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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해인사 일주문 주련 2015년 1월 20일 화요일 맑고 좀 포근함
베풀 선 亘이 아니고 뻗을 긍 亙이다.
어제 밤에 『한국사찰의 주련』 31쪽 해인사 일주문 주련을 세필로 쓰다니, 亘 자가 낯설었다. ‘歷千劫而不古 亘萬歲而長今 역천겁이불고 긍만세이장금’이라, 천겁을 지나도 옛날이 아니요 만세를 뻗쳐도 항상 오늘. ‘긍’ 자로구나. 아래 주에 ‘긍(亘)…뻗을 긍’이라 적혀있었다. 에이 쉬운 글자인데 그냥 넘어갈까 하다가 그래도 옥편에서 확인해 봐야지 생각이 들었다. 귀찮게 부수 뒤져 찾지 말고 음훈색인을 보고 찾지 뭐 하며 옥편을 열었다. ‘긍’자 칸을 오며가며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쉬운 글자인데 옥편에 없다니, 뭔가 까탈이 있는 글자로구나, 또 귀찮게 하는 구나. 한 일 一 부수에서 찾아도 없다. 날 일 日 부수에도 없다. 가로 왈 曰 부수에도 없다.
한문을 공부하다 보면 드물지만 글자 한자 때문에 10분 이상, 어떨 땐 30분을 보내는 경우가 있다. 옥편에 없으면 잠자던 1802쪽 『漢韓大辭典』을 열어 겨우 ‘~의 古字’라도 찾으면 그나마 다행, 30분 동안 뒤져도 영 못 찾는 경우엔 짜증이 난다. 대자전에도 없는 자라니, 내가 못 찾는지 필자와 출판사가 오류인지, 내가 공부한 흔적을 남겨 놓았으니 후손이든 후학이든 중고서점에서 이 책을 산 독자든, 관심 있으면 찾아 심판하라고 쪽 여백에 ‘~?’ 라고 써 놓는다.
이 옥편이 작아서 그래. 10년 너머 뒤적여서 손때가 거멓게 묻은 이상사의 1994년 판 794쪽 『漢韓最新理想玉篇』을 접고, 작년에 산 2013년 판 명문당의 2329쪽 『漢韓明文大玉篇』을 펼쳤다. 이런, 이 큰 옥편에도 없다니! 하나 일 부에도 날일 부에도 가로 왈 부에도 없다니, 아래 위 두 획에 사이에 날 일로 6획, 쉬운 글자 아니가. 어디에 처박혀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두 二 부?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7쪽 두 二 부 4획 난에 亘 자가 얌전하게 앉아 “이제 오세요? 저를 찾았어요? 저도 기다렸어요”하며 방긋 웃었다. 선이란 음에 ‘베풀’의 훈이 있고 환이란 음에 ‘씩씩할’의 훈이 있었다. 그런데, 亘 자의 훈인 ‘베풀’대로 하면 ‘만세를 베풀어도’가 되어 주련의 국역인 ‘만세를 뻗쳐도’와 안 맞다. 그러므로 ‘선’으로 읽히는 ‘亘’이 아니고 다른 자이다. 후련 음역이 ‘긍만세이장금’이고 주에도 ‘긍’ 자이며, 바로 앞에 ‘亙’이 ‘뻗칠, 뻗을, 통할, 극진할’이므로 그 중에서 ‘뻗칠’의 훈을 쓰면 ‘만세를 뻗쳐도’가 된다. 그러므로 ‘亘萬歲而長今’이 아니라 ‘亙萬歲而長今’으로서 베풀 선 亘이 아니고 뻗을 긍 亙이로구나. 권영한과 전원문화사가 틀렸구나, 오류를 발견한 즐거움으로 亘 자 옆에 亙 자를 써 놓고 아래 여백에 亘과 亙의 음과 훈을 써 놓았다.
