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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집 문집 제8권 / 지명(誌銘)
영돈녕부사 서평부원군 한 문익공 묘지명 병서
(領敦寧府事西平府院君韓文翼公墓誌銘 幷序)
천계(天啓) 7년(1627, 인조5) 가을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유천(柳川) 한공(韓公)이 운명하였다. 이미 연제『練祭: 소상(小祥)』 를 지내고, 맏아들 부평 부사(富平府使) 회일(會一)이 공의 불후(不朽)한 업적을 가지고 본래 공과 절친했던 사람들 가운데 당대에 문장으로 명성이 있는 이들에게 두루 글을 부탁하였는데, 묘지명을 나의 선친(先親)께 부탁하니, 선친께서 마음으로 허락하셨다.
그러나 선친께서 일을 마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시니, 부평군(富平君) 한회일(韓會一)이 나의 선친께 부탁했던 일을 나에게 대신 해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 일에 적임자가 아니니, 적임자가 아니면 명징(明徵)이 되지 못한다. 또 나는 진실로 어리석은 데다 글도 잘 짓지 못하니, 어찌 공의 아름다운 공렬(功烈)을 드날려서 무궁한 후세에까지 드리울 수 있겠는가.
그러나 부평군이 말하기를 “그대가 우리 아버지의 비명을 쓰는 것은 그대 아버지의 뜻을 잇는 것이다.”라고 하니, 나는 슬픔에 목이 메어 온다. 오히려 무슨 말로 사양할 수 있겠는가. 가장(家狀)을 살펴보니, 한씨(韓氏)는 청주(淸州)의 큰 성씨이다. 비조(鼻祖) 란(蘭)은 왕씨(王氏: 왕건(王建)의 개국을 도와 지위가 태사(太師)에 이르렀다.
강(康)은 충렬왕(忠烈王)을 도왔고, 시호(諡號)는 문혜(文惠)이다. 이분이 사기(謝奇)를 낳으니, 보문각 제학(寶文閣提學)이다. 이분이 악(渥)을 낳으니, 우정승(右政丞)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이다. 이분이 공의(公義)를 낳으니, 정당문학(政堂文學) 청성군(淸城君)이다.
이분이 수(修)를 낳으니, 우문관 대제학(右文館大提學)으로, 시호는 문경(文敬)이며, 도학(道學)으로 명성을 떨쳤다. 이분이 상경(尙敬)을 낳으니, 우리 조선에서 영의정(領議政)을 역임하고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이 되었다. 이분이 혜(惠)를 낳으니, 함길도 관찰사(咸吉道觀察使)이다.
이분이 계희(繼禧)를 낳으니, 좌찬성(左贊成)으로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공의 고조(高祖) 휘(諱) 사무(士武)는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으로 좌참찬(左參贊)에 증직되었다. 증조(曾祖) 휘 승원(承元)은 정선 군수(旌善郡守)로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었다.
조부(祖父) 휘 여필(汝弼)은 중추부 경력(中樞府經歷)으로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선고(先考) 휘 효윤(孝胤)은 경학(經學)에 밝고 예법(禮法)을 준수하여 당세에 명성이 있었는데,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재직 중에 운명하였고,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선비(先妣)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예빈시 정(禮賓寺正) 휘 건(健)의 딸이다. 가정(嘉靖) 정사년(1557, 명종 12) 8월에 공을 낳았다. 공의 휘는 준겸(浚謙), 자는 익지(益之)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났으며 몸이 크고 기상은 원대하였다. 6세에 글을 지을 줄 알고 어린 나이에 학업을 이미 성취하니, 보는 사람들마다 입이 닳도록 재상이 될 인재라고 칭찬하였다.
기묘년(1579, 선조12)에 생원시(生員試)에서 장원을 차지하고, 진사시(進士試)에 7등으로 합격하였다. 이듬해 의정공『議政公 : 한효윤(韓孝胤)』이 운명하였는데, 예제(禮制)보다 지나치게 슬퍼하여 몸을 상하였다. 상례를 마치자 이조(吏曹)에서 공을 태릉 참봉(泰陵參奉)에 보임하였다.
병술년(1586)에 문과 합격하여 곧바로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선발되었다. 선조(宣祖)께서 어제(御題)로 유신(儒臣)들을 시험하셨는데, 공의 시가 수석을 차지하였다. 또 어제(御製)에 차운하여 올리자 모두 많은 하사품을 더해 주셨다. 태학사(太學士) 이산해(李山海)가 특별히 성대하게 칭찬해 주었다. 주서(注書)와 봉교(奉敎)를 거쳤다.
기축년(1589)에 전적(典籍)에 올랐다. 외직으로 나가기를 청하여 금천 현감(衿川縣監)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선조께서 공의 어머니가 살아 계신지 물은 연후에야 임명을 허락하셨다. 조정에서는 공이 외직으로 나가는 것을 애석해하는 의론이 일어나 전관(銓官)의 탄핵을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가을에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0월에 정여립(鄭汝立) 모반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공이 그의 생질(甥姪)을 천거하여 사국(史局)에 들어가게 했다는 이유로 공을 심리(審理)하였다. 선조께서 공의 억울함을 살펴 석방하고 곧바로 다시 서용하게 하였으나, 오히려 말하는 사람들의 견제를 받았다. 그러므로 드디어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원주(原州)로 돌아가 밭을 사서 농사를 지으며 생을 마칠 생각이었다.
임진년(1592, 선조 25)에 전란이 발생하자, 멀리서 예조 좌랑(禮曹佐郞)과 정랑(正郞),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 강원도 도사(江原道都事)에 임명되었으나, 길이 막혀 미처 이르지 못하였다. 원주가 함락되자 곧바로 공을 목사(牧師)로 임명하였는데, 공이 백성들을 보호하고 어루만지며 문제점을 해결하니, 온 경내가 공 덕분에 온전하였다.
을미년(1595)에 비로소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하는 소명을 받고 조정에 나갔다. 이로부터 시강원 필선(侍講院弼善), 사간원 정원(司諫院正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지제교(知制敎)에 연달아 임명되었다. 문충공(文忠公)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평소 공을 중히 여기다가 종사관(從事官)으로 뽑으니, 군대의 크고 작은 일들을 모두 돕고 결정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도 차례를 따지지 않고 공을 쓰고자 하여 부수찬(副修撰)에 의망(擬望)되자마자 다시 경상도 관찰사에 의망되니, 예전에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 정유년(1597, 선조 30)에 검상(檢詳), 사인(舍人), 응교(應敎), 사간(司諫)을 역임하고, 참교(參校), 보덕(輔德), 집의(執義), 전한(典翰)을 겸직하였다.
가을에 승선(承宣) 자리가 비니, 임금께서 파격적으로 공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하셨다. 당시 왜적들이 핍박해 들어오므로, 명(明)나라 장수 마 제독(麻提督)이 임금을 맞이하여 한강을 건너면서, 중신들을 독촉하여 말먹이와 군량의 조달을 다급하게 요구하였다.
임금께서 공으로 하여금 가서 군사의 일을 가늠하여 처리하도록 하시니, 도움을 준 것이 매우 많았다. 연로(沿路)에 파발(擺撥)을 설치하여 밤낮으로 다급한 보고 사항을 전달하게 하니, 영구적인 제도가 되었다. 겨울에 우승지(右承旨)로 있다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특진되어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나갔다.
