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채문(智蔡文)은 봉주(鳳州) 사람이고 현종(顯宗) 원년(1010)에 중랑장(中郞將)에 임명되었다. 왕은 거란(契丹) 군사들이 침략했다는 소식을 듣고, 지채문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화주(和州)에 진을 치고 동북 방면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강조(康兆)가 패하고, 강조 및 이현운(李鉉雲)·노의(盧顗) 등이 모두 포로가 되자, 〈왕은〉 지채문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이동하여 서경(西京)을 돕도록 하였다.
지채문은 즉시 군용사 시어사(軍容使 侍御史) 최창(崔昌)과 함께 진격하여 강덕진(剛德鎭)에 머물렀는데, 노의가 거란의 길잡이[鄕導]가 되어 거란 사람 유경(劉經)과 함께 격문을 가지고 서경에 와서 항복을 권유하였다. 서경부유수(西京副留守) 원종석(元宗奭)은 속관[僚佐] 최위(崔緯)·함질(咸質)·양택(楊澤)·문안(文晏) 등과 함께 이미 항복한다는 글[降表]을 작성하였다.
지채문 등이 이를 듣고 군사를 인솔하여 서경에 이르렀더니, 성문은 닫혀 있었다. 최창이 분대어사(分臺御史) 조자기(曺子奇)를 불러서 말하기를, “우리들은 왕명을 받들고 힘써 급히 왔는데, 지금 들어가지 못하게 하니 무엇 때문인가?”라고 하였다. 조자기가 노의와 유경이 항복을 권유한 사실을 상세히 보고하고 마침내 성문을 열어 주니, 지채문은 옛 궁궐의 남쪽 회랑으로 들어가 부대를 주둔시켰다. 최창이 원종석에게 넌지시 말하여 노의와 유경을 억류하고 성을 굳게 지키자고 했으나, 원종석은 따르지 않았다. 최창은 은밀히 지채문과 모의하여 군사들을 성의 북쪽으로 보내어 노의 등이 거란 군영으로 돌아가는 것을 기다렸다가 불시에 쳐서 그들을 죽이고 표문을 빼앗아 불태워버렸다.
이 때 성 안〈사람들〉은 의심하고 배반하여 지채문이 성의 남쪽으로 나가 진을 쳐도 오직 대장군(大將軍) 정충절(鄭忠節)만이 그를 따라 왔다. 얼마 후 동북계도순검사(東北界都巡檢使) 탁사정(卓思政)이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므로, 드디어 군사들을 합세하여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갔다. 왕은 삼군(三軍)이 패전하고 주군(州郡)이 함락되자 표문을 올려 조회를 요청하니, 거란 임금이 허락하여 드디어 노획과 약탈을 금지시켰고, 마보우(馬保佑)를 개성유수(開城留守)로 삼았으며 왕팔(王八)을 부유수(副留守)로 삼았다. 을름(乙凜)으로 하여금 기병 1,000기를 거느리고 마보우 등을 호송하게 하였으며, 또 합문인진사(閤門引進使) 한기(韓杞)로 하여금 돌격 기병 200기를 거느리고 서경 북문으로 가게 하였다.
〈한기가〉 소리쳐 말하기를, “황제께서 지난번 유경·노의로 하여금 조서를 보내어 알아듣게 타일렀는데, 어찌 지금까지 소식이 없는가? 만약 명령을 거역하지 않을 것이라면, 유수(留守)·관료들은 와서 나의 지시를 듣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탁사정이 한기의 말을 듣고 지채문과 함께 모의하여 휘하의 정인(鄭仁) 등으로 하여금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돌격하게 하였다. 한기 등 100여 명을 베고 나머지는 모두 사로잡으니, 살아서 돌아간 자가 하나도 없었다. 탁사정은 지채문을 선봉으로 삼아 〈성 밖으로〉 나가 을름과 싸우게 하니 을름과 마보우가 패하여 도망하였다. 이에 성 안의 사람들이 조금 안정되자 탁사정은 성안으로 돌아오고 지채문과 이원(李元)은 자혜사(慈惠寺)로 나가 주둔하였다.
