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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베토벤입니다..
전석 초대권이라 치열한 줄서기전투가 벌어질까봐.. 일찍 갔는데..
사람이 없더군요~ㅎㅎ
무작위 초대권이라서 매니아가 많이 온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제뉴어리님.. 선운님.. 스컬리님..
심포니에서 공연시작전 만나서 커피한잔 하면서 이런 저런 대화 즐거웠습니다..
역시 어설픈 후기입니다..
글이 길어요~~
어찌어찌 쓰다보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길어지네요... 양해바랍니다..
http://blog.naver.com/mastoy/40046755586
제 블로그에서 퍼온글이기에.. 반말체 양해 바랍니다..
태안주민을 위한 특별 콘서트
예술의 전당
2008년 1월 20일 (일) 17시
오늘은 전에 응모했던 태안 주민을 위한 특별 콘서트에 당첨이 되어서 말러 1번을 듣는다.
그래도 년초부터 운이 좋은지 당첨이 되었다..
3시부터 좌석을 배정해준다고 해서 일찍 집을 나섰다..
오전내내 피아노를 쳤지만.. 그다지 맘에 들지 않았지만 다녀와서 다시 치기로 하고..
아쉬운 맘에 피아노 뚜껑을 닫고 출발 하였다..
일요일이라 길은 막히지 않았다.
도착해보니 사람들이 의외로 없었다..
예상대로 좌석은 이미 1층은 다 찼더군..
어차피 3시이전에 차있는 자리였을테니..
1층 A열 구석으로 자리를 주길래 차라리 2층 박스로 올라가겠다고 하였다.
차라리 2층 박스석이 낫지 1층 뒷자리는 2층때문에 소리도 막혀서 잘 안들리고 오히려 관객들의 부산스런 소리만 들린다.
2층 박스3번 맨 앞줄..
자리는 나쁘지 않다..
너무 일찍 도착해서 혼자 음악이나 들으면서 커피나 한잔하려고 심포니로 갔다..
마침 헤드폰에서 멘델스존 피아노트리오가 나와서 커피한잔에 천천히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좀 있으니 제뉴어리님과 선운님께서 도착하셨다..
제뉴어리님은 항상 반갑게 맞아주신다.. 1월 9일에 보고 오늘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 말러이야기며 시울시향이야기며..
이야기 도중 서울시향 콘트라바쓰 수석이신 안동혁님께서 지나가다 들리셨다..
인사를 꾸벅 드리고 후기 잘보셨다며 몇말씀 해주셨다..ㅎ
그냥 혼자 끄적거리는 글을 읽어주셨다길래 그저 감사할 뿐이다..
곧 어머님이 도착하셔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쌀쌀한 겨울의 음악당 앞을 어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잠깐 거닐었다..
또한 오늘 공연이 태안 주민을 위한 공연이고 또한 무료 공연이었다..
그러기에 입장권을 대신하여 로비에 있는 모금함에 작은 돈이지만 조금 기부도 하였다..
큰 도움은 안되더라도..
마음만이라도 돕고 싶은 심정이기에..
곧 공연이 시작되는 소리가 울렸다.
입장을 하고 잠시 앉아서 심호흡을 하며 대기하고 있는데..
옆박스에서 누군가 인사를 하였다..
코스마님이셨다..ㅎㅎ
코스마님도 오늘 당첨되어서 오신다는 것을 알고있었는데 바로 옆에 자리하시다니~ㅎㅎ
그렇지 않아도 한번 인사를 하려 했었는데.. 우연찮게도 먼저 알아보신 것이다..
반가움에 인사를 하고.. 역시 훈남~ 이시다..ㅎ 와이프 되시는 분도 조신한 이미지에 참 잘 어울려 보였다..
곧 공연이 시작 되기에 많은 이야기는 못했다.
오늘의 공연은 말러 1번이다.
오케스트라가 입장을 하고..
곧 화면에 영상이 비춰졌다.. 태안반도를 덥친 기름 재앙에 관한 영상..
많은 사람이 아프고 힘들다..
참 화가 많이 난다..
이어서 진양혜씨가 나와서 몇마디 하였다.
이번 공연이 태안주민을 위한 공연으로서는 문화 예술 단체에서는 최초로 행해지는 콘서트라 하더군..
