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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여[喪輿]
상례 때 시신(屍身)을 운반하는 기구.
내용
상례 때 쓰이는 운반기구는 시신을 운반하는 상여와 혼백을 운반하는 영여(靈輿)로 나누어진다. 이 둘을 통칭하여 상여라고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앞의 것만을 이른다. 상여라는 말은 우리 나라의 문헌에서 최초로 나타나며, 중국의 문헌에서는 대여(大輿)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중국에서는 온량(轀輬)·온량거(轀輬車)·영거(靈車)라고도 하였다. 온량이라는 말은 원래 평안하게 누어 쉬는 수레를 뜻하였으나, 나중에 관(棺)을 싣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예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중국의 예서들인 주희(朱熹)의 ≪가례≫나 구준(丘濬)의 ≪가례의절 家禮儀節≫에는 대여라는 이름만이 보이고 있는 데 반하여, 이러한 중국의 예서들을 두루 참작하여 18세기 중엽에 편찬되고 19세기 중엽에 간행된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예서인 이재(李縡)의 ≪사례편람≫에는 대여라는 이름과 함께 상여라는 이름도 같은 기구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대여를 사용하면 정말로 좋으나 가난한 사람은 쉽게 구비할 수 없는 점이 있으니,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따라서 상여를 사용해도 무방하다.”고 설명한 것으로 보아, 한편으로는 이 두 기구를 구별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그 밖에도 “요즈음에 아래 위에서 모두 두루 사용하는 것으로, 그 만드는 법은 대여를 모아 간단하게 만든 것”인 소여(小輿)라는 것도 소개하고 있다.이러한 설명을 종합할 때 아마도 상여는 소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조선시대의 왕가에서는 대여라는 말을 사용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조선시대 초기에 편찬된 ≪세종실록 世宗實錄≫이나 말기에 간행된 ≪순종국장록 純宗國葬錄≫에는 모두 국장에 사용하는 운반기구로 대여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왕가에서 사용하는 대여는 ≪사례편람≫에 나타나 있는 대여와는 그 생김새가 다른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한 점은, 또한 ≪사례편람≫이 왕가의 의례가 아닌 사대부나 서인(庶人)의 의례를 다루고 있는 책이라는 데서도 보다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다고 하겠다. 이제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대체로 대여는 왕가에서, 상여는 그밖의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사용하는 것을 아울러 가리키는 말이라고 하여도 무방할 것으로 인다. 한편, ≪사례편람≫에 나타나 있는 대여는 우리 나라 왕가에서 사용하는 것과도 구분되는 것으로, ≪가례≫의 본문을 중요시하여, 그 글자 한 자도 빼놓지 않고 편찬하려는 우리 나라 성리학자의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실제로는 ≪가례≫에 나타나 있는 꾸밈새대로 대여를 꾸며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오히려 그것을 간략하게 만든 상여 즉, 소여를 많이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 대여보다 더 오래 전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 유거(柳車)라는 것이 문헌에 나타나고 있다. ≪가례≫에 따르면 “옛날의 유거를 만드는 제도가 아주 자세히 남아 있으나, 지금은 쉽게 그와 같이 만들 수 없으니, 단지 요즈음의 풍속을 따라(주희가 살던 12세기 중엽의 중국) 유거의 단단하고 평온한 점을 살린 대여를 사용해도 된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보아 중국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시신을 운반하는 기구로서 유거가 있었으나, 12세기 중엽에는 보다 더 간단한 모양의 대여가 보편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상으로 짤막하게 살펴본 내용을 통해서 상여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유추해 볼 수 있다. 즉, 유거에서 대여로 대여에서 상여 또는 소여의 형태로 점차 간략화된 것이 아닐까 보여지는 것이다. 이렇게 점점 간략화된 배경에는 경제적 조건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경제적인 문제가 없었던 계층에서는 예서에 나타나 있는 꾸밈새나 옛날부터 정해져 내려오는 격식대로 대여를 꾸며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계층에서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격식의 대여를 제작 여 사용하기에는 그 경제적 부담이 컸기 때문에, ≪사례편람≫의 설명에서 본 바와 같이 일반적으로 쓰이는 상여 즉, 소여를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조선시대의 왕가에서 사용하였을 때는, 그 격식은 ≪가례≫에 나와 있는 대여와 같으나, 그 구성이 복잡하게 꾸며져 있을 뿐만 아니라 겉치장이 더 화려한 점이 다르다고 하겠다. 문헌에 나타나 있는 상여의 꾸밈새는 다음과 같다. 우선 대여는 장강(長杠:상여의 좌우에 있는 긴 멜대)을 중심으로 한 기본틀과, 관(棺)을 싣는 소방상(小方牀), 그리고 그 관구를 덮는 죽격(竹格)으로 나누어져 조립하도록 되어 있다.
