退居也, 與大夫之去位巷處者及鄕中諄謹老上舍等, 約爲眞率會, 花朝月夕, 輒會樂飮。 居家蕭然無念, 不問有無, 客至則但促供, 俱磬殷懃窮朝曛以爲常。 公生於正統辛酉年, 七十六, 以病卒于第, 是正德丙子四月初六日也。 其冬, 窆于歸來亭南麓坤坐艮向之原。 公考諱增, 贈嘉善大夫、吏曹參判、行靈山縣監; 王考容軒諱原, 輸忠翊戴同德佐命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鐵城府院君; 曾王考平齋諱岡, 贈右議政、固城府院君、行奉翊大夫・密直副使・進賢館提學, 贈諡文敬公, 卽杏村之子也。 妣李氏, 通政大夫、慶尙道觀察使暿之女, 高麗益齋文忠公齊賢之後, 亦鷄林望族也。 公娶僉知宋衣之女, 生一女, 適咸陽安㥠。 㥠生一女, 適廣興倉守張明遠, 生二男: 曰景良、景安。 其於側室, 生二男二女: 長孝側, 典醫監奉事, 恭謹有操行, 好文學能詩詞; 男次恩重, 早歿。 女長適奉事卞亨孫, 次嫁領議政成希顔。 孝側生二男: 曰福貞、命貞。 卞生一女, 適權裕。 成之一男曰瑚。 銘曰:
鐵城李, 世顯隆。 能自約, 業已通。 先行實, 取科遲。 急奉檄, 官無卑。 職所莅, 見聲績。 都嘉善, 位云赫。 雅恬淡, 乞骸勇。 身逾寧,
名逾重。 亭洛涘, 形勝擅。 寄蕭然, 居諸遣。 終天年, 七十六。 永安宅, 無感恧。
[주01] 父 : 底本에는 “母”로 되어 있다. 文脈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國朝人物考四十三 / 燕山時罹禍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