불평불만만 늘어놓는 무리들이 이미 영의정 서애 유성룡을 내쫓고, 온갖 방법으로 공을 방해해 마지않으니, 마침내 글을 올려 스스로 물러났다. 그리고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임명되었다. 기해년(1599, 선조 32)에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나갔다.
정인홍(鄭仁弘)이 자신에게 야박하게 굴며 어울리려 하지 않는 공의 태도를 파악하고, 전후의 유감을 품고서 자신의 당인(黨人)을 사주하여 공을 탄핵하였다. 경자년(1600)에 병조 참판(兵曹參判)과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에 서용되었다.
신축년(1601)에 부체찰사(副體察使)를 겸직하였다. 임인년(1602)에 전라 감사(全羅監司)가 되었다. 계묘년(1603)에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임명되었다. 국가가 막 난리를 겪은 터라 국경 방비가 허술하였다. 임금께서 조회에서 장수로 적합한 인재를 물으셨는데, 영의정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이 공을 천거하면서 “관질(官秩)은 비록 낮으나 인망이 아름답고 융성하여, 조정의 신하들 가운데 이 사람보다 뛰어난 이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4도 도원수(四道都元帥)에 임명되니, 참판에서 서열을 뛰어넘어 곤외(閫外)를 다스리는 도원수가 된 것이다. 그리고 당시 문단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도 공에 대해 높이 평가하였다. 이로부터 거듭 부제학(副提學), 이조 참판(吏曹參判), 세자 빈객(世子賓客)이 되었다.
을사년(1605)에 남쪽으로 가서 군사를 시찰한 뒤 돌아와, 특별히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올랐다. 이듬해 명나라 조사(詔使)가 도착했을 때 조사를 대접하는 데 필요한 물품을 마련함에 있어서 넉넉하게 경비를 조달하였다. 대사헌(大司憲)과 동지경연(同知經筵)으로 옮겼다가 이윽고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나갔다.
무신년(1608, 선조 41)에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였다. 상기(喪期)를 마치고 대사헌(大司憲)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나갔다. 임지에 부임하여 정릉(定陵)과 화릉(和陵)의 비석을 다시 세우고, 태조(太祖)가 등극하기 이전에 살던 곳에 빗돌을 세웠다.
백성들을 경(敬)으로써 가르쳐 가장 먼저 풍속을 교화시켰다. 나이 많은 사람들을 예우하고, 품행이 남다른 사람들을 표창하고, 몽학(蒙學)들을 장려하여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주자(朱子)의 《소학(小學)》과 《가례(家禮)》를 번역하여 널리 보급하고 익히게 하니, 북쪽 풍속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어 본래 질박하던 모습에 문채가 더해지게 되었다. 3년을 다 채웠는데도 교체를 허락하지 않았다.
계축년(1613, 광해군5)에 이르러, 박응서(朴應犀)의 옥사(獄事)가 일어나 국구(國舅) 연흥공(延興公)을 무고하여 죽이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유폐하였으며, 선류(善類)들을 엮어 넣으려고 온갖 기만과 술책이 동원되었다. 처음에 선조(宣祖)께서 병세가 악화되자, 광해군(光海君)이 골육(骨肉)들을 살려두지 않을 것을 알고 유교(遺敎)를 손수 쓰셨다.
그 대략의 내용은 “대군(大君)이 아직 어려 장성하지 않았는데, 인심은 헤아리기가 어려우니, 원컨대 여러 공들은 대군을 사랑으로 보호하고 보살펴 주길 바라노라.”라는 것이었다. 글을 봉해서 장차 공을 포함한 일곱 명에게 부치려 하였으나, 실제로는 일찍이 외부로 유출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이이첨(李爾瞻)이 그 유교는 선왕의 어필로 작성된 것이 아니라고 하며, 일곱 신하의 죄를 꾸며서 유활(柳活)을 사주하여 공 등의 이름을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였다. 또 사형수 정협(鄭浹)을 꾀어 이름 있는 공경(公卿)들을 죄적(罪籍)에 마구 끌어들이니, 조정이 텅 비는 지경이 되었다.
공이 수감되어 장차 대질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공이 장차 헤아릴 수 없는 처벌을 받게 될 것을 염려한 어떤 사람이 공과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의 관계는 아주 작은 것까지도 증명할 수 있으니, 사실대로 말하라고 권하였다. 공이 달가워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운명에 달렸으니, 나는 남을 팔아서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을 싫어한다.”라고 하였다.
원서(爰書)가 올라가자 시골로 추방되니, 옥문을 나오자마자 곧바로 서호(西湖)의 집으로 갔다. 백씨(伯氏) 참의공(參議公)이 이미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와 쉬고 있었으므로, 집을 마주하고 서로 의지하며 아침저녁으로 즐거워하였다. 시운(時運)을 편안히 여기고 순리에 맡긴 채 환란을 만난 근심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흉악한 무리들이 공의 명성을 흠모하여 찾아와 안부를 묻고자 하는 이도 있었지만, 공은 몸을 거두어 피하였고, 역경(逆境)을 만났다고 하여 평소 지키던 지조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이이첨이 이미 조정의 권력을 천단하여 심지어는 모후(母后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고자 하였고, 연흥부원군을 부관참시하고 일곱 신하의 찬축(竄逐)을 논의하였다. 공은 충원현(忠原縣)으로 유배되었는데, 입을 닫고 자취를 감춘 채 5년 동안 경계를 벗어나지 않았다.
신유년(1621, 광해군13)에 여주(驪州)로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건노(建虜)가 요동을 뒤엎어 급보가 연달아 보고되었다. 묘당(廟堂)에서 공을 천거하여 독려를 맡게 하니, 처벌된 사람 가운데 일으켜 오도도원수(五道都元帥)로 발탁하였다.
공이 아픈 몸을 싣고 달려가 궐하에서 사직하니, 광해군(光海君)이 말하기를 “큰 추위가 닥치고 나서 뒤늦게 갖옷을 찾는 일은 하지 마라.”라고 하였다. 이에 부지런히 힘써 중화부(中和府)에 막부를 열었으나, 당시의 사태가 이미 기울었음을 알고 화합과 절제로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았다.
계해년(1623, 인조 원년) 봄에 금상(今上 인조(仁祖))께서 국내의 혼란을 안정시키시고, 중궁 전하(中宮殿下 인열왕후(仁烈王后))께서 왕비의 자리에 오르시게 되었다. 그러자 공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에 진봉(進封)하고, 서둘러 불러서 조정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전후로 유도 도체찰사(留都都體察使), 도총관(都摠管),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겸직하게 하였으나, 모두 국구(國舅)라는 혐의를 이끌어 고사(固辭)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정묘년(1627, 인조 5)에 오랑캐가 해서(海西)에 난입(闌入)하였다. 그러자 동조(東朝)가 남쪽으로 내려가게 되었는데, 공이 배위대장(陪衛大將)의 신분으로 따르면서 무군사(撫軍司)가 되었다. 적이 물러나자 동조를 모시고 행재소(行在所)에 갔다가 남으로 서울에 돌아왔다.