이러한 공연이 각 장르별로 많이 되어서 그분들의 시름과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렸으면.. 하는 마음이다.
악장이 입장하고 정명훈님이 입장하셨다..
드디어 말러 1번이 시작된다..
말러..
1860년 보헤미아의 칼리쉬트라는 마을에서 태어난 작곡가이다.
후기낭만주의에서 근대에 이르는 과도기를 살았다.
말러는 가극 지휘자로서 아주 명성을 날렸지만, 실제로 작곡면에서는 오페라는 초기에 한곡 작곡했을뿐이다.
본질적으로는 교향곡과 서정적인 가곡에 창작의 주체를 두었다.
극적인 면을 강조하기 보다는 서정성을 존중하였고 구성이 빈틈이 없는 음악을 만드는 것에 힘썼다는 점이다.
말러의 교향곡의 경우.. 거의 모두 가곡의 체험과 가곡적인 영감에서 발전되었다.
1888년 교향곡 1번을 작곡한 이후 사망할때까지 교향곡을 10곡(대지의 노래 포함)을 완성하였다.
그중 성악이 사용되지 않은 교향곡은 1번 5번 6번 7번 9번 으로 다섯곡이다.
말러의 곡의 특징은 선율적 재능이 풍부하고 형식이 정비되어 있으며 염세관과 자연관을 담고 있는 감상주의와 서정성..
그리고 기독교 신앙과의 결합이다.
또한 말러는 병을 극도로 두려워 했다.
환자나 건강하지 못한 사람을 만날때면 극단적이라고 할만큼 오들오들 떨었다고 한다.
만년에 브람스를 만날때도 그랬다고 한다..
이는 건전하지 못한 몸으로는 이상적인 창작활동을 할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말러의 이야기는 대충 이정도만 하고 자세한 것은 뒤에 다시 이야기 하기로 한다.
교향곡 1번 D장조.. 타이탄..
1884~1888년에 작곡되었다.
초연은 1889년 11월 20일 부다페스트에서 자신의 초연으로 이루어진다..
이교향곡은 처음에는 교향곡 1번이 아니고 교향시로 되어 있으며 5악장으로 이루어졌다.
1,2부로 나누어 졌으며
제1부 - '젊은 날로부터', 꽃, 과일 그리고 가시의 곡
1악장 : '끝없는 봄' (서주와 알레그로 코모도)
끝없는 봄.. 서주는 자연이 긴 겨울의 잠으로부터 깨어나는 것을 묘사한다.
2악장 : '불루미네' (안단테)
꽃의 장
3악장 : '돛을 달고' (스케르쪼)
돛에 바람을 싣고..
제2부 - '인간 희극'
4악장 :
'좌초' (캘롯 풍의' 장송 행진곡)
5악장 : '지옥으로부터' (알레그로 푸리오소)
깊이상처 입은 마음의 갑작스런 발작
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전체 교향곡의 제목은 장 폴 리히터(1763-1825)의 소설에서 따온 '타이탄'이었다.
말러는 청년시절부터 이소설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거인주의를 예찬하는 의미에서 자신의 교향곡에 거인이라는 명칭을 부여한것은 아니다.
인생에 눈뜬 20대 청년의 서정미 넘치는 일반적인 감정으로 세계와 싸워 나가는 혈기넘치는 마음으로 인생에 뛰어들어가는 모습이라고 한다.
말러가 아끼는 제자 부르너 발터는 이곡을 말러의 베르테르라고 말했다.
어쨌든 이런 의미에서 직전에 작곡된 가곡집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와 정신적으로 연관성이 있으며 2곡과 4곡의 선율이 교향곡에 사용되었다.
이후 2악장이 없어지고 지금의 1번 교향곡으로 탄생되었다.
대략적인 설명은 여기까지만 한다.
1악장..
소나타형식..
곡은 유연하고 장중하게라고 지정되어 있다.
정명훈님은 역시 악보없이 지휘하셨다.
정명훈님의 정교한 지휘봉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음악회를 보기 전에 마음으로 준비하면서 내가 예상했던 바로 그 소리가 울려 퍼진다..
가슴이 떨려오고 기분이 좋다..
약간 느린 듯한 느낌을 주면서 아주 단정하게 연주되었다..
관객은 시작부터 산만하였다.. 차분한 시작에 방해하듯이 핸드폰이 울리질 않나.. 아이들의 소란스러움..등등
다소 많이 방해가 되었다..
