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5대 임금 문종.
문종은 명실상부한 세종대왕의 적장자로서 왕위에 오른 임금임.
시기적으로보나 무엇으로 보나 참으로 군왕으로서 많은 것이 갖추어졌을 때 왕위에 오른 임금이기도 하였음.
세자로서 20년 넘게 세종대왕을 보필하며 탄탄하게 실무를 익혔고 슬하에 자식도 있는 어엿한 가장이기도 하였음.
그러나 문종이 가지지 못한 것들도 물론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건강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여복이었음.
조선왕조 임금들 중에서 세자빈을 두 번이나 갈아치운 임금도 드물 것임.
아니, 여복을 떠나 문종은 여자에 관심이 별로 없는 세자였음.
14세때 처음으로 가례를 올린 문종은 비교적 어린 나이 탓인지 갓 시집온 세자빈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음.
합방에 관심은 없고 서책만 파고드는 세자를 지켜보는 세자빈은 당연히 열불이 터짐.
14세의 세자가 며느리에게 관심이 없는 것을 지켜보는 세종도 속이 터졌음.
거기다가 독수공방 신세를 견디다 못한 세자빈이 남편의 사랑을 불러온다며 민간의 요사한 술수까지 행하자
세종의 걱정은 더욱 깊어짐. 결국 이 일을 빌미로 세종은 첫번째 세자빈을 폐출시키고
순빈 봉씨를 두 번째 세자빈으로 맞아들였음.
이때 문종의 나이 16세. 솔까...그때 즈음이면 부부사이가 어떤지 다 알만한 나이였음.
게다가 결혼도 했는데ㅠㅠㅠㅠㅠㅠㅠ모를리가 있음?! 정말 여자에게 관심이 없었던 것임 ㅠㅠㅠ
그러나 두 번째 세자빈을 맞이했어도 문종의 여자무관심증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음.
오죽했으면 보다못한 세종대왕이
"내가 아무리 부모라고 해도....침실 속의 일까지 내가 어째 참견할 수 있음?
그걸 어째 가르친단 말임? ㅎㅎㅎ내가 진짜 기가 막혀서"
하고 푸념까지 할 정도였음. 결국 세종은 다른 신하에게 순빈 봉씨를 폐출할지,
아니면 문종의 후궁을 들일지 논의하기에 이르렀음. 순빈 봉씨를 폐출하지 않은 것은,
만약 폐출한다면 그 이유가 아들을 못 낳았다는 것인데 그건 세종이 봐도 봉씨에게 너무 억울한 처사였던 것임!
아니...봉씨가 아들을 낳기 싫어서 안 낳은 것도 아니지 않음? 세자가 관심이 없다고....세자가!
후궁을 들이고 나서 세종은 문종에게 신신당부를 하기에 이름.
"이제 제발 며늘아기와 좀 화목하게 지내도록 해라!! 알겠느냐? 알겠냐고! 내 말 알아들었냐고!!"
세종의 이런 노력과 염려가 통했는지 문종은 후궁 중 하나였던 권 승휘와의 사이에
딸을 낳았음. 문종의 첫 딸이었으나, 애석하게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요절해버리고 말았지만
문종이 권 승휘를 총애했기 때문인지 권 승휘는 곧바로 또 딸을 낳았고, 이번에 태어난 아기는 무럭무럭 건강하게 자람.
이 아기는 정말 왕실의 경사 중의 경사였음. 문종에게는 감격적으로 태어나서 건강하게
성장하기 시작한 첫 딸이었고 세종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딸이었음!
당연히 문종은 자신의 딸을 애지중지 금이야 옥이야 아꼈음.
그러나 순빈 봉씨는 궁녀와 동성애에 빠진 사실이 발각되어 결국 사가로 쫓겨남.
그리고 공석이 된 세자빈 자리를 어떻게 할 것인지 하는 문제가 대두됨.
여기서 아직 두 살밖에 되지 않은 문종의 딸은 태어나기만 했을 뿐인데 자신과 자기 어머니의 운명을 바꿔놓게 됨!
만약 새로 세자빈 간택을 한다면 문종은 왕이 되기도 전에 벌써 세 번째 결혼을 하는 것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리하여 후궁 중에 세자빈을 가려 뽑기로 했는데 문종의 후궁 중에서 세자빈으로 낙점된 것이
바로 아기의 어머니인 권 승휘였음! 그것도 그럴 것이 문종의 다른 후궁들에게서 후사가 없었던 반면
권 승휘는 어려서 죽은 아기에 이어 또 건강하게 딸을 낳았기 때문! 세종은 그런 권 승휘를 내심 좋게 생각하고 있었고
문종 역시 권 승휘가 정식으로 세자빈이 되는 것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음.