오래 앓았던 중풍(中風)이 재발하였는데, 7월에 이르러 더욱 심해져서 숨결이 이미 미미하였으나, 오히려 침상을 옮겨 자리를 바르게 하고서 생을 마쳤다. 임금께서 부음을 듣고 매우 슬퍼하여 사흘 동안 조회를 폐하셨다. 왕세자는 빈소를 찾아 곡하고 조문을 예제보다 더하였다.
경사(卿士)와 대부(大夫)로부터 노비와 주졸(走卒)에 이르기까지 모두 목놓아 울면서 탄식하기를 “나라는 장차 어찌한단 말입니까.”라고 하였다. 운명에서부터 장례에 이르기까지 관에서 상사를 도왔고, 궁중에서 사람을 보내 감호(監護)하였으며, 호조(戶曹)에서 물품을 대고 예조(禮朝)에서 치제(致祭)하였다.
태상시(太常寺)에서 역명(易名)의 은전(恩典)을 논의하여 문익공(文翼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향년 71세였다. 그해 9월에 원주(原州)의 음지촌(陰枝村)에 안장하니, 원근에서 모인 사람이 3백여 명이었다. 공은 자질이 빼어나고 기운이 침착하였으며 너그러우면서도 절제가 있었다.
식견과 도량이 깊고 재성(財成)의 능력이 넉넉하였다. 땅이 만물을 다 실어주는 것과 같고 바다가 모든 물을 다 받아들이는 것과 같았으며, 봄바람이 불어와 만물이 자라는 것과 같았다. 상서로운 기린이 덕을 실천하는 것과 같고, 의젓한 봉황이 광채를 발하는 것과 같았다.
중후하고 독실함은 한 충헌(韓忠獻)과 같았으나 문아(文雅)함은 그보다 더 뛰어났고, 풍류와 원대한 뜻은 사 문정(謝文靖)과 같았으나 예법은 더 넉넉하였다. 평소 생활할 때 일찍이 다급한 말과 황급한 기색이 없었다. 행동거지가 엄정하여 마치 가까이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직접 대하면 온화하여 훈기가 넘쳐났으니, 속 좁은 사람은 시기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경박하게 이익을 다투는 사람은 조급한 마음을 거두었다.
사람의 잘못에 대해 들으면 한참 동안 좋아하지 않다가 정성스레 잘 타이를 뿐 각박하게 나무라지 않았으므로, 사람들도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다. 노여워할 만하고 놀랄 만한 일이 발생하더라도 태연히 순응하여 기미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체포되는 도중에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가 권흉(權凶)의 의도를 눈치채고 공을 잘 대우하지 않았지만, 공은 처음부터 유감이 없었고 삶을 마칠 때까지 그 사람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독실하게 논의하는 사람이 “공의 숨은 공업(功業)은 백성들을 구제했지만 백성들은 그 실상을 알지 못했고, 공의 성대한 덕은 사람들에게 미치자 사람들이 스스로 복종하였다.”라고 하니, 전혀 과장된 말이 아니다. 공은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고 지극하였다.
어머니를 섬기는 데 있어 양지(養志)에 힘썼다. 처음 가난할 때에도 반드시 맛난 음식을 준비하였다. 관직에 나간 후에 큰 고을과 높은 관직을 드나들었고, 참의공(參議公 한백겸(韓百謙)) 또한 큰 고을을 다스렸는데, 당시 어머니의 연세가 이미 여든을 넘겼다.
어머니를 화려한 마차에 태우고 말 탄 수행원이 따르게 하여 성대한 모습으로 왕래하였으니, 그 화려한 모습과 영화로움은 한 시대에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였다. 매번 가족들이 모일 때면 어머니께서 모든 음악을 물리치고 오직 〈감군은(感君恩)〉만을 연주하게 하니, 공이 이 때문에 속곡(續曲)을 지었다.
일찍이 조정의 경대부(卿大夫)들과 약속하여 수친계(壽親禊)를 만들고 술잔을 올리며 축수(祝壽)하니, 한 시대의 가장 멋진 일이었다. 이에 선조(宣祖)께서 술과 음악을 하사하여 은혜를 특별하게 하셨다. 공은 어머니 슬하에서 춤을 추며, 백발의 노인이 되어서도 어린 아이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듯이 하였다. 참의공(參議公)과는 서로 사우(師友)처럼 지내면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았다.
둘째 형님이 일찍 운명하고 자매(姊妹)들도 대부분 세상을 떠났으므로, 조카와 생질들을 돌보아 주어 모두 살아갈 수 있게 하였다. 가난한 사람을 보면 마치 부족하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도와주니, 친족이나 마을 사람들이나 모두 충분히 얻어가면서도 오히려 자기가 맡겨 놓았던 물건을 찾아가듯이 하였다.
태사(太師)의 고향에 정표하고 제단을 쌓아 제사 지내니 먼 조상을 사모하는 일이고, 종인(宗人)의 모임을 만들어 족보를 분명하게 하였으니 종친을 도탑게 하는 일이었다. 일찍이 선영(先塋) 아래에 매우 누추한 작은 집을 짓고서 귀래재(歸來齋)라고 하였다. 비록 세상일이 평온하지 않아 감히 용과 뱀처럼 자유롭게 꿈틀대지는 못했지만, 구학(丘壑)에서 지내겠다는 의지를 부친 뜻은 유유히 절로 원대하였다.
공은 대단히 총명하여 눈에 스친 것은 잊지 않았으니, 국가의 전장(典章)과 유문(遺文), 그리고 고사(故事)의 연혁(沿革)의 변화에 대해 마치 손바닥 가리키는 것처럼 분명하게 알았다. 더욱이 예학(禮學)을 숭상하여 피복(被服)을 반드시 유자(儒者)의 법도에 맞게 하였다.
문장은 평이(平易)하고 섬부(贍富)하며 농후하고 혼후하여 의사를 전달하는 데 주력하였을 뿐 구차하게 하지 않았고, 운문은 충담(沖澹)하고 강건하여 스스로 마음에 맞게 하였을 뿐 아름답게 꾸미는 데 연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찍부터 나랏일에 종사하느라 지은 글을 많이 유실하였다.
아아, 선조(宣祖)께서 나라를 다스리실 때 수많은 인재를 얻었으니, 훌륭하고 빼어난 인사들이 어찌 많지 않았으랴. 하지만 때의 변화를 만나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공은 유아(儒雅)한 태도와 덕행과 공업을 통해 임금의 특별한 인정을 받아, 풍채와 경륜(經綸)이 이정(彝鼎)에 언제까지 새롭게 남아 있을 것이다. 중간에 법망(法網)에 걸려 좌절을 겪었으나 다시 일어났으니, 귀신이 돕고 하늘이 보호하여 영광전(靈光殿)처럼 우뚝하였다. 곤경에 처해서도 태연하였고, 조정에 나가서나 물러나서나 변함없는 태도를 견지하였다.
내가 가만히 살펴보건대 공이 사판(仕版)에서 이름이 삭제되기도 하고 전리(田里)로 쫓겨나기도 했으며, 충주로 귀양 가고 여주로 옮기기도 했지만, 안색과 모습이 만족스러운 듯하여 처한 상황에서 어려움을 알지 못하였다. 그 유배자 명단에서 갑자기 선발되어 도원수가 되고 존귀한 국구(國舅)가 되는 데 이르렀으니, 삼공(三公)이 존귀함을 양보하고 백관(百官)과 자리를 달리하여 앉았지만, 공은 행동거지를 더욱 신중하게 하여 부귀와 권세에 동요되지 않았다.