≪가례≫에 의하면, 중앙에 구멍을 뚫고 그 곳에 복토(伏兎)를 붙인 장강 두 개를 중심으로 하여, 양끝에 횡강(橫杠)을 붙이고, 그 횡강 위에 다시 단강(短杠)을 덧붙여서 기본틀을 만들거나, 또는 단강 위에 다시 소강(小杠)을 덧붙여 만들며, 이 기본틀은 삼[麻]줄로 얽어 만든다.
그리고 따로 소방상을 만들어 관을 싣는데, 양옆에 둥근 기둥을 달아 장강 중앙의 구멍에 끼워달며, 그 두 기둥 윗부분에 네모난 구멍을 뚫어 횡경(橫扃:가로로 된 빗장목)을 가로질러 끼우고, 기둥 밖으로 나온 횡경 끝에는 다시 소경(小扃)을 질러 만든다. 그리고 두 기둥의 앞뒤에 따로 네 개의 기둥을 세워 죽격을 떠받치도록 한다.ㅡ 죽격은 대나무로 틀을 만들어 비단을 둘러 감싸 만들고, 맨 위에는 연꽃 장식을 달아, 마치 촬초정(撮蕉亭)과 같은 모양으로 하며, 네 모퉁이에는 유소(流蘇:깃발이나 가마 등에 다는 술)를 단다. 이에 반해서 ≪사례편람≫에 나타나 있는 소여는 대여의 기본틀을 중심으로 하였으나, 소방상이 없으며 죽격 대신 유개(帷蓋)를 사용하여 관구를 덮으며, 그 앞뒤에 네 개의 사롱(紗籠)을 매어달고, 그 위에 앙장(仰帳)을 치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한편, ≪세종실록≫에 나와 있는 대여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먼저 아래에 굽음쇠[鐙鐵] 17개를 박은 장강 두 개를 좌우로 놓고, 굽음쇠마다 17개의 횡강을 끼운다. 그리고 또 다른 횡강 두 개를 장강의 중앙에 네모지게 설치하고, 그 사이에 작은 횡목 두 개를 끼워 그 위를 답판(踏板)으로 덮는다. 장강 위에는 승적목(承籍木) 네 개를 놓고, 그 위에 홈이 팬 지대목(地臺木) 네 개를 대고 네 모퉁이에 우목(隅木) 네 개를 세운다. 그 사이에 동자주(童子柱) 일곱 개를 지대목에 세운 다음, 동자주 사이에 정판(精板)을 끼워 위로는 항목(項木)에 닿게 하고, 아래로는 지대목에 잇게 한다.
