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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黃進)
1550년(명종 5) - 1593년(선조 26) / 향년 4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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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훈련원판관, 익산군수, 충청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 본관은 장수(長水)이고, 자는 명보(明甫). 황희(黃喜)의 5대손이며, 지중추부사 황사효(黃事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부사직 황개(黃塏)이고, 아버지는 증좌의정 황윤공(黃允恭)이며, 어머니는 방씨(房氏)로 봉사 방응성(房應星)의 딸이다.
1576년(선조 9)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그 뒤 거산도찰방에 기용되고 안원보권관(安原堡權管)을 역임하였다. 이어 다시 선전관이 되어 통신사 황윤길(黃允吉) 일행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그 뒤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를 거쳐, 동복현감에 임명되었다.
이후 장차 있을 왜란에 대비해 무예의 단련에 열중하였다.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온 뒤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황윤길의 예상과 뜻을 같이하게 되면서 이에 대한 준비를 하였던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을 따라 군대를 이끌고 용인에서 왜군과 대적했으나 패하였다.
이 후 남하하다가 진안에 침입한 왜적 선봉장을 사살하고 이어 안덕원(安德院 : 오늘날의 전라북도 전주시 산정동에 있던 院의 하나)에 침입한 적을 격퇴하였다. 그리고 훈련원판관으로 이현전투(梨峴戰鬪)에 참가해 왜적을 격퇴하였다. 이 공으로 익산군수로 충청도조방장을 겸하였다.
1593년 2월 전라병사 선거이(宣居怡)를 따라 수원에서 왜군을 맞아 싸웠다. 3월에는 충청도병마절도사가 되어 진(陣)을 안성으로 옮겼다. 여기서 군대를 훈련시키고 대오를 정비해 죽산성에 있는 적과 대치하였다. 이 때 적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가 안산성을 탈취하고자 죽산부성(竹山府城)을 나와 안성으로 진군하였다. 이에 군사를 이끌고 왜군에 접전해 죽산성을 점령했으며, 퇴각하는 왜군을 상주까지 추격해 대파하였다.
그 뒤 6월 적의 대군이 진주를 공략하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와 함께 진주성(晉州城)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성을 굳게 지키며 9일간이나 용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뒤에 좌찬성에 추증되고, 진주의 창렬사(彰烈祠), 남원의 민충사(愍忠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무민(武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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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선생집 제14권 / 비명(碑銘)
절충장군 수 충청도병마절도사 증 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황공 묘비명 병서
(折衝將軍守忠淸道兵馬節度使贈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黃公墓碑銘 幷序)
왜구(倭寇)가 난리를 일으킨 이래로 그 흉악한 칼날이 온 누리를 범했는데, 그중에서도 적(賊)이 신경을 곤두세워 다급하게 공격하면서 반드시 탈취하고야 말았던 사례로 진주(晉州)와 같은 경우는 없었고, 장사(將士)가 온 힘을 기울여 항전(抗戰)하면서 엄청난 숫자의 적을 죽였던 사례도 진주와 같은 경우는 없었고, 성이 함락되려 할 즈음에 명장(名將)과 열사(烈士)가 목숨을 바쳐 절조를 지키며 성과 함께 모두 죽어갔던 것 역시 진주처럼 그렇게 많았던 경우는 있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서도 절도사 황공이 가장 저명한 인물로 부각된다고 일컬어져 온다.
공은 신묘년(1591, 선조 24)에 통신사(通信使)를 따라 일본에 들어갔다가 적의 형세로 볼 때 반드시 군대를 출동시키리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전대(纏帶)를 털어 보검(寶劍) 2자루를 사면서 말하기를, “머지않아 적이 쳐들어올 때 내가 장차 이 검을 쓰리라.”하였다.
그러고 나서 얼마 뒤에 동복 현감(同福縣監)이 되었는데, 공무(公務)를 파하고 나면 언제나 갑옷을 입고 말을 치달리기도 하고 혹 거약곡용(距躍曲踊)을 하며 무용(武勇)을 익히기도 하였다. 이듬해 왜구가 쳐들어오자 공이 관찰사를 따라 근왕병(勤王兵)을 이끌고 북상(北上)하였다.