온화한 마음과 공손한 자세를 견지하고 지조를 더욱 겸손하게 하여, 노비는 한 명도 늘리지 않았고 전원(田園)은 한 이랑도 넓히지 않았다.
문에는 말과 수레를 타고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고 입으로는 조정의 의론을 말하지 않았으니, 티끌세상 밖으로 초탈하여 조금도 부귀에 오염되지 않았다.
저 얕은 식견을 가진 사람이 본다면 그 한량(限量)을 헤아릴 수 없을 테지만,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은 인망은 진실로 공을 제쳐 두고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없다. 공이야말로 진실로 기화(氣化)의 성쇠(盛衰)와 세도(世道)의 소장(消長)에 관계되니, 옛날의 이른바 훌륭한 덕을 지닌 큰 인물이라는 경우에 해당하는 분이 아니겠는가.
공의 부인 창원 황씨(昌原黃氏)는 회산부부인(檜山府夫人)에 추봉(追封)되었다. 예조 좌랑(禮曹佐郞)을 역임하고 이조 참판(贈吏曹參判)에 증직된 휘 성(珹)이 부인의 선고(先考)이다. 부덕(婦德)을 잘 갖추어 집안을 다스리는 데 법도가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포를 만들어 공을 도와 대부인을 섬기니, 대부인이 가난을 잊을 수 있었다. 만력 갑오년(1594, 선조27)에 원주(原州)의 관아에서 운명하였으니, 태어난 신유년(1561, 명종16)으로부터 34년의 세월이 흐른 때였다. 부인을 안장한 지 또 34년 뒤에 비로소 공과 합장하였다.
2남 4녀를 두었는데, 중궁 전하는 여섯째이시다. 세자를 낳으시니,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강석기(姜碩期)의 딸을 책봉하여 빈(嬪)을 삼았다. 봉림대군(鳳林大君) 호(淏)는 신풍군(新豐君) 장유(張維)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인평대군(麟坪大君) 요(㴭)는 아직 궁을 나가지 않았다.
장남은 곧 부평군(富平君 한회일(韓會一))으로, 아들은 생원(生員) 이성(以成)과 이평(以平)이고, 딸들은 참봉(參奉) 신익륭(申翊隆)과 정하(鄭何)에게 시집갔다. 공의 막내아들 소일(昭一)은 요절하여 후사(後嗣)가 없다. 공의 맏딸은 종부시 정(宗簿寺正) 이유연(李幼淵)에게 시집가서, 별좌(別坐) 안헌규(安獻規)에게 시집간 딸을 두었다.
둘째 딸은 대사간(大司諫) 여이징(呂爾徵)에게 시집갔다. 셋째 딸은 참의(參議) 정백창(鄭百昌)에게 시집가서 아들 선흥(善興)과 선홍(善弘)을 낳았고, 딸은 김진표(金震標)에게 시집갔다. 공은 측실(側室)과의 사이에서 두 딸을 낳았는데 모두 허통(許通)되었으며, 이환(李煥)과 진원 부수(珍原副守) 세완(世完)이 그 사위들이다. 내외(內外)의 손자와 증손자 몇 명은 모두 어리다.
내가 생각건대 공의 선대는 9대에 걸쳐 공경(公卿)의 지위에 올라 벼슬이 계속 이어졌다. 그 후 중간에 곤경을 만나 4대 동안 번창하지 못하였으나, 아름다운 덕과 복을 쌓아 공에게서 크게 나타났다. 그리하여 공의 성대한 업적과 큰 공렬이 불같이 일어나 더욱 성대해지고 밝게 사록(沙麓)의 상서로움을 열어 많은 자손을 낳아 후손이 번성하니, 나라에 한없이 융성하고 태평한 복이 있게 하였고, 한씨(韓氏) 가문에도 그와 더불어 경사가 있게 하였다.
속어에 “황하와 바다의 넓음은 작은 시냇물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고, 화산(華山)과 태산(泰山)의 높음은 한 웅큼의 흙이 쌓여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창대한 업적은 한 치 한 푼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진실로 맞는 말이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천제께서 동방을 살피시니 / 帝省東方
능히 그 덕과 같은지라 / 克類厥德
이에 훌륭한 임금을 내리고 / 乃降元和
이에 뛰어난 신하도 주시네 / 乃錫輔碩
악독에 정기 얽혀 / 嶽瀆絪縕
대인이 용으로 변하니 / 大人龍變
탁월한 한공 / 有卓韓公
시대의 큰 선비로다 / 時維魁彥
예악과 문장 겸비하여 / 禮樂文章
명성과 업적 광대했고 / 聲猷彌廣
우뚝한 풍도 만물의 표준이었으니 / 巍標準物
만백성이 바라보았네 / 萬夫攸望
선조께서 재위하실 때 / 宣廟當陽
많은 인재가 세상을 달렸는데 / 群才騖世
공이 발탁되어 / 公膺迪簡
하나하나가 임금의 뜻과 맞았지 / 動合宸契
문무를 경위처럼 갖추어 / 經文緯武
좌우에서 보좌함이 다 이치에 맞았으니 / 左右俱宜
내직에 있으면 지방관으로 쓸 걸 생각하고 / 內思外庸
멀리 있으면 반드시 그리워하셨네 / 居遠必懷
사단 이미 쌓아 / 師壇旣築
봉록과 지위 높아지니 / 祿位斯崇
내달리는 군사들도 / 駪駪士馬
또한 잘 따랐지 / 亦是率從
호남에서 영남으로 / 由湖以嶺
관서와 관북까지 / 洎關西北
넉넉하게 정사 펼쳐 / 敷政優優
마침내 치적 이루었네 / 迄厥成績
백륙 년에 도가 사라지니 / 百六道消
황극이 기울어 / 皇極之頗
선한 사람을 원수에게 주었으니 / 以善與仇
저 못된 사람들을 어찌하랴 / 匪人則那
세상 어디서든 다 마땅하게 처신하여 / 八表俱宜
나의 행실 의혹되지 않으니 / 我行不惑
곤경에 처해서도 매우 편안하여 / 在險孔易
그 굽은 것을 펴려고 하지 않았네 / 勿伸其蠖
천지가 다시 열려 / 天地重開
공이 떨쳐 일어났지만 / 公于奮興
깊고 넓은 관부에서 / 潭潭公府
평소처럼 행동하여 변하지 않았네 / 素履不驚
장추궁 비로소 세워져 / 長秋始建
나라 사람들이 공을 국구라 하니 / 國謂公舅
아름다운 상서가 더욱 발하여 / 休祥濬發
그 공적 더욱 두터워졌네 / 厥績愈厚
겸손하면 형통하는지라 끝내 길하게 되어 / 謙亨終吉
온갖 복이 다 이루어지니 / 百福所咸
비유하자면 저 높은 산을 / 譬彼喬嶽
사람마다 바라봄과 같구나 / 民靡不瞻
조정 반열에 나오도록 궤장 내리시니 / 贊班授几
인자의 영광이며 / 仁者之榮
온명과 황장목 쓰니 / 溫明黃腸
죽어서의 애도 비견될 것이 없네 / 歿莫與京
공의 정신 사라지지 않아 / 公神不亡
날마다 별자리에 빛나니 / 日麗星經
효성 지극한 아들 / 烝烝孝子
무덤을 여기에 만들었네 / 窀穸是營
영원의 남쪽에 / 鴒原之南
한강물 끝없이 흐르듯 / 漢流無極
돌에 새겨 글 묻으니 / 刻石埋辭
이 글은 사라지지 않으리라 / 斯文罔蝕
그 후 병자년(1636, 인조14)에 안산(安山)으로 이장하였다.