손 내과에서 처방전 받아 경북약국에서 약을 사고 털레털레 나서니 서기 2015년1월 20일 오전 11시 반 大寒의 태양이 눈부시다. 영주 집필실인 산백암으로 곧바로 갈까? 오후에 학가산온천 가려면 점심을 먹어야 하고, 거긴 수도가 얼어 라면을 못 끓여 먹고, 그렇다면 여기 시내에서 먹고 가야지. 오랜만에 연경이에게 전화 한 번 해 볼까? 영주에 있으면 불러 내 점심 먹어야지. 안되면 대타로 화선이에게 전화 해 점심 먹어야지. 지금 전화를 해? 길에선 좀 그렇고 주차한 데 가서 될지 안 될지 한 번 전화 해보지 머.
횡단보도를 건너, 큰 길 보도로 갈까 뒷골목 길로 갈까 잠깐 재다가, 사람들이 북적대고 응달인 보도보다 한적하고 양달인 뒷골목 길이 좋지. 뒷골목 길에 들어서니, 위로 차 있는데 갈까? 아니면 오랜만에 아래로 구성공원에 가 볼까? 공원에서 전화 해야지.
구성공원 골목에 들어서서 조금 걷다니 길 가 포교당 건물이 눈에 띄었다. 그냥 지나치려다니 대문 왼쪽 기둥 아래에 허연 게 붙어 있었다. 무엇일까? 절에 무슨 광고? 다가가서 읽어보니 B4만한 코팅한 종이에 한자 두 줄과 한글 두 줄이 적혀있었다. 읽어보니 ‘歷千劫而不古 亙萬歲而長今’, 어제 밤에 쓴 가야산해인사 일주문 주련과 같았다. 문득 쳐다보니 일주문이 아닌가. 아하! 모든 절에 일주문은 주련이 같구나,
그런데 ‘亙萬歲而長今’이라, 첫 자가 亘이 아니고 亙이었다. 그렇다면 책이 틀렸다고 한 내 생각이 맞구나. 청남 권영한이 잘못 썼구나. 어제 밤에 가야산 일주문 주련을 써 보았는데, 마침 일주문을 만났으니 절 구경하고 가야지. 경내에 들어서니 예불하는 목탁소리가 낭랑했다. 영주 지역 널리 부처님의 마음을 포교하시라 뇌며 합장하였다.
야 참 신기하다, 어제 밤에 오류라고 지적하며 옆에다 亙 자를 써 놓았는데, 지금 내 지적이 맞다고 확인 되다니, 야 이거 내 공부가 대단하구나, 드디어 문리가 통하였구나. 발길이 구성공원으로 옮겨지고 포교당 일주문을 만나고 주련 해설문을 읽다니! 아하, 이 것은 누가 인도한 일이로구나. 야 이거 이제 내가 불교에 깊이 들어간 것 아니가? 요즘 한국사찰에 주련을 공부하는 내 정성이 지극하여 어제 새벽꿈에서 옛 고승들 이름 세 개를 떠올릴 정도로 내공이 깊어지더니, 오늘은 책 주련에 오자를 확인하다니, 부처님이 공부를 도우시는 게 틀림없어. 스승인 석가모니께서 직접 가르치실 리는 없고 누군가가 도우고 있는 게 분명해. 그렇다면 누구? 법칭이 다르마키르티 아닐까? 책 한 권 읽어주었으니 말이야 친구 됐다고. 공원으로 오르는 몸과 마음이 흐뭇했다. 그런데 말이야 포교당 일주문에 주련이 반듯하게 써 있어야지 겨우 종이에 써 붙이다니, 초실해서 되겠냐 하는 생각도 들었다.
따스한 겨울 햇살을 받으며 벤치에 앉아 세 군데 전화를 했는데 한 곳이 맞혔다. 작년에 추수한 알토란을 줄까 해서 옹천에 산골보신탕 영자에게 114에 물어 전화했으나 안 받고, 현경이는 전원이 꺼져있었다. 114에 물어 성화에 전화하니 화선이가 잠결에 푸석한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안동 박희용인데, 영주 온 김에 마담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요”라고 했더니,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는 어떻게 말해야 돼요?”란 대답이 들려왔다. 내야 한 번 보고 싶은 얼굴에게 전화해서 다행히 나오면 함께 점심 먹으며 얘기나 나누면 되는데, 대답이 저렇다니, 화선이가 반년 동안 전화 한 번 안했다고 삐졌나? 하는 생각이 들며 즐거운 마음과 불편한 마음이 함께 들었다.
