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의 마술
글: 정연우
정병학자녀 결혼식때 정연우와 함께 (춘천문인협회 사무차장)
어렸을 때 마크 트웨인의 소설 "거지와 왕자"를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다.
영국의 에드워드 6세가 된 왕자는 한 날 한시에 얼굴이 똑같이 태어난 거지의 아들 톰 캔디를 만나 운명의 장난을 한다. 그들은 서로 의복을 바꾸어 입고, 왕자는 거지가 되고 거지는 왕자가 되어 각각 색다른 체험을 하게 된다.
소설 속의 이야기는 허구로만 끝나는 줄 알았는데 나에게도 그런 인연이 생기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나의 처제는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앤공주로 나오는 배우 오드리 헵번과 같은 청순한 미모의 얼굴을 가졌었다. 가끔씩 TV에서 재방영되는 그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처제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한다.
앤 공주는 정해진 왕실의 규율과 스케줄에 권태를 느끼고 숙소를 몰래 빠져나와 거리를 떠돌며 서민 생활을 즐기는데 어느 날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긴 머리마저 싹뚝 자르고 만다. 그 짧은 모양의 헤어스타일이 오드리 헵번 스타일이라 하여 전세계에 유행이 되기도 했었다. 처제 역시 그 오드리 헵번 스타일의 머리를 했던 거라 두 사람이 더 닮았다고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불행하게도 어느 해 추석 연휴, 처제는 두 살 나는 딸을 두고 패혈증으로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허망하기 이를 데 없는 비운 속에서 어린 딸을 데리고 살아가야 하는 동서의 딱한 모습도 그렇고 엄마없이 자랄 조카도 불쌍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다행히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셔서 그분들께 조카를 맡겨 키우게 되었다. 알 수 없는 것은 하늘 만이 정해 놓은 인연이어서 아무도 앞날을 예측할 수가 없었다. 어린 조카가 네 살이 되었을 때다. 웬일인지 할머니마저 갑자기 세상을 뜨고 말았다.
직장에 다니는 동서는 또다시 이런 어린 딸을 맡겨야 할 데를 고민하다가 처형인 집사람을 자주 찾아오곤 하였다. 홀아비 손에 자라는 조카가 불쌍하기 짝이 없고 천덕꾸러기로 크는 것 같아 집사람은 마음 아파하며 잘 돌보아 주었다. 이모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어린 조카으 모습은 어미 잃은 병아리처럼 애처로워 보였다.
그 무렵이었다. 나의 둘째 여동생은 특별한 인연으로 미국 사람과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낳아 미국에서 살고 있었다. 딸을 하나 더 낳아 키우고 싶어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여자아이를 입양하고 싶어 하였다.
외국인 제부도 이왕이면 아내와 같은 한국 여자아이를 입양하는 것을 원했다. 마침 죽은 처제의 딱한 사정을 알고 있던 내 여동생은 조카를 입양하고 싶아든 의사를 전해왔다. 나는 조심스러웠지만 동서에게
입양 의사를 타진하게 되었다. 그 문제로 며칠을 두고 고심하던 동서는 결국 입양을 보냈다고 약속하였다.
젊은 나이에 홀로 어린 딸을 키운다는 것이 어렵고 만약 재혼이라도 하게 된다면 조카가 더욱 천덕꾸러기가 될지도 모를 것을 걱정했나 보다 차라리 양육여건이 좋고 입양가정을 잘 아는 곳으로 보내면 아이의 장래를 위해 나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결정을 내린 듯하다. 곡 미국 입양기관인홀트 아동복지를 통해 입양 절차가 이루어졌다.
꽤 긴 기간을 두고 현지 확인과 복잡한 서류 심사를 거쳐서 입양 제한 나이 직전,다섯살을 넘기지 않고 드디어 입양 허가가 떨어졌다. 여동생도 미국에서 다방면으로 노력을 하였기에 그나마 빨리 허가가 나왔다고 한다.
조카에게는 미국에 있는 엄마가 데리러 올 것이라고 미리 귀뜸해 두었다. 조카는 친구들에게 동네방네 자랑하며 다녔다.
어린 마음에도 제 처지의 그늘을 벗어나려고 하는 모습이 가슴 뭉클하게 느껴졌다. 여동생은 입양할 조카를 데리러 한국으로 나온 후 우리 집에서 지내며 새로 맺어진 모녀의 정을 나누었다. 엄마 없이 풀이 죽어 있던 조카도 새엄마 품에 안겨 기뻐했다. 그 생가가 넘치는 모습을 보니 측은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였다.
미국으로 떠나던 날 , 인천 공항에서 여동생의 손을 잡고 출국대기실로 들어가다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던 조카의 꾀가 말짱한 나이이므로 자기를 낳아준 엄마와 아빠가 따로 있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해주겠다고 하였다. 그렇게 떠난 후 한국 이름 예진이는 제인을 바뀌었다.
어느덧 예진이가 한국을 떠난 지 6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엿한 미국 소녀로 자란 제인은 지금 초등학교 5학년이다. 학교생활에 잘 적응할 뿐 아니라 하고 싶어 하는 일도 많아서 여러 가지 서클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지난 베이징 올림픽 때는 체조경기를 보고 저도 배우고 싶다고 하여 체조 클럽에 등록해 주었더니 열심히 운동하고 있다고 한다.
적극적이고 활발한 성격과 심지어 용모까지도 처제를 쏙 빼닮았다. 여동생이 연초에 연하카드와 함께 보낸 제인의 사진을 보니 더욱 처제얼굴을 닮아가는 것 같다. 앞으로 예쁘게 자라서 숙녀가 되면 미스 아메리카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상상도 해보게 된다.인연의 굴레에서 어린 조카는 내 여동생의 딸이 되고 이모인 집사람을 외숙모로 부르게 되면서 나 역시 이모부에서 외삼촌으로 바뀌게 되었다.
뒤바뀐 운명의 인연을 보면서 조카의 앞날에 행운이 가득하기를 빌어 주고 있다.
비록 한국의 제 아빠 품에서 자라지는 못하고 있지만, 미국으로 건너가 새 아빠와 새엄마 그리고 오빠를 만나 배우고 싶은 것을 마음껏 배우면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 것을 보면 인연의 마술에 경이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끝)-2009. 수필문학 4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