<끝>
[註解]
[주01] 한회일(韓會一) : 1580~1642.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형보(亨甫), 호는 협소(愜素)이다. 《인조실록》 10년 10월 11일 기사에
부평 부사(富平府使) 한회일 등을 모두 파직하여 서용하지 못하게 하라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한회일이 부평 부사를 역임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주02] 한란(韓蘭) : 청주 한씨(淸州韓氏)의 시조이다. 왕건(王建)이 후백제를 공격할 때 종군(從軍)하여 전공을 세웠다.
[주03] 한상경(韓尙敬) : 1360~1423. 본관은 청주, 자는 숙경(叔敬), 호는 신재(信齋)이다. 고려 때 과거에 급제하여 예의 좌랑(禮義佐
郞), 우정언(右正言), 종부 영(宗簿令), 밀직사 우부대언(密直司右副代言) 등을 역임하였다.
태조 때에 개국(開國)을 보필한 공로로 개국 공신이 되었으며, 중추원 도승지(中樞院都承旨), 도평의사사(都評議司使), 충청도
관찰사, 경기 좌도 관찰사, 공조 판서, 사헌부 대사헌, 영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책봉되었다.
《世宗實錄 西原府院君韓尙敬卒記》
[주04] 이산해(李山海) : 1539~1609.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漢陰文稿 卷12
輸忠翼謨光國推忠奮義協策平難功臣……鵝城府院君李公墓誌銘 幷序》
[주05] 공이 …… 심리(審理)하였다 : 정여립의 생질(甥姪)인 예문관 검열(檢閱) 이진길(李震吉, 1561~1589)에 관한 일로 한준겸이 처
벌된 것을 말한다. 《선조실록》 22년 12월 3일 기사에 “전 현감 한준겸, 전 좌랑 박승종, 전 저작 정경세는 이진길을 사국에 추천하
였는데, 옥사가 끝나기도 전에 서용되었기 때문에 여론이 좋지 않으니 성명을 거두소서.[前縣監韓浚謙前佐郞朴承宗前著作鄭經
世, 引進震吉於史局, 而獄事未畢, 遽蒙敍命, 物情未便, 請還收成命.]”라는 기록이 보인다.
[주06] 농사를 지으며 : 명농(明農)은 주(周)나라 주공(周公)이 그의 조카 성왕(成王)을 보좌하여 섭정하다가 권력을 넘겨주면서 자신의
거취에 대해 “나는 전야로 돌아가 농사일을 밝히겠소.[玆予, 其明農哉.]”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書經 洛誥》
[주07] 유성룡(柳成龍) :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이다. 《蒼石集 卷17 西厓柳先生行狀》
[주08] 마 제독(麻提督) : 명(明)나라의 장군 마귀(麻貴)이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명나라의 구원병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와 그 해 12
월 도원수 권율(權慄)과 합세하여 울산 도산성(島山城)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경주로 후퇴하였다.
[주09] 정인홍(鄭仁弘) : 1535~1623. 본관은 서산(瑞山), 자는 덕원(德遠), 호는 내암(來庵)이다. 《孤臺日錄 人名錄》
[주10] 이덕형(李德馨) : 1561~1613.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ㆍ쌍송(雙松)이다.
《漢陰文稿 附錄 卷3 行狀》
[주11] 정릉(定陵)과 …… 세우고 : 정릉은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 환조(桓祖)의 능이고, 화릉(和陵)은 환조의 왕비 의혜왕후(懿惠王后)의
능이다.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4년 1월 28일 기사에 “함경 감사 한준겸(韓浚謙)이 치계하기를 ‘정릉과 화릉의 비석을 이미
찾아냈으니, 글자를 새기는 사람을 보내 주소서.’라고 하였는데, 예조에 계하하였다.”라고 하였다.
[주12] 박응서(朴應犀)의 옥사(獄事) : 계축옥사(癸丑獄事)를 가리킨다. 1613년(광해군5)에 대북파(大北派)가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옥사이다. 박순(朴淳)의 서자 박응서 등 서얼에 대한 차별에 불만을 품고 있던 서자들이 대북파의 실권자인 이이첨의 사주를
받아 허위자백하며 영창대군을 비롯한 소북파를 제거하였다.
[주13] 연흥공(延興公) :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 1562~1613)으로,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공언(恭彦), 시호는 의민
(懿愍)이다.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아버지로 연흥부원군에 봉해졌다. 1613년(광해군5) 이이첨(李爾瞻) 등에 의해
인목왕후 소생인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공격을 받아 사사되었고, 1616년에 폐모론이 일어나면서 다시 부관참시되었다.
[주14] 병세가 악화되자 : 대점(大漸)은 병이 위독하다는 말이다. 《서경》 〈고명(顧命)〉에 “아, 병이 크게 번져 오직 위태하다.[嗚呼, 疾大
漸惟幾.]”라고 하였다.
[주15] 대군(大君)이 …… 바라노라 : 이것은 선조(宣祖)의 유교(遺敎) 내용의 일부로, 자세한 내용은 《광해군일기》 즉위년 2월 2일 기사
에 보이는데, 이민구의 기술은 선조의 유서를 요약한 것이다. 칠인(七人)은 유교칠신(遺敎七臣)으로 불리는 유영경(柳永慶), 한응
인(韓應寅), 박동량(朴東亮), 서성(徐渻), 신흠(申欽), 허성(許筬), 한준겸을 가리킨다.
[주16] 유활(柳活) : 1576~? 본관은 흥양(興陽), 자는 원숙(源叔), 호는 태우(泰宇)이다.
[주17] 참의공(參議公) : 한백겸(韓百謙, 1552~1615)으로,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명길(鳴吉), 호는 구암(久菴)이다.
《愚伏集 卷18 通政大夫戶曹參議韓公墓碣銘 竝序》
[주18] 역경(逆境) : 진박(震剝)은 진괘(震卦)와 박괘(剝卦)를 가리키는데, 모두 좋지 못한 일을 의미한다. 《주역》 〈진괘〉에 “연거푸 오
는 우레가 진괘이니, 군자가 이를 보고서 두려워하며 덕을 닦고 반성한다.[洊雷震, 君子以, 恐懼修省.]”라고 하였다. 또 〈박괘 육
사(六四)〉에 “상을 깎아 살갗에 이름이니 흉하다.[剝牀以膚, 凶.]”라고 하였다.
[주19] 신유년에 여주(驪州)로 옮겼다 : 이 내용은 여주로 이배(移配)되었다기 보다는 거주지를 옮겼다는 말인 듯하다. 《광해군일기》 13
년 8월 24일 기사에 “한준겸을 도원수로 삼았다.[以韓浚謙爲都元帥]”라는 기록이 있는데, 그 아래에 “이때 준겸은 적소에서 사
면을 받은 다음 여주에서 우거하였다.[時, 浚謙自謫所蒙宥, 寓居驪州.]”라는 설명이 있다.
