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남부 우지강변에 일본인 6천여명이 세운 윤동주 시비
교토 남부 우지시(宇治市)의 우지강변에는 윤동주 시비가 세워져 있는데.... 윤동주와 교토
도시샤 대학 동료 학생들이 사진을 찍었던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인도교로 그물형
나무 다리인 천게빈교(天ケ瀕橋)를 지나 댐 못 미쳐 백홍교(白虹橋) 다리가 보이는
곳에 곤타니 노부코(紺谷延子) 등 6천명이 넘는 일본인들이 윤동주 시비를 세운 것입니다.
교토 도시샤대학에 재학중인 윤동주는 귀국전인 1943년 친구들과 함께 교토 남부에 있는 우지강을 찾아
다리에서 마지막이 된 사진을 찍었는데.... 며칠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죽으니 몇년 전에 마지막
사진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일본인들 사이에서 우지강에 윤동주 기념비를 세우자는 움직임이 생겼습니다.
“시인 윤동주 기념비 건립위원회” 곤타니 노부코 (紺谷延子) 사무국장등인데 그녀는 2002년 부터
윤동주의 시를 읽고 꽃을 우지강에 던지는 추모행사를 열어왔고 2009년 에는 6,358명 의 서명
을 받아 교토부(府) 지사에게 제출했으나 번번히 거절당하고 비를 세울 곳을 찾아 동분서주 합니다.
곤타니 사무국장의 바람은 마침내 2016년 교토 남부 우지시 시즈가와(志津川)구에서 우지강에 용지 제공
을 결정해 이뤄지게 됐는데.... 구청장은“세계 평화의 상징이 됐으면 좋겠다”라며 기념비 건립을 받아
들이니 시인의 탄생 100주년인 2017년 10월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가 우지강변에 세워졌습니다.
윤동주는 1942년 3월 일본유학 을 떠나면서 의무적으로 창씨개명을 했으니‘윤(尹) 씨’는‘히라누마(平沼)
군(君)’이 됐는데.... 개명을 앞두고‘참회록’이라는 시를 썼다는데 이후 일본 유학 시절을 관통한 감정
은 ‘부끄러움’ 이었으니 교토(京都) 도시샤대 학우였던 기타지마 마리코 (北島萬里子) 씨는 우연히 둘만
수업을 듣게 됐을 때윤 시인이 조용한 목소리로 “둘밖에 없는데 틀리면 부끄럽겠네요” 라고 말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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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누마 군’ 이 ‘국민시인’ 이 된 사실을 몰랐던 기타지마씨는 전후 50년 KBS 와 함께 윤동주 다큐멘터리
를 만들던 NHK 제작진에 학창시절 앨범을 찾아 윤시인의 생전 마지막 사진 을 제공했는데...
“1943년 우지(宇治) 강의 다리” 에서 찍은 사진 이었으니 윤시인은 중앙에 여학생들 옆에 자리 잡았습니다.
수줍음이 많아 수업시간이면 강의실 맨 뒷자리에 앉아 조용히 수업을 듣던 그였는데 징병을 피해 귀국을
결심한 그를 위해 학우들이 열어준 송별회 였던지라 당당하게(?) 중앙에 자리를 잡은 것이네요?
사진을 찍고 1개월후 윤 시인은 일본 경찰에 치안 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 됐는데 함께 사진을 찍었던
일본 남학우들도 대부분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전선으로 끌려가서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평범한 주부였던 “곤타니 노부코” (紺谷延子)씨는 윤 시인을 만난후 인생이 바뀌었다는데
2002년 부터 매년 시를 읽고 꽃을 우지강에 던지는 추모 행사 를 열었고...
2005년 기념비 건립을 위한 시민단체를 조직해서 각계의 모금을 받아 2007년 기념비
를 만든 후에는 용지를 확보하기 위해 문턱이 닳도록 지방 자치단체를 돌아다닌 것입니다.
윤 시인의 탄생 100주년인 2017년 10월에 우지강변에 세워진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 에는 한국과 일본의 화강암에다가 양국 언어로 시 ‘새로운 길’ 을
새겼으며 시인을 상징하는 돌기둥이 그 위에서 양국을 연결하는 디자인 이라고 합니다.
이번 비석은 일본 내에서 3번째인데..... 윤 시인을 기리는 일본 시민들은 매년 2월이 되면
시인이 유학했던 도쿄(東京) 릿쿄대와 교토 도시샤 대학교 그리고 숨을 거둔 후쿠오카
(福岡) 등에서 추모 행사를 연다는데...... 일본인 중에는 중국에서 “시인의 무덤”
을 찾아낸 학자도 있으며 30년 넘게 일본 내 행적을 추적한 전직 언론인 도 있다고 합니다.