용인(龍仁)에 이르러 군대가 무너졌으나 당시에 공은 휘하 병력을 거느리고 수원(水原)에 잠복하고 있었으므로 그 부대만은 온전히 보전된 채 돌아올 수가 있었다. 제장(諸將)과 함께 웅치(熊峙)를 지키고 있던 중, 적이 전주(全州)로 향하자 공이 병력을 이끌고 그곳으로 나아갔는데, 안덕원(安德院)에서 적과 만나 접전을 벌인 결과 크게 격파하였다. 이 공으로 훈련판관으로 관직이 승진되었다.
또 여현(黎峴)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곳이 적에게는 요충(要衝)이 되는 곳이었으므로 적이 밤에 습격을 가해 왔다. 이때 공이 탄환을 맞아 다리에 부상을 입었으나 더욱 힘을 내어 싸운 결과 적이 큰 손상을 입고 물러가려 하였다. 그런데 공이 또 총탄을 맞고 땅에 쓰러져 숨이 다하려 하자 적이 그 기세에 편승하여 다시 진격해 왔는데, 부하 군사들이 힘을 합쳐 격퇴하였다.
논하는 자들은 말하기를 ‘만약 이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했다면 적이 필시 호남 지방 전역을 유린했을 것이다.’고 한다. 그런데 주장(主將)이 승첩 보고를 올리면서 공의 공(功)을 약소하게 아뢴 결과 상이 훈련부정(訓練副正)으로 올라가는 데에 그쳤다.
정 상공 철(鄭相公澈)이 남쪽 지방을 체찰(體察)하면서 공의 명성을 듣고 발탁하여 임시로 익산 군수(益山郡守)와 조방장(助防將)을 겸하게 한 뒤 이를 조정에 보고하여 정식으로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절도사(節度使) 선거이(宣居怡)를 따라 병력을 이끌고 북상하여 수원에 주둔하면서 척후(斥候)로 전방에 나가 있던 중 적을 만나 역전(力戰)을 벌이고 나서 그 말을 타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그 공으로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품계가 오르면서 충청도 조방장이 되었고, 계사년 봄에는 본도(本道)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임명되었다. 경성에서 적이 퇴각하자 공이 적의 뒤를 추격하였는데 상주(尙州) 적암(赤巖)에 이르러 적과 전투를 벌여 연거푸 승리를 거두었다.
이해 6월에 적장(敵將) 청정(淸正)이 대대적으로 진주를 범하려 하자, 공이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절도사 최경회(崔慶會) 및 이종인(李宗仁) 등 제장(諸將)과 진주에서 회동하였다. 이때 공이 말하기를, “제군(諸軍)이 모두 한 성으로 몰려들어갔다가 포위를 당한 상태에서 외부의 응원군이 없게 된다면 성이 필시 위태롭게 될 것이다.”하고, 스스로 일개 부대를 이끌고 성 밖에 주둔하면서 안팎으로 서로 응하여 적의 세력을 분산시켰으면 좋겠다고 하였으나, 창의사가 난색을 표했으므로 공이 어찌할 수 없어 마침내 성안으로 같이 들어가 사수(死守)할 계책을 세우게 되었다.
며칠 뒤에 적의 대병력이 이르러 해자(垓字)를 트고 구덩이를 메우는 한편 토산(土山)을 쌓아 비루(飛樓)를 세우고 죽붕(竹棚)과 목궤(木櫃)등 기계들을 제작한 뒤 성을 공격하면서 비오듯 포탄을 퍼붓기 시작하였다. 이에 공과 제장(諸將)이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면서 밤낮으로 조금도 쉬지 않았는데 쏘는 족족 적을 관통시키곤 하였다. 그리고 때마침 크게 내리는 비에 성이 무너져 내리자 공이 몸소 흙과 돌을 져 나르며 곧바로 다시 쌓아 보완하곤 하였다.
이렇게 서로 대치한 9일 동안 크고 작은 전투를 수십 회 치르는 과정에서 적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죽어 그 시체가 쌓인 것이 마치 언덕과 같았다. 그러던 중 이달 28일에 공이 느닷없이 탄환에 맞아 운명(殞命)하자 성안의 사기가 급격히 저하되었는데 적이 승세(勝勢)를 타고 재빠르게 공격을 가해 오는 바람에 성이 마침내 함락되고 말았다.