솔직하고 간결한 현악기의 '오르간 포인트'('페달 포인트' 라고도 하는데 몇 마디에 걸쳐 한 음 만을 길게 지속시키는 것을 일컫는다. 이를 배경으로 다른 성부에서는 자유롭게 화성 진행이 이루어진다)를 배경으로 오보에와 파곳이 하강하는 음의 특징적인 동기를 연주한다.
이는 말러에 의하면 뻐꾸기의 소리를 모방했다고 한다..
정말 새소리 같다..
멀리서 관악기의 소리가 들린다..
무대뒤에서 트럼펫이 몇번 팡파레를 울리더니 곧 무대 한쪽에서 트럼펫주자 3명이 조심스레 나와서 자리로 간다..
첼로에 의해 등장하는 주제는 말러의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중 두 번째 곡인 '오늘 아침 들판을 거닐 때'이다.
아침의 이미지가 강한 악장이다..
밝은 햇살이 비추기 시작한다.. 새의 지저귐도 들리면서..
급하지 않게 차분한 아침이다.. 아름다운 자연을 묘사하듯이..
햇살이 많이 비추면서 곡도 시원하게 내달리기 시작한다..
관악기도 신나게 연주한다..
뻐꾸기 울음소리를 남기면서 곡은 고요해진다.. 속도도 늦어 지면서 다소 우울한 분위기가 된다..
그래도 여전히 새의 지저귐은 있다.. 다소 우울한 지저귐이지만..
이내 다시 밝아진다..
심벌의 큰 소리와 함께 클라이막스로 치닫는다..
강렬하다..
정명훈님의 움직임에서도 그 강렬함을 느낄 수 있다..
유난히 무대를 많이 쓰시는 모습이다..
평소에 즐겨듣던 번스타인보다도 훨씬 화려하게~ 맘이 시원하게 뚫리는 느낌이다.
신나고 화려한 코다로 곡은 마무리 되어진다..
예상대로~~~
악장간 박수는 의기양양하게 퍼졌다..
이로서 연주는 끝이 났다..
오늘의 연주는 정말 관악기들이 수고를 많이 해주었다.
예전에 몇차례 관악기들이 약한 모습을 보여줘서 이번 말러1번이 솔직히 다소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 잘해주었다.
정말 4악장에서는 간만에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이러한 느낌을 찾아 헤매다가 갈증이 해소되는 느낌이다..
말러의 느낌이 충분히 전달되었다..
또한 요즘 콘트라바쓰의 음에 매료되어서 일부러 콘트라바쓰 음반을 찾아 듣는 나로서는 안동혁님의 3악장 처음 부분도 너무 좋았다.
전 주자들의 광분하는 연주는 참으로 보기가 좋던지..
곡에 완전히 심취하여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하는 단원들의 모습은 언제 보아도 너무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많은 박수 갈채가 쏟아졌다.
몇번의 커튼콜에 정명훈님께서 한말씀 하셨다..
어려움이 많겠지만 그래도 화이팅이시라며..
앵콜곡은 브람스의 헝가리무곡 1번..
자주 앵콜곡으로 연주되기에 친근하다..ㅎㅎ
곡이 마친 후 모두 기립하여 화이팅하였다..
정말 서울시향의 연주는 날이 갈수록 좋아진다는 것을 느낀다..
나같이 클래식을 조금 아는 초보자도 그것을 느끼는데..
정말 어디까지 실력이 상승될지..
서울시향을 아끼는 맘으로 지켜보는 것도 꽤나 재밌는 일이다.
조금 아쉬운 부분은 위에서 보니까 1층 객석이 무더기로 많이 자리가 비어 있었다.
물론 공연을 협찬한 사람들의 간부급이거나 윗사람들 자리였겠지..
그런데..
너무 보기 안좋다.
관심이 없고 안오는건 이해한다..
그러면 좀 전화 한통으로 못간다고 연락을 해주면 다른 사람들에게 자리를 줄수도 있는 것이고..
누구는 3층에서 보고 싶겠나..
나 하나 말없이 안가도 그만이라는 생각..
초대권이라고 우습게 보지 말란 말이다.
또한 예당의 오버스러운 관객제지는 조금 바뀔 필요가 있다.