달리 말하면 이 여자아기는 태어나면서 자신의 엄마를 세자빈으로 만들게 된 것임! 어머니가 세자빈이 되고
장차 중전으로 봉해지면서 문종이 금옥처럼 아끼던 아기 역시 세자의 딸에서 명실상부한 조선의 공주로 봉해짐.
그렇게 문종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태어난 딸이 바로....
경혜공주임.
이어 권 승휘는 아들까지 낳아 자신의 입지를 확실하게 굳히게 됨.
그러나 여복 없는 문종 팔자가 어디 가겠음?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들을 낳고 하루만에 권 승휘가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나버린 것임 ㅠㅠㅠ경혜공주가 일곱살 때 일이었음.
문종은 권 승휘가 세상을 떠난 뒤 다른 세자빈이나 중전을 들이지 않고 쭉 홀홀단신을 유지함.
졸지에 홀아비가 된 문종에게 가장 큰 기쁨이자 위안이 되었던 것이 바로 경혜공주와 어린 세자였음.
경혜공주가 16세가 되었을때 세종의 건강이 악화되며
문종은 경혜공주의 혼처를 서둘러 정하기로 마음먹음. 왜냐? 세종이 승하하면
3년상 중에는 혼인할 수 없었기 때문임. 사실 16세도 혼인하기에 그렇게 이른 나이가 아니었는데 19세에 혼인한다면
그건 너무 늦은 일이었음. 문종은 자신의 고명딸이자 외동딸인 경혜공주를 위해 최선을 다해주고 싶었음.
문종의 아내인 권 승휘가 죽었기 때문에 경혜공주에게는 혼인을 돌봐주고 살펴줄 어머니가 없었음.
문종에게는 그것 또한 가슴이 찢어지는 일이었음ㅠㅠㅠ그리하여 경혜공주의 신랑감을 찾아내는 일도
문종과 세종이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음. 아빠와 할아버지가 공주를 위해 서둘러 찾아낸 청년이 바로
정충경의 아들 정종이었음.
그러나!!!!! 겨우 정종을 사윗감으로 골랐을 때 세종이 승하하고 맘.
그리하여 경혜공주의 혼인절차는 세종의 3년상을 치르기 위해 잠시 중단되었는데,
이어 문종이 왕위에 오르며 문종은 세종의 소상이 끝난 후 부랴부랴 공주의 신혼집 물색에 나섰음!
원칙적으로는 세종의 3년상이 모두 끝난 후에야 혼인을 계속할 수 있었지만
문종이 이렇게 서두른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음.
문종은 자신의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던 것임.
만약 지금 경혜공주의 혼사문제를 마무리짓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이 승하하기라도 하면 경혜공주는
세종의 3년상과 더불어 아버지의 3년상까지 치르느라 22살에나 다시 결혼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것임.
그것은 문종에게는 말도 안되는 일이었음. 그동안 어떻게 키운 딸인데ㅠㅠㅠ일곱 살에 엄마 잃고
얼마나 마음 아프게 키운 딸인데ㅠㅠㅠ멀쩡한 혼처를 놔두고 노처녀로 늙게 한단 말임??
결코 절대로 그렇게 둘 수는 없었음.
경혜공주의 혼사를 다시 추진하며 문종은 하나뿐인 딸 경혜공주에게 아버지로서
으리으리한 신혼집을 마련해주고 싶었음. 임금이었지만 아버지로서 부정이 끓는 것은 당연한 일.
그래서 문종이 딸의 신혼집을 지을 곳으로 고른 곳은 경복궁과 창경궁 사이에 있는 양덕방 향교동이라는 곳이었음.
향교동이 어떤 곳이냐? 당시 향교동은 안국동과 더불어 왕족과 고관대작들의 집이 즐비했던
도성 내 최고 핫플레이스였음. 지금의압구정? 강남? 한남동? 다 쳐바름.
그런데 경혜공주의 집을 양덕방에 마련해 주겠다고 하자마자 문종은 반대에 부딪힘.
"향교동은 겁내 명당이라 이미 지어진 집들이 많은데요?
공주의 신혼집을 지으려면 지금 있는 집을 철거해야 하는데요?
임금이라고 그렇게 집 막 부셔도 됨? ㅋㅋㅋ 안 될 말임."
양덕방에 이미 집을 갖고 있던 조정신하들이 자기들 집을 부순다고 하니 반대하고 나선 것임.
그러나 문종도 물러서지 않았음.
"내 딸 집 내가 지어주겠다는데 님들이 왜 난리?
집을 엄청 많이 부숴야 하는 것도 아니고 30채 정도인데 님들은 돈 많으니 다른 집 또 있지 않음?