선묘(宣廟)가 공의 충렬(忠烈)을 갸륵하게 여겨 관원을 보내 사제(賜祭)하고 의정부 좌찬성을 추증하였으며, 또 그 고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할 것과 그 집안의 호역(戶役)을 면제해 줄 것을 명하였다. 이와 함께 그 고을에다 사당을 세우게 한 뒤 창렬(彰烈)이라는 편액(篇額)을 내리고, 김천일, 최경회 등과 함께 봄가을로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공의 휘(諱)는 진(進)이요, 자(字)는 명보(明甫)이다. 그 선조는 장수(長水) 사람인데, 세종조(世宗朝)의 명상(名相)인 익성공(翼成公) 희(喜)가 바로 공의 5대조이다. 익성이 판중추 호안공(胡安公) 치신(致身)을 낳고, 호안이 지중추 사효(事孝)를 낳고, 지추(知樞)가 부사직 개(塏)를 낳았는데 공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사직(司直)은 아들이 없어 종제(從弟)인 진사 원(愿)의 아들 윤공(允恭)을 아들로 삼았다. 윤공은 벼슬을 하지 않았으며 뒤에 좌의정의 증직을 받았으니 이분이 공의 부친이다. 모친 남양 방씨(南陽房氏)는 봉사(奉事) 응성(應星)의 딸로서, 가정(嘉靖) 경술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사람됨이 엄중(嚴重)하였고 기절(氣節)을 숭상하였으며, 장대한 체격에 아름다운 수염의 소유자로서 모습이 매우 기위(奇偉)하였다. 어려서부터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혔으며, 여력(膂力)이 남보다 아주 뛰어나고 민첩함이 비호(飛虎)와 같아 이종인(李宗仁)과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그리하여 서로 벗으로 친하게 지내면서 생사(生死)를 같이하기로 약속했었는데 결국은 그 뜻대로 되고 말았다.
나이 27세 때 무거(武擧)에 입격(入格)하여 선전관이 되었다가 모친상을 당해 그만두고 여묘(廬墓) 생활을 3년 동안 하였으며, 상복을 벗고 나서 거산도 찰방(居山道察訪)이 되었다. 계미년 시전(時錢)의 전역(戰役)에 참가하여 참획(斬獲)한 것이 매우 많았다.
그런데 친구 하나가 죄를 지어 충군(充軍)되었는데, 공을 세워야만 죄를 면하고 돌아갈 수 있는 처지에 놓여 있자 공이 참획한 것을 모두 그에게 주기도 하였다. 그 뒤 안원보(安原堡)의 권관(權管)을 거쳐 다시 선전관에 임명되었다가 제용감 주부(濟用監主簿)로 옮겨진 뒤 동복 현감(同福縣監)으로 나가게 되었다.
당초 공이 진주(晉州)로 나아가려 할 때 의병장 곽재우(郭再祐)가 공을 만류하며 말하기를, “진주는 외로운 성이니 지켜낼 수가 없다. 그리고 공은 충청도 절도사를 맡고 있는 만큼, 진주를 지키다 죽는 것은 직분에 걸맞지 않는다.”하였으나, 공은 말하기를, “이미 창의사(倡義使)에게 승낙한 이상 비록 죽는 한이 있어도 식언(食言)할 수는 없다.”하였다.
이에 곽재우가 공의 뜻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마침내 술잔을 나누며 서로 작별하였는데, 뒤에 공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애통해하며 슬퍼해 마지않았다. 아, 공과 같은 사람이야말로 정말 열장부(烈丈夫)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공이 죽었을 당시에는 성이 아직 함락되지 않은 상황이었으므로 이종인(李宗仁)이 공의 시신(屍身)을 수습하여 땅에 묻어 주었다.
그러다가 적이 물러간 다음 어떤 사람이 그 지점을 알려 준 덕택에 공의 시신을 찾아와 남원(南原) 풍산(楓山)에 안장하였다. 공의 부인 진주 소씨(晉州蘇氏)는 부장(部將) 충세(忠世)의 딸로서 현숙하고 부도(婦道)가 있었다. 공이 증직(贈職)됨에 따라 역시 정경부인(貞敬夫人)에 봉해졌으며 해마다 조정으로부터 주찬(酒饌)을 하사받았다.