[주20] 건노(建虜)가 …… 보고되었다 : 요동이 후금(後金)에 점령되었다는 말이다. 건노는 건주(建州)의 오랑캐라는 말로, 후금(後金)을
가리킨다.
[주21] 국구(國舅) : 폐부(肺腑)는 본래 왕실의 가까운 인척을 가리키는데, 한준겸은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아버지이므로, 직접 국구로
풀이하였다.
[주22] 재성(財成) : 재성보상(財成輔相)의 준말로, 지나치면 억제하고 모자라면 보완하는 것을 말한다. 《주역》 〈태괘(泰卦) 상(象)〉에
“하늘과 땅의 기운이 서로 통하는 것이 태괘이다. 제왕이 이것으로써 천지의 도를 지나침 없이 이루고, 천지의 일을 모자람 없이 도
와서 백성을 보호하고 인도한다.[天地交泰, 后以, 財成天地之道, 輔相天地之宜, 以左右民.]”라고 하였다.
[주23] 땅이 …… 같았으며 : 한준겸의 덕량(德量)을 묘사한 말이다.
[주24] 한 충헌(韓忠獻) : 북송(北宋)의 정치가 한기(韓琦, 1008~1075)로, 자는 치규(稚圭), 시호는 충헌이다. 젊어서 진사에 합격하여
사천(四川)의 기민(飢民) 190만 명을 구제하고, 이어 서하(西夏)의 침입을 격퇴하여 변경 방비에도 역량을 과시함으로써, 30세에
이미 명성을 떨쳤다.
[주25] 사 문정(謝文靖) : 동진(東晉)의 명재상 사안(謝安, 320~385)으로, 자는 안석(安石), 시호는 문정이다. 젊어서부터 청담(淸談)을
좋아하여 여러 차례 벼슬을 거절하고 회계군(會稽郡) 산음현(山陰縣)의 동산(東山)에서 왕희지(王羲之), 손작(孫綽) 등과 어울렸
으나, 후에 벼슬길에 올라서는 공적을 쌓고 이름을 날렸다.
[주26] 양지(養志) : 어버이의 뜻을 받드는 효성을 말한다.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증자가 부친 증석(曾晳)을 봉양할 때의 일과 증
자의 아들이 증자를 봉양할 때의 일을 비교해 거론하면서, 효행은 비슷하지만 증자는 부모의 뜻을 봉양하였고[養志], 증자의 아들
은 부모의 몸만 봉양한 것[養口體]이라며, 진정한 효도는 뜻을 봉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주27] 감군은(感君恩) : 조선 초기의 악곡으로, 임금의 은택을 찬양하고 충성을 다하겠다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작자는 자세하
지 않으며, 현재 그 가사와 악보가 《양금신보(梁琴新譜)》와 《대악후보(大樂後譜)》에 실려 전한다.
[주28] 태사(太師)의 고향 : 청주 한씨의 비조(鼻祖) 한난(韓蘭)의 고향으로, 지금의 청주시(淸州市) 상당구 방서동이다.
[주29] 이정(彝鼎)에 …… 것이다 : 한준겸의 공로가 언제까지나 잊히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정은 종묘(宗廟)에 쓰는 술그릇과 솥으
로, 큰 공이 있으면 이정(彝鼎)에 그 사실을 새겨 두었다.
[주30] 영광전(靈光殿)처럼 우뚝하였다 : 선조(宣祖)가 재위할 당시 훌륭한 인재가 많았지만, 끝까지 홀로 남은 석학(碩學)은 한준겸이라
는 말이다. 영광(靈光)은 한(漢)나라 경제(景帝)의 아들인 공왕(恭王)이 산동성 곡부(曲阜)에 건립한 영광전을 가리키는데, 후한
(後漢) 왕연수(王延壽)의 글에 “서경의 미앙궁과 건장궁으로부터 모든 궁전이 파괴되어 허물어졌지만, 영광전만은 우뚝 홀로 서 있
었다.[自西京未央建章之殿, 皆見隳壊, 而靈光巋然獨存.]”라고 하였다. 《東漢文紀 卷14 魯靈光殿賦序》
[주31] 강석기(姜碩期) : 1580~1643. 본관은 금천(衿川), 자는 복이(復而), 호는 월당(月塘)ㆍ삼당(三塘),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소
현세자빈(昭顯世子嬪)의 아버지로, 소현세자가 죽은 뒤 강빈 또한 저주 사건의 주모자로 모함을 받아 사사되었다. 이미 죽은 강석
기는 관작을 추탈당하였고, 그의 부인은 처형되었으며, 아들 문성(文星)과 문명(文明)은 장살(杖殺)되었다. 숙종 때 복관(復官)되
었다.
[주32] 봉림대군(鳳林大君) 호(淏) : 저본(底本)에는 어휘(御諱)이므로 쓰지 않았지만, 여기서는 보충하여 풀이하였다.
[주33] 밝게 …… 열어 : 한준겸이 인열왕후를 낳았다는 말이다. 사록(沙麓)은 한(漢)나라 원제(元帝)의 비(妃)인 원후(元后)가 태어난 곳
으로, 대개 왕비가 태어난 곳을 가리킨다.
[주34] 많은 …… 번성하니 : 인열왕후가 많은 자녀를 낳아 왕실의 자손이 번성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즉백사남(則百斯男)은 자손을 많이
낳았다는 말로, 《시경》 〈사제(思齊)〉에 “태사께서 그 아름다운 명성을 이으시니, 수많은 아들을 두었네.[大姒嗣徽音, 則百斯
男.]”라고 하였다.
과질(瓜瓞)은 《시경》 〈면(綿)〉에 “면면히 이어진 오이 덩굴이여.[綿綿瓜瓞]”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로, 오이 덩굴이 끝없이 뻗어
나가 오이가 주렁주렁 열리는 것처럼 자손이 번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35] 악독(嶽瀆)에 정기 얽혀 : 한준겸이 천지의 빼어난 기운을 타고났다는 말이다. 악독은 오악(五嶽)과 사독(四瀆)을 이른다. 오악은
중국의 다섯 명산으로, 태산(泰山), 화산(華山), 형산(衡山), 항산(恒山), 숭산(嵩山)을 가리키고, 사독은 네 개의 큰 물로, 양자강
(揚子江), 황하(黃河), 회수(淮水), 제수(濟水)를 가리킨다.
인온(絪縕)은 서로 화합하여 만물을 생성하는 하늘과 땅의 두 기운을 말한다.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천지의 기운이 얽
히고설킴에 만물이 화하여 엉기고, 남녀가 정을 맺음에 만물이 화생한다.[天地絪縕, 萬物化醇, 男女構精, 萬物化生.]”라고 하였
다.
[주36] 선조께서 재위하실 때 : 당양(當陽)은 임금이 보위에 있을 때를 가리킨다. 왕은 남면(南面)하기 때문에 당양이라 한 것이다.
《춘추좌씨전》 문공(文公) 3년 기사에 “천자는 양에 당하며 제후는 명을 듣는다.[天子當陽, 諸侯用命也.]”라고 하였다.