항목 위에 앙련엽(仰蓮葉)을 설치하고 그 위에 죽목(竹木)을 설치한다. 난간 안에는 소방상을 설치하여 재궁(梓宮:임금의 관)을 싣는다. 소방상을 설치하는 법은 좌우의 승적목 사이에 횡목 네 개를 끼우고 답판을 그 위에 깐다. 그리고 좌우의 기목 위에 현주(懸柱)를 세우고 모철(冒鐵)로 현주를 씌워 횡량(橫梁)의 구멍에 닿게 하고 움직이지 않도록 못을 박는다. 포철(抱鐵)로 현주의 아래 끝과 기목을 감싸 현주의 위끝까지 닿게 하고 움직이지 않도록 못을 박는다. 현주의 좌우에 용지(龍支)를 달아 승적목에 끼우고, 방상 밖의 좌우에 있는 지대목 위에도 입주(立柱)를 세우고, 그 좌우에 용지를 달아 지대목에 끼운다. 그리고 그 옆에 사주(斜柱)를 세워 위는 입주에 대고, 아래는 지대목에 끼운 다음 입주 위에 대들보를 건다. 대들보 위에 입주와 현주를 꿰어 건 횡량을 설치한다. 그리고 앞뒤에 있는 지대목의 네 모서리에 네 개의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우목(又木)을 설치한다. 입주 위에 현벽목(懸璧木)을 앞뒤와 좌우에 각각 하나씩 끼운다. 그리고 별갑(鼈甲)을 만들어 현벽 위에 덧붙인다. 먼저 배방목(排方木)을 네 개 설치하고 만충연(彎衝椽)을 지붕과 같이 설치한다. 그 위에 연용(椽桶)을 붙이고 또다시 그 위에 구리로 만든 복련엽(覆蓮葉)으로 대(臺)를 삼은 뒤 대 위에 정자(頂子)를 세운다. 다음에 선연(扇椽) 여섯 개를 위 끝은 연용에 끼우고 아래 끝은 배방목에 닿도록 설치하고, 죽연(竹椽) 10개를 선연과 같이 설치한 다음 죽망(竹網) 네 개를 덮는다. 그리고 아청저사(鵝靑紵絲)와 주화불(朱畫黻)로 좌우에 두 개씩, 앞뒤에 한 개씩 덮는다. 네 면에는 상첨(上簷)과 하첨(下簷)을 설치하는데, 상첨은 밖을 향해서 약간 기울게 설치하고 자황화 금문(雌黃畫錦文)을 쓰며, 하첨은 상첨에 이어 수직으로 세운다. 자황화 수파련(雌黃畫水波蓮)과 청록홍 삼색저사(靑綠紅三色紵絲)로 만든 벽적(辟積:빈 곳을 가리는 데 쓰이는 천)을 삼첨(三簷)으로 삼아 하첨 안에 곧게 내린다.
또, 삼색저사를 사용하여 낙영(落纓)을 만들어 네 면에 걸어 첨의 안에 늘어뜨린다. 충연(衝椽) 네 모서리에 용저(龍箸)를 오채(五彩)로 만들고 용구(龍口)에 고리를 걸어 유소(流蘇)를 건다. 그리고 네 면에 진용(振容:깃발 모양으로 작게 만들어 상여에 달아 흔들릴 때마다 펄럭이게 하는 장식품)을 둘러 내리고 홍저사(紅紵絲)로 휘장[幄]을 만들어 그 위를 덮도록 한다. 이러한 구조로 보아 대여는 크게 장강을 비롯한 난간·소방상·별감·판첨·악 등 여섯 부분이 조립식으로 되어 있다고 하겠다. 반면에 ≪가례≫에 나타난 대여는 장강과 소방상 그리고 죽격의 세 부분으로, ≪사례편람≫에 있는 소여는 장강과 유개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어 잘 비교된다. 현재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는 상여는 두 종류로 구분된다. 하나는 조립식으로 만들어진 반영구적 상여이며, 또 다른 하나는 한번만 쓰고 태워버리는, 보통 일컫는 꽃상여가 그것이다. 꽃상여는 장강채 위에 대나무로 짠 틀을 세우고 그 곁에 흰종이 꽃을 달아 치장한 것으로, 그 위에는 앙장을 달았다. 보통 중소도시의 장의사에서 만들어 공급하고 있으며, 많은 노동력을 동원할 수 없거나, 경제력이 부족한 집에서 사용하고 있다. 사용한 뒤 장강채는 그대로 두고 관을 덮었던 덮개 부분만 태운다. 반면에 반영구적인 상여는 모두 목재를 사용하고, 단청을 하여 호화롭게 꾸민 것으로, 조립식으로 되어 있다. 기본틀로서 양 끝에 두 개의 횡강이 고정되어 있는 장강이 있고, 중앙에는 소방상 대신에 관을 올려놓을 수 있는 횡목이 끼어 있다. 그리고 아래위 두 칸으로 나누어지는 격간(隔間)으로 만들어진 네 개의 난간이 둘려지며, 장강에 꽂아 배방목으로 지탱되는 네 개의 기둥 위에 판첨(일반적으로 윗난간이라 불리고 있다.)을 ‘병아리 못’으로 고정시키고, 주위는 띠와 수실 드림으로 치장한 휘장으로 두른다. 그리고 네 모퉁이에 유소를 매단 봉수(鳳首)를 꽂고 유소에 사롱을 단다. 그 위에 보개로 불리는 별갑을 씌운다. 별갑의 네 모서리마다 십자룡(十字龍)의 나뭇조각으로 치장하며, 맨 위에 연봉(蓮峰)을 붙인다.