자주 음악회에 오는 사람들은 물론 익숙해져서 공연전 핸폰도 꺼놓고 최대한 공연예의를 지키려 한다.
하지만 오늘 같은 공연은 클래식을 처음 오는 사람도 많다.
그런 사람들이 이러한 좋은 공연을 봤을때는 사진도 찍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고 무식하게 연주도중 사진기 후레쉬를 터트리는 건 문제가 크지만...
다같이 기립해서 박수치고 환호 할때... 어디선가 후레쉬가 터지고 그쪽을 보면..
직원이 몸을 날리다 싶이해서 제지한다..
마치 권총이라도 꺼낸 사람 같아진다..ㅎ
그 일대는 순간 썰렁해지기 마련..
그관객 주변은 기분좋게 흥에 겨워 박수를 치시다가.. 기분이 상한지 표정이 달라지면서 주섬주섬 짐을 챙긴다..
정 그렇게 제지하고 싶으면 공연시작전에 말을 해주던가..
아니면 극장처럼 공연전에 뭐뭐 하지 말라고 영상을 비춰 주던가..
처음에는 누구든 잘 모른다.
구스타프 말러
게르만계 유태인인 베른하르트 말러 Bernhard M.와 마리 헤르만 Marie Hermann 사이에서 14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알코올 증류업(蒸留業)과 선술집 경영을 생업으로 하고 있었다. 말러는 어려서부터 피아노 작곡을 배웠는데 14세부터 18세까지 빈 악우협회 음악원에서 율리우스 엡슈타인 Julius Epstein에게 피아노를, 로베르트 푹스에게 화성을, 프란츠 크렌 Franz Krenn에게 작곡을 배우는 등 정규 음악교육을 받았으며, 1877년부터 1879년에 걸쳐서 빈 대학에서 철학과 미술사도 공부했다. 특히 대학에서는 안톤 브루크너와 알게 되어 친교를 맺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까지는 브루크너의 제자라 할 수 있는 관계였다. 18세부터 20세까지 말러는 피아노의 개인교습으로 얻는 작은 수입으로 가난하게 지냈는데, 이 시기인 1880년에 최초의 대작인 칸타타 탄식의 노래를 완성했다. 말러는 이 작품으로 베토벤 상에 응모했으나 낙선했다. 그때 브람스 등 보수파 대가들의 부정적인 태도 때문에 작곡가보다는 지휘자로 입신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는 지휘자로서 린츠 근교의 바트 할(할 온천)에서 데뷔하여, 하기에만 개설되는 이곳의 작은 극장에서 몇 개의 오페레타를 지휘했다(1880 여름). 이것을 시작으로 하여 슬로베니아의 류브리아나 가극장(1881~82), 모라비아의 올로모우츠 가극장(1883), 그리고 프로이센의 카셀 궁정 가극장(1883~85) 등과 잇달아 계약하였고, 1885년에는 유명한 바그너풍의 흥행사 안젤로 노이만 Angelo Neumann의 인정을 받아 25세 때 일찍이 프라하의 독일 가극장 차석 악장으로 발탁되었다. 여기서의 바그너, 모짜르트,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 등 뛰어난 연주에 의해서 말러의 명성은 부동의 것으로 확립되었다. 그러나 노이만과 격렬하게 대립한 뒤 1886년 7월 프라하를 떠났다. 그는 라이프찌히 시립 가극장과 계약하였으며, 이후 2년간 자신보다 조금 연상인 재기가 넘치는 동료 지휘자 아르투르 니키슈와 경쟁을 벌이게 된다.