거란 임금이 다시 을름을 보내어 〈아군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척후병[邏卒]이 보고하기를, “적군이 안정역(安定驛)으로 와서 주둔하고 있는데, 무리가 매우 많습니다.”라고 하였다. 지채문이 빨리 달려가 탁사정에게 보고하니, 마침내 탁사정 및 승려 법언(法言)이 함께 군사 9,000명을 거느리고 임원역(林原驛) 남쪽에서 적을 맞아 싸워서 3,000여 급을 베었지만, 법언은 전사하였다.
이튿날에 지채문이 다시 출전하니 거란 군사들이 패하여 달아났으며, 이에 성 안의 장수와 병졸들은 성에 올라가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다투어 나와 그들을 추격하였다. 마탄(馬灘)에 이르자 거란이 군사를 되돌려 공격하니, 아군이 패하여 마침내 성이 포위당하였다. 거란 임금이 성의 서쪽 사찰에 머물렀는데, 탁사정이 두려워서 장군(將軍) 대도수(大道秀)를 속이며 말하기를, “그대가 동문(東門)으로, 나는 서문(西門)으로 나가 앞뒤에서 협공하면 이기지 못할 리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고, 결국에는 휘하의 군사들을 데리고 밤중에 도망하였다. 대도수는 동문으로 나와서 비로소 속은 것을 알았지만, 또한 힘을 다해도 맞설 수 없어서 결국 자기 휘하의 부대를 이끌고 거란에 항복하였다. 여러 장수들은 뿔뿔이 흩어져버렸고 성 안 사람들은 떨면서 두려워하게 되자 통군녹사(統軍錄事) 조원(趙元), 애수진장(隘守鎭將) 강민첨(姜民瞻), 낭장(郞將) 홍협(洪叶)·방휴(方休) 등이 어찌할 바를 몰라서 함께 신사(神祠)에서 빌고 점을 치니 길한 징조를 얻었다. 이에 그들 무리가 조원을 병마사(兵馬使)로 추대하였고,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여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지채문(智蔡文)이 급히 개경(開京)으로 돌아와서 서경(西京)의 패전 상황을 아뢰니, 여러 신하들은 항복할 것을 제의하였고, 강감찬(姜邯贊)만 홀로 왕에게 남쪽으로 피난 갈 것을 권하였다. 지채문이 요청하여 말하기를, “제가 비록 둔하고 겁이 많으나, 원하옵건대 곁에 있으면서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지난번 이원(李元)·최창(崔昌)이 급히 돌아와 호종할 것을 자청했는데 지금은 다시 볼 수가 없으니, 신하된 의리가 과연 이와 같은 것인가? 지금 그대는 이미 밖에서 수고하였는데, 또 호위하겠다고 하니 나는 그대를 매우 가상하게 여기노라.”라고 하며, 술과 음식 및 은으로 된 안장[銀鞍]을 하사하였다.