접선된 화선이를 만나러 공원에서 내려오니 포교당에 나온 어느 여인이 저만치 가고 있었다. 그 여인의 목탁소리 나는 뒤태를 감상하며 일주문 앞을 지나다니 아차, 장갑을 벤치에 두고 왔다. 겨울 공원에 누가 올라만 그래도 싶어 급히 올라갔더니 장갑이 그냥 있었다. 다시 아까 그 자리에 내려오니 또 어느 여인이 포교당에서 나오더니 뒤태를 목탁소리처럼 흔들며 앞서 걸어갔다. 일주문을 지나면서 보니 오른쪽 기둥에는 ‘歷千劫而不古’가 희미하게 쓰여 있었으나 왼쪽엔 ‘영주시포교당’이란 간판 때문에 가려졌는지 본래부터 안 썼는지 써 있는데 희미해 가려졌는지 몰라도 안 보인다고 언뜻 여기고 그냥 지났다. 화선이와 중앙시장 안 안성식당에서 추어탕과 소주 석 잔 마시며 “에 참 평생토록 그놈의 괴물에게 끌려 다니느라 애 먹었네”라고 말했더니 화선이가 씩 웃었다. 이런 경지를 염화시중미소라고 하는가? 식당 커피 한 잔씩 마시고 헤어지면서 “하마 안 지가 10년 넘었지? 그럼 친구야 친구”라고 했더니 화선이 표정이 주모스러워졌다.
저녁 내내 입이 간지러웠다. 이 신기한 확인을 아내와 딸에게 말해줄까 말까, 이 남편이 아버지가 드디어 도통의 문턱에 올랐다고. 어제 저녁에 몽중육우 이야기를 했더니 딸은 좀 이해를 하는지 아니면 늙은 애비가 가련해서인지 좀 긍정하는 듯한 말을 해주었으나 아내는 “돌았나 이상한 소리 하네”하며 면박만 하였다. 또 얘기하면 딸은 좀 이해할지 몰라도 아내는 더 이상하게 볼 테니 말 안하는 게 낫다. 이 이상한 확인을 오늘 밤에 기록으로 남겨야 할 텐데 하다가, 에이 내일 쓰자 하곤 잤다.
새로운 아침, 중국어 회화를 들으며 『한국사찰의 주련』을 꺼내 다음 쪽 靈鷲山通度寺 일주문 주련과 범종루 주련을 썼다. 쪽을 되돌려 가야산해인사 일주문 주련을 썼다. 그런데 아무래도 주련 사진에 보이는 후련 첫 자가 위와 아래 두 획에 중간에 한 번 돌아 나가는 와형으로 ‘亙’ 자보다 ‘亘’자를 닮았다. 어제 포교당 일주문 해설문에서 분명히 ‘亙’이었데?
아무래도 미심쩍어 『漢韓大辭典』을 열었다. 55쪽에는 ‘亘’이 음 ‘선’에 훈 ‘베풀, 펼, 구할’로, 음 ‘환’에 훈 ‘굳셀’이 있다. 이어서 음 ‘긍’에 ‘뜻은 『亙』에 보라’가 있다. 지시한 대로 본 다음 글자인 ‘亙’은 음 ‘긍’ 하나에 훈 ‘뻗칠, 통할, 극진할, 마침’이다. 또한 숙어로 ‘亙古 긍고 : 옛날까지 뻗침’과 ‘亙萬古 긍만고 : 만고에 뻗침’ 의 두 개가 있다. 이 숙어대로라면 포교당 일주문 해설문이 맞고 『한국사찰의 주련』이 틀리다.
그러나 ‘亘’의 小篆이 ‘위와 아래 두 획에 중간에 한 번 돌아 나가는 와형’이었다. 주련 사진에 소전과 같았다. 그러므로 ‘亘萬歲’이다. 권영한과 전원출판사가 주련에 나온 소전대로 썼으니 그들이 맞다.