모두 윤 시인의‘부끄러움’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이들이니 작은 시민단체를 조직해 12년간 이 사업을
추진해 온 곤타니 사무국장은 한국의 신문 기자에게 보낸 e메일에서 “현재 한일 관계는 결코 좋다고
할수 없지만 시민들은 윤동주를 통해 이어질 수 있다” 며 “개막식에 꼭 와 달라” 고 초청 했다고 하네요?
윤동주는 1917년 북간도 명동촌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평양의 숭실중학교 에 편입했다가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자퇴하고는 돌아와 광명중을 거쳐.... 사촌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 문과에 진학해 19편의 시를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시집을
내려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42년 일본 도시샤대학 영문학과에 입학 합니다.
1943년 7월 여름방학을 맞아 귀향길을 서두르던중 사촌 몽규와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
되었으니 갖은 악형 속에서 2년의 징역 이 선고되었는데 죄명은 독립 운동 이었고,
“조선 학병들은 일본이 패전하는 기회를 타서 조선 출신 군인으로 목숨을 바쳐
궐기해야 한다” 는... “일본 징병제에 대한 생각” 이 옥살이의 중요한 원인 이었습니다.
1년 뒤인 1945년 2월 16일 윤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 에서 숨을 거두었으니 시신을 수습
하러 간 아버지와 당숙이 “피골이 상접한 송몽규”를 면회했는데, 몽규는 자신들이
"이름 모를 주사를 강제로 맞고 있으며 그 주사 때문에 동주가 죽었고 자신의 몸도
이 꼴이다" 라 말하고는 한달 뒤에 숨을 거두었으니 “생체 실험의 대상(?)” 이 된 것입니다.
시민단체 결성후 12년만인 2017년 10월 28일 시인의 1938년 작품 ‘새로운 길’ 을 새긴 비석
제막식을 진행할 것’이란 소식이 알려지자 한국 여중생 이 곤타니 노부코에게 일본어로
작성한 e메일을 보냈으니 “다른 나라 인물을 위해 마지막 까지 노력해 멋진 결과를
낸 것을 존경한다. 윤동주 기념비 가 한일 사이의 가교 가 될 것”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윤동주작 ‘쉽게 씌어진 시’ 에 나오는 싯귀입니다.)
숙명 여대 김응교 교수는 동아일보에 연재중인 “동주의 길” 에서 “이제 북한에서도 윤동주를 언급
하기 시작했어요.” 1993년 일본 와세다대 스승인 오무라 마스오 교수님께서 복사물 몇 장을 주셨다.
어떤 일에도 흥분하지 않는 분의 약간 달뜬 표정이 낯설었으니 윤동주를 과대평가된 작가로 폄훼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다음해 1994년 평양에서 출판된 ‘문예상식’ 에 3면에 걸쳐 윤동주 시 ‘서시’ , ‘슬픈 족속’
‘쉽게 쓰여진 시’ 에 대한 분석이 실렸 는데.... 북한에서 윤동주를 평가 하기 시작한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할까.
간도 용정에서 성장한 윤동주가 국내 상급학교에 진학하려면 총독부에서 지정한 고등보통
학교에 진학해야 하는지라 9월 평양 숭실중학교 4학년에 입학하려 했던 윤동주는
결국 3학년에 편입하니 큰 좌절이었지만 10월에 처음 자신의 글이 활자로 변하는
체험을 했으니... 숭실중학교 YMCA 문예부에서 낸 ‘숭실 활천’에 공상’을 발표했습니다.
이어 12월에는 최초의 동시‘조개껍질’ 을 썼으니 이 시 끝에는 평양의 ‘봉수리 에서’썼다고 쓰여 있는데...
하지만 더 큰 좌절이 닥치니 숭실중학교는 신사참배에 반대 하자 평남도지사는 1936년 1월 신사참배
에 참여하지 않는 숭실중학교 교장 맥큔의 교장 인가를 취소하고 파면하니...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시작하고 3월에 윤동주는 문익환과 숭실중을 떠나는데 이 무렵 3월 24일에 ‘모란봉에서’ 란 시를 씁니다.
앙당한 소나무 가지에
훈훈한 바람의 날개가 스치고,
얼음 섞인 대동강 물에,
한나절 햇발이 미끄러지다.
허물어진 성터에서
철모르는 여아들이
저도 모를 이국 말로
재질대며 뜀을 뛰고.
난데없는 자동차가 밉다.
작게 움츠러져 있는 ‘앙당한’ 솔나무는 윤동주나 친구들 모습 일까. ‘얼음 섞인 대동강 물에,/한나절 햇발이
미끄러지다’ 라는 표현도 신선하지만, 2연을 더욱 주목할 수밖에 없으니 허물어진 모란봉 성터에서
‘철모르는 여아들이/ 저도 모를 ’이국말(일본말)로 노래 부르며 ‘재질대며’ 뜀뛰며 일본 놀이를 하고 있다.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침략해 오는 일제가 밉다는 뜻이니 이 시는 이상화의‘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 이태준 단편소설‘패강랭’을 생각하게 하는데... 성터와
함께 허물어지는 한 나라의 언어와 생활 을 천천히 응시하게 하면서도 윤동주
는 희망을 잃지 않았으니.... 동시 ‘창구멍’ 은 1936년 초에 창작된 시로 추정됩니다.
