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잠리 추억하기와 미래 준비하기
삼거리 점방(선안나, 느림보, 2005.8.)
金 鐘 憲 (시인, 아동문학평론가)
유토피아, 하잠리
“첫닭이 울면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하고 한밤중에라도 사야할 물건이 있으면 가게 문을 두드리”는 하잠리 삼거리는 사람 사는 냄새가 돌아가는 길목이다. 삼거리 주인 아지매, 외팔이 을수 아재, 만물 수리점 오복이 아저씨 그리고 붙들이가 서로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유토피아 공간이다. 등장인물 어느 하나도 기득권을 가진 자가 없으며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아무도 그것을 행세하려하지 않는다. 외팔이 을수 아재가 늘 외상으로 술을 먹지만 점방주인 아지매는 그를 천대하지 않는다. 술값을 가져오라고 승강이를 하지만 인간적으로 미워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 을수 아재는 오른팔이 없이 평상에 앉아서 “온갖 사람한테 참견하고 시비”를 걸지만 남을 해코지 하지 않을 뿐더러 흉이 되지도 않는다. 또 기어 다니는 붙들이를 놀리는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불쌍하다고 동정어린 눈으로 바라보지도 않는다. 붙들이 엄마의 말처럼 하잠리에서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추억하기’의 의사소통
자본주의의 발달로 인한 개인의 사물화 문제가 거론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제레미 리프킨의 말대로 디지털 혁명은 결코 축복이 아닌 빚일 뿐이다. 첨단 과학기술과 정보화 사회, 경영 혁신 등이 인간의 삶을 풍족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일자리를 사라지게 하고 있다. 이러한 자본과 기술의 발달은 사회를 양극화할 뿐 아니라 디스토피아(distopia)의 불행한 공간으로 몰아가게 마련이다. 이런 현재의 절망은 과거를 기억하고 ‘추억하기’에 이른다. 이 ‘추억하기’는 작가의 주관성을 과거에 투사하여 현실을 극복하고 미래를 새롭게 열어가려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현실의 비인간적인 세태를 날것으로 달려들어 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더 긍정적인 상황으로 표현하여야 한다. 선안나는 <삼거리 점방>을 탈고하면서 “(보물을) 서툰 곡괭이질로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적지 않은 세월 손대지 않고 고스란히 묻어 두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리라는” 생각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기에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고향은 작가의 공간적 고향이 아니라 현대인의 정신적 고향이며 그가 “옛집 뒤뜰에 고스란히 묻어 둔 보물”은 다름 아닌 과거의 ‘인정’이었던 것이다. 첨단 디지털 문명과 자본의 화려한 그늘에는 비인간적인 정서와 빈부의 격차 등이 있기 마련이기에 이런 절망을 극복하고자 하는 과거의 추억은 다름 아닌 ‘인정’인 것이다. 그래서 하잠리의 진솔된 이야기는 미래로 소통되는 과거이고, 메마른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인 것이다.
하잠리는 자본과 문명으로부터 소외 된 사람들의 공간이지만 유토피아적이다. 자본으로부터 밀려난 주변이지만 주인공 붙들이는 ‘나’를 찾으려는 모험과 노력을 집요하게 하고 있다. 특별한 역사적인 이슈가 되는 소재도 아니고 이데올로기의 현장에서 억울한 피해를 당하지도 않았다. 하잠리에서는 기어 다니는 붙들이나 오른팔을 잃고 주정뱅이로 사는 외팔이 을수 아재나 모두 오늘 우리가 이야기하는 ‘장애인’이 아니다. 그들은 ‘외팔이’일 뿐이고 ‘뿔뿔이’일 뿐이다. 그래서 함께하는 이웃인 것이다. 이런 하잠리의 인정은 미래와의 소통위한 강도를 높이고 있다.
붙들이를 입학시키고 오는 길에 만난 을수 아재는 점방 앞에서 어머니를 불러 입학 축하 인사 던진다. 만감이 교차한 어머니는 가던 길을 멈추고 평상에 걸터앉아 붙들이 위로 다섯이나 되는 자식을 가슴에 묻어야 했던 아픔을 달랜다.
“성님요, 이 술 내가 사지에. 아인기 아이라 우리 붙들이가 저래 커가꼬 오늘 입학을 했는데, 한 잔 안 할 수 없지예.”(11쪽)
자본의 논리와 빈부의 격차가 없는 가운데 일상의 연장에서 자연스러운 자축을 맞이한다. 여기서 남편과 자식을 먼저 보낸 억척스러운 어머니의 애상과 동시에 강한 일상을 독자는 엿볼 수 있다. 이렇듯 하잠리는 사람 사는 냄새가 돌아나는 곳이다.
중학교를 졸업한 붙들이는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도장방을 생각하게 된다.
“그놈 엔간하네. 좋다, 가리키 주구마. 하지마는 내 있는 동안 여기서 장사할 생각은 하지마래이.”(30쪽)
처음 붙들이가 도장방을 찾아 갔을 때 “내 밥줄”이라며 매몰차게 거절하던 아저씨가 도장 파는 기술을 가르쳐 주겠다며 한 말이다. 돈벌이를 사이에 두고 고집을 부리는 이기도 없고 장애를 가졌다고 천대하는 괄시도 없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기의 밥줄을 걱정하고 아무런 차별 없이 붙들이를 맞이하고 있다. 이웃이란 이런 것이다. 당장 눈앞의 이익에 작은 싸움을 하지만 가슴에 묻어두는 앙금은 없다. 또 불편한 몸을 인식하지도 못할 정도로 함께 지낸다. 이러한 인정 있는 하잠리를 통해서 독자는 장애인 복지가 잘 되고 있는 요즘, 장애인 차별도 그만큼 같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그래서 하잠리는 작가의 고향이 아닌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고향이 되고 또 미래를 준비하는 거울이 되고 있다.