그리고 이 별갑의 네 변에는 작은 동자(童子)나 선녀(仙女)의 조각으로 꾸민다. 그 위는 앙장으로 씌운다. 대체로 구조는 크게 보아 장강·난간·판첨·별갑·앙장으로 되어 있으며, 소방상의 설치가 빠져 있다. 이러한 구조는 전체로 보아 왕가에서 쓰는 대여와 일반에서 쓰였을 소여의 형식을 절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상여는 각 마을마다 추렴에 의한 기금으로 주문받아, 장의사에서 제작하여 판매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마을에서는 상여를 ‘상엿집’ 또는 ‘곳집’이라고 부르는 작은 집에 보관하고 있다. 상여를 메는 사람을 보통 상여꾼·상두꾼 또는 향도꾼이라고 부르며, 장강의 양 끝에 고정시킨 횡강의 양 옆에 천이나 밧줄을 매고 중간중간에 횡목을 끼워 그 사이에 사람이 들어가 어깨에 메고 운반하도록 되어 있다. 장강채의 길이와 상여 꾸밈새의 무겁고 가벼움에 따라, 적을 때는 12명, 많을 때는 30명의 사람에 의해서 운반하도록 되어 있다. 상여는 옛날에는 천민들이 메도록 되어 있었으나 요즈음에는 반상(班常)을 가리지 않고 젊은 사람들이 메게 되었다. 그러나 요즘의 도시에서는 영구차가 이것을 대신하고 있다.
참고문헌
『세종실록(世宗實錄)』
『사례편람(四禮便覽)』
『순종국장록(純宗國葬錄)』
『가례(家禮)』
『가례의절(家禮儀節)』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회다지
흙에 회를 섞어 다진다는 말로, 관을 광중壙中에 안치한 뒤 일꾼들
이 흙으로 채우거나 봉분을 축조하면서 발로 단단하게 밟는 일.
개관
회다지를 하는 이유는 나무뿌리 혹은 뱀・쥐・여우 같은 동물이 광중을 훼손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서이다. 회다지를 ‘다구질’ 또는 ‘달구질’이라고 부르는데, ‘흙을 다지는 일’이라는 점이 공통적이기 때문에 이러한 명칭들이 사용되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래서 달구질을 하면서 <회다지소리>를 하기도 하고, 회다지를 하면서 <다구질소리>를 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노동의 장소만 다를 뿐 노동의 행위나 노래는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을 반영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흙을 다지는 경우는 보통 광중을 흙으로 채우거나 봉분을 만들 때, 집을 짓기 전에 집터를 단단하게 다질 때, 제방을 단단하게 쌓을 때 등이다. 또한, 흙을 다지는 것은 기본적으로 흙을 운반하여 쌓은 후에 이루어지는 작업이기 때문에 흙을 운반하는 도구인 가래를 이용하면서 부르는 노래인 <가래질소리>를 부르기도 한다. 가래질은 1인이 하거나 3인이 하는 작업인데, 주로 흙을 많이 운반해야 할 때는 3인이 1조가 되어 가래질을 했다. 이를 ‘장부질’이라고 불렀고, 장부질을 하는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를 <가래질소리>라 하였다. 이 노래는 흙을 쌓는 때뿐만 아니라 흙을 다질 때에도 불렸다. 그래서 흙을 다지면서 부른 노래의 명칭으로 <회다지소리>·<다구질소리>·<가래질소리> 등이 뒤섞여 사용된 것으로 판단된다. 흙을 다지는 일을 하면서 사용한 막대기를 ‘횟대 ’ 혹은 ‘달굿대’, ‘연춧대’ 등으로 부른다. 보통 ‘달구’에는 굵은 통나무 토막 위에 손잡이가 2개 혹은 4개가 달려 있다. 쇠로 된 것을 ‘쇠달구’라고 하고, 나무로 된 것을 ‘목달구’라고 부른다. 돌덩이에 줄을 달아서 사용하기도 하는데, 2인 또는 그 이상의 사람들이 힘을 모아 달구를 공중에 높이 들었다가 땅에 떨어뜨려 흙을 다진다. 작업의 능률을 올리고 노동의 피로를 덜기 위해 노래를 부르면서 달구를 들어 올렸다 놓았다 한다. 이를 ‘달구질’ 혹은 ‘달구방아’라고도 부른다. 선소리꾼은 북을 치면서 노랫말을 선창하고, 일꾼들은 달구질하면서 후렴을 부른다.