[주37] 공이 발탁되어 : 한준겸이 선조에게 발탁되었다는 말이다. 적간(迪簡)은 가려 뽑은 인재를 가리키는 말이다. 《서경》 〈다사(多士)〉
에 “이제 너희는 ‘하나라의 유민들은 은나라 왕정에 발탁되어, 모든 관직에 종사했었다.’라고 말한다.[今爾其曰, 夏迪簡在王庭,
有服在百僚.]” 하였다.
[주38] 사단 이미 쌓아 : 한준겸이 오도도원수(五道都元帥)에 임명된 일을 말한 것이다.
[주39] 백륙(百六) …… 기울어 : 광해군이 등극하여 한준겸이 좌절을 겪게 된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다. 백륙은 4천 5백 년인 1원(元) 중
에 다섯 번의 양액(陽厄)과 네 번의 음액(陰厄)이 찾아오는데, 양액이 1백 6년마다 있게 되므로, 이를 백륙회(百六會)라 하여 재앙
을 의미한다. 《漢書 律歷志上》
[주40] 세상 …… 않았네 : 한준겸이 유배를 당하는 곤경에 처했지만, 상황에 순응하는 자세를 견지하며 세상에 다시 나가려는 뜻이 없었다
는 말이다.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자벌레가 몸을 굽히는 것은 장차 펴기 위함이다.[尺蠖之屈, 以求信也.]”라고 하였
다.
[주41] 천지가 …… 않았네 : 인조반정(仁祖反正) 뒤에 한준겸이 다시 조정에 나왔지만, 예전의 지조와 태도를 바꾸지 않고 일관된 모습을
지켰다는 말이다.
[주42] 장추궁(長秋宮) …… 하니 : 인조의 등극으로 한준겸의 딸이 인열왕후가 되고 한준겸은 국구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는 말이다.
장추궁은 황후가 거처하던 한(漢)나라의 궁전 이름이다.
[주43] 겸손하면 …… 되어 : 한준겸이 겸양의 태도를 견지하여 마침내 좋은 일이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주역》 〈겸괘(謙卦)〉에 “겸은 형
통하니, 군자는 끝마침이 있다.[謙亨, 君子有終.]”라고 하였다.
[주44] 조정 …… 없네 : 한준겸이 살아서는 영광을 누리고 죽어서는 애도를 받았다는 말이다. 온명(溫明)은 왕공(王公)이나 귀족의 시신
위에 걸어 놓는 장구로서 사각형의 나무 상자에 옻칠로 그림을 그린 경대(鏡臺)를 가리킨다. 황장(黃腸)은 황장목(黃腸木)의 준말
로, 나무 속고갱이가 노랗게 된 것으로서 좋은 관재(棺材)이다. <끝>
ⓒ 충남대학교 한자문화연구소 | 강원모 오승준 김문갑 정만호 (공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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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領敦寧府事西平府院君韓文翼公墓誌銘 幷敍
天啓七年秋。領敦寧府事西平府院君柳川韓公卒。旣練。其嗣胤富平守會一以公不朽事。徧託于當世名能文章素與公深者。而幽竁之刻。實屬我先人。先人旣心許之矣。業未卒。先人無祿卽世。富平君移所以屬先人者命不佞。不佞非其人。非其人則不徵。且誠椎不文。曷足以敷揚懿烈。垂世罔極。顧富平君之言曰。而之銘吾父也。以續而父志也。不佞則蔌蔌中咽矣。尙何辭以辭。按狀。韓。淸之大姓。鼻祖蘭佐王氏開業。位至太師。曰康。相忠烈王。諡文惠。生謝奇。寶文閣提學。生渥。右政丞上黨府院君。生公義。政堂文學淸城君。生修。右文館大提學諡文敬。以道學鳴。生尙敬。入我朝官領議政西原府院君。生惠。咸吉道觀察使。生繼禧。左贊成諡文靖。至高祖諱士武。漢城判官。贈左參贊。曾祖諱承元。旌善郡守。贈左贊成。祖諱汝弼。中樞府經歷。贈領議政。考諱孝胤。通經服禮。顯名富世。卒鏡城判官。贈領議政。妣平山申氏。禮賓寺正諱健之女。嘉靖丁巳八月生公。諱浚謙。字益之。幼有異質。體▒宏遠。六歲解綴文。髫齡而學業已成。見者嘖嘖稱公輔器也。己卯。捷生員壯元。進士第七名。明年。議政公卒。致毀踰制。喪畢。東銓屈公補泰陵直。丙戌。擢文科。卽選藝文檢閱。宣廟御題試儒臣。公詩居首。又次御製以進。俱加蕃錫。大學士李山海稱引特盛。由注書奉敎。己丑陞典籍。丏外得衿川縣。宣廟詢其有母。然後乃許除。朝議惜其出。至論劾銓官。秋。賜湖堂讀書暇。十月。鄭汝立謀反事發。以其甥用薦入史局。逮公下理。宣廟察其冤釋之。遽 命復敍。猶爲言者所持。遂盡室歸原州。買田明農。爲終身計。壬辰變起。遙授禮曹佐郞. 正郞. 侍講院司書. 江原都事。路梗未及達。原州敗。卽拜公爲牧使。喣摩剔搔。闔境賴完。乙未。始以司憲府持平赴召。自是連除侍講院弼善,司諫院正言,弘文館校理,知製敎。文忠柳相國素重公。辟爲從事。軍國鉅細。咸資贊決。唯朝廷亦欲不次用公。纔擬副修撰。復擬嶺南方伯。古未嘗有也。丁酉。歷檢詳,舍人,應敎,司諫。兼參校,輔德,執義,典翰。秋承宣缺。上破資格擢同副承旨。時賊鋒內逼。天將麻提督邀上渡江。督發重臣調蒭輓甚急。上命公往提衡戎政。襄益弘多。沿路設撥。日夜通警報。著爲永制。冬。以右承旨特進嘉善階。觀察京畿。群不逞旣逐西厓相。百訃沮撓公不已。竟露章自免。拜大司成。己亥。按嶺南節。鄭仁弘瞷知公薄之不與通。嗛前後憾。嗾其黨劾公。庚子。敍兵曹參判,同知春秋館事。辛丑。兼副體察使。壬寅。全羅監司。癸卯。遞禮曹參判。國家新去亂。疆域疏虞。上朝而問將。首揆漢陰李公薦公職秩雖卑。望實雅隆。廷臣罕出其右。遂拜四道都元帥。從亞卿超序制閫。而一時譚藝苑者亦以歸公。由是再爲副提學,吏曹參判,世子賓客。