이날 밤에 왕은 후비(后妃) 및 이부시랑(吏部侍郞) 채충순(蔡忠順) 등과 함께 금군(禁軍) 50여명을 거느리고 도성을 떠났고, 행렬이 적성현(積城縣)의 단조역(丹棗驛)에 이르자 군졸 견영(堅英)이 단조역의 사람들과 함께 활을 겨누며 행궁(行宮)을 범하려 하였다. 지채문이 말을 달려 활로 쏘았는데, 적도들이 뿔뿔이 달아났다가 다시 서남쪽 산에서 갑자기 나와 길을 막으니, 지채문이 다시 활을 쏘아 그들을 물리쳤다. 왕이 창화현(昌化縣)에 당도하자 어떤 향리가 아뢰기를, “왕께서는 저의 이름과 얼굴을 아십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듣지 못한 척하자, 그 향리가 성을 내며 소란을 일으키고자 다른 사람을 시켜 소리쳐 말하기를, “하공진(河拱辰)이 군사를 거느리고 오고 있다.”라고 하였다. 지채문이 말하기를, “무엇 때문에 오느냐?”라고 하니, 향리가 말하기를, “채충순·김응인(金應仁) 등을 잡으려고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김응인 및 시랑(侍郞) 이정충(李正忠), 낭장(郞將) 국근(國近) 등이 모두 달아났고, 다만 지채문·채충순·주저(周佇) 등만 남아서 왕을 지켰다. 밤중에 적도들이 다시 오니 시종하던 신하·환관·궁녀[嬪御]들은 모두 도망쳐 숨고 오직 현덕(玄德)·대명(大明) 왕후, 시녀 2인, 승지(承旨) 양협(良叶)·충필(忠弼) 등만 시종하였다. 지채문이 형편에 따라 대응하니 적도들이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
새벽이 되자 지채문은 두 왕후에게 청하여 먼저 북문으로 나가게 하고, 손수 왕의 말고삐를 몰고 샛길로 가서[閒行] 도봉사(道峯寺)로 들어가니, 적도들은 이를 알지 못하였고, 채충순도 뒤따라 도착하였다. 지채문이 아뢰어 이르기를, “간밤의 적도들은 하공진이 아닌 것 같으니, 청하옵건대 제가 가서 알아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그가 도망갈까 두려워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지채문이 말하기를, “제가 만약 주상을 배반하여 말과 행동이 다르다면, 하늘은 반드시 저를 죽일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마침내 허락하였다. 〈지채문이〉 즉시 창화현으로 가다가 길에서 국근을 만났다. 국근이 말하기를, “나의 옷과 행장을 모조리 적들에게 빼앗겼습니다.”라고 하였다. 지채문이 말하기를, “네가 신하가 되어서 불충하였는데, 머리를 보존한 것만으로도 족하다.”라고 하였다. 마침 하공진·유종(柳宗)이 행재소(行在所)로 가는데, 지채문이 〈그들을〉 길에서 만나 적들이 일으킨 변란을 자세히 설명하고 또 힐문하였더니, 과연 하공진이 한 일이 아니었다. 하공진은 길에서 중군판관(中軍判官) 고영기(高英起)를 만났는데, 〈그는〉 패전하여 남쪽으로 달아나고 있다가 함께 〈행재소로〉 오는 중이었으며, 당시 하공진이 거느린 군사는 20여 명이었다. 지채문은 마침내 그 군사들과 창화현을 수색하여 적들이 훔친 말 15필·안장 10부를 차지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지채문이 하공진 등에게 말하기를, “내가 여러분과 함께 가면 주상께서 분명 놀라실 것이니, 청하건대 여러분들은 조금만 뒤에 계시오.”라고 하고, 드디어 혼자서 갔다. 충필(忠弼)이 절 문에서 그를 기다리다가 들어가 아뢰기를, “지장군(智將軍)이 옵니다.”라고 하니, 왕이 기뻐하며 문에 나가 그를 마중하였다. 지채문이 아뢰어 이르기를, “제가 적들을 체포해보니 실로 하공진이 한 짓이 아니었고, 또한 하공진과 함께 왔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하공진·유종을 접견하고 노고를 위로하였다. 그리고 하공진으로 하여금 거란의 군영으로 가서 화친을 요청하게 하였다.