이 시기의 말러의 생활은 감정면에서 매우 파란만장한 것이었다. 칸타타 탄식의 노래(1880), 가곡집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1884), 교향곡 제1번(1884~88) 같은 그의 초기의 작품은 이 시기에 실패로 끝난 그의 세 번의 연애에서 착상된 작품이다. 말러의 미인 가수에 대한 정열은 이미 물의를 일으키고 있었는데, 이것은 그 뒤 함부르크에서 지휘하게 되었을 때도, 그리고 빈에서도 똑같았다. 라이프찌히에서는 1888년 1월에 자신이 보필 완성하고 오케스트레이션한 베버의 미완의 오페라 세 사람의 핀토를 초연하여 빛나는 성공을 거둠으로써 말러는 일약 유명해졌는데 새로운 대립으로 인해 3개월 후에 라이프찌히를 떠났다. 그 후 말러는 부다페스트 왕립 가극장의 예술감독에 임명되어, 여기서는 바그너의 4부작 니벨룽겐의 반지 중 처음의 두 곡 라인의 황금과 발퀴레, 베리스모 오페라의 대표작의 하나인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마스카니 작품)의 헝가리어에 의한 초연을 지휘했다. 그의 연출과 연주의 수준은 특필할 만한 것이었으며(특히 모짜르트의 작품), 많은 칭송자를 얻었는데 그 중에는 브람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말러는 자작의 교향곡 제1번도 이곳에서 초연(1889. 11. 20. 부다페스트 필하모니 관현악단)하였으나 실패하고, 이후 한동안 자작의 상연을 단념하게 되었다. 1891년에 극장감독이 바뀌면서 배외주의(排外主義)와 독재로 알려진 벨라 지치 Béla Zichy 백작이 취임하자, 이 새로운 감독은 말러를 부다페스트에서 추방했다. 말러는 함부르크 시립 가극장의 정지휘자로 취임하기로 했다. 함부르크에서는 지식이 풍부한 많은 청중과 국제적인 수준을 자랑하는 성악진(聲樂陳)을 거느리게 되었으나 관현악단은 수준이 떨어졌고 연출은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곳의 극장감독 베른하르트 폴리니 Bernhard Pollini는 성악 외에는 흥미를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함부르크에서도 말러는 새로운 신봉자를 얻었다. 그가 상연한 작품의 작곡자들(마스네, 차이코프스키, 마스카니, 알프레드 브뤼노 등)이나 한스 폰 뷜로 등으로, 폰 뷜로로부터는 예약연주회의 지휘를 이어받았다.
함부르크에서의 6년 동안 매년 여름을 잘츠부르크 근교의 아테 호반에서 보냈던 말러는 이 사이에 교향곡 제2번(1888~94)과 교향곡 제3번(1893~96), 거기에 가곡집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의 대부분을 작곡했다. 1897년에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그는 브람스와 그의 친구이며 음악평론가인 한슬릭의 후원을 얻어 운좋게 빈 궁정 가극장의 지휘자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음악가 겸 극작가 말러가 상연한 작품(말러는 연출의 뼈대가 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이 직접 결정을 내렸다)은 지금도 역사상 화제가 되고 있다. 특히 무대장치가이기도 한 화가 알프레트 롤러 Alfred Roller와 알게 되어 그 이후의 빈 시대 최후의 5년간은 무대표현에서 시각적, 연극적, 음악적 등 갖가지 요소의 통일적 융합이라는, 이전부터 자신의 예술상의 이상으로 하고 있던 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쉴 사이도 없이 상연을 거듭했다. 이 눈부신 협력관계는 빈 궁정 가극장에 진정한 황금시대를 가져오게 했는데, 그 발전 단계의 주요한 한 시기를 이룬 작품은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1903), 베토벤의 피델리오(1904), 모짜르트의 돈 조반니(1905)와 피가로의 결혼(1906), 글룩의 아울리스의 이피게니아(1907)였다. 또한 말러는 3년 동안 빈 필하모니 관현악단을 지휘했는데 그가 위대한 고전작품에 가한 수정은 평론가들의 분노를 폭발케 했다. 증오를 받거나 숭배를 받기는 했어도 사랑받는 일은 없었던 말러의 예술상의 광신적 행위는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었다.