슬하에 정직(廷稷)과 정열(廷說) 2남을 두었는데 모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정직은 현재 안동 판관(安東判官)이고 정열은 교동 현감(喬桐縣監)으로 있다. 두 딸은 출가하기 전에 모두 일찍 죽었다. 정직은 1녀를 두었다. 정열의 아들 위(暐)는 생원이고, 두 딸은 사인(士人) 박이혁(朴以爀)과 진사 방원량(房元亮)에게 출가하였다.
천계(天啓) 병인년에 소 부인(蘇夫人)이 죽자 장차 공의 묘소에 부장(祔葬)하려고 하였는데, 광중(壙中)에 물이 차 있었으므로 다시 선영의 옆 신향(辛向)의 언덕을 고른 뒤 마침내 공의 영구(靈柩)를 그곳으로 옮겨와 합장(合葬)하였다.
위(暐)가 장차 비석을 세우려고 하면서 정군 홍명(鄭君弘溟)을 통해 나에게 글을 부탁해 왔다. 공의 의열(義烈)에 대해서는 내가 평소부터 장하게 여겨 왔으므로 이에 사양하지 않고 명(銘)하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열장부(烈丈夫) 우리 황공 / 烈烈黃公
씩씩한 풍모에 출중한 무예 / 旣毅且武
강궁(强弓) 그대로 명중되고 / 弓彊命中
힘은 범과 같았어라 / 有力如虎
충성으로 방패 삼고 / 忠爲干櫓
의기(義氣)로 병장기 삼았나니 / 義則其兵
삼군을 뺏을 수 있을망정 / 三軍可奪
이 뜻은 어지럽힐 수 없었도다 / 此不可攖
진주성 지키는 일 / 晉陽之事
공의 직분 아니었지만 / 公非其職
한 번 승낙한 이상 / 一言已諾
죽을 줄 알고도 뛰어들었지 / 知死必卽
왜적 새까맣게 기어오르고 / 衝梯亂舞
포성은 잇따라 진동하는데 / 飛礮如霰
포위된 열흘 동안 / 一圍十日
하루에 열 번도 더 싸웠어라 / 一日十戰
공이 큰소리 부르짖자 / 公起大呼
병든 이 떨쳐 일어나고 / 罷病亦奮
악다문 입 피로 물든 얼굴 / 嚼齒沫血
귀신도 통분하여 울부짖었지 / 神咷鬼憤
성을 짓누르는 흉악한 기운 / 惡氛壓城
공의 이마 꿰뚫은 흉탄 한 발 / 丸穿公額
거목 쓰러짐에 / 大樹旣摧
성도 함께 무너졌네 / 金湯隨覆
공은 죽어도 죽지를 않아 / 公死不死
늠름히 생기 흘러넘쳐서 / 凜然猶生
하늘 찌르는 의열(義烈)의 그 기운 / 烈氣所洩
무지개 쏘고 천둥이 울리도다 / 虹射霆轟
공의 혼령 하늘로 올라가고 / 公神在天
체백(體魄)은 땅속에 묻혀 있나니 / 魄藏于土
비석에 새긴 나의 이 비명 / 刻詩山石
후대에 공의 풍모 전하리로다 / 以風來許
[주-D001] 거약곡용(踞躍曲踊) : 거약삼박(距躍三百) 곡용삼박(曲踊三百)의 준말로서, 거약삼박은 곧장 앞으로 뛰쳐나가며 3번 손으로 치는 것이고, 곡용삼박은 뒤로 몸을 돌려 솟구치면서 3번 손으로 치는 것이다. 《春秋左傳 僖公 28年》 <끝>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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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折衝將軍。守忠淸道兵馬節度使。贈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黃公墓碑銘 幷序。