우짜든동 벌어묵고 살아야지
붙들이는 이러한 인정이 돌아나는 하잠리와 함께 어머니의 가르침이 있어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게 된다. 어머니의 생활철학은 현실의 고통을 이겨내도록 하는 두 가지로 압축되어 붙들이에 전달되고 있다. 그 하나는 세상에는 똑같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붙들이가 자기의 처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극복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세상에 똑같은 사람이 어딨노? 큰 사람이 있으머 작은 사람도 있고, 기운 센 사람이 있으머 약한 사람도 있제. 그거맨치로, 걸어 댕기는 사람이 있으머 몬 걷는 사람도 있는 기라. 그래도 니는 걷지는 몬 해도, 마음대로 돌아댕길 수 안 있나.”(9쪽)
글도 모르는 무식쟁이 엄마지만 불행한 현실을 극복하는 자기철학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철학은 고스란히 붙들이에게로 이어진다. 그래서 붙들이는 앉은뱅이의 자기운명을 비난하지 않고 현실에 맞게 살아가는 방법을 찾는 적극성을 보이고 있다. 그는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전혀 장애인으로 살지 않고 있다.
다른 하나는 “벌어 묵어야제, 빌어 묵으머” 안된다는 것이다. 즉 스스로의 노동을 통해서 작든 많든 벌어야 한다는 생활 철학이다. 어느 하나도 신세나 가난에 대한 한탄이 없다. 여기에 독자와 열린 소통이 가능하다. 즉 독자는 이 어머니의 이 두 가지 이야기를 통해서 현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틈을 발견하게 된다. 근대적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아니 글자도 모르는 어머니이지만 자연적 질서를 저버리지 않는 평소의 생각이 곧 자기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주체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잠리(공간)가 그를 인정하고 어머니가 그를 인정한 가운데 붙들이는 스스로 살아가야 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독자는 붙들이의 ‘나’를 찾으려는 주체적 노력을 통해서 객관적인 현실 인식을 하기에 이른다.
언제부터인가 붙들이는 학교를 슬쩍 빼먹고 읍내를 어슬렁 거렸습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만큼은 절대 놓치지 않았습니다.(19쪽)
읍내를 돌아다니면서 붙들이는 가게와 신기한 물건들을 구경하고 돌아다닌다. 이런 경험은 현실을 극복하는 밑거름이 되고 특히 읍내 시장에서 만난 자기와 똑같은 처지에 있는 기어 다니는 사람을 만났을 때 “우짜든동 벌어묵고 살아야지, 빌어묵고 살머 안 되제.”라는 어머니 말은 붙들이를 세상에 바로 서게 하였다.
도장방 - 수선 집 - 목공소 - 오복 만물 수리점 - 농사 - 삼거리 점방으로 이어지는 붙들이의 사회생활에는 작가의 메시지가 없다. 또 현실에 대한 부정적 시각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잠리 추억하기는 미래로 끌고 가는 힘이 있다. 즉 독자는 하잠리에서 생활하는 붙들이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벌려 놓음으로써 현재의 ‘첨단문명’, ‘부’, ‘복지’ 속에서도 소외되는, 그리고 자본에 사물화되는 인간을 ‘인정’이라는 전근대적 정서를 바탕으로 다시 바라보게 한다. 여기서 오늘을 극복할 수 있는 미래의 대안을 생각할 수 있다.
외적 갈등의 아쉬움
동화는 서사를 통해서 독자에게 현실인식과 함께 자기인식을 일깨워야 한다. 현실적 모순을 극대화하기 위한 배경의 설정,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인물의 선택은 매우 중요하다.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사는 붙들이는 자기의 정체성을 찾고 작은 부분에서 행복을 맞이한다.
“무릉도원이고 극락이고 세상 밖에서 찾을 게 아이지예. 이렇게 자기가 만들며 사는 것 아이겠습니꺼?”
‘스님 말씀이 맞습니더. 여기가 무릉도원이 아이머, 어데가 무릉도원이겠습니꺼. 하지마는, 진짜 내 가족이라면, 날마다 무릉도원이겠네예. 날마다 극락이겠네예…….’
붙들이는 가슴이 자꾸 아려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74쪽)
이 동화의 갈등은 붙들이가 가족을 이루기를 바라는 부분이다. 붙들이는 혜오 스님을 통해서 알게 된 아기엄마(송유화)와 다시 만나 가정을 꾸렸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그러면 여기는 바로 무릉도원이 되는 것이다. 독자는 장애를 가진 넉넉지 못한 형편으로 가정을 꾸리지 못하는 붙들이의 현실적 아픔을 읽을 수 있어 안타깝다. 그래서 독자는 붙들이가 아기엄마와 가정을 꾸리기를 바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동화의 서사가 너무나 우연에 의해 진행되는 것 같아 갑자기 긴장이 떨어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인물의 설정에 성공을 했지만 공간적인 설정에는 안일한 듯한 느낌이다. 이 동화가 미래를 준비하는 거울로서 과거를 추억하기 위해서는 모순적 공간을 설정하여 등장인물이 외적 갈등을 겪어나가게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잠리를 아무런 사회문제가 없는 유토피아 세계로 설정한 것이 이런 면에서 본다면 부담이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사이버 아동문학관 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