말러는 1901년에 젊고 매력적인 알마 신들러 Alma Schindler와 결혼했다. 알마는 유명한 풍경화가의 딸로서 작곡도 좀 하는 음악가였는데, 그 독점적이고 정열적인 성격과 만나는 모든 사나이들을 매료시키는 성향이 말러와의 부부 사이를 몇 번이나 위기에 빠뜨렸다. 그러나 알마의 아름다움과 쾌활한 정신은 동시에 말러의 성격을 바꾸게 했다. 말러는 알마와의 사이에서 두 딸을 얻었으며, 알마를 통하여 몇몇 저명한 예술가들,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콜로 모저 Kolo Moser, 칼 몰 Karl Moll(알마의 양아버지) 같은 화가들, 극시인 게르하르트 하웁트만 Gerhard Hauptmann, 전위음악가인 두 명의 지도자 아르놀트 쇤베르크와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 등과도 사귀게 되었다. 말러는 이 빈 시대에 여름 휴가를 마이어니히의 뵈르터 호반에서 보냈는데, 여기서 제4번부터 제8번까지의 교향곡과 후기 가곡을 작곡했다. 작곡가로서 인정받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이며 1902년부터 약간씩이기는 하지만 자작을 독일 각지 및 오스트리아, 네덜란드에서 지휘하게 되었고, 네덜란드에서는 빌렘 멘겔베르크가 말러의 작품을 지지하여 그것을 다루어 주었다. 그러나 1907년 장녀인 푸치 Putzi가 성홍열에 걸려 죽었을 때 말러는 이미 빈을 떠나 뉴욕의 오페라 극장으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있었다. 10년 동안이나 빈 가극장에 들끓는 책모나 공격의 희생이 되었으며, 빈 시민의 그늘에서 싹터 오르는 유태인 배척의 기운에 고심해 오던 그였지만 그는 작별을 아쉬워 하면서 고향인 유럽을 뒤로 하였다. 이후 여름 휴가를 토플라흐에서 지내는 것을 제외하고는 유럽으로 돌아오는 일이 없었으나 티롤 지방 남부의 두 피서지에서 교향곡 대지의 노래와 교향곡 제9번, 그리고 교향곡 제10번을 중간까지 작곡하게 된다. 뉴욕에서의 말러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바그너와 모짜르트의 작품의 밤(그 외에도 베토벤의 피델리오, 스메타나의 팔려간 신부, 차이코프스키의 스페이드의 여왕 등)을 지휘하여 청중을 열광적으로 감동시켰다. 그러나 2년 후에는 극장 감독이 독일인 콘리트 Conried에서 당시 혈기왕성하며 야심에 넘치던 젊은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를 새로운 지휘자로 데리고 온 이탈리아인 가티 카자차 Giulio GattiCasazza로 바뀌자 그는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을 떠나게 된다. 그에 대한 경의로 뉴욕 필하모니 관현악단을 전면적으로 재조직함으로써 지휘자가 된 말러는 우선 최초의 시즌 동안은 45회의 연주회가 예정되어 있었고, 두 번째 시즌에는 65회의 연주회가 예정되었는데 48회째의 연주회를 마친 후인 1911년 2월 21일 병으로 쓰러지게 되었다. 그 무렵 말러는 어떤 비평가의 조직적인 공격을 받았으며, 뉴욕 필하모니 관현악단의 감독위원회와도 격렬하게 대립하여 지휘를 계속해 나가기가 어렵게 되었는데, 그 뒤 처음에는 그저 후두염 정도였던 병이 악화되어 전신으로 퍼져 이 투병생활은 2개월이나 이어졌으며 파리에서 1주간의 치료를 받기 위해 뉴욕을 떠날 무렵에는 그 누구도 말러의 소생을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파리에서 빈으로 옮긴 며칠 후 말러는 51회의 생일을 앞에 둔 1911년 5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죽기 몇 달 전인 1910년 9월 12일 말러는 뮌헨에서 교향곡 제8번을 자신의 지휘로 초연했는데, 이 연주회야말로 작곡가 말러의 경력 중 가장 눈부신 승리였다.