내용
상여가 장지에 도착하면 관을 묘상각墓上閣에 안치하고, 하관 시간이 되면 복인들이 관을 묶은 새끼를 풀어 하관한다. 그다음, 내광內壙과 관 사이에 회를 채우고 명정銘旌을 덮은 뒤 상주 이하 복인들이 조금씩 실토實土한다. 실토가 끝나면 일꾼들이 본격적으로 내광에 흙을 붓고, 흙이 어느 정도 쌓이면 한번 회다지를 한다. 한번 다진 후에 다시 흙을 넣어 중광中壙을 채운다. 내광이 흙으로 메워져 평지와 같이 되면 평토제平土祭를 지낸다. 평토제에 이어 봉분을 만드는데, 성분成墳을 계속하고 흙을 달구로 다지면서 일꾼들이 노래를 부른다 . 이때는 광중에 흙을 채운 뒤 일꾼들이 선소리꾼의 소리와 북장단에 맞추어 시계방향으로 돌면서 다지기도 한다. 간혹 달구질을 하는 동안 망인의 사위나 조카 등을 데려다가 봉분 위에서 춤을 추게 하여, 그들로부터 담뱃값이나 술값을 받기도 한다.
지역사례
강원도 횡성의 <회다지소리>는 의식요의 하나로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4호(1984년 12월 18일 지정)인데, 장례 때 하관이 끝난 후 회灰를 넣고 다지면서이 노래를 부른다. 하관이 끝난 후 회다지는 연회挻灰・청회錆灰・방회傍灰의 순서로 진행된다. 회다지꾼 여섯명이 금정金井 안에 들어가 선소리꾼이 앞뒤에 서서 선소리를 주면, 율동과 함께 그 소리를 받으면서 회작대기로 찧고 밟으면서 다진다. 먼저 첫 번째 연회挻灰 과정에서 회다지꾼들은 선소리에 맞춰 서로 등을 대고 엎드려, 서서히 다리를 드는 율동을 반복하는 느린 가락과 동작으로 회를 다진다. 그리고 두 번째, 청회錆灰 과정에서 회다지꾼들은 회작대기를 바꾸어 쥐면서 회를 다지며 돌아가는데, 이는 앞의 연회 과정보다는 조금 빠른 중간다지기 과정이다. 이처럼 회다지기 과정은 느린박자에서 빠른 박자로 전개된다. 마지막, 방회方灰 과정은 회다지기가 절정을 이르는 과정으로, 두발차기와 세발차기의 율동으로 진행되며 소리가 매우 빠르다. 회를 굳게 다지는 마지막 과정이다. 이와 같은 과정은 횡성 지방에서만 전해지는 것으로, 회다지기가 막바지에 이르면 회다지꾼과 금정 밖의 모든 일꾼이 한데 어울려 큰 율동과 함께 “에헤라 달회”를 우렁차게 부르며 회다지를 마무리한다.
충청남도 공주 우성면 봉현리에는 상엿소리 가운데 <흙가래질소리>와 <달공소리>가 전해지는데, 달구질 장면은 에헤소리—달공소리—잦은달공—에헤소리로 진행된다. 에헤소리는 달구꾼들이 다 함께 부르는데, 세 번의 “에헤—” 중 첫 번째는 왼팔을 반쯤 비스듬히 벌려 앞으로 모으고, 두 번째는 오른팔을 비스듬히 벌려 앞으로 모으며, 세 번째는 양팔을 비스듬히 벌려 앞으로 모은다. 메기는소리와 받는소리가 각각 3분박 4박 1마디씩이다. 제1박에선 왼발을 한 걸음 옆으로 내고, 제2박에서는 오른발을 갖다 붙이며, 제3박에선 제자리에서 크게 다지고, 제4박에선 제자리에서 작게 굴린다. 잦은 달공소리 때는 오른발을 옆걸음질하여 오른쪽으로 다지며 돈다.