그러나 주련에 ‘亘萬歲’는 ‘亙萬古’와 비슷하지만 대사전엔 없다. 성어법과 분위기는 비슷하지만 ‘亙萬古’는 ‘古’ 자가 들어 과거형 숙어이고 ‘亘萬歲’는 ‘歲’ 자가 들어 미래용 숙어이다. 禪味에 취해 넘어가면 ‘초록이 동색’이지만 두 숙어는 의미상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
또, 이 주련을 지은 이가 두 숙어의 미묘한 차이를 의식하고 썼다고 볼 수 있다. 현재를 중심으로 ‘古’와 ‘今’이 대응하는데, 과거는 ‘지날 력 歷’ 자를 써서 ‘천겁을 지나도’로 나타내고 미래는‘亘’ 자를 써서 ‘만세를 뻗쳐도’로 나타냈다. 그런데 ‘뻗쳐도’보다는 ‘펼쳐도’가 의미상 조금 더 부드럽다. 즉 ‘뻗쳐도’의 훈을 가진 ‘亙’보다 ‘베풀, 펼’의 훈을 가진 ‘亘’이 더 적당한 자이다. 시간을 비단 폭으로 비유하면 ‘아직 안 밟은 비단 폭을 베풀다, 펼치다’가 되어 훨씬 뜻이 상큼하다. ‘베풀, 펼’의 훈일 땐 ‘亘’이 ‘선’이므로 ‘긍만세이장금’이 아니라 ‘선만세이장금’이 된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권영한과 전원출판사는 지은이의 미묘한 변용에 걸리는 바람에 반은 맞고 반은 틀렸나? 이틀 동안 몇 번이나 시각을 바꾸어보아도‘亘’과 ‘亙’이 선이야 긍이야 뻗쳐라 펴라 눈앞에서 오락가락한다.
여하튼 ‘亘萬歲’는 ‘亙萬古’에서 변용된 숙어이므로 첫 자가 소리로는 ‘긍’이지만 ‘亘’이 아니라 ‘亙’이어야 한다. 물론 ‘亘’과 ‘亙’이 소리와 뜻으로 상동이라 하더라도, 글자로서의 존재가 다르므로 주련을 쓰는 사람은 대사전에 근거해서 한 자 한자 확실히 분별해서 써야 한다. ‘초록이 동색’이지만 그것은 한 여름에 초록이고, 4월에 초록은 대여섯 가지로 피어 제각기 미묘한 느낌을 주지 않는가. 주련을 처음 쓴 사람이 그것을 몰랐을 리가 없고, 일주문을 지나는 승려들이나 속인들이 모두가 한 글자의 차이를 초월해서 주련이 풍기는 의미를 함빡 느끼겠지만 말이다.
역시 한문 공부는 대사전으로 해야 한다. 간편한 맛에 옥편을 주로 이용하지만 한자가 가진 깊은 뜻과 미묘한 의미의 차이를 이해하려면 대사전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 이틀 동안 노력한 결과가 무엇인가.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몽중육우를 만나고 포교당 일주문 주련 해설문을 만나 확인하며 신기함을 느껴 ‘이제 내가 도통한 거, 최소한 문턱에 올라 선 게 아니가’하는 자부심의 실상은 한갓 새벽꿈일 뿐이었고 옥편과 대자전의 차이 때문이었다. 아니, 정독하지 않고 설 읽는 내 독서 습벽 때문이었다.
처음 펼쳤던 『漢韓明文大玉篇』 7쪽 ‘亘’ 풀이 끝에 있는 ‘亙과 別字’를 간과했다. 여기서 놓치지 않았다면 이후 쉽게 풀어 나갔을 텐데, 먼 길을 돌았다. 나중에 본 『漢韓最新理想玉篇』을 보니 대자전과 같았다. ‘桓同,亙과別字’이 한 눈에 들어왔다.