乙巳。視師南服還。特陞戶曹判書。翌年詔使至。館儐供億。經調有裕。移大司憲。同知經筵。尋觀察平安道。戊申。遭大夫人憂。旣除。歷大司憲,漢城判尹。出爲咸鏡道觀察使。至則重建定和陵碑。豎石于龍潛舊地。敎民以敬。首先闡風化。禮高年。旌異行。奬進蒙學。提誨不倦。譯文公小學家禮。分布勸講。北俗丕作彬彬。質有其文。滿三歲不許代。至癸丑朴應犀獄起。誣殺國舅延興公。幽永昌大君。株連善類。機穽四發。初宣廟大漸。知光海不克保骨肉。手書遺敎略曰。大君幼稚。未及長成。人心難測。願諸公愛護保持。書封若將付公等七人者。實未嘗出也。及是。爾瞻謂非先王御筆。文致七臣罪。囑柳活削公等仕版。又訹死囚鄭浹。濫引名公卿。朝序盡空。公被囚將置對。或愍公且不測。以公與延興纖芥可證。勸之款實。公不肯曰。死生有命。吾惡夫賣▒蘄免。爰書上。放歸田里。出圜戶。卽就湖莊。伯參議公已謝事歸休。對舍相依。昕夕怡愉。安時委順。不以患難置懷。兇徒慕公名。有欲參尋候問。則斂身自避。又不以震剝頹其守。爾瞻旣顓朝柄。愈欲廢母后。追戮延興。論竄七臣。公責忠原縣。塞兌屛迹。五年不踰閾。辛酉。移黃驪。未幾建虜覆遼左。羽報踵聞。廟堂擧公爲督。起徒中擢五道都元帥。公輿疾而趨。控辭闕下。光海曰。無庸大寒索裘晩矣。於是黽勉開府于中和。知時事已去。唯和節持衆心。癸亥春。今上靖內難。中宮殿下位坤極。進公輔國崇祿大夫領敦寧府事。西平府院君。亟召還朝。前後兼留都都體察使,都摠管,知春秋館。俱引肺腑嫌。固讓不拜。丁卯。奴賊闌入海西。 東朝南下。公以陪衛大將從。仍掌撫軍司。寇退。奉詣行在。南還京。舊風復作。至七月益甚。纊息已微。猶命遷寢正席以終。上聞訃震衋。輟三日朝。王世子出次擧哀。臨弔加禮。卿士大夫下逮臺輿走卒。莫不失聲齎咨曰。國將如何。自始歿比葬。官庀喪事。中使監護。度支致賵。儀部致祀。太常議易名之典。贈諡文翼公。春秋七十有一。其歲九月。厝于原州陰枝村。遠近赴會者三百餘人。公質秀氣沈。寬而有制。淵子其識度也。裕乎其財成也。地載而海涵也。春噓而物發也。祥麟蹈德而儀鳳覽輝也。重厚篤實似韓忠獻。而文雅過之。風流遠致如謝文靖。而禮法優焉。平居。造次未嘗疾言遽色。擧止嚴凝。若不可干。卽之溫溫。薰和盎襲。褊心者喪其忮。浮競者斂其躁。聞人過惡。輒踰時不樂。殷勤善諭。不爲刻覈之論。是以人亦無怨。事有可怒可愕。坦然順應。幾微不外見。其被逮在塗。金吾郞承權凶喉氣。待之不善。公初無恨意。終身不泄其名。篤論者謂公陰功濟物而物不知。盛德及人而人自服。殆非夸也。公孝友篤至。奉事大夫人。志養爲務。始處窮約。必有旨瀡之供。宦成之後。出入雄藩顯位。參議公亦綰鉅邑。蓋太夫人已躋耋矣。雕軒騎從。往來赫舃。光華榮貴。擧代莫二。太夫人每當內集。悉去衆樂。唯奏感君恩。公爲演成續曲。約同朝列卿作壽親禊。稱觴上壽。勝事傾一時。宣廟特賜酒樂以異其數。而公方依依膝下。白首而嬰兒慕也。與參議公居相師友。至老不改樂。仲氏旣早世。姊妹多歿。撫恤孤㷀。咸得其所。見人貧乏。振施若不及。族里取足。猶寄藏焉。表太師之閭。結壇以祀。追遠也。設宗人之會。以明譜牒。惇宗也。嘗就先壟構一室甚陋。號曰歸來齋。雖世故未夷。不敢龍蛇屈伸。而丘壑之寄。逌然自遠。公聰識絶倫。經眼輒不忘。國家典章遺文。故事沿革益損。歷歷如指掌。尤尙禮學。被服必於儒。爲文章。平贍醲渾。辭達不苟。韻語沖健自適。不屑屑於藻繢。早以事業致用。故文辭多放失。嗚呼。當宣廟在宥。得人爲盛。鴻厖魁碩之士詎不林林哉。遭時變化。凋謝略盡。公用儒雅行業。受人主特達之知。風猷經濟。彝鼎恒新。中羅文罔。躓而復起。神扶天佑。靈光巋然。履險居亨。流坎一軌。不佞竊窺公削版矣放逐矣。遷于忠遷于驪。顏貌充然。不知其阨于處也。由謫籍倏起登壇。以至稱尊爲國舅。三公讓貴。百寮絶席。蹈履益安重。不爲貴勢動。持沖挹巽。執操愈謙。奴婢不添十指。田園不拓一畝。門無車馬。口屛朝議。超軼乎埃壒之表。絶無脂膏點染。自夫譾識者觀之。莫有測其涯量。而泰山北斗之望。固不得舍公而它屬。若公者眞關氣化盛衰。與世道消長。而古所謂長德鉅人者非耶。公配昌原黃氏。追封檜山府夫人。禮曹佐郞贈吏曹參判諱珹其考也。梱德甚備。肥家有法。朝夕治脯𠛆。佐公事太夫人。太夫人忘貧。萬曆甲午。卒于原之衙廨。距其生辛酉。三十四稔。自窆後又三十四年。始與公合。生二男四女。中宮殿下序弟六。載誕聖儲。冊司憲府大司憲姜碩期女爲嬪。曰鳳林大君。御諱 聘新豐君張維女。曰麟坪大君㴭。未出閤。男長卽富平君。有子生員以成,以平。女參奉申翊隆,鄭何。季昭。一夭無后。女長適宗簿寺正李幼淵。有女別坐安獻規。次適大司諫呂爾徵。次適參議鄭百昌。有子善興,善弘。女金震標。公置貳室。生二女許通。李煥,珍
原副守世完其壻也。內外孫曾若干人俱幼。不佞永惟念。公之先比九世爲公爲卿。珪組相嬗。其後中阨。四代不昌。儲休蓄祉。駿發于公。盛業閎烈熾而彌融。光啓我沙麓之祥。則百斯男。本枝瓜瓞。致家邦隆平無彊之福。而韓氏與有慶焉。語曰。河海之廣。非涓流所發。華岱之崇。非撮土所積。昌大之業。非銖寸所基。誠哉言也。銘曰。
帝省東方。克類厥德。乃降元和。乃錫輔碩。嶽瀆絪縕。大人龍變。有卓韓公。時維魁彥。禮樂文章。聲猷彌廣。巍標準物。萬夫攸望。宣廟當陽。群才騖世。公膺迪簡。動合宸契。經文緯武。左右俱宜。內思外庸。居遠必懷。師壇旣築。祿位斯崇。駪駪士馬。亦是率從。由湖以嶺。洎關西北。敷政優優。迄厥成績。百六道消。皇極之頗。以善與仇。匪人則那。八表俱宜。我行不惑。在險孔易。勿伸其蠖。天地重開。公于奮興。潭潭公府。素履不驚。長秋始建。國謂公舅。休祥濬發。厥績愈厚。謙亨終吉。百福所咸。譬彼喬嶽。民靡不瞻。贊班授几。仁者之榮。溫明黃腸。歿莫與京。公神不亡。日麗星經。烝烝孝子。窀穸是營。鴒原之南。漢流無極。刻石埋辭。斯文罔蝕。其後丙子。遷厝安山。<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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