경기도 가평에서는 다복하고 장수한 사람이 죽었을 때 호상好喪이라 하며 <회다지놀이>를 한다. 이 놀이는 슬픈 마음을 해학적으로 풀어 회다지소리를 부르고, 그 소리에 따라 흥을 돋우면서 슬픔을 달래고 묘역 작업하는 과정을 놀이화한 것이다. 놀이는 상여행렬과 회다지놀이로 구분된다. 그렇지만 회다지놀이의 행렬이 장지에 도착하면 상여를 내려놓은 다음, 일부는 상여를 해체하고 일부는 산역을 시작한다. 회다지를 할 때에는 “슬프고 슬프도다! 석숭에 역만제를 어찌하여 슬프던가……”라고 시작되는 성토가를 부른다. 이렇게 내광다지기가 끝나면 광중을 제거하고 평토다지기와 봉분다지기를 하고 끝낸다. 전라남도 진도 지산면 인지리 진도만가(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19호)에서 보면, 봉분을 만들기 전에 달구질꾼들이 흙가래질의 가래소리에 맞추어 나무토막에 두 귀를 단 달구를 각자 잡고 관을 묻은 땅을 다진다.
특징 및 의의
중부지역에서는 흙을 더 단단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흙에 회를 섞기 때문에 회다지를 하지만 , 남부지역에서는 회를 넣지 않고 흙으로만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흙을 다지는 달구질을 하는 예가 많다. 특히 달구질하는 방법도 노동 상황에 따라 다르다. 강원도 횡성처럼 광중에 들어가서 다지는가 하면, 밖에서 다지는 마을이 있고, 연춧대나 나뭇가지를 사용하는 마을이 있으며, 발로만 하는 경우도 있다. 노래를 부르는 과정도 지역에 따라 다른데, 광중에 시신을 하관하고 흙을 덮어 평토할 때까지만 노래를 부르는 곳이 있는가 하면, 평토 이후부터 시작하여 봉분을 만들고 묘가 완성될 때까지 노래를 하는 지역도 있다. 이와 같은 회다지 과정에는 단순히 나무뿌리 혹은 뱀・쥐・여우 같은 동물에 의한 광중의 훼손을 방지한다는 실용적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회다지 과정은 지신地神이나 산신山神에게 고하는 제의적인 의미도 있을 뿐만 아니라, 상주를 위로하고 망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의례적인 의미도 아울러 가지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민속문학사전‐민요・판소리(국립민속박물관, 2013), 한국의농요‐4(이소라, 민속원, 1990), 한국인의 일생(이광규, 형설출판사, 1985), 횡성 회다지 연구(김선풍, 영동문화2, 관동대학교 영동문화연구소, 1986).
출처:(한국일생의례사전)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작사 도종환
작곡 정의송
노래 윤태화
견우 직녀도 이날만은 만나게 하는 칠석날
나는 당신을 땅에 묻고 돌아오네.
안개꽃 몇 송이 땅에 묻고 돌아오네.
살아 평생 당신께 옷 한 벌 못해 주고
당신 죽어 처음으로 베옷 한 벌 해입혔네.
당신 손수 베틀로 짠 옷가지 몇 벌 이웃에 나눠 주고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오네.
은하 건너 구름 건너 한 해 한번 만나게 하는 이 밤
은핫물 동쪽 서쪽 그 멀고 먼 거리가
하늘과 땅의 거리인 걸 알게 하네.
당신 나중 흙이 되고 내가 훗날 바람 되어
다시 만나지는 길임을 알 게 하네.
내 남아 밭 갈고 씨 뿌리고 땀 흘리며 살아야
한 해 한 번 당신 만나는 길임을 알게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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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버전】 윤태화 -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미스트롯2 토크 콘서트 2회❤ TV CHOSUN 210325 방송 - YouTube
2023-05-08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