이듬해 정월에는 왕이 광주(廣州)에 머물고 있었는데, 두 왕후가 간 곳을 몰라서 지채문에게 명하여 그들을 찾아보게 하였다. 〈지채문이〉 요탄역(饒呑驛)에 가서 곧 〈두 왕후를〉 찾아 모시고 돌아오자, 왕이 기뻐하며 그 곳에서 사흘 동안 머물렀다. 왕이 광주를 떠나 고개를 넘어서 비뇌역(鼻腦驛)에서 유숙하는데, 지채문이 아뢰기를, “호종하던 군사들이 모두 처자를 찾는다는 핑계를 대고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갔으니, 어두운 밤중에 적들이 몰래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청하옵건대 군졸들의 모자에 표지를 꽂아 구별하도록 하시옵소서.”라고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유종이 말하기를, “저의 고향 양성현(陽城縣)이 여기서 거리가 멀지 않으니, 청하옵건대 그곳으로 행차하십시오.”라고 하니, 왕이 기뻐하며 드디어 양성현에 행차하였다. 밤중에 유종·김응인 등이 왕명을 거짓으로 꾸며 왕의 안장을 뜯어내어 고을 사람들에게 주었는데, 동틀 무렵에 고을의 아전들이 모두 도망쳐버렸다. 유종·김응인 등이 또 요청하기를, “두 왕후를 각각 고향으로 돌려보내시고, 호종하는 장졸들로 하여금 동쪽 변방으로 가서 위급함에 대비하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는데, 왕이 지채문에게 의논하자 지채문이 대성통곡하며 말하기를, “지금 임금과 신하가 방도를 잃고 뜻밖의 재앙을 만나서 이처럼 피난을 다니고 있지만, 참으로 마땅히 인(仁)과 의(義)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해야 합니다. 왕후를 버리고 살 길을 구하는 것을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장군의 말이 옳소.”라고 하였다.
드디어 일행이 사산현(蛇山縣)을 지나가다가 지채문이 기러기 떼가 밭에 있는 것을 보고 왕의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고자 하여 말을 달려 앞으로 나갔는데, 기러기가 놀라 날아오르자 몸을 뒤집어 위를 향해 활을 쏘아 그대로 떨어뜨렸으므로 왕이 매우 기뻐하였다. 지채문이 말에서 내려 기러기를 주워 바치며 말하기를, “저와 같은 신하가 있는데, 어찌 도적을 걱정하시겠습니까?”라고 하니, 왕도 크게 웃으며 칭찬하였다. 천안부(天安府)에 이르러 유종·김응인이 아뢰기를, “청하옵건대 저희들은 석파역(石坡驛)에 가서 필요한 물건을 준비하고 마중하겠습니다.”라고 하고는, 결국 달아나버렸다.
파산역(巴山驛)에 이르러 왕이 지채문에게 일러 말하기를, “현덕왕후(玄德王后)가 임신 중이므로 먼 길을 갈 수 없고, 〈왕후의〉 고향 선주(善州)는 여기에서 멀지 않으니 보내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지채문은 이전의 논의를 고집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형편이 부득이하다.”라고 하고, 드디어 〈왕후를〉 돌려보내었다. 〈왕이〉 여양현(礪陽縣)에 머무르니 장졸들이 배반하려는 마음이 있었는데 지채문이 아뢰어 말하기를, “태조(太祖)께서 통일하셨을 때 유공자들에게 비록 그 공이 작더라도 반드시 상을 내리셨습니다. 하물며 지금은 험난함을 겪고 있으므로 인심을 얻는 것이 중요하니 마땅히 먼저 상을 주어 장려하십시오.”라고 하니, 왕이 그 건의를 좇아서 현안지(玄安之) 등 16명을 중윤(中尹)으로 임명하였다.
