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불교도들은 다들 승복을 많이
입고 다닌다. 그런데 정작 입은 승복은
왜 잿빛일까에 대해 생각해 보지않는 것 같다.
하필 왜 그 많고 많은 재료 중에 아궁이에
타고남은 재로 승복의 물을 들였을까.
그것에 관해 필자의 생각을 말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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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불교신문에 난 기사를 보자.
[… 스님들. 그들을 가리켜 운수 납자(雲水納子)
라고 한다. 그래서 그들이 입는 옷의 색깔은
구름의 빛깔을 닮았을까? …
고려시대에는 평상복으로 한복을 입었으며
검정색으로 물을 들이기나 백색 옷을 입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의 회색 옷은 당시
먹물을 들여 검정색이던 것이 퇴색되면서
자연스럽게 회색으로 변한 데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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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신문의 기사를 보자
[…잿빛이 원래 우리 나라 승복의
고유색은 아니었다. 백의 민족이니 당연히
흰색 옷을 입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행자의
것으로는 적합하지 않았을 테고 무언가
그에 걸 맞는 색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아궁이에 타다 남은 숯이었다.
그 숯가루를 곱게 빻아서 자루에 넣어
물에 옷감을 함께 넣어 치대면 짙은
푸르른 빛깔이 서린 회색 빛이 우러난다.
그것은 흑과 백을 초월한 조화의 색이자 원융의 색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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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두 기사처럼 과연 승복의 색깔은
항상 쓰던 먹물로 들이다가 그것이 퇴색되니
우연히 잿빛이 되었는가? 아니면 수행자의
색깔을 찾다가 우연히 찾아낸 것이
아궁이에 타고 남은 재였을까?
필자의 생각은 우리의 승복 색깔은
절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더 깊은 형이상학적인
근원과 고대부터 내려오는 전통성이 있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멘 처음에 재로
우리나라 승복 색을 염색한 그분은 필자가
지금부터 말하려고 하는 것을 이미 모두
알고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인도에서는 쉬바 신을
명상하는 수행자들은 재를 온 몸에 바르고
있다. 그들과 우리의 승복은 어떤 연관성이
없을까? 필자는 분명 있다고 본다.
그럼 ‘인도신화’에 나오는 파괴의 신인
쉬바가 헌신자에게 하는 말을 풔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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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씨앗을 재 속에 놓아둔다.
그리고 생명체에 그것을 뿌린다.
그러므로 불에 의해 행해져야 할 일을
행하는 자는 과거, 현재, 미래의 주인이
될 것이다. 나의 씨앗이 담겨진 재에
의해서 사람들은 모든 죄를 벗어 버릴 수 있다.
재가 모든 것을 밝게 하면서 불태울 때
바로 그 순간 그것을 재라고 불리며 오직
그러한 재만이 모든 악에서 남게 된다…
영혼이 순수한 자는 재속에 목욕을
하면서 자신의 분노를 극복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모든 감각적 즐거움을 극복한
그는 나에게로 와서 결코 다시 윤회하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영원한 행복을
얻게 될 것이다…인내, 무욕, 명예와
불명예에 대한 무관심 바로 그것이 가장
참되고 훌륭한 옷이다. 그러므로 그대들이여.
완전한 행복을 추구하려거든 재로 온몸을
뒤덮은 채 절대자에 대해 명상하도록
하여라. 오직 재로 목욕을 한 자만이
그로 인해 온갖 죄악을 불태워 없앨 수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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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바는 자신의 “씨앗”을 재속에 둔다고
했다. 그 씨앗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우리에게 익숙한 도형 하나를 보자: ∴
절 지붕 옆면에 거의 그려져 있는
삼각형을 이룬 점 세개가 그것이다.
그것을 보통 불, 법, 승 삼보를 뜻한다고 말 한다.
점 세개로 이루어진 이 삼각형 기호는
기원전 3000년경에 번성했다고 하는
인더스 문명의 모헨조다로 와 하라파
(mohenjodaro harappa)’유적에서 최초로
발견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모헨조다로"는 죽은 자들의
무덤을 뜻하며, "하라파’에서 “Hara”는
쉬바 신의 다른 이름으로 이것은 ‘쉬바 신의 물’
즉 인간 생명의 본질을 뜻한다고 한다.