내가 님들한테 돈을 내라고 했나 아님 사람을 보태라고 했음?
대체 뭐가 불만임? 나 빡치게 하지 말고 그냥 알았다고 하면 되지!!!"
그러나 신하들도 단념하지 않고 다시 반대하자 문종은 쿨하게 해결책을 제시함.
"이사 가 ㅋ"
결국 신하들 gg.
실제로 실록 기록에 따르면 문종이 경혜공주의 신혼집을 지어주기 위해
철거한 집들은 30채 가량이었다고 함. 향교동에 집을 가지고 있었을 정도면 당시에도
끗발 좀 있다 하는 세력가들이었을텐데 오매불방 딸을 위해주고픈 문종 덕분에 철거민 신세가 된거임.
이렇게 신하들과 언쟁까지 해가면서 문종은 자신이 늘 애틋하게 여겼던 딸과 사위가 살 집을 손수 마련해줌.
후일 단종까지 궁궐보다 누나의 집에 머무는 시간이 더 길었던 만큼 문종이 지어준 신혼집은
대궐 못지 않게 으리으리했을 것이라 추정됨.
신혼집이 다 지어지자 경혜공주는 드디어 혼례식을 올릴 수 있었음!
문종으로서는 크게 안심할 수 있는 일이었음. 적어도 자신이 죽기 전에
공주의 혼인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공주에게 든든한 남편이 생긴것도
마음이 한결 놓이는 일이었음. 공주가 아늑하게 지어진 신혼집에서 남편 정종과 함께
오순도순 살아간다면 문종에게는 더 바랄 것이 없었음.
경혜공주 역시 아버지가 지어준 신혼집에서 잠시나마 평화롭고 안정된 시간을 보냈음.
그러나 병약하던 문종은 결국 경혜공주의 혼사를 치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건강이 악화되며 쓰러지고 맘 ㅠㅠㅠ
문종이 승하했을때 경혜공주는 채 스무살이 되기도 전인 18세였고 어린 세자는 12살이었음.
장차 보위를 이을 세자의 나이가 너무 어린데 반해 그 곁에는 문종의 동생들, 즉 경혜공주와 세자의 삼촌들이
호랑이 같은 눈으로 왕좌를 노려보며 등뒤에 도사리고 있었음.
이래저래 불안한 상황에서 문종은 마지막으로 아버지 세종 때부터 조정을 이끌어왔던
김종서, 황보인 등 든든한 버팀목이 될만한 대신들을 불러들여
어린 세자를 잘 보필해 달라는 부탁을 담은 마지막 유지를 남김.
촛불이 일렁이는 것처럼 불안한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마지막 순간에 문종은 일말의 안도감을 느꼈을지도 모름.
그래도 조정에는 당장 함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포스 쩌는 고명대신들이 버티고 있었고
경혜공주에게도 만일의 사태에 곁을 지켜줄 수 있는 남편이 있었음.
그때 종친 중에 가장 세력이 비등비등했던 사람은 바로 문종의 친동생인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었음.
불안했지만, 그래도 문종은 최소한 그들이 자신의 동생이자 자기가 죽고나면 세상에 홀로 남을 공주와
세자의 삼촌들이라는 사실을 잊지는 않았음. 어쩌면, 나중에 그렇게까지 끔찍한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지도 모름. 어쨌든 대군들과 문종은 세종이라는 한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자란 형제들이 아니겠음?
문종이 승하하고 난 후 단종은 국무를 보다가도 시간이 나면 자주 누나와 매형이 있는 향교동을 찾았음.
생전에 문종이 걱정했던 범같은 삼촌들은 어린 왕을 보호한다는 핑계로 주변에 들러붙으며
은근히 단종을 압박하기 시작했던 것임. 그때문에 경복궁이 갑갑하고 두려웠던 단종은
거의 틈만 나면 경복궁을 벗어나 향교동으로 향했음. 아버지가 생전에
물심양면으로 노력하여 지어준 누나의 집은 단종에게도 각별한 장소였을 것임.
어느날도 단종은 여느때와 다름없이 향교동으로 와서 누나인 경혜공주와 매형인 정종과 함께
저녁을 들고 잠을 청했음. 왕이 궁을 떠나 사가로 나갔던 만큼 어느 저택에 비해도 떨어지지 않는
경혜공주의 집 주변으로는 철통같은 경계선이 둘러쳐져 있었음.
단종과 경혜공주, 그리고 정종은 보금자리에서 안심하고 잠을 청함.
그리고 그날 밤, 문종이 자신의 딸 경혜공주를 위해 지극정성으로 애써서
갈고 닦아 마련해 준 포근한 신혼집은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에 의해 피바다가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