구스타프 말러는 40곡 정도의 가곡(거의 절반 가량이 관현악 반주 딸림)과 칸타타 1곡, 그리고 11곡의 교향곡(대지의 노래와 미완의 교향곡 제10번을 포함)을 남기고 있다. 그는 작곡가로서는 오랫동안 과소평가되어 무시되고 논란되어 왔는데, 그 원인의 일부는 그가 연주와 창작이라는 양면의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무의식적인 기억과 위장된 인용, 스캔들을 야기시키는 평범함과 매우 감상적인 자기 만족을 끼워 맞춘 것이라는 비난을 받아왔다. 실제로, 행진곡이나 렌들러 무곡 등의 서민적이고 단순한 리듬, 겉보기에는 안이하게 착상된 것 같은 선율뿐만 아니라 표현되는 기분의 갑작스런 변화, 조성의 파괴, 두드러진 대조, 거친 음향, 격렬한 색채감, 잡다한 양식처럼 말러의 예술에서만 볼 수 있는 모든 것은 쇼크를 주고, 도발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비극적인 것과 그로테스크한 것, 정열과 해학적 어투, 숭고함과 저속함, 진지함과 해학, 민요적인 소박함과 정교한 서법, 환상적이고 낭만적인 신비주의와 냉철하고 비평적인 니힐리즘 등 몇 가지 근원적인 대립과 모순이 말러의 작품 중에서 지금까지도 확실히 두드러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과 역설이야말로 말러의 예술에 독창성과 풍부함을 부여하고 있으며, 그의 음악에 있어서 그 가장 깊숙한 곳에서 양식이 되고 있는 것은 말러 자신의 내면적 갈등과 바람, 형이상학적 이미지인 것이다. 말러에게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나 클로드 드뷔시 등 같은 시대의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향락적인 면이 추호도 없었다. 말러는 항상 음악을 정신적인 것으로 이끌어 올리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래서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말러 속에서 베토벤 이래 가장 형이상학적인 작곡가, 베토벤 이후 후기 양식에 이를 수 있었던 한 음악가를 볼 수 있다는 데 전혀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말러는 확실히 음악을 변혁하려고는 생각지 않았으며, 새로운 음악 언어를 창조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러가 사용한 소박한 리듬과 온음계적 화성은 과거의 환영에 연연해 하는 것을 허용치 않았던 것이다. 쇤베르크나 그 제자들이 말러에게 바친 존경심은 단순히 말러의 인격만이 아니라 오히려 음악가로서의 말러, 새로운 음악의 선구자로서의 말러에게로 향해져 있었다. 자유로움을 획득한 새로운 폴리포니 서법, 음빛깔을 작곡의 패러미터로 하는 관현악법, 역사적인 음악 소재를 겹쳐 놓는 취급법, 소나타 형식에서의 축어반복적(逐語反復的)인 재현부의 삭제, 나아가서는 소나타 형식 그 자체의 거의 안전하다고 할 수 있는 배제-이것은 끝없는 변형(아도르노)의 발전 과정에 있어서의 필연적인 귀결로써, 특히 말러 후기의 작품군을 특징짓고 있다-등 말러의 음악에는 현대를 향한 온갖 싹이 인정되고 있다. 또한 아도르노는 이미 알려져 있는 소재를 전개시키거나 이미 확립된 정식(定式)을 존중하는 대신, 전혀 다른 에피소드와 종종 예상 밖의 일은, 전개의 급변을 사슬처럼 연결시켜 짜내는 현대적인 장편소설에 말러의 교향곡을 비유하고 있는데, 그의 교향곡을 일관하고 있는 인간 존재와 전체를 표현하려는 희망과 더불어 거대한 관현악 편성과 장대한 악곡 규모조차도 현대의 많은 작곡가들에 의해서 모방되고 있는 것이다. 말러가 음악가로서 표현한 위기나 분열, 갈등은 장르와 양식 사이에 있는 장벽의 제거, 형식의 붕괴, 전통적인 가치의 몰락 및 이들의 결과로서 생기게 되는 커다란 의문 등과 마찬가지로 이제 그대로 현대가 안고 있는 문제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말러야말로 프로이트나 카프카와 같은 시대에 속하며 피를 같이 하는 동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 사람은 공교롭게도 보헤미아의 유태인들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금세기 초의 빈을 상설무대로 한 정신의 혁명극의 중심적인 출연 인물이었다.
첫댓글 베토벤 님..어머님 모시고 다니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습니다.모자가 같은 취미를 가지고 있다는데 다들 부러워 합니다.후기 쓰느라 수고 많았습니다.마에스트로가 어머님이 위독하신데도 귀국하여 연습시간도 적었기 좋은 취지의 자선음악회였으니 저도 후한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단 관객들 어제 소란스러운것과 SBS 중계 스탭들 중간에 왔다갔다하고 기계 만지는 소리하며..옥의 티였습니다.