自倭寇搆難。兇鋒遍八方。而賊所盡銳急攻。必取乃已者。無如晉州。將士竭力拒戰。殺賊過當者。無如晉州。城且陷。名將烈士。捐生效節。與城俱亡者。亦無如晉之多。而節度黃公。稱最著云。公當辛卯歲。從通信使赴日本。見賊有必動形。捐橐買寶劍二曰。不久賊來。吾將用此劍矣。未幾。爲同福縣監。每衙罷。輒擐甲馳馬。或距躍曲踊以習勇。明年。倭寇至。公從觀察使勤王。北上至龍仁。師大潰。公時領兵設伏于水原。獨能全所部而歸。與諸將守熊峙。賊向全州。公引兵赴之。遇賊于安德院。與戰破之以多。陞訓鍊判官。又守黎峴當賊衝。賊夜襲之。公中丸傷脚。鬪益力。賊大衄且退。而公又中丸仆地幾絶。賊乘勢再進。部下士共擊却之。論者謂微是捷。賊必遍蹂湖南矣。主將奏捷略公功。賞止訓鍊副正。鄭相公澈。體察南服。聞公名。檄公權守益山郡。兼助防將。事聞爲眞。從節度使宣居怡引兵北屯水原。以斥候在前。遌賊力戰。奪其馬而來。陞折衝。爲忠淸道助防將。癸巳春。拜本道兵馬節度使。京城賊退。公躡賊至尙州赤巖。與賊戰連捷。是歲六月。賊將淸正大擧將犯晉州。公與倡義使金千鎰節度使崔慶會,諸將李宗仁等。會于晉州。公言諸軍俱蹙入一城。被圍而無外援。則城必危矣。欲自引一軍壁城外。表裏相應。以分賊勢。倡義使難之。公不得已遂同入城。爲死守計。居數日。賊大至。決濠塡塹。爲土山飛樓。竹棚木櫃諸械以攻城。砲丸如雨。公與諸將。隨機應變。晝夜不少休。射輒洞貫。會大雨城壞。公身擔土石。旋復補築。相持凡九日。大小數十戰 。賊死者無算。積尸如阜。而是月二十八日。公忽中丸而殞。城中喪氣。賊乘勝疾攻。城遂陷。宣廟嘉公忠烈。遣官賜祭。贈議政府左贊成。又命旌其閭復其家。建祠于州。賜額曰彰烈。與金千鎰,崔慶會等。春秋同享俎豆。公諱進。字明甫。其先長水人。世宗朝名相翼成公喜五代孫也。翼成生判中樞胡安公致身。胡安生知中樞事孝。知樞生副司直塏。贈工曹參議。司直無子。子從弟進士愿之子允恭。允恭不仕。贈左議政。是爲公之考。配南陽房氏。奉事應星之女。以嘉靖庚戌。生公。公爲人嚴重尙氣節。長身美鬚髥。形貌甚偉。自幼業弓馬。膂力絶人。趫捷如飛。與李宗仁齊名相友善。約同生死。竟如其志云。年二十七。中武擧爲宣傳官。以母憂去。廬墓三年。喪除。爲居山道察訪。癸未時錢之役。斬獲甚多。有友人以罪充軍。須得功乃免歸。公悉以所獲與之。歷安原權管。又拜宣傳官。遷濟用監主簿。出監同福縣。初赴晉州也。義兵將郭再祐止公曰。晉州孤城。不可守。且公建忠淸節。守晉而死非職也。公曰。業已諾倡義矣。雖死不可食言。郭知公意不可奪。遂執酒相別。聞公死。痛悼不已。嗚呼若公。可謂烈丈夫矣。公之死。城猶未陷。李宗仁斂公尸瘞之。賊退。得人指告。乃歸葬于南原楓山。公娶晉州蘇氏部將忠世之女。賢有婦道。以公贈官。亦封貞敬夫人。歲賜酒饌。生二男。廷稷,廷說。皆中武科。廷稷安東判官。廷說喬桐縣監。二女未嫁而夭。廷稷有一女。廷說有男曰暐。生員。二女適士人朴以赫,進士房元亮。天啓丙寅。蘇夫人卒。將祔葬于公墓。竁中有水。乃改卜先塋之側辛向之原。遂遷公柩。就其地而合葬焉。暐將樹顯刻。介鄭君弘溟請維文。維壯公之烈有素矣。乃不辭而銘之。其詞曰。烈烈黃公。旣毅且武。引彊命中。有力如虎。忠爲干櫓。義則其兵。三軍可奪。此不可攖。晉陽之事。公非其職。一言已諾。知死必卽。衝梯亂舞。飛礮如霰。一圍十日。一日十戰。公起大呼。罷病亦奮。嚼齒沫血。神咷鬼憤。惡氛壓城。丸穿公額。大樹旣摧。金湯隨覆。公死不死。凜然猶生。烈氣所洩。虹射霆轟。公神在天。魄藏于土。刻詩山石。以風來許。<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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