삼례역(參禮驛)에 이르자 전주절도사(全州節度使) 조용겸(趙容謙)이 평상복 차림[野服]으로 어가를 맞이하였다. 박섬(朴暹)이 아뢰어 이르기를, “전주(全州)는 바로 옛 후백제〈의 수도〉이므로 태조께서도 싫어하셨으니, 청하옵건대 주상께서는 행차하지 마옵소서.”라고 하니, 왕도 그렇게 생각하고 장곡역(長谷驛)에 유숙하였다. 조용겸은 왕을 머물게 하여 그에게 기대어 위세를 부려보려고 꾀하여, 전운사(轉運使) 이재(李載)·순검사(巡檢使) 최즙(崔檝)·전중소감(殿中少監) 유승건(柳僧虔)과 함께 흰 표지를 관(冠)에 꽂고서 북을 치며 떠들썩하게 나왔다. 지채문이 역졸을 시켜 문을 닫고 견고히 지키게 하였더니, 적들이 감히 들어오지 못하였다. 왕은 왕후와 함께 말을 탄 채 역의 청사(廳事)에 있었다. 지채문이 지붕에 올라가 물어 말하기를, “너희들은 무엇 때문에 이러느냐? 유승건은 오지 않았는가?”라고 하자 적들이 말하기를, “왔다.”라고 하였다. 다시 묻기를, “너는 누구냐?”라고 하니 적들이 이르기를, “너는 또 누구냐?”라고 하였다. 지채문이 다른 말소리로 대답하니 적들이 말하기를, “지장군이구나.”라고 하였다. 지채문도 그 음성을 알아차리고 말하기를, “너는 바로 친종(親從) 한조마(馬韓兆)로구나.”라고 하였다. 이에 왕의 명령으로 유승건을 부르자, 유승건이 말하기를, “네가 나오지 않으면, 나도 들어가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지채문이 문을 나와 유승건을 불러서 데리고 왕 앞으로 갔더니, 유승건이 울면서 아뢰어 말하기를, “오늘 일은 조용겸이 한 일이니, 저는 알지 못합니다. 청하옵건대 주상의 뜻을 받들어 조용겸을 불러 오겠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그러나 유승건은 나가자, 결국 도망하였다. 왕이 양협(良叶)에게 명령하여 조용겸·이재를 불러오게 하니, 그들이 오자 여러 장수들이 그들을 죽이려 하였다. 지채문이 꾸짖어 이를 제지하였다. 두 사람으로 하여금 대명궁주(大明宮主)의 말을 끌고 가게 하였다가, 곧 전주로 돌려보내었다.
왕이 나주(羅州)로 들어갔는데, 밤에 척후병[候人]이 잘못 보고하기를, “거란 군사들이 당도하였다.”라고 하였다. 왕이 크게 놀라서 밖으로 달려 나오자 지채문이 아뢰어 이르기를, “주상께서 밤중에 행차하시면 백성들이 놀라 혼란하게 되니, 바라옵건대 행궁(行宮)으로 돌아가십시오. 제가 염탐하여 알아보고 나서, 그 후에 움직이셔도 됩니다.”라고 하였다. 지채문이 밖으로 나가 살피는데, 통사사인(通事舍人) 송균언(宋均彦)·별장(別將) 정열(丁悅)이 거란 전봉원수(前鋒元帥) 부마(駙馬)의 서한과 하공진이 올린 문서를 가지고 왔다. 지채문이 그들을 데리고 행궁으로 가니, 왕은 하공진의 문서를 보고 거란군이 이미 후퇴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왕은〉 기뻐하며 송균언을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로, 정열을 친종낭장(親從郞將)으로 임명하였다. 부마의 서한은 거란 글자를 해독하는 사람이 없어 그 내용을 알지 못하였다.
2월, 〈왕이〉 돌아오다가 공주(公州)에 이르러서 지채문(智蔡文)에게 토지 30결을 하사하였고, 교서를 내려 이르기를, “짐이 적의 침략을 피하여 허둥지둥하며 먼 길을 갔는데, 호종하던 신료들이 모두 도망가 버렸다. 오직 지채문만이 온갖 풍상(風霜)을 무릅쓰고 산 넘고 물 건너며 말고삐 잡는 수고를 사양하지 않으면서 끝까지 송죽[松筠]의 절개를 지켰다. 참으로 빼어난 공적이 많으니, 어찌 특별한 은혜를 아까워하겠는가?”라고 하였다.
〈현종〉 7년(1016)에 〈지채문은〉 무관으로서 우상시(右常侍)를 겸하였고, 〈현종〉 17년(1026)에 우복야(右僕射)를 지내다가 죽었다.
덕종(德宗)이 즉위하자 제서를 내려 이르기를, “고(故) 상장군 좌복야(上將軍 左僕射) 지채문(智蔡文)은 선왕[현종]께서 남행하실 때 홀로 충절을 온전히 하여 공훈이 제일이니, 마땅히 공과(功科)를 기록하여 후세에 권장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증손은 지녹연(智祿延)이다.