음 관객들 소란스러운건 정말 심했습니다. 제 주위에서는 핸드폰 받는분도 계셨고 대화를 나누시고 핸드폰 켜시고 떠드시고 별별분 다계셨어요. SBS 도 제 오른쪽에서 촬영.. 옥의 티였습니다 ㅜㅜ 그래도 제뉴어리님 덕분에 정말 좋은 공연 잘 봤습니다. 참 행복했어요 ^^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후기 잘 읽었습니다. 예술의전당도 2006년까지는 공연 시작 전 휴대폰, 악장 사이 박수, 사진과 관련된 안내방송을 했지만 2007년부터는 운영 원칙을 안내 방송을 하지 않는 것으로 바뀌다고 합니다. 오늘같은 공연은 사진을 찍자마자 사진 제지를 하는 것이 안 좋게 보이기도 했지만 큰 공연에서 한 분, 한 분 사진 찍는 것이 모아져서 엄청난 플래쉬와 사진 소음을 일으킵니다. 오늘도 저는 합창석 H블럭에 있었는데 합창석 F블럭에 앉아있던 여자아이가 1악장 시작하자마자 휴대폰 사진을 찍어 찰칵 하는 소리를 내기도 했구요. 사진 촬영을 제지하는 것도 예술의전당의 운영원칙의 일종인 것 같습니다.
태안사태에 서울시향이 이렇게 도움을 주었다는것에 자부심을 느낍니다.4악장 끝날때는 정말 압권이었습니다.
후기 잘 읽었습니다~ 의기양양하게 나온 악장간 박수가 어색하지 않은 공연이었죠,, ㅎㅎ
제뉴어리님/ 저도 제 옆박스에 카메라가 있었는데 어찌나 소음이 있던지.. 앞으로 카메라 피해다녀야 할듯.. Scully 님/ 정말 좋은 공연이었죠~^^ Free Style 님/ 제지를 아예 하지 말라는게 아니라.. 적당히~^^ 예당이 유독 심해요.. 스턴트맨들을 뽑나.. 어찌나 몸들을 잘 날리는지..ㅎㅎ standchen 님/ 또한 이런 문화 예술 쪽에서는 처음이라서 더욱 좋더군요.. 저도 4악장에서 아주 좋았습니다. vision 님/ 악장간 박수는 이미 처음부터 예상된 공연이었죠~ㅎㅎ
어제 중앙 C열에 위치한 카메라맨들은 유독 중간 중간 기계 만지는 소리하며 몇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눈치를 주어도 전연 개의치 않더군요.SBS는 클래식 중계도 안해 보았나..할 정도였습니다.옆자리를 보니 중간박수..태연하게 의기양양히 치던 커플도 있었고 데이트하며 따라온 아가씨...(프로그램 떨어트리고 줍고를 반복..)얼마나 부스럭 대는지 혼났습니다.
카메라들은 어제 정말 많이 산만했습니다.. 엄청난 잡음과 함께.. 관중들이야 처음 온분 들도 많아보이고.. 그러면서 차츰 클래식에 다가오겠죠..ㅎㅎ 저도 전에는 그런거 무척이나 싫어했는데..요즘은 이해하려 하는데 지금도 싫어합니다..ㅎㅎ 맘은 이해해야지~ 하는데..ㅎㅎ 막상 음악회 가서 접하면 쉽지가 않아요~
연초부터 운좋은 양덕님 덕에 저도 3 층에서 관람했습니다. 세종문화회관의 일명 '빠리의 지붕밑'에 못지 않게 현기증을 느끼며 올라가 착석. 아랫층에선 꽤나 소란스럽고 어수선했나 봅니다. 중간박수, 예상했던 바이나 어제 공연의 성격상 이해해야겠죠? 바로 하루 전 정선생님 지휘로 산타 세칠리아의 베토벤 7 번을(디비디로) 치를 떨며(? ^^;) 감상했는데, 어제 또 가까이서 뵈니, 뭐~그저 즐거울 뿐입니다만...어머님과 더불어 정 샘도 건강하시길..^^
카메라 촬영 때문에 신경 많이 거슬리셨나보네요..그래도 sbs 덕분에 공연 못간 저로선 티비로나마 시청할 수 있어서 기쁠 따름입니다. 이번에도 정성 가득한 후기글 잘 읽고 갑니다^^
mouloud 님/ 3층.. 정말 현기증 나긴하죠~ㅎ 코스모폴탄 님 / 좀 sbs 가 유난했습니다.. 무전기 소리인지 뭔지 계속 잡음 들리면서.. 인터미션이 있었으면 한마디 했을텐데.. 저도 그 잡음값을 치루기 위해 꼭 다시 보렵니다..ㅎㅎ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