이것은 미국 콜로라도 계곡에서도
발견되었으며, 에베르트 산록 신화에서는
이것을 사람 나무라 하고, 세계의 씨눈이라고도 한다.
다른 예로 도가 경전인 ‘태을금화종지’의
내용을 인용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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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연분을 내려놓고 오직 (삼각형을 이룬)
∴ 세 점만 이용하는 것이다. 세 점은 곧
해와 달과 천강성인데 사람의 몸에 있어서는
왼쪽 눈과 우측 눈과 눈썹사이의 편편한
곳이다.
사람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이전의
신과 같았던 사람들에게는 모두 눈이
셋씩 있었다. 사람이 지혜를 딱고 부리노라면
미간이 열리게 되는데 이 열린
눈을 천목(天目) 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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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근원인 ‘옴’은 세가지 형태로
발현된다. 즉 창조, 유지, 파괴 이다.
그것을 인격화 시킨 형태가 브라마 신,
비쉬누 신, 쉬바 신이다. 평소에 우리가
하는 말도 위의 세가지 형태로 표현된다고
한다. 그 중 쉬바는 모든 것을 자신의
불로 파괴하는 신이다. 모든 만물을 불로
태우고 나면 거기에 남는 것은 잿더미만
남는다. 그러므로 잿색은 이 세상의
마지막 색이다.
파괴는 곧 새로운 건설이다. 건설 속에는
곧 파괴가 내재해있다. 파괴 속에는
새로운 희망의 씨앗이 내재해 있다.
인도의 쉬바 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쉬바링가’라는 쉬바의 남근을 숭배한다.
위의 예에서 보듯이 ‘쉬바의 물’은 이
세상에 생명의 씨앗을 심는 쉬바 신의
정액인 우리 ‘생명의 본질’을 말한다.
그 본질은 ‘옴’이다. 창조, 보존, 파괴라는
말은 결국 하나이며 같다. 물질적 눈으로
보는 우리의 눈에 그렇게 보일 뿐이다.
우리가 정견, 즉 바르게 볼 때 그들은
단지 하나인 옴으로 보일 것이다.
동일한 근원을 얻기 위해 성경의 요한복음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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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셨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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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도 동일한 생명의 씨앗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럼 우리의 생명의
씨앗은 어디이며 무엇인가? 이 세상은
유계의 복사판이다. 우리의 근원은
죽으면 돌아가는 유계이다.
그곳이 진짜 우리의 집이다. 그 곳으로
가는 통로가 위의 도교 경전에서 말하는
삼각형의 멘 위에 있는 점, 하늘의 눈인
영안이다. 그것이 씨앗이다.
세상을 보는 두개의 눈(아래 점 두개)이
감기고 영원을 보는 하나의 눈(삼각형
위의 점 하나)이 열릴 때 육체라는 토지에
우리의 근원인 ‘생명의 씨앗’을 심는 것이다.
그러므로 승복의 잿색은 마땅이 파괴해야
할 이 물질적인 세상을 뜻한다. 그것을
붓다는 고(苦)라고 했고, 지금 쉬바는
잿더미라고 말한다. 거미줄에 걸린 불쌍한
파리처럼 욕망과, 감각기관과, 자연력의
거미줄에 걸려 애처롭게 발버둥 치는
나약한 삶을 파괴하고 그 잿더미 위에
영웅처럼 용감히 불변하는 본질의
씨앗을 심으라는 뜻이다. 그래서 인도의
쉬바를 숭배하는 수행자들은 몸에 재를
바르고, 우리의 승려들은 잿색의 옷을 입는
것이다. 항상 변하는 이 세상을 파괴하고
불변하는 본질의 씨앗을 얻기위해-.
이제 우리나라 승복의 잿색은 위의
기사에서 말한 것처럼 단지 우연히 얻은
결과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우리보다 먼저 간 선사들은 그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안배해 놓았던 것이다.
오늘 당신이 잿색의 승복을 입고 거리를
걷는다면 잿색의 그 위대함을 알고, 재색
뒤에는 위대한 절대자 쉬바 신이 보호해
준다는 것을 알고 영웅처럼 용감하기를,
이 세상의 유혹에-.
---------옴 평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