내게는 옥편이 네 권 있다. 가장 오래 된 것은 1986년 판 466쪽 은광사 『現代玉篇』으로 목성교 좌판에서 5,000원에 사서 30대 초에서 50대 초까지 한 20년 간 너덜해지도록 썼다. 일년에 몇 번 지방과 축문, 부주 봉투 쓸 때 나오곤 책상 아래 원로로 고이 모셔진다. “내가 이 거 갖고 한문 공부했다”라며 아들 준현이에게 보여주었더니, 준현이가 만지면서 “우리 집 가보일세”라고 말했다. 두 번째는 『漢韓大辭典』으로 『한국사대사전 상하』와 함께 90년대 초 녹전국민학교에서 근무할 때 학교를 방문한 책상인으로부터 샀다. 크고 두꺼워서 평소엔 시용하지 않고 그냥 묻어두었다가 옥편으로 못 찾는 글자가 있으면 겨우 꺼내서 본다. 세 번째는 ‘연곡국민학교도서관’이란 낙인이 찍힌『漢韓最新理想玉篇』이다. 연곡학교에 근무할 때 학교에서 간혹 보다가 어찌 집에 가져와 보게 되다가 돌아가지 않고 눌러 앉아 10년 친구가 되었다. 네 번째는『漢韓明文大玉篇』이다. 『漢韓最新理想玉篇』이 사용하기에 편리하지만 ‘연곡국민학교도서관’이란 낙인이 마음에 걸린다. ‘명색이 선생이란 사람이 말이야 학교 도서관 책을 반납 안 하고 그냥 갖다니 말이야’ 하는 지인들의 말이야 우스개 정도로 그냥 웃어넘길 수 있지만, “어? 할아버지 이 책 학교 도서관 거잖아 왜 안 냈어?”라는 말, 손자 태주가 훌쩍 자라 할아버지 서재의 책을 탐구할 때 할 말을 생각해 보니, ‘새 옥편을 사고 이 건 퇴장 시켜야겠어’라는 생각이 들어서 거금 4만 5천원 주고 샀다. 그런데 막상 사용해보니 쪽수는 네 옥편 중에서 제일 많은데 쥐기도 불편하고 내용도 부실해서 돌아가 세 번째 옥편을 다시 애지중지하고 있다. 내 눈도 간과했지만, 빡빡한 지면 자체가 뭔가 불안해 보이는 이놈 때문에 ‘亘’과 ‘亙’ 사이에서 이틀을 헤맸다. 그래도 덕분에 도통의 환상에서 번쩍 깨어나지 않았는가. 도는 무슨 도, 알음알이일 뿐이지.
그래도 손자 녀석이 자라는 걸 보니, 세 번째를 정리를 정리하고 거금의 이놈을 사랑하긴 해야 해야겠는데, 손때가 진하게 묻어 너덜너덜한 세 번째 녀석을 이미 폐교된 옛집에 보낼 수도 없고 불사를 수도 없고, 어찌한다?
그래 맞다, 천겁을 지나도 옛날이 아니요 만세를 뻗쳐도 긴 오늘이다.
글자 한 자 때문에 아옹다옹 시시비비 다툴 일이 아니라 전체적인 뜻을 알아야 하지 않겠냐.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아득한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변화. 우주가 한 집이니 지구 역시 한 집 아닌가. 한 집에 사는 우리 인간들 모두 가족 아닌가. 눈을 들면 삼라만상 모두가 아득한 시간의 비단 폭에 실린 이웃 아닌가. 지금 숨 쉬고 있는 이 공기와 마시는 물 그리고 먹는 음식들이 모두 우주의 것으로서 내 몸을 한 바퀴 돌아 나가 다른 생물들에 숨이 되고 피가 되고 살이 되나니. 전화 건 세 여인과 포교당 일주문을 나온 두 여인, 더하여 손 내과와 길거리에서 만난 남녀노소 모두 나와 연결되어 있나니. 추어탕을 같이 먹은 화선이는 오늘 잠시 더 가까이 있었고.
천겁과 만세는 무한한 시간이지만 전체를 1로 보면 단순하다. 과거는 1의 왼쪽이요 미래는 오른쪽이다. 그 중간에 내가 존재하는 현재가 있다. 그러므로 천상천하유아독존, 나는 우주에 중심이다. 아주 귀한 우주인이다. 회전하는 시간의 비단 폭 위에서 희노애락애오욕의 더운 숨을 뿜으며 열연하는 인간들, 후회할 과거가 아니고 두려워할 미래가 아니라 모두가 긴 오늘이다. 그래서 항상 살아 숨쉬는 오늘이 즐겁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