바람 부는 새벽에 장터 가시는
우리 아빠 뒷자취 보구 싶어서
침을 발라 뚫어 논 작은 창구멍
아롱아롱 아침해 비치웁니다
눈 내리는 저녁에 나무 팔러 간
우리 아빠 오시나 기다리다가
혀끝으로 뚫어 논 작은 창구멍
살랑살랑 찬바람 날아듭니다
구절구절 아빠 사랑이 간절합니다. ‘눈 내리는 저녁에 나무 팔러 간/ 우리 아빠 오시나
기다리다가 ’침 발라 작은 창구멍을 뚫는다. 얼마나 궁하면 나무가 젖을수밖에 없는
눈 내리는 날 나무 팔러 나갈까. 새벽도 아니고 저녁에 말이다. 새벽부터 밤늦게 고단
하게 일하는 아빠를 기다리는 아이 마음 소담한 비애가 독특한 리듬으로 반복 됩니다.
윤동주는 연희 전문 재힉시절 때에도 평양에 가서, 서양 고전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다방
‘세르팡’ 에 들르곤 했는데 “한번은 초현실주의 등 현대예술 관련 토론이 벌어졌는데
옆 테이블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청년이 불만스럽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나갔으니
‘초현실주의 같은 사조는 인정할 수 없다’ 는 표정이었는데....... 시인 윤동주 그였습니다.
중국에서 태어나 평양 숭실중학교, 서울의 연희전문에서 공부하고, 일본에서 절명한 그의 이력은‘중국-북한-
한국-일본’을 연결하는 아시아 평화공동체 에 대한 작은 창구멍 입니다. 중국과 일본에서 윤동주 강연을
할때 중국과 일본에 세워진 윤동주 시비 를 볼 때마다 윤동주가 내놓은 작은 창구멍이 떠오른다고도 합니다.
숙명 여대 김응교 교수는 한때 남북 공동 문학교과서 를 만든다면 어떤 작가를 넣어야 할지 고민한
적이 있다는데 북한에서도 높이 평가받는 김소월, 이육사 등과 함께 윤동주 는 통일문학을
위한 창구멍 역할을 할 수 있으니 아시아 문학교과서 를 만든다면 윤동주가 작은 역할을
하지 않을까. 윤동주는 우리 시대와 아시아인에게 다가오는 희망과 실천의 상징 이라고 말합니다.
몇년 전에 교토에 옛 일왕의 궁궐 앞에 자리한 “도시샤 대학교” 에 들러서 “윤동주 시비”
를 본 기억이 떠오르는데... 윤동주 시비 바로 옆에는 “鄭芝溶 詩碑(정지용시비)” 가
있으니 '압천(교토 가모가와 강)' 을 새겼으니 가만히 읽어 보던 일이 다시 떠오릅니다.
'鴨川 十里ㅅ벌에/ 해는 저물어...저물어...
날이 날마다 님 보내기
목이 자졌다...여울 물소리....'
정지용 은 1902년 옥천에서 태어나 휘문고보에 입학해 홍사용, 박종화, 김영랑과
이태준을 만났는데 3· 1운동이 일어나자 무기정학을 받고 요람에 소설 “3인” 을
싣고 휘문학교의 교비생으로 교토의 도시샤대학 영문과 에 입학해 시 “석류” 를
썼으며 문예시대에 ‘홍춘’, ‘산엣색시 들녘사내’ 등을 발표해 시인으로 등단 합니다.
일본 문단지“근대풍경(近代風景)” 에는 예민한 언어 감각으로 순간의 이미지를
그린 '카페 프란스', '바다', '갑판 위' 와 같은 작품들을 실었으니...
지금 들여다 보아도 지극히 현대적 인데, 1930년대 우리 문단의 총아였던
김기림 은 "한국의 현대 시는 지용에게서 비롯되었다." 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1929년 모교에 영어 교사로 부임하고는 김영랑과 함께 동인지 “시문학” 을 창간해 순수시 운동의 물길을
텄으며 이태준, 이무영, 김기림 등과 “9인회”를 만드는데 문인탄압과 회유 에도 꺾이지 않은 민족시인
으로 1948년 “문장” 에 발표한 ‘조선시의 반성’ 에서 “친일(親日) 도 배일(排日)도 못한 나는 산수에
눕지 못하고 들에서 호미도 잡지 못하였으니 그래도 버릴수 없어 시를 이어 온 것” 이라고 고백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